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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웨버의 예배학 20세기 말부터 계속 되어왔던 예배에 형식 타파현상이 한국 교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열린 예배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이 같은 현상은 교회의 울타리가 낮아지고, 성장위주의 교회 시스템과 맞물려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본질을 버리고 구도자 중심으로 드리는 구도자 예배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특히 교회를 떠나고 있는 청소년, 청년층을 위한 구도자 예배가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목회자 양성소인 신학교에서 조차 구도자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얼마 전 감리교신학교 기독교 교육과 교수인 장종철의 「믿음의 길, 각성의 길」에서 청년목회 활성화 방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젊은이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예배로 한국 교회에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에 주목하려 한다. 물론 이 예배는 믿지 않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믿는 젊은이들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구도자란 영적 갈급함을 지닌 사람들로서 이들이 목회의 주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구도자 예배는 결국 그들을 위한 예배를 지향한다. 구도자 예배에서는 예배의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음악이나 비디오 등 미디어를 많이 사용한다. 환희와 기쁨, 축제의 요소가 많으며 예배 진행이 음악과 더불어 빠르게 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유행이 급속하게 퍼지더니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구도자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덕분에 한국교회의 몸은 점점 비대해지고, 커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문제가 이곳 저곳에서 터지고 있다. 크리스천 투데이는 2010년 5월 1일자 “청년 중심의 ‘구도자 예배’가 오히려 청년 내몰아”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경배와 찬양’으로 대변되는 한국교회의 구도자 예배(seeker worship)가 더 이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대인의 종교성과 이머징 문화’를 제목으로 발표한 조 교수는 미국에서 ‘이머징 교회 운동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목회자 댄 킴볼의 말을 인용하면서 “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구시대적이며, 오히려 교회에서 청년들을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다음과 같은 조교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를 선택함에 있어 더 이상 재미와 흥미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함과 상징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선택한다. 개신교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읽지 못했다” 필자는 조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최근 20년 사이 급속하게 퍼졌던 열린 예배 열풍과 구도자 위주의 예배는 오히려 한국교회의 예배에 부정적인 역할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예배를 경시하는 태도가 커지면서 예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을 위한 예배의 형태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예배의 형식은 파괴되었고, 찬양은 공동체와 사회를 구원하신 하나님보다 오직 자신에게만 초점을 두는 ‘나’ 중심의 하나님만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찬양과 예배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이어져 나가게 되었고, 결국 한국의 기독교 모습은 오직 자신에 집중하고, 나만을 위한 종교로 인식되어 버렸다. 기독교는 ‘나’의 만족과 행복에만 집중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하나님이시며, 끝도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인 예배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또한 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인 예배에 대하여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다시 돌아보게 하고, 점검하게 하는 로버트 웨버의 「예배학」은 평생 동안 예배에 대하여 연구하고, 반성한 최종 결과물이다. 그는 「예배학」이라는 주제 아래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의 구현”이라는 소제목을 두고 우리에게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라는 다소 생소한 주장 가운데 찾아온 로버트 웨버는 고대 – 미래의 예배를 우리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고대 – 미래의 예배란 “이 세상의 모든 상황속에서 신실하게 실행하며 분명하게 소통되는 말씀과 성만찬 그리고 찬송 가운데 드려지는 공통된 기독교 교회의 예배 전통이다.” 그는 이러한 고대-미래의 예배를 실행에 옮기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배우고, 이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과 성만찬 속에서 실행하며, 교회사 속에서 전승된 위대한 신앙 고백의 보화에 대한 응답을 담은 아름다운 노래를 활용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오늘날 예배를 돌아보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충만한 구원 이야기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에 스스로 성경을 통해 답하며,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저자의 주장인 고대 – 미래 예배를 준비하라는 주장에 굉장한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로버트 웨버의 「예배학」을 읽으며 필자가 느꼈던 긍정적인 부분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진단이다. 어떠한 사안에 있어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문제에 대한 치료방법을 펼치기 전에 명확한 진단일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오늘날 예배에 대한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드러난 문제는 이미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쌓여 드러난 부분이다. 이렇게 드러난 문제의 이면속에는 문제에가 드러나기 전의 역사 즉, 이유가 있다. 이러한 역사 즉, 이유를 파악하며, 진단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로버트 웨버는 이러한 부분에 있어 굉장한 통찰력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 4장 ‘하나님의 충만한 구원 이야기가 사라진 이유’를 그리며 로버트 웨버는 평생을 예배에 대한 학문과 실제를 다룬 학자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특히 하나님의 충만한 구원 이야기가 예배의 요소에서점점 사라지는 모습들을 역사적으로 다시 재조명하여 오늘날 문제를 진단한다. 그는 고대 기독교의 예배속 기억과 예상, 중세 동방과 서방교회의 예배에 담긴 나님의 비전, 종교 개혁기, 근대 교회기, 20세기 후반의 예배들을 돌아보면서 예배의 중요한 변화에 관한 조감도를 그린다. 그는 초대교회, 동방교회, 중세시대, 종교개혁 이후, 근대교회, 20세기 후반을 돌아보면서 오늘날 폭력과 불확실성이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후 현대주의 세계속에 선포해야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승리자 그리스도이다. 저자는 오늘날 예배의 문제와 붕괴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교회는 이 당에 존재함으로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과 소망을 표현하는 예배를 통해 이 진리를 올바로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가 바라보는 예배의 전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날 드러난 예배의 문제를 다시 한번 확인할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치료해야하며,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둘째는 패러다임 전환이다. 문제가 드러난 상황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적절하게 판단하고, 진단 내렸을 지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수 천년간 진행 되어온 예배의 틀 가운데 급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예배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찾아오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개신교 예배가 그 구조와 내용 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말하며, 이러한 예배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라는 초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필자는 신학대학교 학부과정을 이수하면서 예배학이라는 수업을 이미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예배를 학문으로 배울 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목적이라는 부분에 강조를 두고 배운적이 많다. 또한 수많은 예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예배란 “주님의 뜻에 의한, 주님의 뜻을 위한, 주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바라보는 행위”등으로 인간 중심의 정의들을 많이 배웠다. 또한 예배에 대하여 설명할 때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표현 중심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패러다임을 전환 시킨다. 그는 “예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가득할 때 예배의 주인공은 나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저 입술로 어떤 기도문을 따라하거나 노래하는 것으로 예배 참석을 했다고 할수 없으며, 진정한 예배 참석은 예배를 통하여 구현된 그분의 본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배의 패러다임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를 다루는 것으로 변화 되어, 오늘날 자본주의와 성공주의로 얼룩된 설교와 신사도주의 신비주의로 변모된 기도, 그리고 기복주의로 가득한 예배가 변화 될 것을 기대한다. 셋째는, 말씀의 변혁이다. 사춘기 무렵 처음 간 교회에서 필자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그래왔던 것처럼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자연스레 찾아가며, 말씀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은 마지막에 일어났다. 성경이 없던 필자는 공부를 마치고, 성경을 던져서 친구에게 주었다. 그때 선생님 호통과 모든 아이들의 눈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가 던진 성경책이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인 듯 여기는 그들은 바로 교회였다. 어릴적 성경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들을 통해 기독교와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혔다. 그러나 로버트 웨버는 “오늘날 성경에 대한 위기가 있는데 이는 독자들이 성경을 대할 때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내부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를 읽는 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속에 놓여있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역사비평과 본문비평에 의한 독법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이러한 비평에 따른 성경 독법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진영 양쪽에 도입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의미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필자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신학교에서 조차 성경의 고고학적, 역사적, 문학적 해석들이 만연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은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옹호하는 방법들에 대해서는 훈련을 잘 받았지만, 그 성경본문이 나에게 그리고 신학생 자신들과 그들이 관여하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초대 교인들과 교부들의 성경 읽기와 설교에 대하여 분석하고 고대의 사고 방식 즉, 성경을 진리로 대하고 읽으라며 우리에게 말한다. 또한 상관적이며, 열정적으로 그리고 은유로 읽으라는 저자의 제안을 통해 오늘날 성경에 대하여 점점 미신적이며, 비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세대들에게 도전이 되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같은 로버트 웨버의 「예배학」 가운데도 필자의 견해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하였으며, 또한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로 오히려 혼란을 더욱 가져온 부분들이 있다. 우선 필자의 견해와 맞지 않은 부분은 바로 신조에 관한 부분이다. 어릴 적 부터 다녔던 교회와 현재 사역하는 교회는 침례교회다. 침례교회의 특성에 따라 두 교회 모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래서 침례교회로써 사도신경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고민이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침례교회와 사도신경이라는 부분을 고민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군에 입대하고 나서 부터이다. 늦은 나이에 사단 군종으로 입대한 필자가 예배 때 마다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시간이었다. 군종목사님과 대부분의 사병들이 예배시간에 한번도 막히지 않고 사도신경 줄줄이 외우는 모습을 보며 놀랐다. 그전에 사도신경은 성경에 쓰여 있지 않기에 침례교회에서는 고백하지 않는다고 배웠던 필자로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억지로 암송하려하지 않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할때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로버트 웨버는 신조에 관한 가르침에 대하여 필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신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신조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성육신 그리고 재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 핵심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이 되신 이로서만이 고침을 받을수 있다는 고대의 기본원칙을 확립하였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 진영의 신학자들은 고대 교회 교부들이 정리한 신조들의 중요성을 간과 하였고, 예수로부터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라고 말하며 신조의 중요성을 말한다. 저자는 마치 신조가 예배에 꼭 필요한 요소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며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기독교적 상황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전통인 듯 고백되어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신조를 사용하지 않는 전통을 고수해 온 침례교회는 단지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단의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최근 한국의 침례교회들 가운데 예배 시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예가 상당히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 반대한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역사에서 서방교회의 전통에 서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진영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 정통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신조이며 많은 교회들이 예배 때에 사용해온 친숙한 신조이다.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며 성경 외 다른 어떤 신조도 고백하지 않는 신앙을 가진 침례교인들이 신조를 거부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것이 성경은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권위의 원천의 문제이다. 셋째, 신학적인 오류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다같이 고백하는 신조보다는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다양하고, 자유함을가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성만찬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는 화채설, 기념설, 공재설 등을 말하면서 이러한 부분을 통해 오해받게 되었고, 점점 종교적 행위로 변모하게 된 성만찬에 대하여 말한다. 물론 필자도 성만찬의 의미가 보다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구원이야기의 의미를 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실재적인 임재에 대한 의미가 애매모호 하다. 저자가 말하는 성만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겠지만 실재적인 임재에 대한 부분과 공재설, 화체설, 기념설과의 다른점은 무엇이 있는 지 궁굼하다. 오히려 이러한 실재적인 임재로 인해 성만찬에 대한 편견이 심해질수 있으며, 저자가 바라는 그것이 오해될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실재적인 임재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이해가 필요하며 필자와 저자가 주장하는 입장에 대하여 나눠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한 명확한 진단, 더 나아가 예배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과 예배의 틀까지 제시하는 로버트 웨버의 「예배학」은 분명 예배 문제가운데 힘들어 하는 독자들에게 커다란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확신한다. 그동안 수많은 예배를 드리며, 포기하고 싶었고, 실패 하였다 생각이 드는 사람들에게 로버트 웨버의 「예배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줄 수 있는 책이다. 더 나아가 열린 예배와 구도자 중심예배로 예배의 힘과 기능을 모두 잃어버린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 예배에 따스한 하나님의 빛이 더 해질 것을 기대한다. 필자 또한 한명의 목회자 후보생으로써 로버트 웨버가 제안하는 과거-미래 예배를 사역지에 적용해 보며,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의 구현인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