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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니게 되는 관념의 저변에는 도덕과 양심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고, 이것이 이성이라는 힘과 결부되어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때로 저지르게 되는 무모하고 충동적인 여러 행위들을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강력하게 제약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생각해보면 오늘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죄들을 저지르고 살아간다. 그러한 것이 하나의 의미 없는 작은 시기나 질투에서 비롯되었던 혹은 타인으로부터 입게 된 깊은 상처였든지 간에,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 내면의 존재하는 양심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말이다. 그리고는 어리석게 생각되는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두고 왜 그랬을까 하는 끝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학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도 잠시,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은 어느새 또 합리화라는 편리한 방법을 통해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애초 의도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그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행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정당방위임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게 된다. 이런 점을 유심히 생각하다보면 인간이 과연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신뢰의 그 밀도를 지금보다 점점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가지게 되는 여러 모순 덩어리들이 딱히 해결되는 것도 아닐듯해서 문득 답답해짐을 느낀다. 한때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에는 이 책에 짙게 깔려 있는 유물론 사상이나 인간의 본연적인 부분 즉, 선과 악의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내면적 문제들에 대해 다각적인 부분까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불충스런 독서가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번에 다시 손에 쥐게 된 그의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불안한 사회상에 맞물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들의 이중적인 모습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퍽이나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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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과 악의 경계를 서성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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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의 배경이 되는 페테스부르크의 뒷골목에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된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19세기 러시아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자유와 평등사상이 전파되고 농노제도에 대한 거부적인 사상이 팽배하게 되면서 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체제가 들어서는 과도기에 있던 시대로서 사회적,사상적,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이며 문학으로서는 황금기를 이루어낸 시대로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대표작가로는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푸쉬킨을 꼽을 수 있다.그 중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의 하나로 시대의 사회적,사상적,정치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응시키면서,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점에 그의 문학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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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과 어둠이 반대의 뜻을 가진 것이라면 죄와 벌은 언제부터 늘 붙어있는 단어이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단 사실과 결과라는 명료한 명제를 알지만 어떻게든 피하고픈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 작품<죄와벌>은 유명해서 사실 읽지 않았는데도 마치 읽은 것처럼 느껴졌던 세계문학 중에 최고중에 최고 <죄와벌>의 완역판에 도전하는 것은 진정 잘한 일인가. 하는 자문을 읽은 동안 내내 생각했다.아니 지금 나는 벌을 받는 것이야라는 느낌이 들어 주인공이름을 적다가 포기했다를 몇번 반복하고 나서야 드디어 다 읽었다. 처음 읽은 완역판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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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벌 (홍신문학사 세계문학 003)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는 법학을 전공하던 매우 촉망받는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으로 더이상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휴학을 하면서 비참할 만큼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고, 궁핍한 자신의 현실과 자신이 주장하는 이성적인 결론에 의해 정신분열증세를 일으키게 된다. 그에게 ' 알료나 이바노브나'라는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의 존재는 모든 사람을 위해 반드시 처리해야만 할 '이'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하거나, 그들의 물건을 거저 갖다시피 하는 노파는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흡혈귀 벌레와 같은 존재이며, 지식인이자 나폴레옹처럼 선택된 강자의 입장인 자신이 노파를 죽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선행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자신만의 깊은 사색에 빠져 병색이 깊어진 그는 결국 도끼를 이용해 노파를 살해하게 되고, 우연히 그것을 목격한 또 다른 여인까지 살해하게 된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물질재료로써 주어진 자리에서 톱니바퀴와도 같이 현 체재를 유지할 존재들이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재료로써의 존재들보다 우월하고 비범한 지배자로써의 인간이다. 이들은 법을 정립하고, 이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로써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작은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정당히 행할 수 있는 자들이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고 그것은 당연히 실행했어야 할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소냐'를 만나 그녀의 고결함을 사랑하게 되고 모든 것을 최초로 자백하게 된다. 그녀를 만나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이 그저 살인을 저지른 범죄행위였음을 자각하게 되고 그녀의 권유로 자수를 결심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학창시절 나름 문학소녀였던 내게 엄마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선물해주신 책이 세계문학전집이었다.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지만 그 순간 너무도 행복한 마음으로 한 권씩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고, 그때 이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벌]도 꽤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정말 끈기있게 읽어 나갔던 기억이 있다. '끈기있게' 라는 표현을 하는 이유는 당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저지른 사건이나 줄거리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죄와벌'이라는 작품이 주는 진짜 의미는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해, 정말 읽기 시작했으니 다 읽고 싶다는 끈기로 읽어 나갔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정말 짬이 나면 꼭 다시 읽고 싶은 책으로 관심이 가던 장르가 바로 '고전문학' 작품들이었다. 예전에 읽었으니까 라는 이유로 '아는 책, 읽은 책'으로 분류했던 책 중에 얼마나 많은 책이 그저 글자만을 읽었는지 모른다. 정말 작가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생각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시기에 읽은 책도 있고, 그저 주변의 권유로 필독서 목록이어서 바쁘게 읽었던 책도 있다. 마흔을 넘기고 이제 어느 정도 세상을 조금은 안다는 나이가 되어 다시 [죄와벌]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고, 꽤 많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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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살던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인간의 범죄가 흔히 병이나 환경 때문에 일어난다며 병과 환경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리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렇게 양심을 버리는 행위는 즉 모든 것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맞는 처벌을 받아야하며 정확히 범죄임을 인식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행위를 한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돌을 던지지 않는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 변화 과정 속에서 그가 실제 8년의 형보다 더 많은 고뇌를 겪었으며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경험하고 자신의 죄를 승화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그의 삶의 모습을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그 마음은 주인공들을 통해 자신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투영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금요 독회 때문에 니콜라이 1세 때 당국에 체포되어 8개월간 갇혀 지냈다. 그리고 사형까지 언도받게 되지만 황제의 사면으로 8년간 시베리아 유형을 살게 되는데 이 때 그는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민중들과 귀족간의 차이를 느꼈고,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그것을 갈망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라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당포 주인 노파 알료나를 살해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고도 자신의 죄에 대한 근원적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였던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의 인내와 봉사를 통해 끝내 그녀의 삶을 사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새로운 미래를 얻게 된다. <죄와 벌>은 가난한 대학생의 범죄를 통해서 인간에게 죄라는 그리고 벌이라는 심리적인 모든 것들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 인간이 갈망하는 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 친구 라주미힌과 결혼해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사는 동생 두냐를 보면서 자기 자신은 살인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 라스콜리니코프. 소냐를 만나고 그가 읽어달라던 복음서가 생각난다. ‘나사로의 부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속죄하라고 충고한다. 소냐는 우리 인생의 누구일까? 내가 믿는 하늘에 계신 신일까? 아니면 나의 내면속의 또 다른 나일까? <죄와 벌>,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제목. 죄를 지었으면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 하지만 결코 간단치가 않음을 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를 거쳐 한 번, 두 번을 읽을 가치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불완전한 많은 등장인물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게 된다. 누구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 홍신 문화사의 세계문학시리즈를 통해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볼 기회를 가짐이 기분 좋을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