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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뉴스를 장식한다. 자신의 아이를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도 종교인이라는 사람이. 한 사회의 가장 기본이라고 하는 가정이라는 곳.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출한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을 텐데.. 아이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는다. 겉으로 보이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 진짜 민낯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왜 그런 가정이 늘어나는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내게 난해하면서도 거북하고, 거북하면서도 불편해 마주보고 싶지 않은 책을 만났다. 그럼에도 책을 끝까지 읽은 이유는 이 청춘에게 과연 희망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결코 개운한 맛은 없지만 이 시대의 슬픈 청춘이란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이 책에는 네 명이 젊은이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레지나와 아녜스는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고 수녀인 이모의 보호를 받는다. 자매는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한다. 민우와 세키는 같은 동네 이웃이다. 이들은 일찍 고향을 버리고 함께 지내며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들 또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며 산다. 장애를 가진 세키는 맹학교에 다니는 레지나를 보고 반한다. 세키가 레지나에게 마음을 주면서 이 네 명의 남녀는 일그러진 관계를 시작한다. 여상 야간 학교 교사인 민우는 아녜스와 관계를 갖는 사이고 레지나와는 오래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이다. 민우는 레지나에게 성적인 관심을 가지지만 자위만 할 뿐 다가서지 못한다. 그런 과거가 있던 민우였기에 세키가 레지나에게 관심을 갖자 마음이 복잡하다. 레지나는 민우의 학교 동료이자 아녜스의 담임인 김일면과 깊은 관계이고 레지나는 김일면의 아이를 가진 상태다. 세키와 포커 판에서 알게 된 일면, 아녜스의 임신으로 고민하는 민우, 레지나와 민우의 사이를 의심하는 세키.. 복잡하게 얽혀가는 가운데 어느 날 민우가 실종된다. 오랜 실종 기간 이후 경찰의 연락이 오게 되고 민우는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되는 그들만의 비밀은 무엇일까 책을 다 읽었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아니면 선생과 제자의 관계? 그것도 아니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가정이 아닌 비정상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다만 그런 생각은 했다. 이들 모두 어린 시절 아낌없이 사랑받았다면 고독 역시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 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 같이 있지만 서로를 의심하기도 하고, 믿지 못하기도 하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때론 서로를 향한 집착을 놓을 수 없다. 그들끼리 뭉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외로운 사람들. 이들이 사는 배경이 아픈 이유는 서로의 결핍을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데 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서로의 상처를 어떻게 할 수 없었겠지... 또한 이들은 이 사회의 비주류들이다. 그나마 민우가 학교 선생으로 있지만 그 마저도 짤릴 위기에 처해있다. 선생님의 지위를 얻기 위해 뒤로 돈을 건낼 수밖에 없는 민우의 모습은 비겁하다기 보다 안타깝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살 수 없었던 이들은 앞으로도 결코 주류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서글픈 네 남녀에게 희망은 있을지... 사람 마음을 참 무겁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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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소설이다. 우울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작가의 용감함에 점수를 주고싶다. 작가 박금산. 알지 못했던 작가지만 1972년 여수 출생이란 소개만 보고 정감이 간다. 나와 같은 또래에 한달전까지만 해도 내가 살고있던 도시 출생이라고 하니.. 사실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이미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고층아파트 베란다는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공간일 수 있다' "베란다에 의자를 갔다놨어." " 의자는 갑자기 왜?" "그러고 싶어졌을때 쉽게 넘어서 뛰어내릴 수 있도록." "뭘 넘어?" "난간" 이 소설은 엇갈린 다섯남녀를 통해 학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비윤리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뒷돈을 통한 교사채용, 교사와 여학생의 성관계, 여고생의 임신, 장애인 학교 여학생과의 성관계, 윤리와 욕망 사이에서의 갈등...그럼에도 이 책의 주인공들은 주로 나쁜쪽으로만 움직인다. 흔히 여고생, 또는 장애여성이라하면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보호하고,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보통사람이라면, 아니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을 한낱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봐선 안되는거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듯 이들을 성적대상으로 바라봤을때 이들이 스스로 자기결정권을 가질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불편하고 암울한 소재를 다루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바라보면서도 독자들이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비윤리적인 행태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어렵지않게 신문지상에서 찾아볼수 있는 교사와 여고생간의 성관계, 심지어 얼마전엔 여교사와 남중생간의 성관계도 회자됐었다. 또한 장애인학교에서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등이 버젖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소설이 소설로만 느껴지지 않아 불편한 마음이 드는건 아닐까? 몇년전 이같은 장애인 학교에서의 성폭력을 고발한 공지영의 '도가니'란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으니까.. 그러기에 이러한 내용들을 소설속에 묘사해 낸 박금산이란 작가가 더 용기있게 다가온다. 비록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하지 말고, 문제의식을 갖고 다함께 용기를 내어 양지로 끌어내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한다. 작가도 그러기를 바라고 책을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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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성과 사랑, 불편한진실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개글에 공지영의 도가니와 영화 오아시스를 또올리며 불편한 만큼 사건사고 문화의 이슈가 되지 않고서는 금새 잊혀지게 되는 그들의 이야기라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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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난해한 소설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에서 조명한 문제작'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 다르다. 분명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다섯(레지나, 민우, 세키, 아녜스, 김일면)의 둘(레지나, 세키)은 장애인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장애인이 등장하고 이들의 사랑과 성적 욕망을 밝히 드러내 보였다고 해서 이것이 장애인들의 일반적인 사랑과 성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비윤리적인 관계와 캐릭터들이 소설 속에 난무한다. 교사 민우와 제자 아녜스와의 관계 그리고 임신, 교사 김일면과 시각장애인 레지나의 관계 그리고 임신, 야설을 쓰는 언어장애자 세키 또 선생 김일면과 세키의 정기적인 도박, 고등학생인 아녜스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민우의 레지나를 향한 욕정, 레지나를 향한 세키의 사랑 그리고 성욕. 줄줄이 나열해놓고 보니 참 복잡하기도 하다. 앞서 나는 이러한 관계들은 비윤리적이라고 했는데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다수의 일반적인 입장에 반하는 것들? 이것들을 명명백백하게 규정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동성애의 문제를 놓고 보자면 이들 이성애와 같이 보는 이들도 있고 또 이는 용인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교사와 제자의 성애 관계라면 이는 동성애 문제보다는 좀 더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를 두고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으로 치부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것을 감히 비윤리적인 관계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얼마 전 이런 관계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외신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유부녀 여교사와 남자 중학생과의 관계가 사회를 경악게 한 일이 있다. 둘 사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사랑이 있었건 없었건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관계를 고운 눈으로 본 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이런 관계가 버젓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교사인 민우와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아녜스다. 앞에서 교사 김일면과 시각장애인 레지나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상 이들 관계에 있어서는 문제가 될만한 점은 없다. 레지나는 성인이고 김일면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성일 뿐 이들 모두 성인이기 때문이다. 민우와 아녜스의 관계를 단지 스승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배제한 채 '부적절한 관계'로 치부하는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조금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상 교사와 학생 간에 성행위가 존재하는 것에서는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에서 조명한 문제작' 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하겠다. '이 시대 장애인'이라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장애인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의 '성과 사랑'이라면 그들의 성 그리고 사랑에 대한 관념이나 행위, 실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면에서 조명'했다 함은 문제를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시하여 까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의 비정상적으로 드러나는 성욕과 그들의 관계를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무슨 근거로? 내 보았을 때는 '인간의 은밀한 성과 사랑을 엿본 문제작'이라는 표현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작가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 편협된 시각에서 탈피하길 원했다. 그런데 소설 속 이런 성애 관계와 성적 관계를 말하면서 장애인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작가의 의도에 어긋나는 게 아닐까? 이들의 이런 관계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실제 다르지 않은) 인간들의 관계와 삶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치 장애인이기에 이들이 이러한 관계와 성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과연 레지나와 세키 그들이 장애인이기에 소설 속에서처럼 이렇게 사랑했을까? 또한 이들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민우는 아녜스와 관계를 갖고 아녜스가 임신(물론 소설 속에서는 아녜스의 임신이 민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김일면을 통해 밝힌다)을 한 상태지만 아녜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김일면 역시 레지나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임신하지만 레지나가 아이를 낳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서로 사랑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경우라 할지라도 어느 한 쪽이나 쌍방이 아기를 원치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김일면은 민우에게 레지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것을 의아해 하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쩌면 김일면은 레지나의 매력적인 외모때문에 그녀를 독점(세키가 레지나를 좋아하는 것을 시기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 물론 나는 김일면과 레지나의 관계에서도 둘 사이의 진실한 사랑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끝으로 세키. 세키는 정말 레지나를 좋아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아녜스에게 여러 차례 성욕을 느낄까? 민우가 아녜스를 사랑했다면 어찌 레지나에게 느끼는 성욕을 아녜스에게 풀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이들 관계를 사랑이라고 보지 못하겠다. 도리어 제어되지 않는 너저분한 은밀한 성욕이 존재하는 관계라고 단언하고 싶다. 이 소설에서 장애인은 레지나와 세키였다. 그러나 이들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민우, 아녜스, 김일면 역시 장애인이다. 사회에서는 이들을 정상인으로 간주하겠지만 이들은 자신만이 안고 있는 내재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장애인의 성과 사랑....'이라고 언급한 것을 용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어쩌면 나와 다른, 내가 비윤리적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이 마치 나로 하여금 이들에게서 외톨이가 되게 하는 듯 했다. 이들의 세상 속에서는 날 선 눈빛과 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규정짓는 것이 비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정상', '비정상'을 너무 쉽게 갈라버리는 나의 시선이 어쩌면 내가 가진 장애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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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표지의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에서 조명한 문제작'이란 글을 읽고,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이 책이 주는 어둠이 깊고 클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처음 느꼈던 인상과는 달랐던 이 책의 내용에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회의 밝은 면이 아닌 어두운 면이 중점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까지 어두워져 버리곤 했다. 그러니 기분전환을 위해 독서를 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좋다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아일랜드 식탁>은 주로 남성의 시점으로 그려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레지나와 아녜스 자매를 중심으로 글을 써 나가고자 한다. 언니인 레지나는 시각장애인으로 이미 24살이지만 신분은 아직 고등학생이다. 그리고 동생 아녜스는 장애는 없으나 부모님의 부재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 자매는 항상 '장애인'과 '고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둘다 타인의 성(性)적 욕구에 지나칠 정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인 이들을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닌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장애인과 고아에 대해 내가 갖고 있었던 이미지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미숙한 생각이었나 보다. 그들이 감당하고 견디고 있는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항시 타인의 악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물론, 박해를 당해도 그 부당함을 호소하기 조차 어려운 것이 그들의 현실인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혜택받은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그 밖에 내가 지금껏 당연한 듯 누려왔던 것들을 되돌아 보고 얼마나 소중한 지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사회적 약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자매를 지켜보는 남성의 심리가 이 책에는 세세할 정도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느낀 건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 독자의 입장에서 화자인 강민우와 세키에게 공감되기 보다는, 같은 여성인 레지나와 아녜스에게 더 많은 애착을 느꼈다. 그래서 자매가 겪고 있는 현실, 고통에 대해 중점을 두고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위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아일랜드 식탁>은 분명 유쾌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흥미위주의 독서를 해왔던 내게 여러모로 자극이 되기도 했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이어지다가 나중에서야 드러나는 진실들. 그리고 어느 인물의 충격적인 마지막과 결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 한 구석이 멍해져 온다. 며칠 동안 제멋대로 편파적인(?) 독서를 하긴 했지만 나에겐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었음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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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용과는 상반되고, 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일랜드 식탁'이라는 책명을 왜 선택했는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지게 된다. 따뜻한 감성과 함께 가족의 안락함을 대표하는 아일랜드 식탁은 역설적이게도 이 책을 읽고나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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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찌하면 좋을까? 읽긴 읽었는데 막상 글로 옮기자니 암담하다.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이야기 정도로 상상했던 <아일랜드 식탁>은 그 보다 훨씬 더 암울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저자 박금산이 말하는 이 이야기를 진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부도덕하다고 해야할지 아직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아일랜드 식탁>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막연히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4인용 식탁'과 달리 '아일랜드 식탁'은 혼자서 먹는 식사가 연상되는 탓이다. 적막함 속에 1인용 의자가 놓여진 책의 표지만 봐도 제목에서 내가 얻은 느낌이 책의 내용과 그리 동떨어진 것은 아님을 증명해 준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이 책에는 시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 그리고 고아인 여고생과 담임 선생이 등장한다. 앞을 못 보는 레지나와 여고생 아녜스는 자매지간으로 작품 속에서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선생 강민우와 야설 작가 세키는 각자 이 두 여성과 모호한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의 욕구를 충족해 나간다.
장애인의 성과 사랑에 대해 책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도 자주 다뤄지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외면해 왔던 이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모자라 그들을 성적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남성들의 그릇된 욕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책의 제일 마지막 해설에도 나오듯 사회적 관습에 의해 장애인이나 미성년자인 여고생은 모두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들 모두 성적 주체로 등장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성인 남성들에게서도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은 독자로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그 중에서도 강민우는 제자인 아녜스와 성적 관계를 유지하며 임신까지 시키지만 아이를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가 진심으로 욕망하는 대상은 아녜스의 언니인 레지나라는 점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리고 결말에 다다라 강민우가 행한 돌발적인 행동의 의미도 뚜렷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 작품의 마지막에 문학평론가 강유정의 적절한 해설이 있었기에 적어도 이 네 남녀의 기형적인 관계가 그들 각자가 가진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울러 우리가 윤리적이다 혹은 비윤리적이다라고 평가하는 것들에 대한 재평가와 욕망을 감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실질적으로 드러내 보인 욕망의 누춤함을 불편해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어서 오히려 소설 본문에서보다 해설에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다시금 서로 다른 사람과 얽히게 된 이 네 남녀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마지막까지도 각자의 행복에 안도하는 모습을 보며 4인용 식탁은 그들의 집에서 영원히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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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대략난감이다. 참 오랜만에 난해한 책을, 아니 불편한 책을 읽은 기분이다. 식탁이라 함은 왠지 모르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둘러쌓여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는 그런 풍경이 연상되는데, 이 책의 내용은 결코 그런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모든 소설이나 영화속 주인공은 이제껏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고, 그 주변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의 전면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세워진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 수녀인 이모의 보호를 받는 레지나와 아녜스는 자매다. 언니인 레지나는 앞을 볼수 없는 시각장애인이고, 아녜스는 신체적 장애가 있지는 않지만 부모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자다. 여기에 고향을 떠나 함께 살고 있는 사촌간인 세키와 민우가 있다. 이렇게 4남녀의 얽히고 설키는 사랑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이 4명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들어 평범한 윤리의 경계선을 뛰어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불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장애라는 것은 결코 선천적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후천적으로 갖게되는 그 결여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네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각자만의 트라우마와 함께 장애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작가가 진정으로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한번에 알아내기 힘들었다. 책소개글이나, 비평글을 통해 아~ 이렇게 해석하고 이해하면 되구나 정도라고나 할까? 또 야간 여상의 교사였던 민우가 고등학생인 아녜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되고, 심지어는 임신까지 하게 만드는데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나, 아녜스의 담임과 역시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임신을 한 레지나를 보면서 숨이 턱 막혔다. 정상적이지 못한 이 자매와 부적절한 관계를 한 사람이 선생이라는 명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좀 강도가 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민우. 그로부터 오랜 실종끝에 돌아온 민우는 언어를 잃은 상태다. 과연 그가 언어장애를 갖게 된 비밀은 무엇인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부류로 나뉜다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누구든 자신만의 장애를 갖고 있기에 타인의 장애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다거나, 불편해하지 말고,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그 취지가 어떻든 내용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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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하지만 사라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인들의 성과 사랑, 그리고 장애인들을 향한 성과 사랑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결혼이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는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반대 아니면 조롱일 겁 니다. 아일랜드 식탁은 말 그대로 금지사항을 사회에 퍼뜨린 소설입니다. 네남녀 모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고 일반인들이 보기 에 저것들도 사랑을 하나 하는 시선을 거두게 합니다. 차별은 어느시대나 어느 공간이나 존재하나 이한권을 통해서 부디 사람들 의 시선이 좀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전 설경구와 문소리 주연의 오아시스가 생각났습니다. 물론 주인공들부터 다 르지만 소외된 공주(문소리)와 가족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종두(설경구)의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하지만 초 반부터 설경구가 문소리에게 사랑보다는 욕정을 느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차츰 그 감정이 사랑임을 알고 알콩달콩 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좋은면만 보여준게 아닙니다. 문소리를 통해 돈을 뜯어내려는 올케언니와 장애인과 비장애 인이 무슨 사랑이냐 하는 시선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점을 이소설에서는 여지없이 깨뜨리려고 노력합니다. 한편으로는 지 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를 터뜨린 셈이고 한사람으로서 장애인의 인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글의 구성면이나 내용면에서는 반전과 스릴을 즐기는 독자들에게 좀 심심한 느낌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잔잔한 강의 흐름을 연상 케하는 부분이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외로움을 극대화시킨 소설이라고 본다. 사회는 외 친다. 장애인도 일반인들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차별은 여전하고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한다. 내가 왜 오아시스와 이소설을 비교하는지도 다른 독자들도 분명히 알것으로 본다. 한사람이든 두사람이든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 또한 그리 따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중인물들은 가족이 아닌 장애와 더불 어 가족의 소멸속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한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는 않지만 적어도 틀 을 깨고 좀더 장애인들에 대한 눈을 다른곳으로 돌렸으면 한다. 좀 충격적인 내용은 한 시사프로에서 장애인들에게 연구피임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 그것은 돈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참 마음이 씁쓸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 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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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을 생각하면 따뜻한 느낌이 생각난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오손도손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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