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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격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와 사상을 접하게 된 계기는 신정론 수업을 통해서다. 1년 동안 배운 신정론 수업의 원서 교재가 존 힉의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처음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국내엔 이 책이 김장생의 번역본으로 나와 있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로는 <독백>과 <자유의지론>을 읽었고, 사상 입문서로는 샤론 M. 카예와 폴 톰슨이 쓴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를 읽었다.
최근에 한나 아렌트의 박사논문을 읽고 나니 다시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다. 단지 시간과 기억, 악의 본질과 신국론의 논의를 넘어서 보다 폭넓게 그의 사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를 읽기 위해 내가 고른 책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 전기 저서들](두란노아카데미, 2011)이다. 공성철이 번역한 이 책에서 내가 이미 읽었던 <독백>과 <자유의지론>을 비롯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한참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웠던 때의 진솔한 글 총 8편을 접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 저서와 후기 저서를 나누는 기점은 그가 주교로 승진한 395년이다. 그러니깐 전기 저서는 386년 그의 유명한 회심 사건부터 시작하여 391년 사제 서품을 정점으로 하는 시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프로그램은 플라톤에 기초한 헬레니즘과 성 바울에 기초한 헤브라이즘의 원만한 결합이었다. 그는 <아카데미 학파 사람들 반박>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우리는 권위와 이성이라는 이중의 힘에 의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후로 나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이는 그 이상 타당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민한 이성 활동으로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에 관해서 현재 나의 성향은 진리를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이해로도 깨닫기를 견딜 수 없도록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우리(기독교의) 성스러운 것들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21쪽)
<독백>은 열정적으로 신앙을 추구하는 영적 여정을 담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글이다. 이성과의 내적인 대화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체적인 감각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파악되는 지혜를 붙들기 원하는 그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9세 때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부유함에 대한 추구를 중단한다. 어느덧 34살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부에 대한 경멸에 덧붙여 이제는 명예와 결혼을 경멸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인 봄과 지성적인 봄의 유비를 통해서 진리의 부름에 응하는 기독교적인 삶에 대해 언급한다. 영혼은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눈, 바라봄과 봄이라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눈을 가진다는 것은 바라본다는 것과 다르고, 바라본다는 것은 본다는 것과 같지 않다. 우리를 봄으로 이끌어주는 올바르고 완전한 바라봄을 덕이라고 부른다. 덕은 바르고도 완전한 이성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 바로 그러한 덕이다.
"영혼의 진보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치유, 바라봄, 봄. 이와 같이 세 개의 덕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치유와 바라봄을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이 항상 필요합니다. 봄을 위해서는 셋 모두가 여기에는 필요하지만 다음 생에는 사랑만이 필요합니다."(50쪽)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덕적으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친구를 잃는 두려움, 고통의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 그러하다. 로마의 내과의사 코르넬리우스 켈수스의 말대로, 최고의 선은 지혜이고 최고의 악은 육체적 고통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참(veritas)과 참된 것(verum)을 구별하고, 참된 것이 소멸할 때에도 참은 남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불멸이라는 얘기다. 참은 소멸될 수 없다는 논리는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결론으로 직행한다. 영혼 없이는 세상이 존재할 수 없다.
389년 경 집필된 <교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당시 16살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와의 대화에 기반한 인식론적 에세이다. 가령 진리의 인식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관념들은 어떻게 서로 교류되는가? 배움의 과정에서 가르침은 어느 부분을 담당하는가? 아렌트식 수사법을 빌면, 부자지간의 대화에 기초한 '이해의 에세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쾌활함, 아들의 예리함과 온건함,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칭찬,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등을 읽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악의 기원을 자유의지에 둔다. 악은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 글은 악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놓고 하나님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니교도를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보다 세밀한 논증이 제2권과 제3권에서 이루어진다.
선한 의지는 최고로 선한 것이고 모든 선한 것들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자유의지는 중간 크기의 선에 해당한다. 우리가 바르게 행할 의지의 자유를 말할 때 우리는 사람이 그 안에서 창조된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거나 의롭게 살도록 한다. 문제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타락할 수 있지만 자발적으로 일어설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강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엄습한 비참함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유의지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데 반해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 은혜의 자리를 지우고 자유의지만 극단적으로 강조하기에 이단으로 간주된다. 펠라기우스 이단은 원죄를 부정하고 은혜가 우리 공로대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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