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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들녘에서 펴낸‘일루저니스트 작가의 세계’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한다. 문학작품에 대한 기존의 명성을 뒤로하고, 다양한 문화권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간직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세계문학의 스펙트럼을 넓히겠다는 출판사의 의도가 신선해 보인다. [알바니아의 사랑]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건 먼저 알바니아란 나라의 상황이다. 내전 끝에 독립하여서도 독재자의 절대권력에 숨죽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이미 비극적인 사랑이 싹틀 조건을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 나의 상상력(?)이 그런 쪽으로 발달한 탓인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사랑은 항상 분위기가 조금은 음울한쪽으로 흘러야 제 맛이 나는 것 아니겠는가? 비록 금지된 사랑은 아니었다 해도, 나의 첫사랑 또한 알바니아와 유사한 그런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고, 혼자서 위안을 삼는다. 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은 금지된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마력이다. 우리는 우리주위에서 이 단어가 주는 말초적인 자극에 너무도 많이 노출되어 있다. TV에서 하는 드라마들의 내용이 그렇고, 주위에서 들리는 온갖 루머들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해서는 안 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내용이 그렇게 자극적이라는 생각보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의문이 들게 만든다. 또한 우리의 과거를 한번쯤 뒤돌아보면서, 나 같으면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 속에 빠져본다. 새벽녘 한발의 총성이 파열음을 내고 정적을 깨운다. 아마 아버지 자눔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이스마일은 먼 과거로 빠져 들어간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여 지나온 세월들이 펼쳐지고, 다시 자신의 침대에서 파열음을 내는 총성을 생각할 때쯤이면 소설은 끝이 나고 있을 터이다. 권력의 실세인 아버지 자눔의 저택은 알바니아만큼이나 폐쇄되고 은밀한 곳이다. 이스마일이 5살때‘그 여자’로 불리는 어머니는 갑작스레 죽었고, 가족의 주치의이던 기오르크 박사도 더 이상 집에 오지 않았다. 단편적인 기억들만 존재하는 이스마일의 머리 속에는, 4살 차이 나는 형 빅토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형제애에 대한 기억뿐이다. 아버지 자눔을 닮은 빅토르, 이스마일은 그런 빅토르를 쫒아가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유전적인 차이였다. 빅토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사학교를 마치고 군인이 된다. 그리고 장학사들의 눈에 들어, 티라나까지 유학을 온 시골아가씨 헬레나와 결혼을 한다. 제대를 하고 집에 온 이스마일은 헬레나를 처음 본 순간, 까닭 모를 불안에 휩싸이지만 이내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헬레나를 통해, 형 빅토르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무의식 속에 들어있던‘그 여자’어머니의 존재를 떠 올린다. 그리고 갑자기 실종이 된 아버지의 친구 기오르크 박사의 행적을 뒤쫒는 중에, 유모에게서‘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자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원한다고 한다.‘그 여자’또한 마찬가지 이었고, 그런 상태에서도 남편에게는 전과 같이 대할 수가 있었지만, 잠자리에서 만은 표시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자눔은 아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눈치채고, 그 결과로 당연하게 기오르크 박사는 실종될 수밖에 없었고,‘그 여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삶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이내 헬레나의 몸을 탐닉하는 것으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헬레나도 이스마일의 감수성을 사랑하면서도 앞날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 헬레나를 통해 자신들의 관계를 빅토르가 이미 알고 있음을 눈치채지만, 이스마일은 별 동요가 없다. 새벽녘 한발의 총성이 파열음을 내던 날, 빅토르는 그의 아버지 자눔이 했던 대로, 자눔의 살인범으로 이스마일을 지목한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일까? 사회체제와 비슷한 저택 속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가부장제가 갖는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을까?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통하여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한 인간에게 정체성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려 했을까? 그 어느 쪽이래도 작품속에 흐르는 분위기는 조금은 우울하다. 이스마일이 헬레나의 몸을 탐하는 그 순간에도, 자극보다는 한 인간의 아픔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군인이 되겠다는 빅토르를 편애하는 자눔과, 곤충학자가 되고 싶었던 이스마일이 자눔의 마음에 차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기에.. 우연찮은 기회에 이 책 [알바니아의 사랑]을 읽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알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서구권의 명성 있는 작품이 아닌, 알바니아란 잘 알지 못하는 문화권의 작품으로, 그들 문화의 고유성을 알고자 한다면 분명 의미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되면 이들 시리즈를 읽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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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재촉하는 사랑이야기, 금지된 사랑의 저주와 그래서 더욱 고양되는 사랑이야기, 쾌락과 복수로 이어지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비극적 사랑이야기이다. 또한 폐쇄되고 가부장적이며, 폭력과 기만, 억압과 공포로 이어지는 사악한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독재정권의 나라, 알바니아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애처로운 저항의 은유이기도 하다. 열정과 조바심, 죽음과 같은 쾌락과 사랑의 그 절실함이 작품전체를 격정적 분위기로 몰아댄다. 이해 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 표정들의 아련한 기억들이 음울함과 내재적인 은밀함을 더욱 강렬하게 하고, 까무룩하게 눈이 절로 감기는 어떤 환각적 상태에 빠져들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외부와 차단되고, 가부장적 권위, 근엄한 공포의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에 갇힐수록 그 반작용은 더욱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질서일 것이다. 소설은 스페인내전, 유럽을 휩쓴 파시스트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알바니아의 한 지배권력자인 ‘자눔 라드지크 가문’에 저주처럼 내린 사랑과 죽음의 비밀, 그리고 그 황폐화를 향해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근원을 좇는다. 작품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카눈의 전설’을 소재로 한‘이스마일 카다레’의 장편소설 『부서진 4월』에서와 같이‘피는 피로 갚는다’는 보복의 순환은 비극을 예고하지만, 인간의 본능이란 금기(禁忌) 앞에서 더욱 초연해지는 것,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추동력은 격렬함, 간절함, 죽음의 불사를 초래한다. 소설은 라드쉬크 가문의 가장인 대(大)자눔의 둘째 아들인‘이스마일’의 어린 시절의 흐릿하고 몽환적인 기억들과 그의 성년으로서의 현실, 즉 과거와 현재시점을 오가며 비극적 기원의 비밀스런 윤곽을 드러낸다. ‘그 여자’로 지칭되는 엄마의 죽음에 숨겨진 이면의 진실, 엄마의 죽음과 동시에 가족과 항시 함께했던 의사 기오르크 박사의 사라짐은 시대의 폭력성과 가문의 비극성을 동시에 표출해낸다. 여기서 엄마와 기오르크의 관계가 지니고 있는 금기의 파괴가 낳은 결과는 은밀하고 잔인한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것은 곧 권력의 저항이자 관습의 순응이라는 대자연의 질서로의 회귀를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동시에 금지된 사랑, 그 금기에 도사린 부인 할 수 없는 절대적 쾌락, 죽음까지 수용 할 수 있는 사랑, 그 죽음의 부름 속에 살아있음과 깨어있음을 찾았던 부조리의 격렬함이 거친 숨결로 다가오기도 한다. 급기야 형 빅토르의 아내인 형수 헬레나와의 초조함과 은밀함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이스마일이 쓰다듬는 형수의 등은 이스마일을 빅토르의 우주로 접근시켜주는 작은 우주였고, 사랑하는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는 그에게 죽음과 같은 쾌락을 일깨워주었다.”라고 하듯이, 금기의 파괴는 질서와 제도, 권력의 중심을 파괴하려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권위적인 가부장적 질서인 자눔과 그를 닮아가는 형 빅토르라는 기존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행위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의 행위는 그 어떤 사랑보다 극한의 격정과 강렬함을 내 뿜는다. 그 격렬함,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서로에게 넘겨주게 되는” 사랑의 침대 속에 내재하는‘죽는다’라는 내밀한 고백처럼 쾌락과 죽음이 분리 할 수 없는 일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총소리, 그러나 쾌락과 복수에 대한 갈망이 혼재된 적대감 앞에서의 침묵과 순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다. ‘바타이유’를 연상시키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행위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하게 한다. 육체적 달콤함, 욕망의 본능, 그 촌각을 다투는 심장의 떨림, 그것이 추억을 이루는 물질들과 연결되어 설혹 상상의 세계일지언정 절실함이 만들어내는 삶의 진리로 이끈다. 에로티즘에 실린 그‘저주의 몫’을 이 보다 풍부하게 전달하는 작품도 없을 게다. 자유를 향한 연인들의 질주가 더 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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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장을 넘겨가면서 점차 몰아치는 격정의 바람 속에 몸을 맡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소용돌이 가운데 던져진 그런 불안함이 아니라, 태풍의 눈에 들어간 것 처럼 시끄러운 주위에 결계가 쳐진듯이 느껴지는 그런 고요함이었다. 또한 이 책이 번역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훌륭한 글이라도, 그것이 번역되는 순간, 진흙 속의 진주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경우, 몇 몇 부분에서, 세밀한 묘사에 감탄해 버리고 말았는데, 순간 이 책이 번역된 소설인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한번 더 감탄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닮아있다’ 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하는데, [알바니아의 사랑]에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최근에 읽는 책이 무엇이에요? 난 당연히 알바니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알바니아의 사랑은 지금 나에게 있어 다른 사람에게 권해주고 싶은 첫번째 소설이 되었다. 방금 전,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에파스파냐 출신의 작가가, 알바니아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지만,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도 읽어 나가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책 속 주인공의 감정과 동화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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