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년생. 올해 (2019년) 26세. 중졸 (고등학교 중퇴). ... 이 정도 학력의 젊은 여자가 책을 4권을 썼다. 그리고 아마 또 한 권의 책을 집필 중일게다. 쿠바에서. 인터넷에서 월간중앙 (2017.12월 김해완의 쿠바탐험)에 12회에 걸쳐 연재한 그녀의 칼럼을 읽었기 때문에 해보는 짐작이다. 다른 십대의 탄생: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 2011.3월 (18세) 그린비 출판.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한 청년 백수의 ‘천 개의 고원’ 사용법 2013.12월 (20세) 북드라망 출판.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고전 찬찬히 읽기 2015.8월 (22세) 작은길 출판 뉴욕과 지성: 뉴욕에서 그린 나와 타인과 세상 사이의 지도 2018.4월 (25세) 북드라망 출판. 처음에는 중졸백수. 그리고 뉴욕에서.. 어쩌구 하길래... 장난하나. 중졸백수가 무슨 책을 써.. 그리고 뉴욕은 어떻게 가구...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첫 번째 책, ‘다른 십대의 탄생: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를 도서관에서 빌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호기심 때문에. 결국, 나는 이 책을 샀다. 그리고 한 권을 더 사서...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큰 딸에게 슬쩍 건네주었다. “너 혹시, 자립에 대해서 관심있니?” 하면서... 경제적인 자립, 정신적인 자립 운운하면서... 김해완은 지친 마음으로 (?) 첫 번째 책을 썼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질문에... “학교는 왜 그만두었니? 다른 계획이 있니?” 등의 질문을 보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함께 공부하는 남산강학당의 다른 학생들 (최소한 그녀보다는 나이가 많은...)도 비슷한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자퇴를 결정하면서 그녀는 친구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학교에 대한 비판을 했고, 친구들은 ‘세상물정 모름’, ‘의리없음’을 얘기했다. 힘들었다고 했다. 선택이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의 ‘당위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책을 쓰면서 그녀는 말한다. 진짜로 좋은 선택은 ‘당위성’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유효성’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살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은 거의 없다고 얘기한다. 부모님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외모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사주팔자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성격을 선택하지도 않았다고. 한 번도 자신의 조건들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고. 김해완이 학교를 나가 중졸백수가 되기 까지의 과정에도 자신의 선택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세상의 많은 힘들이 작용했다고 한다. <수유 너머> 연구실이 있었고, 곰숙쌤도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자퇴를 반대하지 않으셨고, 학교는 점점 바빠졌다고. 물론 그녀의 이 당당한 해명에는 니체의 꼬드김이 작용한 듯 하다. “왜 너는 진리를 끌어와야 너를 설명할 수 있는가? 당당하게 네 몸이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네 안에서 도대체 ‘무엇이’ 진리를 향해 의욕하고 있는 것일까?”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15쪽 해완이 자퇴한 것에 대해서 거의 유일하게 화를 냈던 사람, 그녀의 할머니 (빌딩 청소부 생활을 하시며 자급자족하고 계심. 용인으로 이사가는 자식들의 권유를 한사코 물리치고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계심.)에게 아직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 어느 어버이날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학교를 나오고 또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예요. 학교를 나오고 백수가 되었어도 매일 바쁘게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있어요. 언젠가는 내가 하는 공부를 통해 당당하게, 나를 책임질 거예요.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고통도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겠지요.’ 절집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스승과 제자이거나 도반들뿐이어서 그 밖에 인연은 없다. 저 산에 있는 바위도, 흘러가는 구름도 모두 함께 성불해야 할 도반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 지관스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한국일보. 2005.7.11. 해완은 짧은 연애도 경험하고, 또 헤어진다. 삶의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녀의 우선순위는 공부였고, 연애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우선순위는 연애가 우선, 공부는 그 다음이었다. ^.^; 해완은 1주일에 이틀, 맥도날드에서 일을 한다. 크루 (Crew: 맥도날드 시급제 아르바이트생)다. 최저임금 4,110원. 한달에 197천원을 번다. 보증금 2천만원, 월세 200만원인 집에서 12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밥은 연구실에서 돌아가면서 밥을 하기 때문에 한 끼 밥값이 1,800원 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목욕탕은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밖에 사용하지 않으며 세탁기는 1주일에 1~2회 정도 돌린다. 거꾸로 말하면, 목욕탕은 하루에 23시간 정도 비어 있다는 것이고 세탁기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비싼 돈을 들여 이런 것을 독점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공유할 수 있다면 공유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 아닐까.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26쪽 해완에게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많은 것을 배웠고, 익혔고, 이해했다. 선생님의 교육방침은 비체계적이었고 늘 급작스러웠다. 이러이러한 책을 사서 언제까지 공부해 와라.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해완은 서점에 가서 책을 사왔다. 펼쳐보기 전에는 그 책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그 ‘뭔지도 모르는 것’을 공부했다. 선생님은 그녀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었고 질문에 답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사제관계가 맞기는 한데 ‘수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완은 혼자 공부했다. 모든 문장이 ‘해석불가’인 책을 읽다가 분노가 폭발해도 별 도리가 없었다. 수수께끼를 풀 듯 종이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며 짐작하고 추측하고 헛다리 짚다가,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깨닫곤 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씩 그녀의 공부결과물을 체크하셨을 뿐이다. 그렇게 그녀는 1년동안 ‘선생님 없이’, ‘교육적 체계 없이’ 그녀가 모르는 것을 배웠다. 아는 한자가 學, 之, 不 뿐인 상태에서 ‘논어’를 읽었다. 어려운 철학책도 읽었다. 이 역시 하늘과 같은 스승님의 명이었다. 책을 읽고 각 챕터별로 글까지 써가야 했다. 물론 책 속에서 해완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어려운 철학책을 읽고 있는 그녀에게 좀 더 쉬운 책부터 읽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무지한 자에게는 8급 한자나 1급 한자나 다를 바가 없다고. 무지한 자는 공부의 수준을 식별할 수 없다고. “오 무지한 자여. 완전히 무지한 것보다 조금 ‘덜 무지한 것’부터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좀더 빨리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이야.” 라는 말이 의미가 있는가 라고 그녀는 묻는다. (p.108) 내 자발적 힘으로는 어려운 철학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글 쓰는 작업은 언제나 괴롭기만 했고 철학책을 읽는 것은 다 큰 어른들이나 하는 공부인 줄로만 알았다. 이토록 게으른 내가 지금 이렇게 ‘철학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다. 철학공부는 싫었지만 선생님은 좋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선생님을 만날 구실이 사라질 테고, 결국 글을 쓰는 것만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공부를 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선생님은 나의 배움의 과정에 일절 참여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나와 책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늘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계셨다. 그러나 내가 책과의 관계를 멀리 하려는 순간, 선생님은 죽비로 머리를 후려치듯이 매섭게 일갈하셨다. 그러면 나느 다시금 울상을 지으며 책을 손에 잡곤 했다. 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바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였다. 결국 배움이란 의지와 의지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선생님과 나 사이엔 ‘수업’이 아니라 ‘만남’이 있었다. 그 만남은 지식과 지식이 아니라 의지와 의지의 만남이었다. 무지한 스승과 무지한 제자의 만남. 의지와 의지가 만난다면, 무지와 무지의 결합에서도 知가 탄생할 수 있다. 해완이 풀어놓는 경험담 하나이다. “나는 ‘노마디즘’이라는 책을 10개월 동안 읽었다. 이 책은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카타리가 쓴 ‘천의 고원’이라는 철학책에 대한 해설서다. 사실 이것은 나중에 안 정보이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들뢰즈의 이름이나 그의 철학사적 맥락은 아무것도 몰랐을뿐더러, 철학에 대해서라면 아주 초보적인 것까지 깜깜무식한, 그야말로 ‘무지’ 상태였다. 내용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요약해 놓은 참고서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정말로 무언가를 ‘배울’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어쨌든 ‘읽을’수는 있었다.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이 책을 정말 ‘무식하게’ 읽었다. 어쩌면 내가 배운 것은 책 속 활자가 아니라 바로 텍스트를 ‘무식하지만 정면으로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결국 나는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끝까지 읽어냈다. 물론 끙끙대며 정리했던 내용이나 개념 따위는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 후로 나는 어려운 텍스트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무지막지한 텍스트에서도 언제나 나름대로 배울 것은 있었다. 책을 무작정 읽어야 했던 또다른 경험이 있다. ‘노마디즘’이 10개월 동안 한 책만 열심히 팠던 경우라면, 이번에는 1주일에 6권씩 책을 읽어치워야 했던 경우다. 학교를 그만두고 연구실에서 막 공부를 시작할 때, 욕심 부리느라 있는대로 세미나를 벌인 결과였다. 책 읽고 발제하기. 4개월 동안 그것은 내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되었다. 왜 내 무덤을 스스로 팠을까? 지금 생각해도 괴로운 스케줄이다. 그러나 정신없는 그 와중, 폭풍같이 몰아치는 세미나 속에서 나는 내 몸이 또 변하는 것을 느꼈다. 닥치는대로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책은 튕겨져 나갔고 어떤 것은 좀더 오래 머물렀다. 그 책들이 내 몸에서 일으키는 화학장용은 아주 대채로웠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감격할 때도 있었고, 글자 하나 하나가 전부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었다. 기쁘다가, 가라앉았다가, 찢어버리고 싶다가, 머리가 아프다가, 아예 몸이 아프기도 했다. 책을 읽는데 머리가 아니라 몸이 움직였던 것이다. 머리가 튕겨 냈던 책까지도 몸에는 전부 다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맨 땅에 헤딩하기. 공부하고 싶다면 이것도 참 괜찮은 방법이다. 해완의 아빠는 정말 공부를 많이 하셨다. 아빠의 책들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해완의 방 책꽂이까지 점령하고도 늘 넘쳤지만, 그렇게 집이 좁아도 책이 줄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어느 순간 알게 된 그 책들의 정체는, 칼 맑스였다. 아빠의 지난 30년은 언제나 맑스와 함께 였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 1997.)’ 1권을 선물 받고, 아무런 밑줄이 그어지지 않은 ‘공산당 선언’의 새하얀 첫 장을 펼쳤을 때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완은 아빠가 오랫동안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 길을 걸어갔는지 보았고 그 힘겨운 여정 저변에는 맑스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공산당선언’을 신나게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이 해완의 심장을 뜨겁게 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착취나 억압을 겪은 적도 없고 주변 사람이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해완은 부모님이 80년대 대학가에서 화염병을 던지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으로는 몹시 부러워했었다. 그녀에게는 맑스의 싸움의 기술 첫 번째부터가 갖춰져 있지 않다. 도대체 누가 적이야? 바로 여기가 해완과 맑스가 만나는 지점이다. 해완이 맑스를 공부하고픈 지점이다. 이 책을 뜨겁게 읽은 해완의 심장이 반응한 것은 맑스가 해방시키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 그들이 아니라 맑스가 보여주는 천재적인 싸움의 기술이었다. 맑스는 사는 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 ‘먹고사는 문제’에 딴죽을 걸고 싸움을 선포했다. 그것도 아주 유쾌하게, 실리적으로 말이다. 해완은 말한다. ‘노동운동하는 사람만이 맑스를 공부하고, 싸움에 곤봉을 들고 경찰대와 마주서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아빠의 맑스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아빠 때의 그것과 다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아니라 나의 해방이다. 나를 잘 먹고 잘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파악한 후에 명랑하게 다음 스텝을 내질렀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당연한 상황을 당연하지 않게 만드는 맑스의 유쾌한 기술이 필요하다. 실용적으로 적을 파악하는 기술. 악조건을 승리의 조건으로 바꾸는 기술. 한방에 격파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난 맑스를 공부하고 싶다.‘ (p.131) 비노바 바베는 학습의 목적이 ‘자유’라고 했다. 걸음마를 배우고 나면 세상의 크기가 확 달라진다.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닌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두 발로 집 밖을 벗어나 어마어마하게 큰 세상을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어려움이 닥쳤을 때도 상황에 대해 무지하면 이 말에 흔들리고 저 말에 흔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의 관점이 똑바로 섰을 때는 어떤 파도가 닥쳐와도 결코 두렵지 않다.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앎의 크기가 나의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했다. 무지에서 벗어나면 두렵지 않고, 두려움을 모를 때 우리는 자유롭다. 진정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의 곁에서 스스로 배울 뿐이다. 태양은 누구에게도 자기 빛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만물이 그 빛을 받아 스스로 자라 갈 뿐이다. (버리고 행복하라 p.31) 나무가 자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엄마가 아이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빛나는 동그란 것이 태양이란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모녀 사이에 신뢰관계가 부족하여 아이가 속으로 ‘엄마 말대로 저게 태양인지 누가 알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배우려면 일단 믿고 봐야 한다. 학생은 선생의 지혜, 삶, 노동, 사람 자체의 진실함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힘을 믿어야 한다. 선생과 함께 하는 배움이 자신의 삶을 변하게 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선생을 선택하고 이 배움을 계속할 ‘자신’을 믿어야 한다. 온통 믿음 투성이다. 그렇다고 학생이 생각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삶으로부터 나온 선생의 말은 씨앗이 되어 학생에게 심어진다. 씨앗은 선생의 것이지만 그것이 심어지는 토양은 학생의 가슴이다. 씨앗은 선생의 것이지만 그것이 심어지는 토양은 학생의 가슴이다. 그것을 발아시키고 어떻게 키워내느냐는 학생의 몫이다. 선생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되었을 때, 학생은 언제든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다면 스승과 학생 간에 이루어지던 교육은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교육은 학생이 독립적인 사상을 튼튼하게 완성한 후, 의심없이 그것을 믿고 행동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것이 자신감이다. 이 학생이 목수이든, 글쟁이이든, 청소부이든 그는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자기 두 발로 선’ 인간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나무는 스스로 자란다. (p.157) 꿈은 미래에 쟁취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해 주는 좌표다. 꿈을 꾼다는 것은 현재를 ‘이렇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내 몸을 움직이는 순간, 현재는 꿈에 의해 움직이고 변한다. 따라서 꿈이 영향을 주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그 순간에는 ‘되기’와 ‘하기’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존경하는 어떤 작가처럼 되고 싶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다. 또 열심히 글을 쓰다 보니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글을 쓰는 상태, 글을 쓰는 순간만 존재한다. 국가에도, 가족에도, 학교에도 포섭되지 않은 내 삶은 특정한 공간이나 특정한 관계가 보장해주지 않았다. 하긴, 한 인간이 바꿀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지 않은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내 뜻’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의 언어로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대단한 만남, 사건 속에서 ‘뿅’하고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꾸 걸려 넘어지는 일상의 문턱에서 조금씩 완성될 것이다. 내 뜻을 세우기도 전에, 세상에는 이미 내 뜻대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다. 날씨도, 사랑도, 부모님과의 마찰도, 친구 간의 오해도, 건강도,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이 골칫거리들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애를 쓸 때 내 뜻을 품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밥 세끼를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건강을 챙겨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 친구가 있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식구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나를 계속 발전시키는 공부를 해야할 것이다. 현재 내 꿈은 ‘독립’이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글’이다. 앞으로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내가 겪고, 보고, 듣고, 느끼는 수많은 것들은 비로소 ‘나’가 된다. 내가 쓴 글을 내 소유물이 아니다. 내 이름이 박힌 글은 곧 ‘나’이고,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된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비로소 나는 세상과 만난다. 내 글은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힌다. 사람들은 내가 그대로 담겨있는 내 글을 읽을 때 어떤 핸디캡도 주지 않고 그대로 (솔직하게, 냉정하게, 진심으로) 반응을 보인다. 이때만큼은, 나는 세상과 동등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내 전부를 던진다. 그리고 내 글과 전면적으로 부딪혀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글쓰기가 나의 독립기에 든든한 지원병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 방황 중이다. 독립을 향한 여정은 끝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캄캄·막막하지만 유쾌한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p.165) 독후감이라기 보다는 요약 혹은 발췌에 가까운 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게 더 낫다. 내 평범한 감상으로 이 기특한 책을 표현해버리면... 웬지 날카로운 보검을 평범한 검집으로 감싸는 격이 되어 버릴테니까. ㅎㅎㅎ 새로운 공부법, ‘맨 땅에 헤딩하기’을 알게 된 것도 좋았고, 선생과 제자 사이의 믿음이 얼마나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인가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았다. 경제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독립’을 향한, 현재 진행형의 ‘방황‘도 좋았다. 난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 그녀가 뉴욕에서, 쿠바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