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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그 속이 치밀해지다보면 넘치는 일과 관계에 휩싸여 자신을 잃고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외부적으로 두드러지는 많음, 넘침, 풍족함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내면의 바닥은 갈증과 허기로 채워진다. 사람들은 그 목마름과 배고픔을 삭히기 위해 더러는 일상을 떠나려고 하고 거창하게 여행까지는 아니어도 잠시 머리를 식히고 일상을 잠시 팽개치고 싶은 욕망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떠남이란 그 무엇도 챙기지 않고 홀연히 흘러가는 것인데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일상의 좀스러운 사정들을 기어이 끄집어 내어 내 어깨에 짊어지려 하는 것은 오래도록 도시의 압력에 이끌려 살아온 탓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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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생이 아름다운 까닭은 축제가 있기 때문이다.1)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축제가 아니라 여행이 있기에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일상에 지쳤을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그런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기에 삶이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그 어떤 이유에서든 누군가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면 비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간다 해도 그의 인생은 무지갯빛이기는 힘들 것이다. 생각해보라. 사소한 오해로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얼마 전 그 혹은 그녀에게 감미로운 사랑의 말을 속삭였던 곳을 지나가야 한다면, 그 곳은 더 이상 마음을 설레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쓰라린 신물만 나오지 않을까? 여행이 그 모든 것을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행하는 순간만이라도 망각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은 만남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은 상호간의 교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교감의 내용은 한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느 지역의 특징이 그 지역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과 ‘나’사이에 ‘들리지 않는 대화’와 ‘보이지 않는 교감’이 일어나야 그 지역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와 교감은 그냥 스쳐 지나감을 만남으로 전환한다.2) 물론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여행을 한다면 이런 만남이 생기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증명할 사진 몇 장을 통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무엇을, 아니 어떤 여행을 해야 할까? 시간에 쫓기는 여행에서는 어느 지역과도 깊고 진하게 만날 수 없다. 적어도 한 지역에 며칠을 머무르면서 그 도시의 장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과 시장과 카페와 식당을 가보고, 이곳 저곳을 할 일 없이 걸어 다니며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그 지역을 느낄 수 있다. 프로방스는 유학시절 한 번 지나간 적이 있지만 주마간산(走馬看山)의 관광여행에서 큰 영감을 받지 못했다. 그저 한 번 가보아야 할 곳을 다녀왔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프로방스를 ‘나의’ 프로방스로 만나게 된 것은 1996년 여름의 일이다. 파리에서 자동차를 빌려 타고 남쪽 방향으로 차를 몰아 퐁텐–드-보클뤼즈(Fontaine-de-Vaucluse)에 있는 친구 미셸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일주일가량 머무르면서 보니외(Bonnieux), 고르드(Gordes), 카바용(Cavaillon), 압트(Apt), 메네르브(Ménerbes) 등 그 근처의 작은 마을들을 순례한 다음 내친 김에 지중해의 코르스(Corse)까지 차를 몰아 여행했던 기억은 지금도 빛 바래지 않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 그냥 거기 있던 프로방스가 ‘나의 프로방스’가 되었다.3)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프로방스(Provence)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저자는 프로방스(Provence)에 대해 프로방스는 그런 조급증을 치료하는 요양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그곳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다 보면 무엇이든 깊이 느끼고 음미하고 교감할 줄 아는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세속의 허영을 뒤로하고 느리게 살려는 사람들이라야 숨어있는 프로방스의 진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방스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저당 잡힌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4)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삶이라면 굳이 멀리 프랑스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돈에 쪼들리지 않는 상태에서의 귀농이라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프로방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골[Province],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삶의 현장이 아니라 휴식의 공간으로서의 시골로서. 이렇게 프로방스를 향한 여행은 구체적인 장소라기 보다는 우리가 꿈꾸고 장식한 휴식의 공간에로의 즐거운 달음박질이다. 그리고 어떤 여행이건, 그 여행 하나하나가 김춘수의 “꽃”의 한 구절처럼 하나의 몸짓에 이름을 불러주어 꽃을 만드는 과정이고,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어쩌면 나는, 아니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며 햇빛 찬란한, 인생의 어느 날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외칠 것이다.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5)라고 말한 파우스트 박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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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여행,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아닌 전혀 모르는 어느 곳에 머물면서 그곳을 알아가는 재미. 여행의 묘미는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당장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떠난다면 그곳에 오래오래 머물면서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천천히 느긋하게 하릴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시간. 멍, 하니 햇빛을 쬐며 눈부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도, 담벼락 그늘 아래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하루를 보내도 누구하나 간섭하지 않는 자유. 분명 여행이 주는 휴식 같은 시간일 것이다. 그 자유를 만끽한 사람, 정수복.
사람이 살면서 어느 한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빠져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직까지 내겐 그런 경험이 없다. 그저 여행을 간 곳에서 주는 단순한 편안함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도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을 뿐이지 오래도록 그곳을 그리워하고 결국에는 그곳에 가서 살아보겠다고 마음먹는 일은 쉬운 선택이 아닐 것이다. 한데 그는 그랬다. 프랑스에 머물면서 몇 번의 프로방스 여행에서도 '그'만의 프로방스를 만나지 못했던 그가 '그의' 프로방스를 만난 것은 십 년도 더 전에 자동차를 빌려 남쪽으로 여행을 하면서부터다. 친구 미셸의 별장에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그는 '그' 만의 프로방스를 만나게 된다. 그후로 삶이 지루하거나 피로해지면 프로방스를 찾게 되었단다. 문득 생각해보니 내게도 그런 곳이 있긴 했었다. 외국에 나가 오래 있었던 적이 별로 없으니 외국의 어느 곳일리는 없고, 이곳 우리나라에서였다. 바로 경주.
경주는 프로방스만큼의 햇빛은 없었지만 도시의 햇빛보다는 빛났다. 미스트랄과 같은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소금기 먹은 바닷바람은 불었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내륙에서 유일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향지의 느낌이 나는 곳이 바로 경주였다. 그래서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매년 그곳을 찾아 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은 모든 시름을 다 잊었다. 늦게 일어날 자유, 유유자적 돌아다닐 자유, 바닷가에서 오래오래 앉아 있어도 좋을 자유. 어쩌면 한 번의 그 자유가 친구와 나를 매년 그곳으로 불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지 않은 걸로 봐서는 간절할 만큼의 편안함을 준 것은 아닌 듯하다. 그가 경험한 묘지에서의 느낌처럼.
글을 읽으면서 그가 아를에서 느꼈던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시공간을 초월한 무언가 영원한 것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이 느낌을 언젠가 어느 곳에서 받게 된다면 나도 '나'만의 '프로방스' 같은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전문적인' 산책자라 스스로 말하고 있는 작가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남불, 프로방스라 일컫는 곳의 곳곳을 볼 수 있었다. 사회학자답게 조금은 지루하고 어려웠지만 그렇게 천천히 산책하듯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건 그가 바라는 독서의 한 방법인 게 아닌가 싶었다.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해 궁금은 하지만 이토록 세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낯설은 지명과 거리에서 오는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지루함을 산책하듯이 그를 따라 천천히 매일매일 그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즐기면서 잊게 하기 위한(훗, 역시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도 각자의 자유로움이 존재하는 구나!).
아무튼,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을 통해 진정한 휴식을 알게 되었다. 작가가 한 달 동안 누렸던 '프로방스에서의 자유로움, 신선함, 고요함, 장엄함'이 언젠가 나도 그와 같은 경험으로 '나'만의 '프로방스'를 꼭 찾아 누려보리라는 마음을 먹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삶과 여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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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휴식이라는 말에 죽음을 떠올렸다면 너무 니힐한가? 살아 있는 한 약간의 이완은 가능할지라도 완전히 휴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간의 내 삶을 피곤하게 만들어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도대체 어디 가면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하며 궁리만 하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많은 분들이 프로방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검색창에 프로방스를 치면 다다다다 하고 이런저런 프로방스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엔 어린 날 내 감성을 뒤흔들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도 있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뭉클했던 '나무를 심은 사람'도 있다. 도대체 거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롭고, 나른하고, 느긋하기에 그토록 많이들 프로방스를 말할까. 김영주 씨가 쓴 '프로방스'는 작가와의 만남에 친구 따라 가서 '어느 멋진 순간'이란 싱그런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시간도 누렸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 검색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야한 영화로 각인돼 있는 '연인'도 프로방스와 연관 되어 뜬다. 처음 읽고는 '너무 멀리 갔어'라며 기함했던 소설 '향수'의 영화도 뜬다. 이래저래 산타페에 이어 프로방스는 다녀온 것이, 살아 본 것이 남들한테 속닥속닥 들려주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곳인가 보다. 이 책, 인문학자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프로방스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군데군데 그런 시각이 녹아 있어 다른 프로방스 책과 차별된다.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프로방스의 작가'라 할 카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곁들인 사르트르와의 논쟁 부문이다.
사르트르와 까뮈는 나치와 싸웠고, 독재자와 싸웠고, 위선과 불평등에 맞섰다. 사르트르는 공산당이 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시즘은 20세기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다"라고 말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확실한 좌파의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카뮈는 개인의 판단을 집단의 판단에 종속시키고 숭고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할 수 있다는 좌파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중략...) 사르트르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을 통해 불의의 폭력은 거부해야 하지만 정당한 폭력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때 카뮈는 침묵을 택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탄 버스에 알제리 독립을 위해 던져진 폭탄 사고로 어머니가 죽는 상황을 그리면서 그렇게 얻어진 독립보다는 어머니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p.110~111)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카뮈 쪽이다. 정의와 부정이 거의 명확한 상황에서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망설이는 편이다. 그런 사람들은 좀 외롭다. 우유부단으로 비추어지기 십상이다. 카뮈도 그랬구나...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장소에 집 한 채가 있고 주위에 이야기가 통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의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라고 말하곤 했(p.61)단다. 그 또한 내 타입이다. 카뮈의 재발견...내지 첫 발견. 그러고보니 나는 카뮈를 몰랐구나. 그저 실존주의 작가의 한 명으로만 대충 이해하고 있었구나. 그가 프로방스에서 죽었다면, 가볼 만하겠다 싶다. 나의 해외여행은 동남아에 국한되어 있었고, 유럽은 뭔가 꿈처럼 멀기만 한데, 가게 되면 이곳을 찜해야겠다. 진짜 프로방스에 가 보기 전이라면, 그 동안 내게 프로방스는, 휴식의 장소는 어디였을까. 낮잠이 죽을 만큼 감미로운 그곳은 어디였을까.... 없다. 나는 집에서 나서는 순간 나를 휘두르는 외부의 힘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편이라 제일 좋아하는 휴식은 아무도 없는 나의 집에서만 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밖 어디선가 휴식을 발견하는 건 나의 오랜 로망이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나의 프로방스를 발견하고 싶다. 떠날까?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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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책을 받았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설렙니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이제 저는 프로방스로 떠납니다. 그 중에서도 글쓴이 정수복씨가 자신의 '제 3의 도시'로 꼽은 아를로 말이죠. 남프랑스의 빛나는 햇살과 여유로운 시간 속으로. 프랑스어를 전혀 몰라 슬슬 걱정이 되네요. 불어 잘하는 친구라도 데려올걸. 하지만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을 여행이 될테니 그런 걱정은 잠시 커다란 짐가방 속에 묻어두려고 합니다. 짐이 왜이리 거대하냐구요? 이게 다 완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사전 준비랍니다. 가방을 열고 떠나기 전 쓸어담아놓은 책 무더기를 보니 마음이 꽉 차네요. 여행지를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도 좋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도 좋지만 제게 있어 진정한 휴식은 다른 아무 걱정 없이 늘어져 책을 읽는 것이니까요. 아를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저를 반기는 것은 라벤더 빛의 바람입니다. 흐드러지게 연보랏빛 라벤더가 피어 그 향이 미스트랄을 타고 번집니다. 미스트랄은 남프랑스 특유의 거센 바람이에요. 모자와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이게 책에서만 보던 '더위를 날리는 바람'이로군요. 더위만 날리는 게 아니라 사람도 여럿 날리겠어요. 관광객들이 아를을 여행 경로에 넣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반 고흐 때문이겠죠? 미술이나 그림은 잘 몰라도 반 고흐는 워-낙에 유명하다보니 반 고흐 카페나 반 고흐 센터(Espace Van Gogh) 등이 포함된 반 고흐 코스가 따로 마련되어있기까지 하네요. 책의 저자인 정수복씨도 고흐에 대한 열정을 책에 고스란히 담아놓으셨었죠. 하지만 저는 원래 고흐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니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패스. 대신 그 분위기에 젖어 한 두권 쯤은 반 고흐에 대한 책을 골라 반 고흐 카페 맞은편에 자리잡고 느긋하게 독서를 즐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흐 다음으로 아를에서 유명한 것은 고대 로마의 유적들입니다. 아를은 프랑스의 작은 로마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요.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아를의 원형경기장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많을 시간을 피해 아무도 없는 원형경기장에서 노래를 불러보고 글도 써보고, 계단 위에 앉아 내일은 어딜 가볼지 휘 둘러보기도 하고 그러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지리도 익힐 겸 거리로 나섭니다. 아까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반겨준 라벤더 - 글쓴이는 라방드(라벤더의 프랑스식 표현)라고 했지만 - 가 집집마다 창틀 위에서 빛나고 있네요. 예술가들이 탐내던 아를의 풍부한 햇살이 라벤더를 더 향기롭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햇살 아래서는 무슨 꽃이든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겠지요. 기념품점에 잠시 들러 숙소에 걸어놓을 라벤더 포푸리와 샤워할 때 쓸 라벤더 비누를 챙깁니다.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았을테지만 그건 다움 기회로 미뤄두도록 하죠(그런 체험이 가능할 지 어떨지 모르니 말예요). 한 두 시간 정도 정처없이 걸었을까요? 라벤더, 햇살 다음으로 저를 사로잡는 것은 개성있는 창문과 문입니다. 큰 틀은 비슷하면서도 저마다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집 주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듯 합니다. 모두 사진에 담고 싶어도 너무 많아서 다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하나 하나 눈 속에 담아둡니다. 서울에 있는 집들도 이런 센스가 있다면 숨통이 트일 텐데. 걸어온 길과 다른 길로 삥 돌아 다시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여기서 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이라면 잠깐만 쉬더라도 완전한 휴식이 될 수밖에 없겠네요. 정수복씨의 책에서는 워낙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아 미처 들여다볼 수 없었던 아를의 풍경을 기대하며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 김수정 지음'이라고 쓰인 책의 첫 장을 펼칩니다. 책과 풍경 그리고 프로방스라는 제목의 머릿말에는 제가 처음으로 프로방스라는 곳을 접하게 된 정수복씨의 책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이야기가 적혀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함께 해보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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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허브농원이 있다. 잘 꾸며놓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맛과 상큼한 향이 좋아 종종 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허브차를 마시면 돌아갈 때 작은 화분을 하나 준다. 작년 봄엔가 여럿이 가서 차를 마시고 가져온 라벤다가 이제 막 꽃을 피우려 한다. 작년에 꽃을 피우지 않아 속상했는데 알고 보니 꽃은 봄에 피우는가 보다. 그런 걸 가을에 꽃이 피지 않는다고 속상해 했으니 괜한 오해를 한 셈이다. 이 책을 읽는데 라방드 포푸리를 베개에 넣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거나 보라색꽃이 아름답고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무척 좋다기에 도대체 무슨 꽃일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라벤더였다. 안 그래도 카뮈의 묘소 사진을 보며 혹시나 했다. 프로방스에서는 라벤더를 밖에서 키워도 되는가 보다. 우리는 겨울에는 실내에 들여놓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지중해 기후의 장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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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가진 무언가인 것 같다. 특히 예술가라면 아마 그것이 로망의 수준을 넘어 '갈망'의 수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프랑스에 그다지 호감을 가지지 않은 나로서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 정도의 수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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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엊그제, 나는 친구와 함께 두 번째로 부암동엘 갔었다. 비록 처음 갔을 때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겨울이 보여주는 그곳과, 봄이 보여주는 그곳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좀 더 화사해졌다고나 할까? 같이 간 친구도, 서울에 이런 숨은 곳이 있는 줄 랐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바로 이것이 부암동을 가면 첫번째 느끼는 것이고, 두번째로 느끼는 건 프랑스의 어느 마을이 꼭 이렇지는 않을까? 하는 착각이다. 마침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이쯤되면 상상을 더 확대 해, 프로방스와 부암동을 함께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부암동은 한국의 프로방스. 프로방스는 한국의 부암동쯤은 되지 않을까? 시쳇말로, 상상하는데 세금 내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프랑스, 그것도 프로방스를 아직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나는 어찌보면 부암동에서 그곳을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은, 실제로 프로방스에 가 보면 더 많이 감탄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처럼 들릴수도 있겠는데, 사실 사진이나 책만 보고 그곳엘 갔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이 책이 굳이 단점이라면 단점은, 사진은 저리 예쁘고 낭만적인데 비해 저자의 글이 (때론 지나치리만큼) 차분하고 사색적여서 하는 말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을 했지만, 우리나라의 숨막히게 돌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아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 저자의 선택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며 공감한다. 아마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저자를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을까? 프로방스의 풍광과 정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상당 부분 고흐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어쩌면 고흐를 잊지 못해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짐작도 해 보게 된다. 그만큼 프로방스 아를은 고흐가 살았던 동네고, 뒤에 가면 아예 <반 고흐의 '장소'들을 찾아서>란 쳅터를 따로 할애할 정도로, 저자는 반 고흐 애호가고, 또는 '고흐니스트'라 불러 줄만했다. 책을 읽으면서, 고흐는 과연 그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지식인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와 프로방스, 반 고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나도 전염이라도 된듯 예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이 우울하고 을씨년스러운 반 고흐의 그림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고흐의 그림은 뭔가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우울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 싫어 외면했던 그림을 나이 들어서야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것은 또 어쩌면 고흐의 그림 자체보단 그의 그림을 칭송해마지않는 사람들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글과 말을 통해 고흐를 이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하긴, 꼭 고흐가 아니어도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뭐 하나에는 정통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난 이 얘기를 들으면 이게 솔깃하고, 저 얘기를 들으면 저것이 솔깃한, 아직도 사춘기적 감수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가 않다. 저자는 프로방스가 시간이 정지된 곳 같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보통의 한국 사람이 정서라면 꽤 따분하고 심심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글쎄... 사람 사는 것은 어디든 같지 않을까? 30대 때까지는 도시가 좋다가도 40이 넘어가면 그런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한 곳이 좋아지는 때이기도 하다. 내가 부암동에 매료된 것도 알고 보면 저자가 프로방스를 두고 얘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 때문인 것 같다. 재밌는 건, 저자가 자신의 일상을 써 놓은 대목이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읽으면서 느꼈던 건, 선진국의 조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진국에 진입하려고 하는 나라는 그것에 진입하지 못해 휴식도 반납하고 안달복달하면서 산다.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산책로가 발달이 되어있다. 그 길을 산책하면서 많은 것들을 사색하고 힘을 키웠다. 우리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책이 참 지적이란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 반 고흐는 물론이고, 까뮈와 페트라르카를 알게 되고, 크리스티앙 가이란 작가도 알게 된 건 의외의 수확이었다. 나는 이런 지적인 에세이가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