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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정치이념이자 삶의 척도이며 지침이었던 국가단체에서 공자의 묘향 즉 문묘에 배향된다는 자체가 성현의 반열에 올랐음을 공인하는 일련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화폐에 모델로 채택되었다는 자체만으로 그 위인에 대한 평가와 검증은 두말할 필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그 이름만으로도 역사적인 검증을 거친 세칭 위인의 한자리를 찾지 하는데 논박이 없을 정도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메타포 이면의 세계에 대해서 세인들의 관심과 지식의 폭은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워낙 이 두사람의 후광이 크고 추구했던 이념적인 실체에 대한 전문성 요구로 인해 더욱더 일반인들에겐 허상 아닌 허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는 이러한 면에서 퇴계와 율곡의 사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보기드문 연구분야의 책으로 보인다. 역사서나 역사교육등을 통해서 한번쯤은 들어보았고 의무적으로 암기해 보았던 <무진육조소>와 <만언봉사>의 전문을 통해서 두 사람의 정치적인 생각의 틀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로 다가온다. 퇴계와 율곡이 활약했던 시기는 조선역사상 고종, 인조와 더불어 가장 최악의 군주였던 선조시대였고 선조가 즉위하여 치세를 열어나가던 초반기에 각자가 생각하는 정치에 대한 담론을 상소라는 형태로 피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시기까지는 당파성에 대한 확연한 구분이 없어 상대진영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나 폄하성에 가까운 정책의 비판등이 보이질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추진하고자하는 정책을 가감없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퇴계의 말년에 두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각자 추구하는 이념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었다는 점에서 이 두자료는 퇴계와 율곡이 지향하는 정치사상의 백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크게 퇴계와 율곡은 군주 자신의 성찰 즉 수신에 대해서 공통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퇴계가 성학과 더불어 성리학 전반에 입각한 큰틀의 정신적인 바탕에서 정치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면 율곡은 군정 및 노비제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례을 들어 군주의 올바른 정치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이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결국 퇴계나 율곡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의 맥락은 대동소이하다. 퇴계가 큰 맥락만을 집어주고 세세한 내용은 이러한 큰 맥락에서 스스로 터득하게끔 하는 교육방식이었다면 율곡은 그야말로 꼼꼼히 하나 하나 알아듣게 설명하는 타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양측의 장단점은 존재하지만 성리학에 기반을 둔 정치이념의 수립에는 공통적인 지향점은 동일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퇴계나 율곡이냐는 식의 이분법적인 판단은 불가할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이를 받아들여 치세에 어떻게 유용하는냐의 견지에서 본다면 향후 선조의 정치적인 행태로 판단하건데 두 사람의 충정어린 목소리는 되돌아 오지 않는 메아리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반적으로 무진육진소나 만언봉사의 전문을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퇴계와 율곡의 지향하는 정치적인 사상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언어선택을 사용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의견을 이끌어 나가는가에 대한 논술적인 입장에서 상소를 읽어봐도 명문임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 두사람의 상소 내용은 비록 그 의도를 논외로 한다고 해도 지금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정치인들과는 사뭇 질적 양적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만큼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에 그 만큼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이런 정치적 신념과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부끄러울것이 없는 삶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 퇴계와 율곡은 진정한 정치가로 그리고 학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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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 꽤 도발적인 제목이죠? 감히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놓고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지 선택하라고 자못 독자들에게 강요(?)하는 듯 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학자로 인식되는 두 사람에게서 정치와 정치가를 선뜻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신의 학문을 벼려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포부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학문과 정치는 둘이 아니었지요. 따라서 저자는 두 사람이 같이 몸담고 있었던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가졌던 ‘사대부’라는 자의식이 당시 정치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는군요. 그래서 부제가 “실천하는 지성 퇴계와 율곡에게 현실정치의 길을 묻다”인 듯 싶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만남과 교유를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와 남긴 글을 중심으로 재구성했고,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애초의 생각에 따라 나름대로 비교의 시점을 좁혀 잡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나름의 방책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조宣祖 초기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올린 두 편의 상소문, 퇴계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율곡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통해 그들이 시대적 과제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두 사람의 해결책이 어떤 면에서 같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비교했답니다. 선조는 조선 14대 임금으로 선대 명종明宗의 적통嫡統이 아닌 방계傍系에서 들어와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는 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소생이니 명종과는 배다른 형제이지요. 명종에게는 재위 6년(1551)에 얻은 친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이부李暊가 있었으나 재위 18년(1563) 어린 나이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명종 20년(1565), 임금이 크게 병을 앓자 임금의 자리를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지요. 중전은 여러 대신들의 재촉에 못 이겨 여러 왕자 가운데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목했고, 2년 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조에게 사림士林세력은 국왕이 사대부 중심의 국가운영, 임금은 재상을 선택할 뿐 실제 통치는 신하들이 맡는다는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몸에 익힐 것을 주문하고 강조합니다. 사실 조선 전기의 정치史를 보면 삼봉三峰 정도전鄭道伝과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투쟁, 단종端宗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정변, 연산군燕山君 4년(1498)과 10년(1504)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와 명종 즉위년(1545) 을사사화乙巳士禍 같이 모두 임금과 신하 사이의 권력 관계를 놓고 벌인 정치 투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었음에도 꾸준히 세를 늘려간 사림세력은 선조가 즉위할 무렵 비로소 훈구勳舊세력과 외척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나갈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구축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조 원년(1568), 68세의 퇴계 이황은 6개 조항을 열거한 「무진육조소」를, 7년(1574) 39세의 율곡 이이는 「만언봉사」를 올리게 됩니다. 퇴계는 「무진육조소」를 통해 갓 즉위한 열일곱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성학聖學 이념, 곧 올바른 임금이 유교정치의 이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여섯 개의 조항으로 국정 운영의 전반적인 원칙과 방향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밝힙니다. 첫째, 왕통의 승계를 중요하게 여겨 인仁과 효孝를 온전하게 할 것. 둘째, 참소와 이간을 막아 양궁兩宮(선조와 명종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이 친하게 지낼 것. 셋째, 성학聖學에 힘써 다스림의 근본을 세울 것. 넷째, 도술道術을 밝혀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심복이 되는 대신을 두어 눈과 귀를 통하게 할 것. 여섯째, 수양과 반성을 정성스럽게 하여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긴급히 처리해야 할 국정의 문제점, 첫째, 마음 씀씀이에서 쌓인 은밀한 허물을 깨끗이 씻을 것. 둘째, 척족戚族이나 내시와 같은 무리의 접근을 막을 것. 셋째, 건의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며 사사로운 고집으로 거부하지 말 것. 넷째, 실속 없이 선을 억지로 구하는 일을 조심할 것. 다섯째, 벼슬과 상을 넘치게 주지 말 것. 여섯째, 사면을 자주하지 말 것. 일곱째, 절의를 높이고 염치를 장려하여 명분을 지키라는 가르침을 굳건히 할 것. 여덟째, 검소와 절약을 숭상하고 사치를 금할 것. 아홉째, 조상이 정해놓은 제도를 모두 다 고치려 하지 말 것. 열째,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군자를 우대할 것. 열하나째, 보수적이며 관례에 안주하는 신하들에게 의지하지 말 것. 열두째, 신진관료로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신임하지 말 것. 열셋째, 지방 서리와 노복의 도적질을 조심할 것. 열넷째, 육진과 수군의 장수들이 병사와 주민들을 침탈하지 못하게 할 것. 열다섯째,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에 힘쓰고 도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것. 열여섯째, 변경의 방비가 느슨하니 외적의 침입을 조심할 것을 짚습니다. 퇴계는 선조에게 임금으로서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정통을 이은 국왕의 명분을 효를 통해 굳건히 하고, 성리학 이념에 따른 정치를 하기 위해 먼저 국왕 자신이 성학에 힘써야 하며, 성학의 성취를 바탕으로 도를 안팎에 널리 밝혀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오도록 주문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어진 재상과 강직한 언관들이 국왕의 주변에 모여 성대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살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율곡은 퇴계와 달리 당시가 국정의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해야할 중요한 때라는 생각을 갖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책을 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지요. 율곡의 「만언봉사」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당시의 현실에 대한 진단을 앞부분에 내세웠고, 그 진단에 따른 대책이 뒷부분에 제시되어 있답니다. 그는 먼저 당대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연산군 이전과 이후로, 연산군 이전까지는 훌륭한 임금들이 연달아 나와 나라를 잘 다스려 왔지만 연산군의 폭정과 그 뒤에 이어진 사화는 나라를 계속 쪼그라들게 했다고, 개관槪觀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법령과 제도를 시대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선조가 덕성을 갖춘 임금이 되기 위해 요청받는 여러 가지 일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실질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일곱 가지 실질에 힘쓰지 않아서 근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현실을 분석합니다. 그 일곱가지 실질이란, 첫째 위아래가 서로 믿는 실상이 없고, 둘째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으며, 셋째 경연經筵이 아무것도 이루는 실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어진 이를 거두어 쓰는 실상이 없고, 다섯째 재이災異를 만나도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이 없으며, 여섯째 여러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고, 일곱째 사람들의 마음이 선善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가지 방향, 스스로를 수양하여 덕을 높이는 이른바 ‘수신修身’과 제도를 개선하여 백성의 생활을 편안케 하는 이른바 ‘안민安民’과 관련한 대책을 제시합니다. 성상聖上의 뜻을 분발하여 삼대三代(고대 중국의 세 왕조 하夏, 은殷, 주周)의 융성함을 되돌리기를 바라며, 성학에 힘써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은 보람이 오롯이 이룩되도록 하며, 한쪽으로 치우친 사사로움을 버려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히고, 어진 선비들을 가까이하여 온 정성으로 깨우쳐주는 보탬을 마련함으로써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또한 정성된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충정을 얻고, 공안貢案을 고쳐 세금을 모질게 거두어들이는 해악을 없애며, 절약과 검소함을 기려 사치하는 풍조를 개혁하고, 선상選上하는 제도를 바꾸어 공노비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며,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해야 한다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을 제안합니다. 두 상소에서 보여지듯이 퇴계와 율곡은 모두 국가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군이 나와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리학 이념에 기반하여 국왕이 갖추어야 할 학문과 덕성의 내용을 제시하고 그것을 선조가 구현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당시 국정의 16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어떤 방법을 통해 해결할지는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고 여섯째 조항에 간단히 언급하는 것에서 그치고 맙니다. 국왕이 공경[敬]의 태도로 스스로를 수양하고 정성[誠]을 다해 정사를 보는 성군으로 성장한다면 그러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지요. 반면에 율곡은 당시의 문제점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추진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상세히 제시합니다. 그는 성군이 되기 위한 수양과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건의한 것입니다. 퇴계와 달리 국정 운영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한 율곡의 이력과 ‘개혁’을 추진해야할 중요한 때라는 율곡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이는 평소에는 모호하게 숨겨져 있던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임금이 바뀌는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그들의 가치관, 시대인식과 소명의식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쯤에서 누가 진정한 정치가일까요? 자신의 소명을 은거隱居와 학문에서 찾은 퇴계나 관료로서 나라에 헌신하는 데서 찾은 율곡 모두 어느 한 길만이 옳은 길이며 그 길만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요. 두 길이 모두 가치 있는 길이라고 여겼으나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좀 더 가치 있고 올바른 길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심했을 뿐입니다. 다만 「무진육조소」와 「만언봉사」해설에 그치지 않고 원문을 같이 실어주었으면 더욱 돋보였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와 율곡이라는 두 “실천하는 지성”을 조선시대 선조 당시라는 “현실정치” 속에서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지 제 나름의 답을 내렸음에도, 은연중 선택을 강요(!)하는 도발적인 책의 제목이 주는 압박감은 솔직히 회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저 “정치란 결국 벼슬아치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요, 도덕과 정치의 일치 즉 도덕적 세력의 정치 참여와 권력 장악이 해결책이다. 천하의 근심을 짊어져야 할 선비가 홀로 독야청청하는 것은 일개인의 자족적 행위에 불과하니, 더러운 정쟁을 일삼는 소인당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천하의 군자들로 당을 만들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싸워야 한다.”했던 정도전이 떠오르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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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이 많은 난 역사책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중에서도 역사의 아침을 좋아한다. 그 출판사에서 새 책이 출간된다는 소문을 듣고 과연 어떤 책일지 궁금해 미리 생각해 보았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라는 두 거장의 비교 분석이라면 정말 대단할 것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비교할 만한 그 많은 자료들을 책한권에 옮기기는 힘들었을것이고 아마 어떤 부분을 선택했을 것인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책을 만나게 되었다. 퇴계와 율곡은 비슷한 조선 초기의 학자며 정치가 이지만 나이가 서른 정도의 차이가 있으므로 정치적 환경은 판이 하게 달랐을 것이다. 그 중에도 좋고 바른 말만 하는 선비들이 있고 아부를 생명줄로 아는 중신들이 있으니 그 또한 현 시절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본다. 지금으로 치자면 정치안, 개혁안, 법안 그런 사안들이겠지만 예전에는 상소로서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임금께 전달 되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두분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만언봉사萬言封事의 내용들을 통해서 이분들의 정치적 성향과 그 분들의 소신을 엿보고 분석해보는 책이다. 퇴계 이황은 나이 어린 임금에게 우선 공부를 하라고 진언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래야 어진 신하를 볼수있는 눈이 생기며 어진 신하들이 곁에 있어야 어진 임금 바른 정치로 성군이 될 것이며 나라도 태평 성대를 이룰것이라는 내용등이고 율곡 이이는 제도 정비와 편애하지 않고 덕으로 신하와 백성을 보살피라는 진언이다. 두분다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똑 같다. 하지만, 다른 점도 많아 보인다. 한분은 현실 정치와 인재 육성을 같이 하고자 하는 행동파이고 한분은 뒤에서 조용히 조언하며 인재 양성을 하고자 하는 분이다. 왜 이 부분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님이 생각나는 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으나, 정치가가 정치를 잘 못하고자 하는 이는 없겠지만 그 시대와 현실에 맞는 정치가 이상과 포부 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두분의 스타일이 다를 뿐 같은 충신이라 본다. 두 분이 나눈 정치적 교류 또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의 무게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걱정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는 분들이 이시대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예전 임금은 태어날때 부터 평생을 왕도를 공부를 한 사람이지만 요즘의 정치인들은 가끔 보면 한쪽의 지식만으로 균형을 모르는 분이 많다고 본다. 옛 선인들 처럼 대학과 중용 등 고서에서도 길을 묻고, 무진육조소나 만언봉사 같은 우리 선조들의 글에서도 길을 물어 무조건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만 지향할 것이 아니라 골고루 발전하고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책은 나에게는 조금 어려운 책이었지만 보면서 자꾸 현 정치와 비교하는 것은 현 정치인들을 내가 너무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현재도 이분들 처럼 나라걱정에 밤잠 설치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나는 믿고 싶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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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VS 율곡 김영두 지음 역사의아침 刊
퇴계가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상대는 율곡이 아닌 고봉 기대승이다. 또한 율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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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절대 빠져서는 안 될 큰 인물이 여럿 있지만 조선의 유학을 논하는 데 있어 절대 빠져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있다. 바로 퇴계와 율곡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조선시대 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란히 손꼽힌다. 퇴계와 율곡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현실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관료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학문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퇴계는 학문적 깊이에서 우러나는 권위 위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정치이념의 내용과 방향을 이끌었지만 실제적인 관직을 맡는 것을 사양하고 구체적인 실무와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반면 율곡은 성리학 이론뿐만 아니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입안과 집행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리고 퇴계는 중년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 더 집중한 반면 율곡은 죽을 때까지 국정 운영을 위해 노심초사했다. 두 사람이 대조적인 모습을 빚어내게 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퇴계가 주로 관직생활을 한 명종대는 아직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문정왕후가 명종대 후반까지 살아서 왕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사림의 정치이념이 정국 운영에 반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뜻있는 선비라면 관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도를 지키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퇴계는 바로 그 길을 걸었다. 반면 율곡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 그리고 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선조 때는 이전의 정치를 쇄신하고 새로운 사림정치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시대정신이 가득하던 시기였다. 명종 말부터 시작하여 선조가 즉위한 초기까지 이전에 사화로 인해 인루어진 여러 가지 조치가 차례로 무효화되었다. 이 책은 이 두 사람을 비교하기 위해 가장 잘 대비된다고 생각한 정치사상 분야에서 그들의 이념적 지향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글 하나씩을 골라서 두 사람의 해결책이 어떤 면에서 같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비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퇴계의 ’무진육조소’와 율곡의 ’만언봉사’를 통해 두 사람의 사상을 비교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장_역사 속의 퇴계와 율곡에서는 퇴계와 율곡의 첫 만남과 두 사람의 시대인식과 소명의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2장_무진육조소에서는 퇴계가 선조에게 남긴 ’무진육조소’의 내용을 통해 국정 운영의 전반적인 원칙과 방향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3장_만언봉사에서는 율곡이 선조에게 남긴 ’만언봉사’를 통해 당시의 현실에 대한 율곡의 진단과 대책을 밝히고 있다. 먼저 무진육조소의 여섯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_왕통의 승계를 중요하게 여겨 仁과 孝를 온전하게 할 것 제2조_참소와 이간을 막아 양궁(兩宮)이 친하게 지낼 것 제3조_성학(聖學)에 힘써 다스림의 근본을 세울 것 제4조_도술(道術)을 밝혀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제5조_심복이 되는 대신을 두어 눈과 귀를 통하게 할 것 제6조_수양과 반성을 정성스럽게 하여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다음으로 만언봉사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머리말 2. 본문 ① 진단 - 때를 맞춤(시대의 진단 : 변통의 필요성, 당대의 현실에 대한 역사적 개관 - 실질에 힘씀(위아래가 서로 믿는 실상이 없음,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음, 경연이 아무것도 이루는 실상이 없음, 어진 이를 거두어 쓰는 실상이 없음, 재이를 만나도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이 없음, 여러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음, 사람들의 마음이 善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음) ② 대책 - 자신을 닦음(성상의 뜻을 분발하여 삼대의 융성함을 되돌리기를 바람, 성학에 힘써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은 보람이 오롯이 이룩되도록 함, 한쪽으로 치우친 사사로움을 버려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힘, 어진 선비들을 가까이 하여 온 정성으로 깨우쳐 주는 보탬을 마련함 - 백성을 편안케 함(정성된 마음을 열어 여러 신하들의 충정을 얻음, 공안(貢案) 을 고쳐 세금을 모질게 거두어 들이는 해악을 없앰, 절약과 검소함을 기려 사치하는 풍조를 개혁함, 선상(選上)하는 제도를 바꾸어 공노비들의 괴로움을 덜어 줌, 군정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함) 3. 맺음말 이 두 위인의 상소를 통해 조선시대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고, 목숨을 건 진언을 통해 진정한 위인은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새삼 실감 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과연 이런 분들처럼 목숨을 걸고 진언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도 이런 위인들이 갖고 있던 용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나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p. 110] 여공필이 인종에게 간언한 말에, "간쟁하는 관리는 눈과 귀고 정치를 맡은 신하는 팔다리입니다. 팔다리와 눈귀는 반드시 서로 어울려 쓰여야 온몸이 편안하고 머리가 높아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생각건대 사사로운 샛길로 가지 않고 서로 어울려 쓰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밝은 임금께서 마음에 담아 두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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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VS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퇴계와율곡. 반면 율곡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과 선조떄는 이절의 정치를 쇄신하고 새로운 사림정치를 전개해 나갈수 있는 희망이 율곡과 퇴계가 만날때는 율곡 23세 퇴계가 환갑을 앞둔 노인였다고 한다. 35세의 나이차가 난다고 하니 요즘도 말하듯 시대차가 있었을듯하니 알아둬야 할듯 하다. 학자적인면에서는 퇴계는 주리파로서 이를 중심에 둔반면 율곡은 주기파로서 기를 앞세우는 성리학적 해석의 방식이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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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VS 율곡 김영두 지음/ 역사의 아침/ 2011.03. 우리가 일찍 배웠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만난다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이 책을 읽었다. 두 분은 조선 중기 명조와 선조 때 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사림정치(士林政治)를 대표하는 ‘士大夫’였다. 퇴계는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던 분이다. 퇴계는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반면, 율곡은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리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서경덕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출처: 위키백과 참조) 퇴계는 학문을 함에 있어 치밀하고 성실한 반면 주변 사람들과 교유할 때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가라기보다는 교육자 기질을 지닌 것이다. 율곡은 빼어난 능력에서 비롯된 자유로움과 당당함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기질의 차이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조선 중기 양반 사대부라면 누구나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자신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임무가 무엇인지, 시대의 인식과 소명의식에 달려있다. 퇴계는 ‘은거강학(隱居講學)’의 삶을 살았고, 율곡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삶을 살았다. 퇴계는 젊은 선조 임금에게 두 가지 글을 올렸다. 『무진육조소』와『성학십도 』가 그것이다. 『무진육조소』는 무진년에 올린 여섯 개 항목의 상소다. 제1조는 왕통의 승계를 중요하게 여겨 仁과 孝를 온전하게 할 것, 제2조는 참소와 이간을 막아 兩宮이 친하게 지낼 것, 제3조는 聖學에 힘써 다스림의 근본으로 세울 것, 제4조는 道術을 밝혀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을 것, 제5조는 심복이 되는 대신을 두어 눈과 귀를 통하게 할 것, 제6조는 수양과 반성을 정성스럽게 하여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등이다. 퇴계는 국왕이 성군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것과 국정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다. 국왕이 성군으로 성장한다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반면에 율곡은 당시의 문제점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떠한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건의한 것이다. 율곡은 선조 임금의 求言을 계기로 상소를 올린다. 그것이 『만언봉사(萬言封事)』다. 선조 6년 12월에 서울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괴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율곡은 국왕의 개인적 수양과 국정 운영의 요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한 편의 상소로 올렸다. 율곡의 『만언봉사』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뉜다. 당시의 현실에 대한 진단을 앞부분에 내세웠고, 그 진단에 따른 대책이 뒷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그는 변통의 시대라고 주장했으며, 일곱 가지 실질에 힘쓰지 않아서 근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현실을 분석했다. 그리고 두 가지 방향으로 대책을 제시했다. 먼저 안으로 임금이 스스로 수양해야 한다고 하면서 네 가지 조항의 대책을 내놓았고, 다음으로 밖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섯 가지 조항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만인봉사는 머리말과 본문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단으로 때를 맞춤과 실질에 힘쓰라고 강조했다. 대책으로는 자신을 닦음과 백성을 편안케 함을 중요하게 말하고 있다. 퇴계와 율곡의 생각과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백성을 아끼고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소통하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것이 학자이며 정치가가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근본은 같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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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퇴계와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통해서 정치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선조에 대해 온갖 존칭은 다 쓰고 있지만 돌직구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선조는 조선 왕조 임금 중 처음으로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의 왕이다. ( 선조의 아버지가 중종의 서자였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명종비와 대신들에 의해 '택군'을 당한 임금이며 임진왜란만 아니였으면 그저 그런 다른 임금들처럼 '폭탄돌리기'를 하다 자신의 임기가 끝났겠지만 임진왜란이란 큰 위기를 만나 자신의 능력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임진왜란이 아니였다면 이름없는 변방의 충실한 무장으로 삶이 끝났을 이순신장군과는 그 운명이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상소문은 문장 하나 하나가 다 옳은 말이고 지금 시대에도 통할 문장이 많이 있다. 그러나 상소문을 읽으면서 노련한 유학자들의 임금 길들이기가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조선시대 상소문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다른 많은 상소문들이 이런 식의 말투인지 아니면 이들만 더 강경해 보이는지 나로서 알 수는 없다.
상소문에서 퇴계와 율곡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이념가로서의 퇴계와 행정가 출신으로서의 율곡이 느껴진다. 율곡의 역사 인식에서 창업, 수성, 경장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 같다. 다만 조선시대보다 그 기간이 짧아졌다는 것 뿐.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시기에 와 있는 걸까?
또한 하필이면 자신의 임기 기간 동안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맞짱을 떠야했고 임진왜란까지 겹쳐 무능한 임금이란 오명을 써야 했던 선조의 입장에 쓴 글(선조의 변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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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왕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세종대왕이 꼽힐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