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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을 시작으로 하여, 제1차,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그리고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들을 거쳐 1990년 걸프전, 2000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르기까지, 훗날 사람들은 20세기를 이야기할 때, 전쟁을 빼놓고서는 할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기 초부터 벌어진 전쟁은 한세기를 넘어서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우리가 지금 17세기를 위대한 세기, 18세기를 빛의 세기라고 부르는 것처럼 후대에 이르러 혹자는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라고 부르지나 않을지.. 엄브라 2004년 호를 번역한 이 책은 전쟁에 대한 정신분석적 모색들을 모은 책이다. 분단된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써는 전쟁은 어떤 예외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이 되고 있다. 왜 인간은 전쟁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전쟁을 생각할 때, 평화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세뇌되어 왔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해 온 전쟁, 평화의 상대어로써의 전쟁, 평화를 얻기 위해 저질러지고 있다고 믿는 그 전쟁의 허구성을 나타내기 위한 말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먼저, 엄브라의 편집자들은 전쟁의 정치학에 대해서 말한다. 전쟁문제에 관한한 정치는 무비판적 평화주의 또는 정치의 총체적 군사주의로 나타날 수 있으며, 단순히 전쟁을 말할 때 평화만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전쟁이 평화의 적들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행위로 너무나 쉽게 변질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대표적인 것이 민간인 학살이며, 그들은 어떠한 가책도 받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전쟁은 그 목표와 조건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전쟁은 전쟁의 의미를 위한 전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한 전쟁은 정치적 수단으로써 존재하며, 이렇게 행하여진 전쟁이, 또는 정치가 서로에게 각자의 한계를 일컫는 이름이 될 때, 정신분석은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신분석이 쥬이상스(라깡이 말하는 고통 속의 쾌락)를 정치의 영역에 도입하여 다른 담론분석이 맞닥뜨리는 막다른 골목들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책에는 이러한 전쟁의 정신분석에 대한 9편의 논문이 실려있다. ‘스티븐 밀러’는 왜 전쟁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왜 분노인가로 바꾸어 칸트와 프로이트의 분석을 소개하고 있으며, ‘지젝’은 인종적 정체성과 윤리적 폭력에 대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들어 분석하고, ‘질 애니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시오니즘과 전쟁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즉 종교와 전쟁의 관계를 데리다의 저작을 빌어 분석하기도 한다. 또 9.11테러 후, 이라크 전쟁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로써 정당화 시키는 심리를 분석한‘시기 야트캔트’는 이를 이미 상징화한 것을 페티시적 대상으로 대체하는 도착증세로 보기도 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페타라마다 노빅’은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와 정치의 군사화는 아버지의 지배는 끝이 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권위적 형상 이면에 있는 진정한 아버지를 투사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가 유지될 것처럼 행동하는 페티시적인 정치를 세우고 있다고 라깡의 안티고네와 외디푸스를 빌어 설명하기도 한다. 책은 읽기가 매우 어렵다. 진도도 빨리 나가지를 못한다. 아니 책을 어느 정도나 이해했는지, 다 읽고 난 지금도 헷갈린다. 그저 제목만 간신히 이해하고 있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 쪽에 내가 문외한이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각각의 논문들이 전쟁에 대한 정신분석을 하면서 결론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읽다가 포기한 라깡에 대한 전의(?)를 다시 불태우게 만든다. 또한 곁에 쌓아두고 있는 [데리다평전]도 순서를 앞당기도록 재촉한다. 그 두권의 책을 읽어보고,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떻게 이해가 될지 궁금해진다. 어쨌든, 정신분석학상 결론은 어찌되었든, 무비판적 평화주의로 나타나는 전쟁이나, 총체적 군사주의로 나타나는 정치, 이 두가지 모두를 우리는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는 편집자들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전쟁은 벌어지고 있으며, 그 전쟁들이 어떠한 미사여구로 목적을 호도하고 있더라도“전쟁은 전쟁에 대한 준비과정 때문에 일어난다”는‘스티븐 밀러’의 말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 얼마 전까지, 아니 지금도 틈만 있으면 나타나려고 하는 분단된 우리 사회의 현상 임에야 더 말할 여지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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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평화를 염원하지만 손으로는 끊임없이 나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은 전쟁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1) 그렇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왜 그럴까?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접촉을 다른 수단으로 실행하는 것이다.2)라고 하면서 전쟁이 정치의 수단임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정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을 근절시킬 수 없음을 말하는 동시에 전쟁과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당면과제는 성급하게 정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전쟁비판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전쟁문제에 관한 한 정치에 관한 부인은 두 가지 극단적 형태 – 무비판적 평화주의, 아니면 정치의 총체적 군사주의화 – 를 띤다. (따라서) 전쟁비판학은 아무 생각 없이 평화주의를 내세우거나 단순히 전쟁을 부정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들은 평화의 적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행위로 너무나도 손쉽게 변절3)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 <엄브라 Umbr(a)>라는 저널의 편집자인 알렉세이 디 오리오와 롤랜 벡소는 재미있는 말, 즉 “정신분석”을 꺼내 든다. 전쟁과 정신분석은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같은 전쟁후유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쟁과 정신분석의 접합점을 떠올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쟁과 정치가 서로에게 각자의 한계가 되는 순간, 정신분석은 바로 이 차원에서 전쟁에 개입한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우리 존재의 핵심에 놓여있는 근본적 적대주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본질적 부정성은 초월의 차원을 가리키며, 비록 “실패한 초월”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이 초월성은 완전한 내재성의 정치학을 배제한다.4)라고 함으로써 전쟁에 정신분석이 개입될 여지, 아니 개입해야 할 이유를 당당하게 제시하고 있다. 전쟁에 정신분석이 개입하는 것 자체가 모험일 수 있다. 하지만 분석의 전체 목표는 욕망하는 방식을 바꾸는데 있다5)는 점을 감안해보면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정신분석을 통해 주체의 욕망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국가건 소수의 권력자이건 전쟁을 야기시키는 호전적인 주체가 자신의 욕망에 헌신했을 때 초래되는 전쟁이라는 재난의 가능성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을 것이 아닐까? 잘 알지도 못하는 정신분석 얘기는 일단 옆으로 돌려놓고,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자.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전쟁을 “집단적 정신병”이라고 부른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그의 내부에 증오와 파괴를 향한 욕정을 품고 있다. 정상적 시기에 이 열정은 잠재적 상태로 존재하고 범상치 않는 상황에서만 드러난다. 하지만 이 욕정을 불러내어 집단적 정신병의 힘으로 키워내는 일은 비교적 쉽다.”6)라고 하여 전쟁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하지만 스티븐 밀러는 칸트의 영구적 평화에 관한 글들의 주제가 전쟁은 전쟁에 대한 준비과정 때문에 일어난다.7)고 말하면서 전쟁 발발의 구조주의적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칸트의 ‘평화에 대한 결론이 만일 미래의 전쟁을 위한 소재를 비밀스럽게 저장해 둔다면 그것이 어떤 결론이라도 유효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는 단순한 휴전이며, 적대감의 중지이지 평화가 아니다. 평화란 모든 적대감의 종결(이라는 진술처럼) 평화에 대한 모든 약속이 미래의 전쟁을 위해 “비밀스럽게 저장된 재료”를 동반한다면, 계약 당사자들은 각기 상대방의 말을 믿기 보다는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항상 살펴야 하는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다. (결국) 타자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아내려는 과대한 시도 속에서 스스로 소진할 수 밖에 없어진다.8)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고, 민족이나 종교 등을 통해 “정의”라고 이름 지어진 색안경을 벗어버린다면, 소수 권력자의 욕심에 의해 전쟁을 비롯한 폭력이 사용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점만으로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미흡하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9편의 논문이 특정결론에 내놓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전쟁 반대가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전쟁에 대한 반대만을 외치다, 무조건적인 평화주의나 정치의 군사주의화로 흘러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만으로 어렵지만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옥의 티 p. 229 다시 말해 이 형재애는 외디푸스적 아버지와 실제 아버지들 사이의 차이를 투사한다. ⇒ 다시 말해 이 형제애는 외디푸스적 아버지와 실제 아버지들 사이의 차이를 투사한다. -------------------------------------
1) 최영주,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3, (휴머니스트, 2006), p. 354 2)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1, 김만수 옮김, (갈무리, 2006 ), p. 77 3) 알렉세이 디 오리오 / 롤랜 벡소, “편집자의 말: 전쟁의 정치학”, <전쟁은 없다>, 강수영 옮김, (인간사랑, 2011), p. 11 4) 알렉세이 디 오리오 / 롤랜 벡소, 앞의 글, p. 12 5) 샘 길레스피, “당신의 결여를 작동시키라!”, <전쟁은 없다>, 강수영 옮김, (인간사랑, 2011), p. 30 6) 시기 야트캔트, “베일의 형제들: 군사주의적 가족로맨스”, <전쟁은 없다>, 강수영 옮김, (인간사랑, 2011), p. 217 7) 스티븐 밀러, “과장된 전쟁: 칸트와 프로이트에 나타난 분노의 신화”, <전쟁은 없다>, 강수영 옮김, (인간사랑, 2011), p. 11 8) 스티븐 밀러, 앞의 글, pp. 103~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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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에 '의자 뺏기'게임은 끊임없이 승자를 만들어 내고 승자 독식 사회를 창출한다. 그 게임에서 탈락한 자는 루저가 되고 잉여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전쟁 상태, 야만 상태를 이제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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