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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감싸는 주변은 항상 외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 스마트폰 등, 여러가지 APP 덕분에 우리는 휴대폰을 통해 항상 연결된 삶을 살면서 지구촌 어디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셜네트워킹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공통관심사를 공유도 하고요. 항상 연결된 삶은 많은 정보량을 보기때문에 깊이가 떨어진 피상적인 내용, 자극적인 내용등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놓쳐서는 안되는 일 등에는 몰입하면서 하지 못하는 사태도 벌어집니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 살면서 누구나 접하는 일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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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영원히 접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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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서 깊이로> 서평
디지털 ‘온고지신(溫故知新)’
시원한 소나무 숲 사진이 우리의 바쁜 시선을 사로잡는 책. <속도에서 깊이로>는 표지부터 편안하다. 인문학과 철학을 오가는 다소 심오한 내용을 쉽고 생동감 있게 서술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 윌리엄 파워스의 매력은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책은 디지털 시대의 과도한 분주함으로 인해 ‘깊이’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상황을 진단하고 나름대로 처방해보려는 저자의 노력으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사람들의 분주함을 ‘속도’라 칭하면서, 우리가 그 대가로 치르고 있는 것은 바로 내적 충만함, 즉 ‘깊이’의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스크린에 접속한 후 몰려오는 피로함과 불안함, 어떤 것에도 몰입할 수 없었던 초조함,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없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분명 인식하고 있지만 정의할 수 없었던 순간들을 저자는 ‘깊이의 상실’이라고 진단 내림으로써 명쾌함을 준다. 이 책의 특징은 ‘깊이’를 되찾기 위한 과정과 해결책을 과거 위대한 7명의 철학자들로부터 찾는다는 점이다. 이른바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이 책 속에 녹아 있다. 플라톤, 세네카,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벤저민 프랭클린, 데이비드 소로, 마셜 맥루한. 인쇄기술, 미디어등 새로운 도구가 출현 할 때마다 혼란을 맞이 했던, 그리고 지혜롭게 대처해 나간 철학자들의 사례는 우리에게 현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아테네의 군중과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던 플라톤, 어떤 상황에서도 한 가지에 집중하여 ‘내적 거리’를 확보했던 세네카, ‘햄릿’을 통해 오래된 도구로 정보를 통제하는 법을 알려준 셰익스피어, 월든 숲 속에 ‘자기성찰’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었던 데이비드 소로. 그들의 에피소드는 단순해 보이는 해결책들에 신빙성과 힘을 부여하며, 우리는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받는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해결책이라도, 결국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계점을 가진다. ‘깊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강한 내적동기와 신념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충분한 동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던지는 메세지는 그저 현실과 동떨어진 투정으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저자는 이런 한계점을 인식 한 듯 하다.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직접 적용해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했다. 휴대폰을 서랍에 두고 밖으로 나가는 것,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드는 것, 통화할 때는 통화에만 집중하는 것, 집 안에 스크린이 없는 휴식 공간 ‘월든존’을 만드는 것 등등. 두루뭉술한 일반화된 결론이 아닌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해결책들이 내적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최근에 구글이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눈앞에 펼쳐 보일 수 있는 ‘특수 안경’을 공개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기술의 진보가 실로 경이롭다고 생각했었다. 책을 덮은 지금, 특수 안경으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상실하게 될 ‘깊이’는 또 어느 부분일지 걱정스럽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수 있는 지나친 편리함과, 타인과 시선을 마주치며 교감할 때 느껴지는 ‘깊이’있는 순간들을 맞바꾸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속도에서 깊이로>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하는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인문독서 토론 2기 우수서평 당첨! 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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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독서생활에 위기가 왔음을 직감케 된다. 농담이 아니다. 읽고도 충만하지 못하고, 읽고 있어도 좀더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원인은 무엇일까? 생활인으로서 일과 독서를 조합하기가 힘들다. 바쁜 삶은 창조성을 말살하는 일등공신이다. 독서에 감동이 없는 건 아마도 그것과 연관돼 있을 것이다. 더불어 어느 순간부터 멀리하게 된 고전 독서, 내 독서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신간과 베스트 셀러 위주의 독서 생활이 바로 문제다. 이와 비슷하게 내 삶 전체를 공허하게 하는 것은 또 있다.
얼리어답터는 아니지만, 생활의 모든 것을 최신 전자기술의 도움을 받는다. 넘치는 편의성들. 차안에는 네비게이터가, 사무실에선 업무의 모든 것을 컴퓨터가 제어하고, 집엔 무선공유기를 통해 어느 공간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고, 아이폰을 통해 24시간 네트워크를 떠날 수 없다. 특히 아이폰의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생활의 질을 끌어올렸다. SNS는 내가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세상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올해 내 수첩에 적어넣은 비전 15가지 가운데 하나가 삶을 스마트하게 만들고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었다. 생활은 편리해지고 사람들에게 뒤쳐졌다는 느낌은 지웠지만, 여전히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독서생활의 최대의 황금기가 있었다. 까마득하지만, 20대 초입 막 군입대를 앞둔 시절이었다. 겨우 10개월이었지만, 겨울부터 가을까지 나는 줄곧 책만 읽었다. 휴학하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올 날을 기다리던 시간들, 시골집에서 책만 읽고 보낸 시간들에 나는 주로 고전을 읽었다. 그것이 평생 처음으로 시작했던 본격적인 책읽기였다. 철학,문학서를 위주로한 인문서를 탐독했다. 세상에 대한 의문과 인생에 대한 회의가 짙었던 시절, 고전 독서를 통해 만난 역사속의 인간들은 내게 살아갈 분명한 이유와 어떤 감동과 인류의 지혜를 건넸다. 자와 볼펜 하나를 들고, 수많은 고전들을 독파했던 네 계절의 시간들이 내게 준 최대의 보답은 삶을 충만감으로 깊게 채웠다는 것이다.
이제 이십여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더 많은 책을 읽었고, 생활은 더 윤택해졌고, 인생의 불확실성은 많이 사라졌다. 고독을 느낄새도 없이 바쁘고 편리하게 시간이 흘러가지만 여전히 나는 그 시절의 충만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슷한 불안과 초초함을 느끼는 사람이 이 시대, 나만은 아닌가 보다.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고,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요한 매체에 정치, 문화, 미디어와 기술에 관련된 글을 기고해온 필진인 윌리엄 파워스는 이 문제를 심도있게 파고든 책을 세상에 내 놓았고 미국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 아마존 베스트 셀러에 오른다. 원제 `Stop! Breathe! Think! 로 <속도에서 깊이로>란 책이다.
저자는 스크린(인터넷)이 세상을 눈부시게 바꿔놓으며 정보 교환의 속도를 높이고, 사람들간의 거리를 좁혀 마치 유토피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해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왔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은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정보 기술의 노예로 전락했고 쓸데없는 정보교환에 열을 올리며 중독의 나락에 빠져들었다고 진단한다.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통해 인류 전체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걸 위해 진정 자신 곁의 사람들로부터는 떠나게 되었다. 가족이 모이면 대화가 사라지고 저마다의 스마프폰 속 트친들과 살갑게 대화하기 일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별 필요도 없는 기사들을 검색하느라 스마트폰과 인터넷 포탈을 뒤지고, 하루에도 시덥짢은 트윗을 수없이 날리고, 그렇게 날아든 정체모를 트윗을 읽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어쩌다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알 수 없이 불안 초초가 사람들을 잠식하곤 한다. 이 괴상한 불안 증후군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스마트 폰을 끄고 인류 고전속의 작가와 철학자를 찾아 떠난 이유다.
신제품의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진다. 자고 일어나면 쓰나미처럼 밀려와 최신, 최고라고 떠벌리는 제품들이 소비자를 희롱하는 시대다. 희롱이 아니라 `우롱'이라고 해야 될까? 사는 순간 구닥다리로 전락시키는 소비전략을 구사하는 마케팅 기법앞에 소비자는 봉이라고 불리워야 하리라. 정보 속도와 `항시접속성' 앞에, 집중할 수 없는 시대에 또한 우린 살고 있다. 글을 쓰다가도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전자책이 상용화 단계가 접어들면 책조차도 넷 상의 분주함속에서 읽어야할 판이다. 끊임없는 정보 중독증에 걸리도록 유혹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깊고 조용히 사색할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인간의 창조성이 몰입과 여유의 순간에야 한 인간의 삶에 축복처럼 내려앉을 수 있다면, 스크린으로 지구가 점령당한 우리 시대는 스마트 한 시대가 아니라 dumb(바보같은)한 시대가 아닐까?
저자가 이 시대에 발견한 해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책의 제목처럼 속도를 버리고, 깊이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깊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고전을 읽고 그들의 삶과 철학을 본받아야 한다, 고 주장한다. 이 책속에서 저자가 유독 주목한 고전 작가들은 플라톤, 세네카, 구텐베르크, 세익스피어, 벤저민 프랭클린, 소로, 맥루한이다. 플라톤은 철학을 통해 인생의 사소한 분주함과 거리를 두는 법을 가르친다. 먹고 사는 것은 훌륭한 철학이 기본 전제 됐을 때만 오직 의미를 획득한다. 먹고 사는 일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며 이유없이 분주하다. 내, 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나, 를 살찌우기 위해 노력한다. 인생의 근본목적이 내, 가 누구인가를 먼저 배우는 과정이라 하면 어떤가? 전자만을 추구한다면 전형적인 주객 전도다.
외부의 평화와 외부의 만족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절름발이 인생을 산다. 마음, 즉 내부의 평화를 얻는 법을 아는 사람은 외부가 고달플 지라도 인생이 훼손되지 않는다.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바깥이 아수라장이 되어도 내면은 고요할 수 있다', 고 세네카는 가르친다. 마음의 수련이 부족한 오늘 고전속의 대 사상가의 식견은 그 자체로 위안을 주지 않는가? 구텐베르크는 책을 통해 자기 성찰을 이루라고 조언했고, 세익스피어는 최신 도구보다는 오래된 필기구를 통해 인생의 여유를 찾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절제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삶의 질서를 창조했고 성공적인 삶에 도달했다. <월든>의 작가 소로는 어떤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세상이 규정한 성공의 법칙과 정 반대의 삶을 살며 깊고 고요한 인생 철학의 진수를 인류에게 남겼다. 현대의 학자 맥루한은 `지구촌'과 `미디어는 메세지다'란 말을 통해 디지털 세상을 예언했고 그 세상의 부작용을 경계하며 쓸데없이 뜨거운 마음의 온도를 낮추라고 조언한다.
이 책은 최신간이다. 여전히 나는 최신간을 통해, 그들의 해설를 통해 고전을 읽고 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속도에서 깊이로, 라는 책 제목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많은 책 가운데 우선적으로 선택해 분주히 읽어내려간 이유다. 그러나, 실망감도 만만치 않다. 제목만큼 책 내용이 썩 깊이있지 못하다. 스마트폰의 해악과 디지털 스크린의 해악을 설명하는데 책의 반을 허비한다. 시간 낭비다. 후반, 양념처럼 고전 작가와 그들의 언설을 인용해 놓았다. 내가 제 3 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고전을 느리고 깊게 읽어내려가야할 필요성을 깨닫기에 충분한 책이다. 별을 세개 밖에 주지 못한 이유이지만, 별 다섯개를 줄만한 책들이 내 서재에 가득 쌓여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이 책은 깊이 없는 내 독서를 돌아보게 한다.
아이폰은 내 생활을 생동감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아이폰 자체는 죄가 없다. 이 책의 저자도 아이폰과 모든 스크린(인터넷도구들)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저자는 줄곧 그래서 중용과 중도를 이야기 한다. 한마디로 잘 쓰자, 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궁여지책으로 주말 이틀간은 모든 스크린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정도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이제 나또한 스크린을 현명하게 사용할 분명한 이유를 이 책을 통해 발견했다. 차를 몰면서도, 퇴근 후에도, 끊임없이 스마트 폰을 확인하는 버릇을 없애야 겠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고전 독서로 방향을 틀어야 겠다. 꾸준한 독서생활에서도 채워지지 못하는 이 공허감은 분명히 인생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내 가벼운 독서 탓이 크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2011.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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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내면의 깊이와 친해져야 할 때
도시의 끔찍한 교통 체증을 피해 워싱턴 근교의 작은 마을로 이사한 윌리엄 파워스라고 하는 남자는 어느 날, 보트를 타다가 실수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휴대전화가 고장난 것을 확인 하는 순간, 앞으로 하루 이틀 동안 재앙을 맞았다는 좌절감과 함께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지금의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휴대전화가 없는 혼자‘는, 진짜 혼자였다.
그는 이 고립의 순간을 경험한 후 자신의 ‘과도한 디지털 문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열어서 읽어야 할 메일도 없고, 클릭하거나 댓글 달 일도 없어지자, 의외로 마음이 평온해짐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혁명으로 세상은 가까워졌지만 그 대신 우리 내면의 중요한 것, 바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크린을 통한 네트워크 가 촘촘해 질수록 우리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로 인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바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깊이’ 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 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19 페이지)
혹시,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 풍경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열에 아홉 명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지켜보거나 두드리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스크린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자와 빛이 겹쳐 흡사 좀비를 닮았다. 내 스마트폰 속에 들어 있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다양한 유무선 기술의 애플리케이션들은 혼자 있는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준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대신 내게서 ‘생각하는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살아갈 뿐, 정작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켠다. 혹 잠깐이라도 생각에 빠지면 ‘쓸데없이 멍~ 때린다’고 핀잔을 듣는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잠깐의 침묵에도 우리는 쉽게 외로워지고 불안해진다. 그리고 곧 스마트폰을 켠다.
저자는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를 통해 디지털 도구는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감정적 사회적, 정신적인 갈증을 해소하며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로인해 인류는 스크린에 사로잡혔고, 디지털 기술은 마치 정치나 종교적 믿음에서나 볼 수 있는 헌신적이고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층을 양산해냈기 때문이다. 언제나 연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디지털 맥시멀리스트’들에게 디지털 기술은 단지 새로운 도구가 아니라, 혁명적인 신념이고 삶의 목적이며 이 세상에서의 삶을 완벽하게 해주는 새로운 발견이자 삶의 해답이다.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삶에 유익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이퍼컨넥티드Hyper Connected 된 삶이 과연 우리가 바라던 삶인가?’ 질문해 봐야 한다.
“경고! 정보의 시대에 지식 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3분에 한 번씩 다른 활동을 한다. 이메일이나 전화가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일단 흐트러지면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데 대략 30분이 걸린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시사평론가 고든 크로비츠가 칼럼에 쓴 내용이다. 한때 IT전도사였던 니콜라스 카(Nicholas G. Carr)는 어느 날 독서 시간을 채 30분도 넘기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책을 읽고 있어도 전혀 몰입을 할 수도 없었다. 예전의 독서 몰입도가 잠수부였다면, 지금은 서핑을 하는 서퍼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유를 각종 ‘스크린’ 때문이며,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라는 제목의 책에 고백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구글의 회장이자 최고 경영자인 에릭 슈미트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2009년 봄 펜실베니아 대학 졸업 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컴퓨터를 꺼라. 휴대전화도 꺼라. 그러면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발을 떼는 손자, 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순간은 없다.”
이 말은 진보를 반대하는 러다이트Luddite가 아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경험(스크린은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과 깊이 있는 생각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다면 깊이 있는 생각을 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파워스는 그 답을 과거에서 찾았다. 과거로 돌아가 일곱 철학자들, 플라톤, 세네카,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플랭클린, 소로, 맥루한의 통찰을 빌렸다. 디지털 시대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과거에서 찾는다니 어불성설같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명쾌하다. 21세기에 디지털 혁명이 있듯 철학자들이 살았던 과거에도 인쇄술, 철도와 전보와 같은 혁명의 시기는 있었다는 것이다. 혼돈과 혼란의 혁명기에도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통제하며 위대한 사상들을 창조해낸 그들의 깊이 있는 생각을 추적한 것이다.
플라톤은 분주한 도시와 군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리적 거리’를 두는데 노력했다. 하루 몇시간씩 일부러 멀어지는 것도 방법이다. 최근 내가 찾아낸 멋진 아이디어들도 대부분 인터넷 서비스가 거의 안되는 KTX 속이었다. 세네카는 편지를 쓰면서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의식적으로 내적 거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내면을 돌보며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뜨개질, 요리, 자동차 엔진이나 자전거 손보기 등 손을 움직이는 일을 하며 몰입한다면 스마트폰과 자연히 멀어질 수 있다.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는 ‘책’이라는 내적 공간에 접속하는 도구를 만들어 자기성찰의 기회를 만들었고, 군중들의 내적 읽기를 가능하게 했다. 책을 읽어라. 마음껏 생각하고 상상하는데 책만한 것이 없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적을 수 있는 특별한 메모장이 있었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스스로 만든 ‘13가지 덕목’을 습관화하면서 하루를 분주하게 살면서 나름의 생활 질서를 만들어냈다. 소로는 월든 숲이라는 자신만의 은신처를 만들어 고독을 즐길 줄 알았고, 맥루한은 정보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관심을 둠으로/서 분주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저자는 생각이 탄생하는 곳은 ‘디스커넥토피아’라고 단언하며 일주일에 이틀 정도 모든 네트워크를 차단하는 ‘인터넷 안식일’을 제안한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해서 당장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끊고 소로처럼 월든 숲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수중에 스마트폰이 있고, 와이파이가 되는 인터넷 환경에서도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지금껏 외부의 환경과 친했다면, 이제 우리의 내면과 친해질 시간, 내가 만든 고독을 만끽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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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가입자가 천만 명을 넘어 섰다. 그만큼 스마트폰은 우리 일상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웬만한 콤팩트 카메라 수준의 촬영과 동영상 재생이 가능한 것은 물론 각종 네트워킹과 길찾기, 생활정보들이 손 안에서 다 해결이 된다. 다양한 학습 기능과 전자북 읽기도 가능해 그야말로 만능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유용함만큼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기능이 워낙 좋다보니 정말로 손에서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출퇴근길에 얼핏 주위를 둘러보면 젊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게임과 영화보기, 메신저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른다. 나도 처음 아이폰을 구입한 후 한동안 스마트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책읽기를 마다할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년)의 저자 윌리엄 파워스는 스마트폰을 포함한 디지털 기기의 중독성을 인식하고, 이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우선 그가 진단하는 디지털 중독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 중독의 문제는 3가지 측면에서 발생했다. 첫째, 개인의 내적인 삶이다. 전문가들은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정신적, 정서적 장애가 확산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가족을 비롯한 개인적인 인간관계이다. 스크린을 사용하는 시간이 얼굴을 맞대는 시간을 대신하고 있다. 셋째, 기업을 비롯한 조직적인 측면이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직원들로 인해 생산성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76쪽)
아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이미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켜 디지털 기기를 잘 사용하고 있더라도 한순간에 빠져들어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 막상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별로 없다. 깊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디지털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20세기 사상가 미셸 푸코는 삶을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철학적 도구를 ‘자기의 기술’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디지털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새로운 기술,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108쪽)
그는 ‘자기의 기술’을 선대의 일곱 철학자로부터 구한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철학자들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탐구한 것이다. 거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플라톤, 광대한 로마사회에서 내적 거리를 발견한 세네카, 책을 보급시킨 구텐베르크, 테이블의 매력에 빠진 셰익스피어, 긍정적인 삶의 습관을 지닌 벤저민 프랭클린, 숲 속 안식처로 떠난 소로, 기술의 발전을 경계하여 인간의 의식을 강조한 맥루한 등은 분주해진 새로운 시대와 기술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탈출 방법을 마련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로부터 배운 바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깊이 있는 삶을 위한 일곱 가지 철학은 다음과 같다.
1. 플라톤/ 물리적 거리 : 오늘날 물리적 거리를 확보하고 거리가 제공하는 이익을 즐기기 위해서는 눈앞에서 스크린을 치워야 한다. 휴대전화를 서랍 속에 넣어 두고 밖으로 나가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2. 세네카/ 내적 거리 :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은 친구나 가족을 곁에 두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물론 스크린의 방해가 없어야 한다.
3. 구텐베르크/ 자기 성찰의 기술 : 만약 방해 요소를 차단하고 휴대용 컴퓨터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마무리하고 싶다면 컴퓨터의 무선 인터넷 신호를 차단해 컴퓨터를 ‘연결이 끊어진’ 도구로 만들면 된다.
4. 셰익스피어/ 오래된 도구 : 종이 책을 읽어라. 내가 몰스킨을 사용하는 것처럼 일기를 쓰거나 단순한 공책에 아무거나 끼적여라. 새로운 잡지를 구독하라. 한 가지에 집중하기가 점차 힘들어지는 멀티태스킹 세계에서 웹에서 벗어난 종이의 호젓함이 가진 힘은 점차 강해지고 있다.
5. 프랭클린/ 긍정 습관 : 범을 통해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6. 소로/ 월든 존 :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소로는 분주함을 극복할 방안으로 평화의 장소를 마련했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집 안에서 구역을 나누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어떤 집에서든 그와 같은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7. 맥루한/ 행복의 온도 : 디지털 분주함이 자기 삶에 어떤 소용돌이를 일으키는지 연구하고 자기만의 창조적인 탈출 방법을 마련하라.
저자는 첨단 디지털 시대의 혜택을 최대한 누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기술적 발전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된 만큼 긍정적으로 좋아진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으므로 이를 슬기롭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군중과 자아,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디지털 기기를 벗어나 거리를 거닐고 가까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 행복한 균형을 위해서.
“증가하는 군중과 분주한 사회에서 삶을 최대한 즐기려는 개인의 노력에 관한 문제다. 인간의 다양한 내적, 외적 욕구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과 그에 대한 유용한 사고방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적 목표 역시 바뀌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군중에서 달아나 은둔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알파의 삶은 순수한 오메가의 삶만큼 즐겁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행복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139쪽)
by 꽃다지, 2011년 5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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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앉아 계속해서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휴대전화를 들고 종종거리다 또다시 이메일을 확인하고 이 모든 과정이 디지털 축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깊이 있는 경험의 가능성과 기회는 점점 멀어진다. 물론 제품을 혁신적으로 개선해 달라는 고객의 이메일을 받고 제품 개선에 대한 간략한 밑그림이 떠올라 시장 전제를 뒤흔들 수 잇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꽃피울 만한 시간을 잠시도 허용하지 않고 또 다른 스크린으로 옮겨가기를 반복한다면 새로운 사람은 결코 없다.” 하루 일과를 떠올려보자. 데스크톱에서 스마트폰으로 다시 데스크톱에서 스마트폰으로 하루중 스크린과 눈이 만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스크린이 토해내는 정보를 탐할수록, “디지털 네트웤을 추구할수록 더 창의적이고 똑똑해질까?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모두들 ‘하이퍼 커넥티드’된다면 가족과 지역사회의 유대감이 더 강해질까? 더 나은 조직을 세우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디지털 스크린은 그런 목표들을 이루는데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좋은 것도 정도가 있다. 과하면 없느니만 못하다. 지금 우리의 일상이 그렇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계가 없어 보이는 디지털 세상의 삶은 흥미지진진하지만 두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우리를 뒤흔들고 있다. 첫째 여러가지 업무를 동시에 다루다 보면 시간과 집중력을 끝없이 쪼갤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제나 새로운 자극과 일거리를 찾아 헤메면서 초조해 하고 결국 매 순간을 분주하게 살아간다. 심지어 스크린에서 떨어져 있을 때조차도 초조해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두번째 측면은 다소 철학적이다. 디지털 네트웤이 확장도리 수록 우리의 사고는 외부 지향적이 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돌아보며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는게 아니라 부산한 바깥 세상을 내다보면 ‘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다. 우리의 주의력도 유한하다. 스크린이 토해내는 무한한 정보의 홍수는 그 유한한 자원을 쪼개고 쪼개며 더 많은 몫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보는 정보다. 정보를 소화해 의미를 만들 시간이 있을 때만 정보는 가치가 있다. 저자는 정보와 정보 사이에 공백, 정보를 소화할 시간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우리 삶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가벼워지며 무의미해져간다고 말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친구가 인사를 하러 잠깐 들렀다고 하자. 친구와 막 대화를 나누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친구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받는데 웨이트리스가 와서 리필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커피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카페의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 상황의 경우 잠재적 관심의 대상은 3가지(책, 음악, 커피)였고 그중 한가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몇 분 만에 잠재적 관심의 대상이 7가지(책, 음악, 커피, 친구, 전화, 웨이트리스, 화재경보)로 늘었으며 그중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엇다. 만족스러웠던 몰입이 불만족스러운 혼란으로 대체된 것이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다 해도 몰입의 상태는 사라져버렸고 어쩌면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삶은 죽은 삶이다. “창조성은 오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만 발휘된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잘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불필요한 요구나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 즉 존재가 아닌 부재의 상태다. 설명하기 조차 힘든 그 부재의 상태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 것?” 이책의 물음이다. 저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과거에서 찾는다. 저자가 답을 찾아 떠나는 과거는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는 본격적인 도시가 등장한 시대엿다. “고대의 대도시 역시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실로 무척 바쁜 곳이었다. 아테네에 산다는 것은 수천명의 사람들로 밤낮 구분 없이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활동, 소음, 냄새, 타인의 관심을 요구하는 수많은 주장과 함께 한다는 뜻이었다.” 디지털 스크린이 만들어내는 분주함과 산만함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대도시가 등장하기 이전 촌락단위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보량이 거리를 흘러다녓다. “혼자 있을 때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내면을 향하며 이 경험은 다소 조용하고 느리다. 반대로 실제 군중이든 가상의 군중이든 구중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외부지향적이 된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도 많고 관심을 기울일 대상도 많기 때문이다. 군준 안에서의 삶은 보통 더 바쁘고 더 빠르다.” 아테네에 사는 사람은 스크린에 포위된 지금의 사람들과 마찬가지 문제에 부딫혔고 공백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도시라는 공간은 그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와 밀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 속도와 밀도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절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문자매체에 의해 더 가속화되었고 더 촘촘해 졌다. “군중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어올 수 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생각할 시간이 없는가? 떨쳐버리기 힘든 이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군중의 의견이고 어디서부터가 내 의견인가? 이 도구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잇는가? 우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가?” 로마제국은 “ㄱ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길을 포장했고 잘 훈련된 군대를 파견했으며 행정제도를 마련하고 우편제도를 정착시켰다. 로마 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네트웤을 대변했는데 그 새로운 네트웟은 특히 상류층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의 대가도 치러야 햇고 그중 일부는 꽤 까다로웠다. 세상을 더 가깝게 만들면서 제국의 일상은 매우 분주했고 개인의 의무 또한 무거워졋다. 어디를 가든 그곳이 제국의 영토라면 쭉쭉 뻗은 도로, 수로, 요새, 용병, 우편배달부와 같은 같은 다양한 수단이 여전히 로마 ‘안에’ 있음을 일깨워주었고 개인에게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 자율성을 요구햇다. 문자언어를 통한 의사소통때문이었다. 우편물은 오늘날의 이메일처럼 급히 확인해야 할 대상이엇다. 세네카는 이집트에서 막 도착한 우편선을 맞이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이웃에 대해 묘사한 적이 잇다. 로마 사회의 유력자들은 세네카가 언급한 ‘언제나 쫓기는 듯한 분주한 마음’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리고 “문자언어의 폭발적인 증가로 로마제국은 읽어야 할 자료로 넘쳐 났다. 수십만원을 넘어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를 읽기 위해 이집트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읽을 거리가 많아질수록 진정으로 지식을 쌓기가 어려워졌다. 수많은 책을 정독하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했다.” 19세기, 전보와 철도는 그런 분주함과 정신없음을 새로운 단계로 올렸다. “힘든 하루를 마친 무역강들은 늦은 저녁을 먹을 기대를 품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족의 품에 안겨 일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고 싶지만 런던에서 온 전보 때문에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밀 2만 포대를 사들이라는 급전을 받은 가련한 남자는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 치우고 캘리포니아로 전보를 보내기 위해 최대한 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업가는 쉴 틈 없이 바쁘게 뛰어나녀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기술 때문에 정신없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가 동일했기에 그에 대한 답도 비슷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플라톤은 가끔씩 도시의 군중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두어 내적 자유를 얻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파이드로스’에서 하고 있으며 플라톤의 물리적 거리두기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세네카는 군중 속에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후퇴하여 내적 거리를 만드는 기술에 대해 언급한다. 구텐베르크는 세네카의 내적 거리두기의 수단으로서 책을 손쉽고 싸게 구할 수 있도록 인쇄술을 발명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쏟아진 인쇄물의 홍수에 대응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넘쳐나는 정보를 통제하는 도구로서 손으로 언제든 썼다 지웠다 할 수 잇는 ‘테이블’이란 도구가 만들어진다. 저자는 그러한 거리두기와 내적 자유를 위해 어떤 방법을 생각해냈는지 플라톤부터 프랭클린, 소로, 맥루한 등 7명의 시대와 그들의 대응을 검토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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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기계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보다 편안한 삶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엔 모두 직접 몸으로 했던 집안 일부터 산업영역의 일까지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는 곳이 없다. 최근엔 스마트폰의 등장과 IoT의 발전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회사일이나 학교의 과제나 모든 일을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여유로워졌을까? 모두가 행복하다고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보다 육체적으로는 편해졌을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의 울림소리나 진동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정신적인 쉼의 시간을 없애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크린이 나쁘다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사실 스크린은 매우 좋다. 문제는 균형의 상실,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 스크린을 향한 충동이 야기하는 마음 상태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과 함께, 스크린 안에서 살고 있다.” - P. 308.
<속도에서 깊이로 ?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는 제목 그대로 속도에 목표를 두고 살아왔고,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만족,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깊이를 줘야만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철학자 7명 - 플라톤, 세네카,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벤저민 프랭클린, 데이비트 소로, 마셜 매클루언 ? 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에서 조금 더 빠르게 빠르게만 찾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보다는 주위의 눈과 평판에 휘둘려서 좌절하는 상황에 처한 현대인들에게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마음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내적인 상황과 외적 상황의 균형을 맞추어 갈 것을 말한다. 그것이 좋은 여행지일 필요도, 외딴 시골같은 곳일 필요도 없으며, 순간순간 자신의 내면을 채울 수 있는 짧은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첨단기기를 부정할 필요도 버릴 필요도 없으며, 삶을 위해 최대한 이용하라고도 말한다.
“이 책은 동경과 갈망에 관한 책이다. 마음이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조용하고 널찍한 공간에 대한 동경 말이다. 예전에는 그런 곳이 어디에나 있었고 또 어떻게 가는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점차 그런 곳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 P. 15.
“기술과 철학은 훌륭한 삶을 위한 도구도 오랜 시간 동안 유용하게 쓰여 왔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매일 수천 년 전에 발명된 네트워크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사상에도 유통기한은 없다.” - P. 117.
“기술에 이끌려 다닐 것인지 의식을 통제함으로써 삶 자체를 통제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다.” - P. 279.
첨단 기계로 인해 편해진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삶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겉으론 편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순간도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다. 퇴근 이후에도 계속 울려대는 대화창의 알림 소리와 벨 또는 진동소리에 온 몸의 에너지를 빨리는 것 같지 않는가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 나 스스로가 나를 돌봐야만 한다. 스스로가 어떻게든 작은 여유를 만들어 잠시라도 자신의 정신을 쉬도록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남은 삶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행이든 잠이든, 아니면 잠시 잠깐의 멍때리기이든.
“인간의 맥시멀리즘적 성향을 일깨우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 왔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조용히 그리고 끈질기게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새로운 기술이 선사하는 미래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가 아닐까.” - P. 218.
“첨단 기술 덕분에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 구석구석에는 다양한 방이 있다. 모든 방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삶은 결국 어떤 방에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결심의 문제다.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톡톡 두드려 보라. 답은 전부 그 안에 있다.” - P. 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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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밴드알림, 전화, 문자, 이메일광고, 웹사이트신문등 하루에 이런것들은 끊임없이 내 주변에서 나를 주목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잠시 눈을 돌리는 순간, 난 그만 집중하던 일에서 빠져나와 주목하라는 것에 눈을 돌린다. 다시 집중하던 일을 들어갈려니 쉽지 않다. 그렇다고 주목하라고 하던것도 아주 얕은 집중만 보인채..다른 스크린이 나를 주목하라고 한다.. 이런 일은 하루에도 몇번이나 반목된다.
이런 스크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인간은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악영향이 있을까? 깊이가 없는 삶 또한 스크린에 중독되어 타인의 관심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삶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타인과 조화하며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균형적인 삶이 우리가 바라는 삶이다.
작가는 이런 스크린에 둘러싸인 삶에서 자신을 깊게 들여다볼수 있는 해답으로 7명의 철학자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7명의 철학자의 삶을 무조건 따라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없다면 개발하라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의 물리적 거리(산책,여행)를 두는 방법,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말한 내적거리(손으로 몰입하는 활동-편지,공예,요리)를 두는 방법, 인쇄술을 발명한 쿠텐베르크의 책을 통한 자기성찰의 방법, 세익스피어가 말한 테이블(수첩,종이에 쓰는 행위), 프랭클린의 긍정습관, 소로의 월든존, 맥루한의 개인 각자의 경험이 이책에서 소개하는 경험이다.
나도 혼자서 밤에 거실에서 책을 읽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런 시간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핸드폰을 꺼놓는다든지 더욱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해봐야겠다.
갈수록 혼자있는게 어색해지고 두려워지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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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달로 인해 우리가 정말 살기 좋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는 딴지를 걸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나 장단점이 같이 공존하듯이 비단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가족간의 소통을 위해 참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활용했고, 또 서로에게 연락이 올때까지 설렘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글로벌사회가 되다 보니, 뭐든 빨리빨리 해결해야 하고, 답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도달했다. 그리고 어렵게 얼굴보고 이야기 하려 만났다손치더라도 결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 하는 시간이 길지 않다. 손에서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스마트폰과 노트북.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문자나 카톡으로 대화하는것처럼 능숙하다거나 친근감을 느낄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모든 관계에 있어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껴보라고 조언하고 있다. 너무 앞만 보며 치닫고 있기에 어느날부터인지 느림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었고, 또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우리의 삶의 속도를 안단테로 조절하라는 이런저런 조언들이 많아진것도 사실이다. 이 저자는 우리에게 주위도 둘러보며 긴호흡을 내쉬며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보라고 한다. 뭐든 클릭 한번으로 몇가지의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해결되는 첨단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마법과도 같은 일들에 너무 젖어있다보면 진정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일수 없음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머릿속으로 만약 단하루만이라도 인터넷이 안되는 공간에 있게 되면 뭘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수도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요즘도 난 책을 읽을때마다 중간중간에 핸드폰에 연락온것이 없나는 뒤적이게 된다. 딱히 어떤 연락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순간순간 확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 의지에 따라, 내 선택에 따라 나만의 시간과 공간대를 가지고 주위의 시간 흐름에 연연하지 않고 오롯이 나만을 위한 그런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 얼마나 생산적인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표지를 보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CF인데, 스님과 숲속을 여유롭게 한가롭게 걸어가던 남자의 전화벨이 울린다. 스님의 얼굴을 쑥쓰럽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과 함께 '잠시 꺼두셔도 됩니다'라는 멘트가 오버랩되는 광고가 너무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