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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독식비판>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이 故노무현 대통령의 경제정책이었다. 노통 정권의 경제노선은 김대중 정권의 시장경쟁, 균등한 기회보장, 노동시장 유연화, 시장개방 등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함과 동시에 재정과 복지정책면에서는 사회복지의 확충, 노동자 기본권 보장, 경제적 불평등 문제 해소 등 참여민주주의적 진보정치로 추구하고자 함이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였지만, 집권 초기의 경기침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보수기득권은 시장원리를 무시한 복지와 분배에 치중하여 경제가 위험하다고 몰아치고,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는 진보대로 "경제에 있어서 복지 예산을 더 쓴 건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빈부격차가 더 커진 건 사실이고, 이런 문제의 대응에 있어 진보적인 정책적 노선을 견지하지 못했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결국 출자총액제한과 종합부동산세 등에 대한 기득권층의 조직적인 불만, 퍼주고도 위협 받는 대북정책에 대한 자존심 훼손, 오만하게 느껴지는 보좌관들의 무례함이 섞이면서 국민들은 보수정권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게 된다. 노통의 참여정권이 서민들의 체감경기와 양극화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현 정권과 이전 정권의 경제통계를 비교해보면 참으로 의아한 결과에 어떻게 판단해야할 지 모르겠다. 여러 경제 내·외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경제성장율, 1인당 국민소득증가율, 소비자물가상승률, 최저임금상승률, 상대적 빈곤율, 전세 가격동향, 설비투자증가율, 국가채무, 재정수지 등 나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천안함 피폭과 연평도 폭격사건 등 북한의 도발로 인한 위기의식이 아니라면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했을 것 같은 경제 성적표이다. 이 책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이 시대 모든 부는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사회의 축적된 지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원천은 지식이며, 모든 지식은 사회 속에 축적되고, 기술 진보는 누적된 지식의 새로운 결합이기 때문에 공동의 지식 역사가 가져다 준 '공동 유산'에 기인한 선물을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관대하고 폭넓은 혜택으로 돌아가게 하자는 이론이다. 저자는 미국의 상위 1퍼센트가 미국 전체의 하위 1억2천만 명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는 불균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우리의 기술유산이 지닌 도덕적 의미는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자본과 노동 투입의 양적인 증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제성장 부분을 '솔로 잔차 Solow residual‘라고 지칭하는데 기술발전이나 혁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경제학자 솔로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다. 이 획기적 업적은 새로운 연구 흐름을 자극하고 가다듬어져, 수많은 세대에 걸쳐서 사회 전체적으로 창조된 이득을 어떻게 공평하게 나누어 사회에 되돌려 줄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 우리 시대가 향유하는 모든 부와 소득의 원천은 사회의 지식 유산이다. 참으로 놀라운 혜안을 정리한 논문이다. 단순한 소득 재분배가 아니라 소유권에 대한 근본적 인식 변화를 요구하는 경제 패러다임은 새로운 공공담론을 필요로 한다. 경제 진보의 진정한 원천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식유산 축적에 있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국가의 분배론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야하기 때문이다.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는 신자유주의 경제적 합리주의가 뜻하는 바를 "부자에게는 사랑을,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는 모질게"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란 것이 '돈을 벌어라! 너만을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이 책은 이런 면에서 시장 민주주의를 꿈꾸는 신자유주의자들도 눈여겨보아야 할 책이다. 하워드 진 Howard Zinn은 ‘미국 현대사의 양심’으로 불리던 분인데, 이 분의 칭찬이 이 책을 제대로 표현한 것같아 소개한다. 그리고 며칠전 뉴스에서 우리나라 소득 상위 20%가 차지하는 부의 편중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기사를 소개하면서 이 책의 리뷰를 맺고자 한다. 알페로비츠는 대단한 경제학 지식과 놀라운 도덕적 감성을 하나로 연결하여 복잡하고도 심오한 문제를 파헤친다. 과연 사회가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최상위 부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경제적 상황에 처해야 마땅한 것인가? 그의 연구는 이러한 사회적 추론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대신에 그는 사회의 부가 기업가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된 지식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밝힌다. 도덕적으로 내린 결론은 도발적이지만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 사회는 그 자체가 지식의 원천이며, 그리고 우리 모두가 평등한 지분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 하워드 진 4월 25일 국세청에 따르면 "종합소득세 신고자 중 상위 20% 소득자의 1인당 소득금액은 1999년 5천800만원에서 2009년 9천만원으로 10년 새 55% 증가한 반면, 하위 20% 소득자의 1인당 소득금액은 같은 기간 306만원에서 199만원으로 54% 급감했다. 2009년 종합소득세 신고자의 총 소득금액은 90조2천257억원으로 상위 20%가 가져간 소득금액은 64조4천203억원으로 71.4%를 차지해 전체 소득의 대부분을 가져간 것으로 조사됐다. 상위 20~40% 소득자의 소득금액은 13조5천337억원으로 총 소득금액의 15%를 차지했다. 중간층인 상위 40~60% 소득자는 7.7%, 60~80%는 4.3%, 하위 20%는 1.6%의 소득밖에 벌지 못했다. 결국 상위 20% 개인사업자가 총 소득의 3분의 2 이상을 거둬들인 반면 전체 신고자의 60%를 차지하는 상위 40% 이하는 고작 10%를 약간 넘는 소득을 가져간 셈이다.(매일신문 2011.04.26. 참조)"... 이런 발표를 보면서 지금 MB정부의 경제성적표가 정말 어떤 수준인지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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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과학 혁명과 산업화 그리고 디지털 혁명을 거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부의 폭발을 이루었다. 시간의 추를 되감아 선사시대 아니 굳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300여년전과 비교 하더라도 부의 풍요로움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부의 풍요로움을 극히 당연시하고 있다. 이러한 당연함의 근거는 앞선 세대를 살았던 이들보다 지적인 우월감과 도덕적인 노력의 댓가로 인한 응분의 보상을 누릴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담론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정점에 이른 자본주의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월성(각종 생산요소 및 물려받은 유산등을 망라해서)은 바로 부의 척도를 판가름 하는 표준점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표준은 이제 널리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고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담론들은 빈익빈 부익부현상이나 부의 일부 계층의 편중현상을 설명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제로 작용하고 부의 상위층으로 계층 이동을 하기 위한 다양한 스킬들이 주목 받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담론들이 과연 진실인 것일까? <독식 비판>은 바로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정통보수주의자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에겐 최극단으로 치닫는 결코 받아 들이기 힘든 사고의 전환이지만 저자들이 논거하는 논제들을 쫒아가 보면 상당한 설득력과 더불어 사고 전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담론이라고 해야 겠다.
현재 미국의 상위 1퍼센트가 모든 개인들이 소유한 투자자산의 절반을 소유하고 하위 인구 50퍼센트가 1퍼센트 미만을 차지하고 있는 불균형(물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라는 작은 의문에 대한 사고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흔히들 자본주의시스템속에서 각자 개인의 역량(물려 받은 자본, 지적인 역량등)에 의한 차이로 인해 부의 불평등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들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등의 대부호들은 탁월한 아이디어와 리더십 그리고 한박자 빠른 판단에 의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없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인물들의 성공한 것이 과연 그들 개개인의 뛰어난 역량 때문이었고 그러한 역량에 대한 보상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에 대한 생각은 감히 가져보질 못했던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그들이 표방했던 소위 특화된 하이테크놀러지가 개인의 창조성과 우수성에 의해서만 탄생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즉 영웅의 탄생으로 시대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수혜는 당연히 개인 영웅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탄탄한 논리앞에서 우리는 그저 수긍해왔고 그런 영웅을 모토로 삼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가 실상은 터무니 없는 궤변이었고 실증적인 증거와 다양한 사례연구로 인해 부의 편중과 그에 대한 담론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스토리 텔링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논증하면서도 일부 개념에 대해선 집중적이고 깊이 있게 끌어가면서 자신들의 논거를 공공히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논거들은 그동안 독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동시에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지금 부의 편중은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부의 편중에 이바지 하였다는 개인의 역량들과 이에 대한 응분의 보상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인류는 짧은 시간내에(다른 종에 비한다면 정말 찰나같은 시간이다)불의 발견과 농업혁명 그리고 과학혁명, 산업화를 통하는 과정에서 선대로부터 하나둘씩 쌓여온 지식들의 총합에 의한 공짜점심과 같은 무임승차로 인한 결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개인의 뛰어난 역량의 발현은 창조론자들이 즐겨 표현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과정이 아닌 진화론에서 보여주듯이 꾸준한 진보와 선택에 의해 출현하는 과정에서 상호작용해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부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과 스펙의 결과가 아닌 사회전체의 대리효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런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먼저 정통경제학에서 견지해왔던 토지,자본,노동이라는 생산요소가 지금의 경제성장의 원천이라는 논거부터 새롭게 정립해 가고 있다. 저자들의 견해는 경제성장의 원천에서 이들 생산요소(특히 토지)가 기여한 바는 극히 적은 부분이고 대부분의 원동력은 과거로 부터 축적되어온 지식에 의한다는 것을 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뛰어난 일개 개인에 의해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사회전체가 창출하는 것이고 여기에 공공부분(국가정부)의 역활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제로섬게임이 아닌 분배의 효과적인 성공을 실현하기 위해선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며 명확한 논거들로 인해 부의 집중이나 편중의 상당량이 개인의 역량이나 노력과 무관한 불로소득이 포함되어 있고 이러한 불로소득분은 당연히 사회로 환원되고 재투자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순환과정이야 말로 향후 지식 생산으로 인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벨의 전화, 멘델의 유전법칙, 다윈의 진화론, 빌 게이츠의 성공신화속에 숨겨진 내막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지식의 생산이 결코 개인의 역량이 아닌 사회전반의 상호작용과 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과 리카도와 밀의 지대론을 통해서 지대와 불로소득의 고전적인 개념정립과 베블런과 한계학파등의 통한 현대적 개념의 불로소득의 정의등 다양하고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부의 독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굳어왔는지에 대한 세세한 읽을거리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문성은 들지만 이들 불로소득을 환원하는 방법(사회적 지분 급여 제공등)에 대한 고찰은 향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역활 모델을 제시하고 있어 향후 분배경제학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경제학원론 수준의 사전지식을 갖추고 있는 독자라면 무리없이 이해될 수 있는 경제사 평설로 훌륭한 저작으로 보인다. 특히 고전경제학파의 거물인 리카도와 밀이 바라보았던 토지의 개념과 지대의 개념이 그동안 알려진 바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이들의 저서를 통해 리뷰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 주고 있다. 지식 생산과 경제성장의 상관관계 그리고 사회적 지식의 총합과 그 여파등 분배경제학의 출발이 되는 기본적인 논거에 대해서 일반 독자들에게 많은 부분을 어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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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어느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1982년도 미국회사의 평균 CEO는 평균 노동자 보다 42배가 넘는 보수를 받았으며 2004년에는 무려 이보다 10배가 넘는 431배의 급여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더불어 이후 조사한 내용을 보면 미국인의 상위 1퍼센트가 한해 국가가 벌어들인 세후 소득의 15퍼센트 정도를 가져간 것으로 파악됐다. 더불어 극히 일부인 이런 고소득자의 소득이 미국의 하위계층 1억2천만 명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는 많다는 것인데, 이를 토대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의 편중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나름 구체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소득의 불평등 문제가 과연 미국자체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늘 우리의 경제 현안에 비추어 놓고 보았을 때, 점점 중산층이 사라져 가는 현상들을 보면 우리나라 역시도 이런 지적에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엄청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만한 부를 창조하는데 충분한 기여를 했으니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 말은 자본주의 체제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자연스런 이야기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사실들을 우리는 은연 중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빈익빈 부익부를 양산하며 이를 부채질 하고 있는 소득 불균형의 문제에 관하여,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이런 내용을 두고 그 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그릇된 인식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던 것인지를 되짚어 보고, 극단적인 소득의 양극화로 불거지고 있는 오늘의 불편한 현실을 타개할 경제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구체적으로 모색해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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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경제시대의 부와 분배’라는 부제를 단 <독식비판>은 “하워드 진, 촘스키가 격찬한 책으로 공정사회, 무상복지, 초과이익 공유제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든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출판사의 기대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저자들의 논지를 나누고 있는 소제목들 역시, ‘지식의 열매들’이라는 제목의 1부에는 ‘경제성장의 원천은 지식이다’, ‘모든 지식은 사회 속에 축적된다’, ‘기술 진보는 누적된 지식의 새로운 결합이다’, ‘지식 생산의 가장 큰 투자자는 공공부문이다’라는 소제목으로, ‘공정한 보상’이라는 제목의 2부에서는 ‘얼마만큼이 노력의 대가인가’, ‘부당한 보수, 불로소득 개념의 재확인’, ‘불로소득의 현대적 의미’, ‘미래 경제를 위한 새로운 소득지형’이라는 소제목으로 결론은 ‘지식 경제 시대의 근로소득과 블로소득’이라는 제목으로 논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소제목만으로도 저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번 것 중에 아주 많은 부분은 사회에서 나온 것입니다.”리는 워런 버핏의 발언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600억 달러가 넘는 그의 재산의 대부분은 사회의 것이라는 저자의 추정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리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사회에 축적되는 지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기여분이 쌓여가다가 어느 순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므로, 비약적 발전의 결정적 포인트를 찾아내는데 기여한 천재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21쪽). 이를 달리 해석하면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 등 생산의 3요소 가운데 노동의 가치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주장해온 과거 공산주의철학에서 토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식’이라는 현대에 들어서 확립된 새로운 가치로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자본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는 점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부에서 논의하고 있는 부의 소유권에 관하여 우리가 소유한 부의 상당 부분이 과거로부터 쌓여온 유산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현 세대가 이를 받을 자격이 있을 만큼 일을 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로부터 쌓여온 유산을 배우고 익혀 발전시킨 결과 부를 창출해낼 뿐만 아니라 물려받은 지식유산을 늘려서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데 기여한 사람이 부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지금 우리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지적유산을 향유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넘겨줄 유산을 지킬 뿐 아니라 늘려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는데 대한 보상이라 할 것입니다. 꽤 오래된 일입니다만, 미국에 2년 정도 공부를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현지에 계신 대학선배님이 주선해서 살 집에서부터 공항에 나와 가족들을 맞아준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를 비롯하여 가구를 마련하는 일, 운전면허를 따게 해주고, 일상을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일들을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습니다. 생활이 안정된 다음에 도와주신 분들을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감사하단 말씀을 드렸더니, 다음에 오는 사람들에게 갚아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연구실에 일본에서 연구원이 새로 왔을 때 한국식으로 돌봐주었는데, 일본커뮤니티는 필요한 것들을 상세하게 정리해둔 “미네소타에 처음 와서 살아남기”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전하는 것으로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감을 바탕으로 돌보아주지만 상당부분이 즉흥적인 점이 한국인의 특징이라면 일본인들은 돌봄도 상세한 기록을 전달하는 것으로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보입니다. 결론은 한국식이 되었던 일본식이 되었던 새로 온 사람들은 앞서 온 사람들이 남겨 놓은 기록이나, 앞서 온 사람들의 경험으로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빠르게 정착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보답은 뒤에 오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들은 “워런 버핏이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거나, 1700년의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가 가진 부가 지금과 같았겠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즉 축적된 지식기반이 그의 부의 근원이 되었다는 주장으로 연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가 보기에 워런 버핏이 방글라데시나 1700년의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부의 정상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회에 축적된 지식에 자신의 창의성을 더하여 지금의 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산으로 받은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성과를 사회구성원이 모두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결론은 이미 무너진 공산주의사회를 통하여 실증된 논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산주의가 이상주의적인 사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회구성원이 만들어내는 소득을 나누는 분배정책이 타당성을 얻지 못하는 경우, 구성원들은 사회에 축적되는 지식을 확대 재생산하는 노력을 기울일까요? 진보적인 분배정책을 강화해오던 그리스를 비롯한 몇몇 유럽국가가 파산에 이르게 된 작금의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끝으로 <독식비판>이라는 제목에 대한 저의 비판입니다. ‘불공평한 보상’ 정도로 이해되는 원제목 <Unjust Deserts>를 아바의 노랫말에도 있는 것처럼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의미를 담아 ’독식‘이라는 인상을 독자에게 심어준 것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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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도착증知的倒錯症에 대하여 조석현·김영은|마음풍경 예술철학 연구 이 책은 다소 까다롭다. 경제학 용어의 암초가 곳곳에 숨어있다. 촘스키도 격찬한 책이라 난독이 예상됐다. 유나바머Unabomber의 리스트에 올랐던 촘스키의 눈으로 본 경제사회에 대한 시각을 꺼내게 되어 기쁘다. 먼저 정보Information은 인상 작전impression management과 비슷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자를 만나거나 만나고 난 후의 남자들에게서 인지력이 떨어지는 현상을 인상작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정보가 일반인에게 멍하게 만들었을까?―라는 관점으로 <독식비판>을 읽기 시작했다. 이성이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고 했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하는 편이 옳다. 감정이 마치 싫고 좋음이라는 극단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통해 판단하는 그 순간 생겨난다. 이성이 전적으로 옳다면 진화는 우스꽝스럽게 바뀌었을 것이고, 여성의 외모와 남성의 근육이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누적은 이런 인류의 축적 가치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ohmynews에서 발췌 위 사진은 아프리카를 다녀온 이가 촬영한 사진으로, 기니아 웜이 감염자의 몸에서 나오는 모습이라고 전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더러운 물을 어쩔 수 없이 마시기에, 몸 속에 들어간 기니아 웜이 성충이 되어 나오는 데 1m까지 자란다고 한다. 이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눔의 문화는 원래 우리나라에 있었던 고유한 것이었으나 차차 증발했다. 그러한 민족성은 뚜렷한 사계절로 인해 <빨리빨리>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게 됐고, 나눔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컸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 기후의 변화는 삼한사온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품의 가격과 소유에서 드러난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우물을 하나 마련하는 것인데 대략 1000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이는 개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의 재산이다. 이처럼 정보는 지하수로 유입된 지식의 총체이고, 그것을 퍼올려 마시는 것조차도 독점적 지위에 있는 정보업에서 이득을 취하는 계층에 막대한 지불을 하는 구조다. 그리고 사실과 의견, 이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까닭에 현대 경제사회는 정보로 무장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네라면 어떤 삶을 선택하겠는가? 괴물로 오래 사는 것과 선량하게 빨리 죽는 것 중에서."
왜 이 전제가 이 책을 읽을 때 필요할까. 수학 중 경제학을 필자는 수사학으로 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경제는 고정실체가 아니었기에, 답을 구하더라도 극히 국소적인 영역에 속했으나 인지부조화의 심리를 바탕에 깔고 만들어낸 게 경제학의 예측이라 보았다. 실제로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은 나눔에 가장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치킨게임이든 제로섬게임이든, 지식을 경제로 삼은 후부터 생긴 지식이 쿠루kuru가 아닐까. 위키피디아는 쿠루를 '이 병에 걸리면 운동장애와 무력증, 두통, 관절통증, 다리경련 등이 생긴다. 또한, 온몸을 떨고, 얼굴 근육을 의지대로 움질일 수 없어 마치 웃음을 짓는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죽게 된다. 프리온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크로이츠펠트-야콥병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기술했다. 근친상간과 식인습관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나, 야만적 습관은 변형되어 정보를 독점하고 생산하는 쪽에서 발달하는 기이한 현상중 하나가 아닐까. 이렇게 보는 이유는, 정보가 많으면 행복한가? 라는 질문 때문이다. 정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론 과거의 산물 1부 지식의 열매들 1. 경제성장의 원천은 지식이다 2. 모든 지식은 사회 속에 축적된다 3. 기술 진보는 누적된 지식의 새로운 결합니다 4. 지식 생산의 가장 큰 투자자는 공공 부문이다 2부 공정한 보상 : 얼마만큼이 '노력의 대가'인가 5. 부당한 보수, 불로소득 개념의 재확인 6. 불로소득의 현대적 의미 7. 미래경제를 위한 새로운 소득 지향 1부는 기술 유산이 지닌 도덕적 의미를 묻는다. 2부는 기술적 잔차를 이해하는 데 주목하고, 철학과 사회사상사의 발전 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저자는 서론에서 7장을 강조한다. "보통의 미국 시민이 누리는 긴 수명, 포괄적 자유, 엄청난 재산은 미국인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창조물." 이라고 포스너의 사상을 소개한다. 또한 노벨상 수상자인 고故 허버트 사이먼의 "우리가 자신에게 매우 관대하더라도, 우리는 소득의 5분의 1 정도가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고 밝혔다. 부모를 잘 만난 이들, 그 속을 들여다 본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된 그 생명체는 부를 물려받는다.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에서 앞서 있기에,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정보경제에서 얻는 자본은 곧 과거의 땅인데, 땅에서 노력을 통해 얻는 것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는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으로 남는다.
결론이다. 한국사회에서 개천의 용들이 사라진 이유는, 고도성장기 이후다. 외국어고, 특목고, 국제 중같은 재력이 없으면 감히 진입조차 못하는 담이 높은 학교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겹고 버거운 것은 공공의 재산을 사유화해도 좋다는 법法을 누가 만들었는지 곰곰히 사유할 필요가 있다.
문득 칼레의 시민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이 작품을 통해 퍼져나갔다.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그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도 높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이다. 로댕이 지옥의 문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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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나 아이디어 하나로 소위 '대박'났다는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듣는다. 한 때 '신지식인'이니 뭐니 떠들어댔던 것처럼, 이제 현대의 몇몇 개인들은 과거의 인간들과는 달리 엄청난 부를 벌어들이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과연 그 엄청난 부가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한가?'
우리 연구는, 한 국가의 엄청난 불평등이 오로지 개인적 노력, 숙련 기술과 재능의 차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믿음에 근본적으로 회의를 품는다.
저자들은 개인의 능력이 15배 뛰어났기 때문에 과거 보다 그만큼의 부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더욱 생산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부가 증폭되었다고 본다. 그 생산성 증가의 중심엔 '지식'이 있으며, 그 지식은 과거로부터 중첩적으로 쌓이고 확대된 '공짜점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부의 압도적 원천인 지식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하나도 거치지 않은 채 우리에게 그냥 다가온 것들이다.
"대부분의 '비약적인 발전'은 천재 한 사람의 공헌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진행된 역사적 전개에서 일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공동진보는 과학자, 엔지니어, 장인과 전문가 단독의 활동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이들 개개인의 모든 업적은 발달이 이루어진 매 단계에서 수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다. 광부와 농부, 목수와 청소부, 요리사와 간호원, 도랑 파는 사람까지 모두가 생산 지식을 창조하고 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특히 다른 의무를 면한 시간!)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아무리 위대한 발명이라도 "그것은 인간 활동 이후 모든 사람들의 정신으로 이룩된 온갖 성취를 거대하고 무한한 어느 한 형태로 집결시켜서 증기선이나 전화기 또는 철로와 같은 단어 한마디로 뭉뚱그려버리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 습관을 벗어나면, 결코 존재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결국 거인 운운하는 뉴튼의 말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을 운운하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단순한 겸손은 아닌 것이다. 어떤 발명이나 지식이 사회와 이전에 존재하던 지식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했다는 사실을 지루할 정도로 증명하는데, 그건 '개인이 창조한 것은 개인이 가져야한다는 '노동' 기여 원리'를 사회로까지 확대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개인이 가져가는 부 중에 상당부분이 '불로소득'이며, 그 몫을 사회가 가져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과세의 진짜 기능은, 사회에서 기원한 부의 요소, 좀 더 폭넓게는 현재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노력에 기인하지 않은 모든 부는 사회의 것이라고 보증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 위에서 과세가 인민 대중에게 건전한 존재 조건을 확립하는 데 활용될 때 갑의 것을 강탈해서 을에게 지불한다는 주장도 확실히 없어지게 된다. 갑은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다. 과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갑이 국가를 도둑질하는 셈이 될 것이다. 국가가 사회적 가치의 일정 지분을 확보하도록 가능하는 세금은, 납세자가 자기 소유에 대해 무한한 권리 요구를 갖는 재산으로부터 일부를 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곧 사회가 당연히 받았어야 할 부분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일 수 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논의는 이단에 가깝다. 내가 일한만큼 받는다, 빌 게이츠는 뛰어난 창의력으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라는 생각에 우린 너무 익숙하지 않던가? 세금과 복지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사람조차, 그것은 사회가 당연히 가져가야할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태어난 곳, 누리게 되는 교육, 복지 시스템 같은 것들이 없다면, 지금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너무나 먼 길 같지만, 실은 지금 판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조차 먼 길을 걸어와 주류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미국에서는 1894년 처음 실시되었던 소득세가 법원에서 위헌판정을 받고 폐지, 1913년이 되어서야 겨우 상식선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 패러다임에는 의문점이 남아있다. 빌 게이츠가 미국이 아니라면 빌 게이츠가 될 수 없었다는 논리를 수긍한다면, 전 세계 차원에서의 평등과 착취에 대한 문제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에 대한 '기여도'를 가장 상위 지점에 둔다면, 아프리카의 '기여도'를 따져 그들의 경제적 상태를 정당화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런 경제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탈정치적'이라는 데 있다. 이런 패러다임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 패러다임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정치'로 수렴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런 새로운 논의는 분명 의의가 있다. 역자의 말대로 이런 새로운 논의는 새로운 사상적 무대 위에서 탄탄한 조명을 받으며 진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진행과 더불어 '정치적 투쟁'이 동반되어야만 의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은데(미주를 제외하면 200페이지 정도), 사상사적, 철학적 검토가 포함되어 있는 이론적 책이기 때문에 읽어나가기가 만만치 않은 책. 그럼에도, 우리의 '잘못된 상식'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인내심을 갖고 읽을만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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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독식비판>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부의 과거에 바탕을 둔 것이 많으며 자신의 노력없이 생긴 부는 사회로 환원되어 재분배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이것은 경제적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지식을 기반으로하는 현대사회에서 축적된 지식과 기술은 사회의 공동자산이며 이는 개인의 생산 활동보다 훨씬 더 많이 부의 창출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워렌 버핏이 방글라데시에 태어났거나 1700년대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그가 가진 부가 지금의 부와 같겠느냐고 물으며 동시대인들보다 조금 더 나은 부를 가질 수 는 있겠지만 지금처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사회에 축적된 지식을 활용한 것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자신만의 노력이 더해졌기에 지금처럼은 아닐지 몰라도 저자들이 생각하는 부 이상의 부를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또, 우리가 소유한 상당부분은 과거로 부터 쌓아온 유산으로 부터 기인한 것으로 이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고 묻는데 이는 다른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고유의 유산은 우리가 잘 가꾸어 이를 다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있다고 얘기하고 싶다.
책에서는 이 시대 모든 부는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사회의 축적된 지식에서 나왔으며 최상위 부자들은 사회의 몫을 어떻게 가로챘는가라고 묻는데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는 충분히 이해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지식을 기반으로하는 사회에서 분명 사회에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부를 이루었다는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상당부분 그 축적된 지식을 이용하거나 활용하지만 온전히 그것만으로 부를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창의적인 사고와 노력없이 부를 이룰 수는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소수가 누리고 있는 커다란 부는 과거로 부터 물려받은 지식 유산이 축적되어 있는 사회에서 온 것이지 그들이 단독으로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개인의 힘으로 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사회의 지식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부분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런 대가없이 독점하고 있는 공동 자산의 혜택은 당연히 사회의 정당한 몫이므로 되돌려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다. 이는 소득의 재분배로 볼 수 있는데 민주사회에서 얼마나 가능할 일일지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어디까지가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부인지 어디까지가 사회의 혜택으로 이루어진 부인지 명확히 나누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를 무 자르듯 사회에 축적된 지식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이니 이를 사회에 환원하라고 얘기하는 건 모순이 있지않나 싶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며 <독식비판>만큼 혼란스러운 책은 없었던 것 같다. 평소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을 모두 바꾸지 않는 한 저자의 생각에 100%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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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명의 천재가 수십만, 수백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와 같은 부자들의 성공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그들을 칭송한다. 하지만 그러한 천재론은 점점 심해져만 가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들의 비참한 삶을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은연중에 길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예를 들자면, 모 대기업 회장은 그 정도의 부와 재화를 누려도 된다고, 그가 한국 경제와 근로자들을 먹여살리고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하지만 그것이 그의 탈세와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그리고 근로자들의 위험한 작업환경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면 과연 사회가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최상위의 부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경제적 상황에 처해야 마땅한 것인가. 가 알페로비츠와 루 데일리는 <독식 비판(원제 Unjust Deserts)>을 통해 소득 분배와 공정한 사회 질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지식 경제 사회에서는 장기적으로 축적된 지식과 기술, 즉 사회의 공동 자산이 개인의 생산 활동보다 훨씬 크게 부의 창출에 기여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한마디로 일종의 인프라(infra)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예전에 개발도상국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사회 전반의 기초적인 인프라의 부족을 꼽았던,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한 단락이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저자들은, 지금의 거부들이 과연 지금과 같은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나 제3세계의 최빈국에 있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부를 거머쥘 수 있었을지 의문을 던진다. 물론 그들의 재능을 활용해서 평균적인 동시대인들보다는 잘 살수 있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엄청난 수준의 부를 쌓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굳이 경제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수학이나 과학 등의 새로운 발견과 그로 인한 기술적 진보 역시 단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요소들이 채택되고 재결합되는 일종의 진화적인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고 경제사가 어셔는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개인적 노력으로 기여하여 이룩했다고 보이는 것조차도, 상당 부분은 각 개인이 받은 일종의 유산, 사회적 영향, 행운이 낳은 생산물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는 물질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인 것 역시 포함된다. 물론 개인적인 노력이 유산과 행운보다 의미가 적거나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혜택을 받은 개인은 상속을 받은 만큼 사회를 뒷받침하여 어느 정도 기여할 도덕적 책무(noblesse oblige)를 지닌다. 위에 언급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고 있는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성공한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공동 자산의 혜택을 어떻게 사회의 정당한 몫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까. 저자들은 결코 그들의 정당한 몫을 몰수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나눠줘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압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해결책으로써 저자들은 상위 1~2퍼센트에 대한 소득 과세 증가, 법인세 증액, 대규모 자본의 사적인 상속에 대한 세금 인상, 종업원 소유 기업에 지원을 강화하는 등의 사회적인 제도들을 제안하고 있다. 사회의 안정성 측면에서 봐도 이 편이 훨씬 낫다. 통계학의 지니 계수(Gini's coefficient)는 빈부격차와 계층간 소득분포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인데, 0과 1 사이의 값을 가진다. 0에 가까울수록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낮다는 것을 뜻하고, 수치가 커질수록 불평등이 심화되어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부자들이 부를 누리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로자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착취다. 첫째 문단에 예로 든, 모 대기업 회장 한 사람이 그 기업의 수많은 근로자들을 먹여살린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기업이 많은 이익을 내고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한 것은, 규정 외의 노동 시간에 시달리고,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잃고 중병에 걸리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이며 아버지, 어머니인 수많은 근로자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이 사회에 여러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고 이제는 그들에게, 그리고 모든 근로자들에게, 나아가서 최소한의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그들의 몫을 분배해야 한다.
"난 몰랐어." 경애가 말했다. "그게 너의 죄야." 윤호가 말했다. "그게 모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야. 너희 할아버지는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둘렀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요구에 따라 일한 적이 이때까지 없었어. 너의 할아버지는 모든 법조항을 무시했어. 강제 근로, 정신·신체 자유의 구속, 상여금과 급여, 해고, 퇴직금, 최저 임금, 근로 시간, 야간 및 휴일 근로, 유급 휴가, 연소자 사용 등, 이들 조항을 어긴 부당 노동 행위 외에도 노조 활동 억압, 직장 폐쇄 협박 등 위법 사례를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야. 난장이 아저씨의 딸이 읽던 책을 보았어. 너희 할아버지가 한 말이 거기 쓰여 있었다구.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라 축적할 때라고 쓰여 있었어. 그리고, 너의 할아버지는 돌아갔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나누어주지? 너의 할아버지가 죽은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 어린 동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을 다 주지 않았어. 그리고 너는 그걸 몰랐지? (중간 생략) 이제 네 죄에서 네가 스스로 벗어나야 돼. 지금까진 너희를 위해서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의 어린 동료들이 희생을 당해왔어. 지금부터는 그들을 위해 너희가 희생할 차례야. 알겠니? 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에게 말해."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의 단편 '궤도 회전' p.152~153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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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리는 부는 과연 당신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인가 인간(人間),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당신과 내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사회란 그러한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곳이며, 인간의 화목과 번영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 가령 우리가 무인도에 홀로 있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회에 많은 것들을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 너무나 당연시 되는 것이어서 그 고마움을 모를 때가 많지만 말이다. 부(富)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살펴볼 ‘독식비판’이란 책이다. 책 ‘독식비판’의 주제는 명료하다. 그것은 ‘분배 정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다루어 진 내용인데, 이 책에서는 이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면, 총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지식이 경제성장의 원천인데, 사회는 이러한 지식에 대한 큰 공여자이며, 축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2부에서는 부에 있어서 얼마만큼이 우리 자신의 노력의 대가인가를 논의하면서, 우리가 누리는 부의 대부분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지식에 대한 사회의 공헌이 크므로 우리가 획득한 부를 개인 또는 소수가 독식하지 말고 사회전체로 골고루 배분해야 한다며 논의를 마무리 짓는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상당한 논란이 될 수밖엔 없는 내용이다. 최근 우리사회에 ‘초과이익공유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것처럼 말이다. 이 초과이익공유제가 무엇이냐면 대기업이 해마다 설정한 목표 이익을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했을 때 협력 중소기업에게 초과이윤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중소기업에 의해 악용될 위험성, 자본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적 발상 등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어서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논란 많은 이 제도가 실제로 시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 제도가 현실성이 있든 없든지 간에 적어도 부(富)에 관한 사회적 대의(大義)만큼은 모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개인의 권리’와 ‘분배 정의’ 사이에서 분명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것인데, 책 ‘독식비판’은 이러한 사회적 논의에 있어서 ‘분배’와 관련하여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당신이 누리는 부는 과연 당신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인가? 당신 자신의 노력과 함께 사회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당신을 진정한 분배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 고민의 끝에 당신은 어떤 해답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그 결과가 당신의 뜻을 말해줄 테니깐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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