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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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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때 천문학자로서 유래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가  「코스모스(Cosmos)」 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집필한 시점은 1980년쯤이라 기억된다. 우리나라의 모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이 1981년이니, 대충 맞는 계산이다. 이 책은 1980년대를 풍미했다고 표현해도 크게 과장됨이 없을 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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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때 천문학자로서 유래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가  「코스모스(Cosmos)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집필한 시점은 1980년쯤이라 기억된다. 우리나라의 모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이 1981년이니, 대충 맞는 계산이다. 이 책은 1980년대를 풍미했다고 표현해도 크게 과장됨이 없을 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고, 곧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에는 저자 칼 세이건이 직접 출연해 나레이션을 맏았다.


당시의 컴퓨터그래픽 수준이나, 영상처리기법 등을 고려할 때, 지금의 다큐멘터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조잡한 영상들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정되나(지금 다시 본 것은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거나 중학생이었을 나는 그 프로그램에 그만 홀딱- 매료되었더랬다. 그 전에도 박수동의 별똥탐험대 열광적 애독자였으며, 틈만나면 조잡한 저배율 망원경을 들고 밤이면 마당에 나가 달이며, 별이며 관측하고 그림으로 그리내기를 즐겨하던 터라, TV에 나타난 칼 세이건은 마치 나의 꿈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그 무엇이었다. 그 때부터 만화가에서 탐험가까지 수시로 바뀌던 나의 장래희망은 '진짜' 천문학자로 고정되었다.

여전히 꽤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꿈은 중고생 시절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교과과정 중 과학과목을 통해 약간이나마 천문학의 간을 보고나서도 여전히 난 천문학자가 되기를 희망했었다. 분명 과학과목 중 화학점수가 제일 좋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놓고도 나는 지구과학, 그 중에서도 천문학 파트를 제일 좋아하였으며, 좋아하는 만큼 또 제일 잘하는 과목이라고 스스로를 쇄뇌하였다.

그런 긴 집착의 터널을 지나.. 난 학부에서 결국 천문학을 전공했다. 물론, 처음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다른 환경과 교과내용에 적지않게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난 내 꿈에 한발 더 다가서, 목표가 선연히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그 '다름'을 애써 외면했다. 약간의 방황을 거친 후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난해한 편미분과 중적분으로 이루러진 궤도계산에 꽤 오랜시간 진땀을 꽤나 흘리고난 다음, 문득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3학년하고도 1학기가 훌쩍- 지나버린 시점이었다.

내가 가까스로 졸업이나 하고 일찌감치 취직자리를 알아보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는 어쩌면 변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운명' 처럼 다가왔다. 그것도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의 1악장처럼 깜작 놀랄정도로 갑자기.. 어느 날 여느때와 같이 복잡한 수학공식과 씨름하던 중, 옆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과 동기에게 모르는 부분을 무심코 물어본 것에서부터 교향곡은 몰아치듯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몇 시간을 씨름하던 그 문제를 그 친구는 가볍게 공식까지 유도해내며 풀어주었고, 거기에 알아듣지도 못할 물리학과 전공과목의 이론들을 곁들여가며 설명해주는데.. 한참을 듣다보니, 나는 그의 설명을 듣는게 아니라 엉뚱하지만 사뭇 심각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내가 이런 애들하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잠시 내가 학창시절의 낭만에 빠져 한눈을 파는 사이에도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내공쌓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그런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버텨가면서도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이 전혀 식지 않고 오히려 뜨거워져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부터 내가 기를 쓴다 한들 늘 기를 써온 그들을 단기간에 추월할 만큼 내 머리가 좋지도, 그들의 머리가 충분히 나쁘지도 않다는 것(사실 자존심 강한 내가 보기에도 그들 중 몇 명은 나보다 '확실히' 월등한 두뇌의 소유자들이었다) 등이 나를 고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방.. '교수님.. 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약간 놀라며) 응..? 너는 우리 공부에 그리 관심이 많다고 생각 안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의외로구나. 공부를 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만, 네겐 만만한 일이 아닐게다. 내가 보기엔 넌 사회에 나가 뭘해도 잘 할 것 같으니 공부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게 어떠니? 공부는 그것밖에 잘하는게 없는 애들에게 양보하고..^^'

요즘도 간간히 연락하고 지내는 이 교수님은 이제는 자신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억조차 못하시겠지만, 당시의 내 흔들림에 이 조언은 제대로 된 '카운터 펀치' 역할을 했다. 난 곧 마음을 접고 사회생활을 준비했고, 여전히 나를 유혹하던 대학생활의 낭만과 다시 조우했으며, 그렇게 그렇게 대학을 졸업했다. 천문학 전공자가 아닌 그저 천문학과 졸업생으로..

이 이야기에 구지 긴 지면을 할애한 이유는 사실 다른 간단한 이야기를 하려던데 있다. 쓸데없이 내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본래 하려던 이야기로 슬쩍- 넘어가면, 당시 이과대는 전공기초과목이 곂치는 것들이 많아 학생수가 그리 많지 않은 타 과와 공동으로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전공기초과목이 수학이나 물리관련 과목이다 보니,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과목에 당연히 강할 것 같은 수학과나 물리학과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보자는 생각들이 강했다. 당연히 제일 만만하게 생각되는 학과가 생화학이나 화학, 생물을 전공하는 학과들.. 그렇게 함께 수업을 듣다보면 금새 서로 친해지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는 커플들도 종종 탄생했다. 

서로 웃자 반 자존심 반으로 해대던 농담 중 하나가 서로의 전공 특징을 비하하는 발언이었다. '야 이 뜬구름 잡는 놈들아..'라고 상대학과에서 놀려댈라 치면, '이런 쫌팽이 같은 것들..'이라고 응수하곤 했다. 세상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면서 행성이 어떻다, 항성이 어떻다, 은하계며, 블랙홀이며, 빅뱅이며 하나같이 제대로 보여지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뜬구름잡는 이야기에 매달리는 상황이 어쩌면 그리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사실 우주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알아낸 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까지 그 효용이 와 닿을리 무관하니,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나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를 몇 시간씩 고민하는 것 만큼이나 실용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쓸데 없이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댄 말도 마찬가지다. 미생물이다, 세포다, 유기물이다, 효소다, 분자다.. 이런 조그만 것들에 집착해 세상을 쪼개고 쪼개어 작은 것들만 보면서 그 안에서 그것들이 모아져 이루어진 커다란 생명체의 근원적 의문은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 못한다는 의미를 빗대어 우리 역시 그들을 그렇게 놀려댔다.


그의 이야기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가 든 조각 퍼즐의 예를 읽으며 난 조금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대학시절 '뜬구름''쫌팽이'라는 단어가 가진 복잡한 의미들과 맞물린 것이었는데, 약간은 억지스럽지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퍼즐 조각안에 여러개로 쪼개진 그림의 전체 모습은 그 퍼즐이 온전히 맞추어졌을때야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퍼즐 한 조각을 유심히 들여다본다도 되는 일도, 전체 퍼즐을 바닥에 겹치지 않게 흐트려놓고 높은 곳에서 한번에 내려다본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과학이 하는 일 중 많은 것이 바로 그런 두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알 수 있다는 현학적 오류 비슷한 그릇된 믿음에 근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직접 짜맞추는 작업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이유 때문이다. 예를들어 천문학에서 하는 여러 프로세스들은 퍼즐을 흩어놓고 먼 곳에서 조망한 뒤 퍼즐 속 색의 종류와 차지하는 비중 들을 어림잡아 분류한 다음 현실세계에서 그것과 비슷한 색 종류와 비중을 갖고 있는 원판 그림을 찾는 작업과 비슷하다.

분자생물학이나 생화학분야의 연구는 좀 다르다. 퍼즐 중 그림이 비교적 선명한 몇 개의 조각들을 선별하고 그것 주변에 유사한 색을 가지고 있으며 오목과 볼록이 일치하는 조각들을 하나하나 대어 본 후 대충 맞추어진 그림의 일부를 가지고(그것이 심지어 1/100, 1/10,000 일지라도..)  전체 그림을 추정해나가는 작업과 유사하다. 물론 이에는 퍼즐이 원판과 크기 및 색 구성이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동일하다는 전제(사람의 신체를 연구하면서 실험용 쥐를 이용하는 이치..)가 선행된다.

추구하는 바는 퍼즐 속 그림의 정체라는 같은 목적이지만, 두 연구방법은 확연히 다른 계통을 거친다. 어떤 계통이 더 정확하고 빨리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우월한 방법론인지는 그때그때 과제의 종류와 난이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위에서 예시된 두 가지가 반드시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론 퍼즐의 표면적을 일일히 더해보거나, 때론 퍼즐이 저절로 맞춰질때까지 끝임없이 모았다가 땅바닥에 내팽겨치기를 반복하는 것이, 심지어는 선풍기에 대고 하나씩 날려보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과학적 탐구라는 것이 현상의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뻔- 한 생각을 새삼스레 다시 하게 되었다. 퍼즐의 예를 빌리면, 그 그림이 무엇 쯤 될 것이다라고 가정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뢰할 만한 부분적 증거들을 대 나가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결국 우리는 한정된 정보로 퍼즐 속 그림의 정체가 이것이다 라고 추론할 뿐, 아직은 퍼즐을 완전히 짜맞추어낼 능력이 없기에 실제 100% 그렇다는 확인을 할 수는 (아직) 없다.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이 책의 제목 역시 이를 시사한다. 세상은 그렇 듯 하나하나 짜 맞추기는 커녕 그 갯수조차 헤아리기 어려운 수 많은 조각으로 나누어진 퍼즐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카르파초의 그림에서부터 시작해 비교적 전문가 수준의 사전지식이 요구되는 생화학적 실험까지를 망라하며, 저자의 유려한 글솜씨와 다양한 방면의 식견을 잘 보여주면서도 꽤 흥미롭게 쓰여진 책이다. 초반엔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를 연상시키는 듯한 뜬금없는 것에 대한 기발한 관심으로 저자의 매력을 감칠맛나게 흘리는 한편, 중반 이후 진행되는 거대한 사기 실험은 마치 과학수사물이나 추리소설을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구성을 가지고 전개된다. 두 파트사이에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리 예민한 시선이 아니면 무던히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종류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왜 가장 일본에서 인기있는 과학자인지 실감하게 된다. 흔히 과학자들에게서 풍길 것만 같은 메마른 감성에 기인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그에겐 없다.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가 쓴 에세이같은  글발 때문에 그가 담아낸 지식이 머리로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되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이쯤되면 그가 최고로 인기있는 과핟자인 이유는 월등히 유능한 과학자여서가 아니라, 과학자들 중 가장 감성이 풍부하고, 또 그것을 글로 담아낼 재주또한 남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보게 된다.

나누고 쪼개어도 알 수 없는 세상은 모으고 포갠들 알 수 없기 마련이다. 알 수 없음 또한 인정할 수 없는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본성일까.. 우리는 패턴화(Patterning), 형상화(Imaging), 분절화(Parting) 등을 통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분류하고, 나누며 차이를 인식한다. 저자는 이를 인류가 가진 '고칠 수 없는 병(Incurably)'라 표현했다. 그러나 이 고칠 수 없는 병이 있기에 인류는 세상을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이론체계하에서 그 세상을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인류가 가진 불치의 병은 그 병의 원인이 어찌되었건 인류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게 만드는 병리적 증상을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PS. 이 책 오타가 너무 많습니다. 책 읽는 동안 내내 신경이 거슬렸는데, 일단 생각나는 몇 개만 말씀드리면, 책 맨 앞에 예시된 그림 중 '비토레 카르파초'의 두 그림의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위 그림이 '라군에서의 사냥'이고, 아래 그림이 '코르티쟌' 입니다. 또 하나는 중간에  저자가 코넬대학 연구소에 있었던 시절 에피소드 중 대학 소재지의 지명이 뉴욕 주 '이타카(Ithaca)'인데 '이사카'라는 발음이 혼용됩니다. 아마 'th' 발음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ㅌ''ㅅ'이 혼용된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하나는 글 말미 '에필로그' '프롤로그'라고 씌여 있더군요. 일부러 그렇게 했나 싶어 목차를 보았더니, 목차에는 '에필로그'라고 제대로 써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몇 군데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p***i 2011.04.28. 신고 공감 11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생명을 보는 관점과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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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재미있는 과학책을 보았다. 잘 쓰여진 글인 것 같다. 생화학적 발견과 실험과정을 추리소설과 같이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런 식의 설명이면 생물(분자생물학, 생화학)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대의 과학의 세계는 거대 우주로부터 원자까지, 소위 거대과학과 미소과학의 양극단을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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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재미있는 과학책을 보았다. 잘 쓰여진 글인 것 같다. 생화학적 발견과 실험과정을 추리소설과 같이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런 식의 설명이면 생물(분자생물학, 생화학)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대의 과학의 세계는 거대 우주로부터 원자까지, 소위 거대과학과 미소과학의 양극단을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사랑하고 그에 대해 공부하며 연구하는 사람의 무리가 반드시 있다. 그리고 과학자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약간 편집적인 증상을 나타내는 인물로 표현된다.

 

트립토판학회와 파도바, 글루탐산은 대부분의 단백질에 가장 많이 함유된 아미노산, 트립토판은 가장 희귀한 필수아미노산이고 몸 속에서 합성되지 않아 섭취해야만 한다. 뇌와 트립토판과 신경세포의 과잉흥분을 일으킨다.

 

랑게르한스섬은 세포의 집합체이다. 우리가 시력을 측정하는 시력표의 란돌트고리의 간격이 가지는 의미, 당뇨병은 기아에서 풍족의 시대를 맞이한 인간의 풍족병이다. 인간은 과잉에 대한 대비로 진화되지 못했다. 베네치아 그리고 게티센터에서 만난 그림들, 베네치아에서 호화롭기 그지없는 생활을 누리던 그녀들이 응시하는 공허함이다.

 

부패와 발효의 차이는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한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인간의 음식 속에 있는 스로브산(보존료)는 왜 넣을까? 편리함과 편의성 그리고 최소한도의 필요악과 위험성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나가 결정할 문제이다.

 

EC세포와 암세포, 당신은 지도의존형인간과 지도무시형인간 중 어느 쪽인지? 교신과 세분화, 각 세포는 상당히 단순한 배타적 행동규범에 따라 인접한 세포하고만 교신하고 그 결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변신시켜간다. EC세포는 자기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분열만은 멈출 수 없는 세포, 암세포는 과거 어떤 세포였던 적이 있는 세포로 어느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고 다시 자아를 찾아 나선다. 암세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주변 분위기를 읽을 수 없게 된 세포, 정지명령에 불응하게 된 세포이다. 하지만, ES세포도 때때로 종양화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암, 하지만 인류에게 불사의 힌트를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코라고 부르는 부위의 명확한 경계는 어딘가?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부품이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동적인 평형과 그 효과뿐이다. 경계면은 이미 내부로 녹아 들어가 그곳을 오가는 물건과 언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서로 흡수하고 녹이는 가운데 새로운 평행이 생겨나고 있었다. 장기이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명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소성 덕분이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활력소(생기)와 흐름(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이다. 생물은 마이크로 차원의 부품과 생기가 만들어내는 생명현상(생기론)이다. 원래 죽음에 그 순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경계는 없다. 지금의 분자생물학은 생성되는 과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미노산의 결합을 통해서 질서가 만들어진다. 질서는 구축을 위한 방대한 양의 에너지와 정교함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질서는 순식간에 무질서를 만들어내다. 단백질은 끊임없이 산회되고 변성되며 분해되려 한다. 엔트로피, 무질서 증대. 사람이 결정하는 사람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도되어 가고 있다. 뇌사를 죽음으로 보면 생물로서의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수정란이 탄생했을 때, 아니면 뇌시론에 의거하여 수정후 20주 전후(신경계가 발달), 아니면 뇌파의 발생(24-27주 후)으로 볼 것인가? 과거에 우리가 익혔던 지각과 인식의 수로는 지금도 엄연히 우리 내부에 남아 있다. 우리는 보려고 하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봤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헛것인 것이다.

 

암세포의 바르부르크효과(암의 원인은 불규칙한 세포의 호흡 때문이다.), 암은 치명적인 병이지만 암세포는 불사의 존재이다. 스펙터의 대발견, 암세포의 ATP분해효소가 바르부르크효과의 범인이었다. 32P를 표지화하여 증명, 인산화와 탈인산화의 끊임없는 순환이었다. 인산화의 다단계 반응과 암바이러스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지만,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들과 가이거 계수관의 반응, 밝혀지는 추론과 사실들, 이것은 데이터 날조였다. 재현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스펙트는 사라진다. MAP키나제와 Ras단백질, 어떤 암세포는 Ras변이로 Ras가 이상 활성화 되어 암이 된다. 그들의 인산화가설은 부분적으로 옳았다. 다단계반응의 각 단계에 위치하는 각각의 키나제는 복수의 패밀리로 되어 있었다.

 

암과 관련된 이야기는 천재 스펙트의 업적과 발전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실제적으로 인산화가설을 이들이 증명한 것이 맞은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착각이었다. 물론 그 뒤에 인산화가설이 다른 이들의 발견으로 증명되었다. 우리에게 있었던 가설을 증명한 실험, 황우석박사 사건이 생각난다. 하지만, 사라져 버린 줄기세포들과 살아 있는 황우석을 만들었다. 그는 아직도 잘 지내는 것 같다. 과학자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인데.

 

책 속에 등장하는 생화학, 분자생물학적 과정의 설명은 정말 배울만한 것 같다. 쉽고, 정확하게 단계단계적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한다면 과학에 담을 쌓은 많은 사람들을 과학의 품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편의 글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이었다.

 



p*******t 2011.04.25. 신고 공감 11 댓글 14
리뷰 총점 종이책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과학자들은 왜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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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남자들"에 이어 두 번째로 후쿠오카 신이치의 신간을 리뷰어로서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글쓰고 이야기 풀어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도 꼭 읽고 싶어졌다. 그를 일본의 정재승이라 불러도 좋을까 싶다. 과학자이면서 참 잘 읽히는 글을 쓴다. 인문학적, 문화예술적 소양도 엿보인다. 생뚱맞게 등장한 권두화 몇 점은 호기심을 자아내고, 책 전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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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남자들"에 이어 두 번째로 후쿠오카 신이치의 신간을 리뷰어로서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글쓰고 이야기 풀어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도 꼭 읽고 싶어졌다. 그를 일본의 정재승이라 불러도 좋을까 싶다. 과학자이면서 참 잘 읽히는 글을 쓴다. 인문학적, 문화예술적 소양도 엿보인다. 생뚱맞게 등장한 권두화 몇 점은 호기심을 자아내고, 책 전체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니 이미지와 텍스트가 상호작용하며 함께 말하고 있다. 그림, 사진 뿐 아니라 하루키의 "랑겔한스 섬의 오후",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고린도전서 같은 인용문들 또한 반가웠다.

 

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공부하면서(사실 '교육'보다는 '철학' 자체에 포인트를 두게 된다) 과학과 철학(혹은 종교, 윤리, 형이상학...)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보게 된다. 중세에는 과학이 종교에 봉사했고 근대에는 철학자가 몸소 최신 과학 지식을 공부했다는데 현대에 와서는 그들 사이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이미 암묵적으로는 과학이 철학을 잠식하고 싶어하고, 요즘 유행하는 '통섭'이라는 것도 과학을 토대로 인문학을 포섭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서양근현대철학특강' 강의를 들으면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와 '형이상학 입문'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일찌감치 과학과 형이상학은 사용하는 방법이 전혀 다름을 주장했다.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을 나누고 쪼개서 시공간 안에 정지시켜두고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개념이나 부호를 통해서 사물을 온전히 인식했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완전한 직관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우리는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 안으로 들어가 'sympathy'해야 하는데 이것이 직관이다. 분석의 방법으로는 정지된 부분 이외의 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그것들은 도망가기 때문이다. 이 "나누고 쪼개도..."를 다 읽고 나니 저자는 베르그송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싶어졌다.

 

부호들을 조작해서 어떻게 실재를 만든단 말인가. (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형이상학 입문', 문예출판사, p.220.)

 

과학과 철학의 첨예한 대립 구도에서 심정적으로 철학의 편에 서 있는 나로서는 세상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고 앞으로 인식할 것이라고 믿는 일부 과학자들의 태도를 볼 때 위험해보인다. 그들의 연구 대다수가 우리 삶에 유용한 것들이므로 열심히 연구하는 그분들께 참 감사하지만 그 중 몇%라도 잘못된 판단을 내려 생명을 어그러뜨린다면 생명은 많은 비용을 들여 조정에 들어갈 것이다. 거의 인재에 가까운 자연재해, 유전자조작 같은 것들이 두렵다. 그런 면에서 제목부터 철저히 겸손한 자세를 일관하는 저자의 마인드가 멋있다.

 

어쩌면 형이상학에만 베르그송의 직관이 사용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과학자는 가설을 세우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관찰을 한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이기에 관찰자가 가진 의도는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내릴 여지를 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언급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연구 과정을 '날조'한 사건은 과학이 철저히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날조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이 가설을 세우는데 활용했던 능력도 일종의 직관이 아닐까. 결과를 빨리 뽑아내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아쉽지만 의미 있는 주장을 함으로써 다른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세계를 질서지워 이해 하고자 한다. 우리도 모르게 저지르는 많은 착각들은 인간이 사실은 질서가 없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해 인식하려고 함을 증명한다. 뇌과학 서적들이 다루는 시각에 대한 이야기들은 세상이 우리가 보는대로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본 것을 뇌 속에서 재구조화해서 인식하기도 하고, 뇌가 가지고 있는 구조에 짜맞추어 알기 편한대로 추측해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 세상을 잘못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래의 글이 이 책의 핵심인 것 같아 발췌해본다. 우리가 공부해야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마음에 든다.

 

 

봤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헛것

 

예전에 한 어린 독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해야만 하나요? 그때 나는 충분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충분한 대답을 해줄 자신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색의 그러데이션을 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불연속적인,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경계를 보고 만다. 거꾸로 불연속적인 점과 선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이어서 연속된 모양을 만들고야 만다. 즉, 우리는 원래는 관계 없는 것들에 인과 관계를 부여하려는 성향이 있다. 왜 그럴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속을 분절하고, 뿐만 아니라 경계를 강조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 불규칙적으로 추이하는 자연현상을 억지로라도 연관지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가 익혔던 지각과 인식의 수로(水路)는 지금도 엄연히 우리 내부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수로가 정말로 생존하는 데 유리하고, 정말로 안심할 수 있게 해주며,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져다 주었을까? 사람의 눈이 오려낸 ‘부분’은 인공적인 것이며 사람의 인식이 발견한 ‘관계’의 대부분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보려고 하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봤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헛것인 것이다.

세상은 나누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눴다고 해서 정말로 아는 것도 아니다. ‘Powers of ten’(책 앞부분에서 언급한 영상물)의 저편에서 마이크로적인 해상도를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 ‘Powers of ten’의 이편에서 매크로적으로 조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우리는 한눈에 세상 전체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왜냐하면 목적 없는 해상과 조감의 반복이 세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 거칠다. 거칠게 보이는 것은 사실 한없이 매끈하다.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 현실의 실상을 알기 위함이다.

 

후쿠오카 신이치,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과학자들은 왜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일까』, 은행나무, p.145-146.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1.04.24. 신고 공감 6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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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라는 이름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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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라는 이름의 환상여기 책상이 있다. 의자가 있다. 연필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물체다. 아기들도 몇 개월만 지나면 그것들이 하나가 아니라 따로따로 별개의 물체라는 걸 안다. 그렇다. 개별적인 기능을 하는 개체다. 책상의 각 기능적 부품들, 네 개의 다리, 모서리, 판은 책상을 구성하는 요소다. 다른 곳에서 떼어서 붙이는 게 가능하다. 컴퓨터, 자동차, 냉장고, TV,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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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라는 이름의 환상


여기 책상이 있다. 의자가 있다. 연필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물체다. 아기들도 몇 개월만 지나면 그것들이 하나가 아니라 따로따로 별개의 물체라는 걸 안다. 그렇다. 개별적인 기능을 하는 개체다. 책상의 각 기능적 부품들, 네 개의 다리, 모서리, 판은 책상을 구성하는 요소다. 다른 곳에서 떼어서 붙이는 게 가능하다. 컴퓨터, 자동차, 냉장고, TV, 시계 등등 온갖 물건들은 많은 개별 부품들이 모여져서 하나의 물체가 된다. 그 개별 부품들은 다른 부품들과 구별되고 분리되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나사로서, 엔진으로서, 문짝으로, 다리로서 비슷한 스펙의 어느 곳에 접합해도 가능한 특수한 기능들을 가졌다.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사람 얼굴을 그릴 때 동그라미 속에 눈, 코, 입처럼 생긴 모양들을 채우고 그 얼굴에 선으로 팔과 다리를 그린다. 그렇게 아기들은 사람들의 눈과 코와 입을 개별적인 기능적 모듈로 인식한다.

과학 시간에 무지개의 색깔이 빨주노초파남보 7개라고 배운 어린이들은 무지개를 그릴 때 7개의 색깔로 무지개를 표현한다. 그런데 색과 색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아, 어떤 문화권에서는 무지개 색깔의 개수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7개의 색깔들 사이에는 우리가 명명하지 않은 수많은 색깔들의 점차적인 변화가 있다. 우리가 경계로 인식한 것들 사이에는 사실상 수많은 점진적 변화가 있다. 얼굴 위에 붙어 있는 입술과 얼굴 판 사이에는 명확하게 선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수많은 점차적인 변화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신경망과 근육과 세포와 그 사이를 통과하는 화학물질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우리의 모든 기관들을 하나의 개체로 묶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들은 로봇의 부품처럼 하나씩 살살 돌려서 떼어낼 수 없다. 따로 떨어진 것 같은 부분들은 사실상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용함으로써 한 사람의 정체를 형성한다.

경계는 인위적으로 그은 선이다. 인간은 분류를 좋아한다.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그라데이션 띠를 보면 사람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한다고 한다. 뇌는 경계 없는 색들의 변화 사이에서 경계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얼굴 속에서 눈과 코와 입들을 떼어내어,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세포들, 신경망들, 혈관 등 보이지 않는 연속적인 변화들의 사이에서 엄격한 경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과 교감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봄에 섬진강변에는 벚꽃이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이 있는데, 그곳을 운전하고 가다 보면 어디부터가 전라도인지 어디부터가 경상도인지 모른다. 실제 땅에는 우리가 지도에서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지도가 그어놓은 경계선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억양과 정치적 성향과 출신 같은,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할지도 모를 것들을 그 가상의 경계선이 결정한다.

세상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아주 작은 세계를 평생 연구하며 사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흩어져 살면서 이곳저곳에서 다른 작은 구멍을 판다. 그렇게 파가는 아주 작은 구멍은 깊고 또 깊어서, 언젠가는 지하 수맥에 도달하고 '어두운 곳을 흐르는 물들이 서로 소통하는(p.8)'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지식의 확장은 그런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 그중에서도 트립토판이 타이로신을 만드는 과정의 중간 단계에서 생성하는 퀴놀린산이라는 독성 물질을 연구한다. 퀴놀린산이 과다하게 많으면 글루탐산 수용체에 결합하여 신경을 흥분시키고 뇌세포를 손상시킨다. 퀴놀린산은 전용해독 효소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므로, 해당 효소가 분비되는 이상 뇌세포의 손상은 없다. 저자가 파는 작고 깊은 우물은 이 퀴놀린산 해독 효소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좁고 깊은 우물에 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과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수필집이다. 그가 가진 그 좁고 깊은 지식의 원리가 드넓고 무한한 세계로 확장되는 과학자의 사색과 상상력에 대한 내용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문학적이고도 아름다운 문체가 줄곧 책을 놓을 수 없도록 시선을 끌다가, 마지막 장은 실제 있었던 조작 실험 내용을 마치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으로 흥미진진하게 엮었다.

서로 다른 주제의 글들이 서로 다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들은 책의 전체 주제로부터 미묘하게 결합된 지점이 있고, 또 장과 장 사이에서도 연결고리들이 있다. 전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하나 모래알갱이처럼 흩어져 있는 개별 문장들, 개별 언어의 지식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모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5장 이식 TRANPLANTATION은 다른 장의 많은 주제들과도 만나며 전체를 통합한다고 느꼈다. 경계라는 것의 인위성에 대한 성찰로 시작되는 이 글은 과학적 지식과 통찰로 관찰하는 세계가 실제로 생활하는 세계와 얼마나 절묘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름답게 사유한다. 작가는 와타나베 고라는 사진작가가 TRANSPLANT라는 제목으로 완성한 시리즈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 사회 안에 있는 베트남 이주민 주거지구, 독일에서 브라질로 건너온 사람들의 집과 교회, 싱가포르에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의 모스크,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이식된 문화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진들이다.

그 중 'Boarder and Sight'라는 국경의 어떤 지점을 쌍방의 관점에서 찍어 두 장이 한 세트를 이룬 작품들에 대해 주목한다. 이 국경 사진들에서 작가는 '경계'를 포착해서, 그 경계의 개념을 다시 인간의 몸을 향해 들이댄 현미경 속에서 찾아낸다. 아기들이 그리는 사람은 아기들이 본 것, 전체에서 본 부분이다. 인간의 몸은 실제로 단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출발한 세포의 연속적인 변화일 뿐이다. 그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자의 교환, 에너지의 교환, 그리고 정보의 교환이 흐르면서 생명이 유지된다. 개별 장기는 별도로 만들어진 기능성 모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세포의 그라데이션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기라 부르는 '부분과 신체 사이에는 기능적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점차적인 변화만 있을 뿐 그 어느 곳에도 뚜렷한 경계인 여기부터 자르시오를 의미하는 점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이러한 경계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서, 인공적인 장기 이식에 대해 사유하고, 또 그 이질적 공존 관계를 더 넓은 차원의 세계 속으로 확장한다. 식물들의 이식, 문화적인 이식 같은 것들 말이다.

눈이 빛을 발하는 게 아니라 역시 빛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책속 밑줄 긋기

우리의 몸이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각각의 세포가 취하고 있는 행동 양식 또한 그야말로 분산적이지 않은가. 조감적인 전체상을 알고 행동하는 세포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세포는 손톱만큼도 지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중략) 이때 세포는 무슨 일을 하는가? 그들은 서로 자기 주변의 분위기를 읽고 있다. (중략) 교신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다.(85쪽)
생명 안에는 의인화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모습, 생략하지 않으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중략) 그림은 저만치 떨어져서 봤을 때만 그런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우리 인간들은 생물을 그런 그림이라 생각한다. (중략) 심장 세포는 자기가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진 개체의 일부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심장의 일부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심장이란 우리 지도에 의지하는 부류가 인체를 내려다봤을 때 보이는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95쪽)
역사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위적으로 도려지고 이식된 마을의 삶, 이런 부정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경계와 경계면들. 거기에는 분명 두 개의 세계가 서로 대립하며 생겨난 잡음 같은 것을 나타내는 어떤 실마리가 존재하기는 한다. (중략) 경계면은 이미 내부로 녹아 들어가 그곳을 오가는 물건과 언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서로 흡수하고 녹이는 가운데 새로운 평형이 생겨나고 있었다.(105쪽)
인간의 죽음을 뇌가 죽는 시점이라 한다면 (중략) 수정란은 분명 사람이 아니다. 신경계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것은 수정 후 20일. (중략) 뇌의 신경회로망이 구축되고 뇌파가 나타나는 것은 수정으로부터 24~27 후의 일이다. 소위 말해 의식이 태어나는 것은 이 바로 다음일 것이다. 뇌사가 사람의 죽음을 전도한 것처럼 뇌사는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의 출발점을 얼마든지 늦출 수 있다. (중략) 이는 뇌사와 장기 이식의 관계와 똑같은 문제다. 죽었다고 정의 내린 몸으로부터 아직 살아 있는 세포 덩어리를 적출하고자 하는, 이 직접적인 이유가 인간의 출발점 주변에도 존재할 수 있다. 수정란 및 그것이 세포 분열해 생긴 배아가 뇌사 이전의 아직 사람이 아닌 것의 부속품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단순한 세포 덩어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배아를 재생 의료 따위의 명목으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우리가 신봉하는 최첨단 과학 기술은 결코 우리의 수명을 늘려주지 않는다. 우리 삶의 시간을 양쪽 끝에서 싹둑싹둑 잘라 단축시킬 뿐이다.(130쪽)

* 네이버 오늘의 책 4월 마지막주에 올라왔습니다.  책이 어려운 부분과 공감되는 부분이 섞여 있어,통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은 2달 전쯤 따로 리뷰로 올려서 원성을 샀습니다.


** 비교적 이해가능하고 특히 깊게 공감한 부분만 남은 리뷰인데, 최근 제가 쓴 리뷰 중에서 가장 정성껐(?) 썼는데, 네이버 오늘의 책에 발행된 다음 날 보니, 악평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뭐 리뷰에 대한 악평인지, 책에 대한 악평인지 알 수 없었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악평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유치원생도 쓸 수 있는 글을 썼다는 표현을 봐서,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개인블로그에 쓰는 것과 네이버 오늘의 책에 선정되는 것과는 교통량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부담을 가지고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g******1 2015.05.11. 신고 공감 5 댓글 12
리뷰 총점 종이책
나누고 쪼개도 길어져서 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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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오늘의 책 리뷰에 넣으려고 썼는데 너무나 길어져서 통편집. 네이버에서는 못보고, 예스24에서만 볼 수 있는 미공개 본문 정리 쯤. 나머지 본문은, 발행 후 공개~생물의 세포 안에 존재하는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다. 국제 약속에 의해 이 20종의 아미노산에는 알파벳이 할당된다. 알라닌 A, 아스파라긴 N, 타이로신 Y, 글루탐산 E. 영어 알파벳 중 가장 사용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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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오늘의 책 리뷰에 넣으려고 썼는데 너무나 길어져서 통편집. 네이버에서는 못보고, 예스24에서만 볼 수 있는 미공개 본문 정리 쯤. 나머지 본문은, 발행 후 공개~


생물의 세포 안에 존재하는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다. 국제 약속에 의해 이 20종의 아미노산에는 알파벳이 할당된다. 알라닌 A, 아스파라긴 N, 타이로신 Y, 글루탐산 E. 영어 알파벳 중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것은 E이다. 아미노산 중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것도 E 글루탐산이다. 단백질이 있는 곳에 글루탐산이 있다. 생물체는 글루탐산을 맛으로 느낀다. 반대로 사용빈도가 가장 낮은 아미노산은 트립토판 W 이다. 


트립토판이 뇌 안에서 대사되면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으로 변한다.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이 우울증/수면장애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독자들은 그것들의 생성을 위해 트립토판을 취하면 어떨까 생각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극도의 영양부족이 아니라면 트립토판 결핍으로 멜라토닌/세라토닌이 부족한 경우는 없다. 엉터리 상술은 언제나 작은 지식의 누수를 먹고 자란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만, 일본에선 건강식품으로 나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트립토판이 단백질 중 가장 희귀한 필수 아미노산이라는 희소성이 부족에 대한 공포와 강박증에 대한 결과로 이어진 거다. 타이로신 역시 희귀한 방향족 아미노산으로 뇌내에서 도파민, 아드레날린 노르아드레나드 등의 주요 신경전달물질의 재료가 된다. 역시, 각성효과, 집중력 향상, 항우울 작용 등의 효과를 내세와 영양제화 되어가고 있지만, 인공적 섭취의 효과는 없다.  뇌내 대사는 타이로신 섭취와 관계 없이 항상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 글루탐산은 뇌안에서 신경전달물질을 주고 받을 때 쓰이는 신호물질로 뇌 안에서 합성된다.  뇌의 방어 시스템은 글루탐산 수용체와 반응하는 독성물질인 퀴놀린산이 혈류를 통해 뇌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트립토판은 타이로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퀴놀린산이라는 중간단계의 독성물질을 생성하는데, 퀴놀린산이 과다하게 많으면 글루탐산 수용체에 결합하여 신경을 흥분시키고 뇌세포를 손상시킨다. 뇌의 방어벽이 글루탐산은 차단하지만, 필수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은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퀴놀린산은 전용해독 효소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므로, 해당 효소가 분비되는 이상 뇌세포의 손상은 없다. 저자가 파는 작고 깊은 우물은이 퀴놀린산 해독 효소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아미노산은 아미노기(NH2-)와 카복실기(-COOH)라는 구조가 있는데 아미노산의 결합은 한쪽 아미노산의 카복실기와 다른 아미노산의 아미노기가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카복실기의 OH가 떨어져나오고 아미노기의 H가 떨어져나와 한쪽은 안정화된 물H2O가 생기고 남은 -CO와 NH-도 파트너를 찾아 합체하여 -CO-NH라는 안정적 결합을 성립시킨다. 생명현상의 질서는 여러 종류의 아미노산이 어떤 순서로 연결되느냐에 의해 구축된다. 아미노산은 말하자면 알파벳이고,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는 알파벳으로 쓰인 문장에 해당한다. 생명체는 고유의 문법과 문체(DNA)에 따라 구성된 단백질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소화효소는 단백질에게 다가가 간지럽히고 비틀고 잡아당겨 아미노산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CO-NH 결합을 흔든다. 다양한 소화효소에 의해 단백질이 다양한 형태로 잡아당겨지고 비틀리면서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된다. 소화란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원래 생명체였던 전주인(음식)의 정보를 분해하는 것이다.  아미노산 배열 형태로 가득들어있는 전주인의 고유 정보가  우리 몸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면 몸 내부의 고유의 정보계가 충돌, 간섭, 혼란이 일어난다. 이것이 식품 알러지, 이식거부 반응이며, 소화효소는 끊임없이 다른 생명체였던 단백질의 이야기와 문장을 해체하여 그들을 의미없는 개개의 알파벳 즉 음소단위로까지 철저히 분해한다



g******1 2015.02.25. 신고 공감 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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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도 울고 갈 과학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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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이자 책벌레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찌기 '도쿄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강조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수재들의 모임이기도 한 도쿄대 학생을 한순간 '바보'라고 부르는 까닭이었으며, 이어서 이 책의 내용은 서울대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불똥이 튀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란 다름 아니라, 이른바 고교시절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문과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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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이자 책벌레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찌기 '도쿄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강조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수재들의 모임이기도 한 도쿄대 학생을 한순간 '바보'라고 부르는 까닭이었으며, 이어서 이 책의 내용은 서울대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불똥이 튀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란 다름 아니라, 이른바 고교시절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문과생만이 '인문, 철학'을 공부하고, 이과생만이 '수학, 과학'을 공부해서는 결국 반쪽짜리 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얼른 인지하지 못한다면 <도쿄대>도 <서울대>도 희망을 엿볼 수 없다고 따끔하게 충고한 내용 말이다.

  오래 전에 이 '다카시'의 책을 읽으면서 아주 신선한 충격을 먹었던 모양인지, 그 뒤로 학문을 익히는 배우미(학생)라면 모름지기 한쪽으로 치우친 반쪽짜리 배움보다는 <교양>으로서 학문의 경계를 가르지 말고 두루두루 익혀야 좋은 배우미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뿌리로 삼았다. 물론 그 덕분에 가르치미(선생)인 나부터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 <읽어야 할 책들>을 '곱빼기'로 늘려 고생(?)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이쪽 저쪽 '아는 것'이 참 많아져서 정말 가르치는데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쓴 글쓴이는 '과학자'이면서도 전문용어 나부랭이만 늘어놓는
낡고 묵은 책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문학적, 예술적 예제>를 늘어놓는 매우 새로운 책을 내놓는 글쟁이다. 더구나 일본 독자들은 이 글쓴이가 책을 내놓자마자 선뜻 사서 읽어준다는 데에 깜짝 놀라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도 '다치바나 다카시'나 '후쿠오카 신이치'와 같은 글쓴이로 '정재승'과 '최재천' 같은 분들이 없지는 않으나 이 분들의 책이 나오자마자 선뜻 사주는 <고정 독자들>이 많아서 많은 관심을 끄는 '과학적 글쓴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미루어 짐작하기로 <과학콘서트> 같은 몇몇 책을 제하고는 얼마 없는 것으로 안다.

  아무튼 이 책이 서술하는 내용을 주욱 읽어보면, 개인적인 일상 속에서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예들을 마치 '퍼즐'을 짜맞추듯 쉽게 이해시켜 주면서 뒷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내용을 담아내어서 자칫 어렵기만한 <과학사 스캔들> 내용의 전부를 한 눈에 알아챌 수 있도록 '장치'한 점에서 참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다고 혀를 내두르게 하는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추리소설'에 빗댈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앞서 살짝 내비쳤듯이 이 책에서는 <과학사 스캔들>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과정을 속속들이 밝혀서 보여주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복잡하고 어렵기만한 과학적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익숙한 예>를 늘어놓았다. 사실 뒷부분의 내용이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 아주 유능한 과학자들마저 감쪽같이 속인 사건이었기에 '과학적 지식'이 없다면 너무나 전문적인 어휘들만 늘어놓아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아주 치밀하게도 앞부분에 치밀한 추리소설마냥 '복선과 암시'를 깔아놓았기에 어려운 뒷부분이 아주 술술 풀렸다.

  <과학사 스캔들>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 나라 <황우석 사태>와 같이 엄청난 관심과 성과를 이루기 바로 앞서서 '거짓 논문'임이 밝혀지면서 '과학계의 망신'이 되어 버린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그쳤다면 그저 '거짓말쟁이 과학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가' 일반적인 이야기로 끝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거짓 논문'을 만들게 된 방법이 사실은 '검증 가능한 과학적인 방법'이었고, 훗날 다른 과학자들이 앞선 방법을 이용하여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하고 말았다. 앞서 말한 거짓말쟁이는 결국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고도, 성급하게 성과를 얻어내려고 결과치를 무리하게 조작했던 것이다. 훗날 과학자들은 앞선 과학자들의 방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신중하게 '검증 가능한 결과치'를 얻는데 노력을 쏟았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훗날 과학자들은 그닥 노력도 하지 않고서 엄청난 성과를 차지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를 과학적으로 보면 앞선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운 것이고, 훗날 과학자들은 <검증> 및 <증명>을 해낸 것이다. 대개 과학자들은 <가설>만을 세운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검증>하고 <증명>해낸 과학자에게 모든 영광을 주는 편이다. 그래서 앞선 과학자들이 성급하게 성과를 얻으려는 욕심만 버렸다면, 어쩌면 훗날 과학자들이 받은 영광을 자신들이 차지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다 읽고 나면 슬그머니 다가온다. 거의 전부를 다 얻을 것만 같은데 딱 하나가 모자라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세상도 있고, 어느 누구에게는 봐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다른 누구에게는 아주 잘 보이는 세상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밤하늘에 별을 보고서도 별자리로 죽죽 선을 그어 쉽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똑같은 별을 보고서도 이별 저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어떤 이에겐 북두칠성이 일곱 별로 보이지만, 어떤 이에겐 여덟 별로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왔던 계양성 말이다. 그렇다고 딱히 '눈이 좋은 것'만으로 역사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거짓보다는 참으로 삶을 살아야 겨우 이룬 것을 잃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11.04.25. 신고 공감 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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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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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재는 소설을 싫어한다. 폼재는 사람도 싫고 폼만재는 인생도 싫다. 폼재는 책은 더더욱 싫다. 왠지 분위기 띄우면서 내용 헷갈리게 오리무중으로 쓰는 글이 싫다는 얘기다. 자연과학책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자연과학책을 쓰는 사람들중엔 다행히 분위기 띄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과학자가 쓴 책이란 생각이 안든다. 폼재는 소설을 읽으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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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재는 소설을 싫어한다. 폼재는 사람도 싫고 폼만재는 인생도 싫다. 폼재는 책은 더더욱 싫다. 왠지 분위기 띄우면서 내용 헷갈리게 오리무중으로 쓰는 글이 싫다는 얘기다. 자연과학책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자연과학책을 쓰는 사람들중엔 다행히 분위기 띄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과학자가 쓴 책이란 생각이 안든다. 폼재는 소설을 읽으려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과학자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마치 연애소설의 도입부를 접한 것같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면 저자의 또렷한 주관과 창의적인 세상보기에 결코 폼만재는 글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딱딱한 분자생물학을 이런 방법으로 풀어내면 그 누가 소설읽듯 그의 글을 읽지 않겠나 싶을 정도다.

2002년 6월 저자는 퀴놀린산을 무독화시키는 퀴놀레이트 포스포리보실 트랜스퍼라제라는 효소의 작용과 끊임없는 분해와 합성의 동적 평형을 설명한 자신의 논문을 파도바의 국제 트립토판 회의장에서 발표한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회의장을 빠져나와 그가 간 곳은 베네치아였다. 그 곳에서 그는 산타모니카의 게티센터에서 본 그림의 반쪽을 찾으려한다. 15세기말 이탈리아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의 '라군에서의 사냥'의 아래부분인 '코르티잔'을 찾아서. 일본 여류문인 스가 아쓰코가 치유할 수 없는 병이라고 말한 병의 실체도 그 그림을 보며 떠올린다. 현미경으로 생물조직을 관찰할때 배율을 높이면 갑자기 하나의 세포가 다가오는데 우리는 이 세포가 원래 풍경가운데 어떤 부분이었는지 놓치고 만다고 그는 말한다. 확대된 그림은 원래 세계속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소량의 빛만 도달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각각 하나의 그림으로 생각했던 카르파초의 그림처럼 우리는 하나의 그림만 보고 전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저자는 일상적 관심과 분자생물학의 사실들을 잘 연결한다. 소르브산의 경우 사람의 세포에는 해로운 영향을 주지 않지만 공생하는 장내세균에게 영향을 끼쳐 간접적인 유해함을 유발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소화기관을 미시적으로 보았을때 엄청난 분자가 엄청난 속도로 시시각각 교환되는 그 경계면에서. 또 장기라는 부분과 신체사이에는 어떤 경계면도 존재하지 않기에 장기이식이란 힘든 거부반응과 면역반응을 견뎌 낸 후라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진작가 와타나베 고의 방문을 받고 그의 '보더 앤 사이트'와 '트랜스플랜트'를 보고난 후 경계면의 실체와 이 세계가 갖는 가소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식이후 새로운 동적 평형점을 찾게 되는 것까지...


북두칠성의 국자 손잡이부분 세 개의 별중 가운데 별 하나는 사실 하나가 아니고 두개의 별이다. 시력이 좋으면 우리는 7개의 별을 보지 못한다. 나아가 주변의 별들을 다 볼 수 있다면 북두칠성이란 별자리는 전혀 의미없는 차원이 될 것이다. 우리 뇌안에는 오래전부터 패턴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수로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세계를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 생각하기때문이다. 과거에 우리가 익혔던 지각과 인식의 수로가 지금도 엄연히 우리 내부에 남아 있는 것이다.


8장부터 마지막 장까지에는 1980년 뉴욕주 이타카 코넬대 라커교수 연구실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자뭇 황우석사건의 경과와 유사한 과학자의 양심에 관한 얘기다. (2009년도에 출간되었으니 그 무렵 학계의 지진현상을 목도한 후에 이런 글을 썼음직하다.) 지지부진하던 연구에 신참 연구생의 획기적인 등장과 연구성과에 학계가 깜짝 놀랐지만 야심찬 연구생의 실험조작이었다는 스토리다. 무익한 ATP의 소비와 생산을 영원히 반복하는 극도로 낭비적 세포인 암세포의 정체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였다. 마크 스펙터라는 20대중반의 청년은 라커가 보고싶어한 그림을 오려냈던 것이다.

라커는 스펙터가 총명했지만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칠 수 없는 병은 저자가 베네치아의 한 미술관에서 본 그림에서 연상한 병의 당시 이름이기도 했다. 당시의 병은 매독이었지만 젊은 과학자가 앓았던 병은 실험데이터날조와 사기였다. 물론 실험실 연구원들의 스트레스와 보스와의 관계, 연구실 관리방법, 공동연구행태, 재실험 재현성문제, 연구자금 배분방법과 공평성 확보, 대학이란 연구조직, 연구비 지원의 정부등의 책임, 조사 심사기관의 설치등을 언급한다. 이런 사건이 생길 수 있는 배후를 살펴야 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라커와 스펙터가 실험조작이 아닌 이론제시만 확고히 했다면 오히려 후대에 존경받는 이론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이 제시한 가설은 후발 연구의 성과들에 의해 크게 잘못된 가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들이 제시한 인산화다단계반응이란 가설은 사라졌지만 MAP(mitogen-activated protein)를 둘러싼 키나제의 다단계반응으로 실존하게 되었다. 그것은 별들의 명도가 높아짐에 따라 당초 그곳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점과 점을 이어 만들어진 성좌가 서서히 희미해져가는 것과같다.

저자는 마이크로세계를 관찰하는 분자생물학자로서 꼭 하고싶었던 말을 이 책에 담았다. 자세히 본다해서 부분을 확대한다해서 전체를 알 수 없다는 말, 실제로 경계란 없으며 그건 우리의 착시라는 것이다. 그가 한 말중에 생소한 분자생물학의 독자로서 기억에 남았던 말은 특히 세포부분들은 전체를 알고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웃의 상황을 보고 자신의 대처법을 알 뿐이었다. 세포는 그렇다하더라도 과연 우린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걸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기른다면 윤리적 삶을 살 수 있을까......

f****e 2011.04.23.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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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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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굉장히 많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 깊이 겸손해지는 내 모습, 그저 책속 이야기가 신기하고 감탄스럽다. 글의 소재가 내가 그동안 관심 있게 생각해 온 것들이 아니라서, 낯설고 처음엔 확 와 닿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저자님의 생명과학에 대한 연구 집념이 느껴져서 신기했다.     어떤 화학적 이런 분야에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는데 많이 버거운 느낌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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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굉장히 많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 깊이 겸손해지는 내 모습, 그저 책속 이야기가 신기하고 감탄스럽다. 글의 소재가 내가 그동안 관심 있게 생각해 온 것들이 아니라서, 낯설고 처음엔 확 와 닿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저자님의 생명과학에 대한 연구 집념이 느껴져서 신기했다.

 


  어떤 화학적 이런 분야에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는데 많이 버거운 느낌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 마치 ‘인간현미경’이라도 되는 듯~! 과학자의 시야는 경이롭고 세세하고 넓었다. (확대-축소, 놓치는 부분의 물음표? 의문? 학구열? 불안감?)

 


  의식하지 못했던 색다른 부분을 조명하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독특한 글맛과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더불어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학구열을 불타게 자극하는 책이다. 치열하게 열정을 가지고 관심 있는 분야에 연구하는 삶의 모습에서 저절로 존경심과 질투감이 든다. ㅎㅎㅎ

 


  소르브산의 경우 극소량을 섭취 했을 때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지만, 미량이라도 장기적인 정장작용의 교란이 (p-76)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는 문제제기...와우! 이런 걸 식품업체 관계자가 접하고 개선해야 할 텐데, 인식도 못하고 관심도 없고 뭔가 굉장히 찜찜하다. 저자님의 ‘위험성 - 편의성의 균형을 이해한 다음 그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선택권’(p-77)의 중요성 인식이 시급하게 다가온다. (조미료 소문 우리나라도 있었는데...일본도ㅎㅎㅎ)
 
  먹을거리 속 식품첨가물들의 정체가 급급급 궁금해지고 걱정거리가 늘어가고 씁쓸하다. ㅎㅎㅎ 알면 알수록 교란 그 자체ㅎㅎㅎ 어쨌든 ‘부분이라는 것은 부분이라는 이름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아~심오하다. 과학자의 고뇌도 (조작의 유혹) (검증, 가설과 진실의 접근 아쉬움~!) 느껴지고 뭐든 생각 좀 하고 살자~!!

s*******7 2011.04.2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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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분은 없다! 그리고 보는 것은 인위적 인식일 뿐이다...
"세상에 부분은 없다! 그리고 보는 것은 인위적 인식일 뿐이다..." 내용보기
인간 생명현상의 본질인 세포와 그 화학물질의 차원까지, 그리고 회화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한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그야말로 경외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유쾌하고 지적인 산책길로 안내한다. 분자생물학, 생리학의 시시콜콜한 실험과정으로부터, 때론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으로부터, 대학의 생물실험연구소의 일화로부터, 편의점 삼각 김밥 포장지에 명기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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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현상의 본질인 세포와 그 화학물질의 차원까지, 그리고 회화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한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그야말로 경외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유쾌하고 지적인 산책길로 안내한다. 분자생물학, 생리학의 시시콜콜한 실험과정으로부터, 때론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으로부터, 대학의 생물실험연구소의 일화로부터, 편의점 삼각 김밥 포장지에 명기된 함유물질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과연 진실인가, 아니 어느 한 부분에 불과한 것,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생명의 안전한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환상은 아닌지를 사색한다.


저자가 안내하는 사유의 여정은 화려한‘게티 미술관’에 걸린‘비토레 카르바초’의 작품, <라군에서의 사냥(Hunting on the Lagoon)>과 이태리 베네치아의 차타레 강변과 인쿠라빌라(Incurabill)라는 수로에 얽힌, 한 일본 작가의‘비토레 카르바초’작품 <코르티잔>의 감상과 얽혀 낭만적 골목길에서 멈추어 서게 한다. 그러나 마냥 두 걸작품에 대한 소회에 머무는 것은 아니고, 미국과 이태리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 걸린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거대한 한 작품의 부분임을 알게 되면서 소위 미술평론가들이라는 전문가들이 떠들어대던 그 호사스런 해석이 초라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앎이란 것의 실체란 것이 그리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만큼 미세한 분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래서 우리 비전공자들이 이해하기 수월한 예를 든 것이 곧 김밥이다. 편의점에 놓인 김밥의 유효기간, 납품돼서 진열대에 놓여 판매되는 시간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첨가되는 물질에‘소브르산’이란 것이 있는 모양인데, 임상실험결과 인체에 유해하지 않기에 사용되고 있단다. 이러한 실험이란 것이 인간의 생체에 진정 무해한 것인지는 사실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임에도 부분적일 밖에 없는, 고작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분석에 의존하여 판단을 내린다. 사람의 대장에는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보다 많은 장내 세균이 있고 이 세균이 정장작용을 도우며 공생하고 있다. 소브르산이란 일종의 방부제는 미생물의 번식에 장애를 일으켜 그 증식을 억제하여 부패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사람의 장기 내에서 사람의 생명활동을 지원하는 세균들은 무차별적으로 이 소브르산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니 결국 간접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란 얘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신뢰 할 수 있는 앎, 진정 아는 것이기나 할까?


이 저술의 현미경 배율을 예로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배율을 갑자기 높여 대상물을 가까이 끌어당기면 그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즉 그 물체가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 그 화면의 우측에는 좌측에는 위에는,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도리가 없게 된다. 이 확대된 대상물은 본래의 세계 속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우린 전체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주변의 전경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부분을 정밀하게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일게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예가 소개되고 있는데, ‘지도 의존형’ 인간과 ‘지도 무시형’인간의 행동 양식으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은 정작 누구일까 하면 지도 의존형이란 것이다. 전체를 조감하고 목적지의 그 방향과 위치를 찾으려는 행위가 감만 가지고 자신의 전후좌우와 관계성만 가지고 찾는 지도 무시형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에 익숙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포가 타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인데, 세포는 결코 자신이 인간의 신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성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으로, 오직 주변과의 관계성에만 의지하여 모든 세계를 구축하는 분산적 행동을 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보성이라 하는데, 생명의 신비, 자연,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경외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정상적 세포의 행동,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증식과 억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포와 달리 어느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무한 증식하는 세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암세포이다. 마치 그 행동이 인간 사회에 만연한 탐욕스런 속성의 그 파괴성과 닮은 꼴 같기만 해서 우리 눈의 해상력이 0.01밀리미터의 식별까지만 가능하기에 망정이지 해상력이 더 뛰어났다면 끔찍했을 것 같기만 하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눈의 해상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딱 이만큼만 보이도록 진화한 것은 기막히게 균형적인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조금은 겸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 아는 것이 결코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낭비적이고 몽매한 암세포의 얘기는 코넬대(大)의 한 연구실험의 일화로 이어지는데, 이 암세포의 증식과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을 밝혀내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다. 이러한 인간의 갈망은 한 대학원생 연구자의 강박과 지도교수의 보고자하는 기대감이 결합하여 실험을 조작하여 가설을 입증하는 쾌거를 창조하는 것인데, 결국은 과학계의 대 스캔들로 과학의 깊은 불신만 낳았을 뿐이라니 그‘앎’에 대한 과욕이 실질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안타까운 얘기이도 하다.

이처럼 흥미로운 분자생물의 세계와 여러 에피소드들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 사람의 인식이 발견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의 보기들이다. 우리들,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밀하게 이해하고나면, 또한 이들 부분들을 모으면 올바른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데 기초하고 있다.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여 선명하게 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들은 보충해서 보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앎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눈, 세포의 행동양식, 밤하늘의 별빛,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 아미노산과 같은 분자생물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앎의 본질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보는 것은 망상, 인공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임을. 세상에 부분이란 것은 없다. 어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쪼갤 수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면 그 본성, 본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을 모두 집합하면 우리가 된다. 허나 그 세포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란 존재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계의 순간이란 것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인가?

생명의 본질, 안다는 것의 본질, 그것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에너지와 정보가 유발하는 효과, 그 흐름에 있다는 통찰력은 아마 이 저술의 차원을 저 높이 올려놓는다 할 정도로 거룩하게 인식된다. 명확한 구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린 모두 볼 수 없으며, 결코 모두 알 수도 없다. 우린 아는 것이 없다. 더욱 겸허해져야 할 터이다. 지금보다 더욱 더....그것이 바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