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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때 천문학자로서 유래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가 「코스모스(Cosmos)」 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집필한 시점은 1980년쯤이라 기억된다. 우리나라의 모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이 1981년이니, 대충 맞는 계산이다. 이 책은 1980년대를 풍미했다고 표현해도 크게 과장됨이 없을 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고, 곧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에는 저자 칼 세이건이 직접 출연해 나레이션을 맏았다.
PS. 이 책 오타가 너무 많습니다. 책 읽는 동안 내내 신경이 거슬렸는데, 일단 생각나는 몇 개만 말씀드리면, 책 맨 앞에 예시된 그림 중 '비토레 카르파초'의 두 그림의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위 그림이 '라군에서의 사냥'이고, 아래 그림이 '코르티쟌' 입니다. 또 하나는 중간에 저자가 코넬대학 연구소에 있었던 시절 에피소드 중 대학 소재지의 지명이 뉴욕 주 '이타카(Ithaca)'인데 '이사카'라는 발음이 혼용됩니다. 아마 'th' 발음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ㅌ'과 'ㅅ'이 혼용된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하나는 글 말미 '에필로그'에 '프롤로그'라고 씌여 있더군요. 일부러 그렇게 했나 싶어 목차를 보았더니, 목차에는 '에필로그'라고 제대로 써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몇 군데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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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재미있는 과학책을 보았다. 잘 쓰여진 글인 것 같다. 생화학적 발견과 실험과정을 추리소설과 같이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런 식의 설명이면 생물(분자생물학, 생화학)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대의 과학의 세계는 거대 우주로부터 원자까지, 소위 거대과학과 미소과학의 양극단을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사랑하고 그에 대해 공부하며 연구하는 사람의 무리가 반드시 있다. 그리고 과학자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약간 편집적인 증상을 나타내는 인물로 표현된다. 트립토판학회와 파도바, 글루탐산은 대부분의 단백질에 가장 많이 함유된 아미노산, 트립토판은 가장 희귀한 필수아미노산이고 몸 속에서 합성되지 않아 섭취해야만 한다. 뇌와 트립토판과 신경세포의 과잉흥분을 일으킨다. 랑게르한스섬은 세포의 집합체이다. 우리가 시력을 측정하는 시력표의 란돌트고리의 간격이 가지는 의미, 당뇨병은 기아에서 풍족의 시대를 맞이한 인간의 풍족병이다. 인간은 과잉에 대한 대비로 진화되지 못했다. 베네치아 그리고 게티센터에서 만난 그림들, 베네치아에서 호화롭기 그지없는 생활을 누리던 그녀들이 응시하는 공허함이다. 부패와 발효의 차이는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한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인간의 음식 속에 있는 스로브산(보존료)는 왜 넣을까? 편리함과 편의성 그리고 최소한도의 필요악과 위험성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나가 결정할 문제이다. EC세포와 암세포, 당신은 지도의존형인간과 지도무시형인간 중 어느 쪽인지? 교신과 세분화, 각 세포는 상당히 단순한 배타적 행동규범에 따라 인접한 세포하고만 교신하고 그 결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변신시켜간다. EC세포는 자기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분열만은 멈출 수 없는 세포, 암세포는 과거 어떤 세포였던 적이 있는 세포로 어느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고 다시 자아를 찾아 나선다. 암세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주변 분위기를 읽을 수 없게 된 세포, 정지명령에 불응하게 된 세포이다. 하지만, ES세포도 때때로 종양화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암, 하지만 인류에게 불사의 힌트를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코라고 부르는 부위의 명확한 경계는 어딘가?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부품이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동적인 평형과 그 효과뿐이다. 경계면은 이미 내부로 녹아 들어가 그곳을 오가는 물건과 언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서로 흡수하고 녹이는 가운데 새로운 평행이 생겨나고 있었다. 장기이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명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소성 덕분이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활력소(생기)와 흐름(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이다. 생물은 마이크로 차원의 부품과 생기가 만들어내는 생명현상(생기론)이다. 원래 ‘죽음’에 그 순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경계는 없다. 지금의 분자생물학은 생성되는 과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미노산의 결합을 통해서 질서가 만들어진다. 질서는 구축을 위한 방대한 양의 에너지와 정교함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질서는 순식간에 무질서를 만들어내다. 단백질은 끊임없이 산회되고 변성되며 분해되려 한다. 엔트로피, 무질서 증대. 사람이 결정하는 사람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도되어 가고 있다. 뇌사를 죽음으로 보면 생물로서의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수정란이 탄생했을 때, 아니면 뇌시론에 의거하여 수정후 20주 전후(신경계가 발달), 아니면 뇌파의 발생(24-27주 후)으로 볼 것인가? 과거에 우리가 익혔던 지각과 인식의 수로는 지금도 엄연히 우리 내부에 남아 있다. 우리는 보려고 하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봤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헛것인 것이다. 암세포의 바르부르크효과(암의 원인은 불규칙한 세포의 호흡 때문이다.), 암은 치명적인 병이지만 암세포는 불사의 존재이다. 스펙터의 대발견, 암세포의 ATP분해효소가 바르부르크효과의 범인이었다. 32P를 표지화하여 증명, 인산화와 탈인산화의 끊임없는 순환이었다. 인산화의 다단계 반응과 암바이러스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지만,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들과 가이거 계수관의 반응, 밝혀지는 추론과 사실들, 이것은 데이터 날조였다. 재현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스펙트는 사라진다. MAP키나제와 Ras단백질, 어떤 암세포는 Ras변이로 Ras가 이상 활성화 되어 암이 된다. 그들의 인산화가설은 부분적으로 옳았다. 다단계반응의 각 단계에 위치하는 각각의 키나제는 복수의 패밀리로 되어 있었다. 암과 관련된 이야기는 천재 스펙트의 업적과 발전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실제적으로 인산화가설을 이들이 증명한 것이 맞은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착각이었다. 물론 그 뒤에 인산화가설이 다른 이들의 발견으로 증명되었다. 우리에게 있었던 가설을 증명한 실험, 책 속에 등장하는 생화학, 분자생물학적 과정의 설명은 정말 배울만한 것 같다. 쉽고, 정확하게 단계단계적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한다면 과학에 담을 쌓은 많은 사람들을 과학의 품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편의 글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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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남자들"에 이어 두 번째로 후쿠오카 신이치의 신간을 리뷰어로서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글쓰고 이야기 풀어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도 꼭 읽고 싶어졌다. 그를 일본의 정재승이라 불러도 좋을까 싶다. 과학자이면서 참 잘 읽히는 글을 쓴다. 인문학적, 문화예술적 소양도 엿보인다. 생뚱맞게 등장한 권두화 몇 점은 호기심을 자아내고, 책 전체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니 이미지와 텍스트가 상호작용하며 함께 말하고 있다. 그림, 사진 뿐 아니라 하루키의 "랑겔한스 섬의 오후",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고린도전서 같은 인용문들 또한 반가웠다.
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공부하면서(사실 '교육'보다는 '철학' 자체에 포인트를 두게 된다) 과학과 철학(혹은 종교, 윤리, 형이상학...)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보게 된다. 중세에는 과학이 종교에 봉사했고 근대에는 철학자가 몸소 최신 과학 지식을 공부했다는데 현대에 와서는 그들 사이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이미 암묵적으로는 과학이 철학을 잠식하고 싶어하고, 요즘 유행하는 '통섭'이라는 것도 과학을 토대로 인문학을 포섭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서양근현대철학특강' 강의를 들으면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와 '형이상학 입문'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일찌감치 과학과 형이상학은 사용하는 방법이 전혀 다름을 주장했다.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을 나누고 쪼개서 시공간 안에 정지시켜두고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개념이나 부호를 통해서 사물을 온전히 인식했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완전한 직관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우리는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 안으로 들어가 'sympathy'해야 하는데 이것이 직관이다. 분석의 방법으로는 정지된 부분 이외의 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그것들은 도망가기 때문이다. 이 "나누고 쪼개도..."를 다 읽고 나니 저자는 베르그송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싶어졌다.
부호들을 조작해서 어떻게 실재를 만든단 말인가. (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형이상학 입문', 문예출판사, p.220.)
과학과 철학의 첨예한 대립 구도에서 심정적으로 철학의 편에 서 있는 나로서는 세상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고 앞으로 인식할 것이라고 믿는 일부 과학자들의 태도를 볼 때 위험해보인다. 그들의 연구 대다수가 우리 삶에 유용한 것들이므로 열심히 연구하는 그분들께 참 감사하지만 그 중 몇%라도 잘못된 판단을 내려 생명을 어그러뜨린다면 생명은 많은 비용을 들여 조정에 들어갈 것이다. 거의 인재에 가까운 자연재해, 유전자조작 같은 것들이 두렵다. 그런 면에서 제목부터 철저히 겸손한 자세를 일관하는 저자의 마인드가 멋있다.
어쩌면 형이상학에만 베르그송의 직관이 사용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과학자는 가설을 세우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관찰을 한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이기에 관찰자가 가진 의도는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내릴 여지를 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언급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연구 과정을 '날조'한 사건은 과학이 철저히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날조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이 가설을 세우는데 활용했던 능력도 일종의 직관이 아닐까. 결과를 빨리 뽑아내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아쉽지만 의미 있는 주장을 함으로써 다른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세계를 질서지워 이해 하고자 한다. 우리도 모르게 저지르는 많은 착각들은 인간이 사실은 질서가 없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해 인식하려고 함을 증명한다. 뇌과학 서적들이 다루는 시각에 대한 이야기들은 세상이 우리가 보는대로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본 것을 뇌 속에서 재구조화해서 인식하기도 하고, 뇌가 가지고 있는 구조에 짜맞추어 알기 편한대로 추측해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 세상을 잘못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래의 글이 이 책의 핵심인 것 같아 발췌해본다. 우리가 공부해야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마음에 든다.
봤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헛것 예전에 한 어린 독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해야만 하나요? 그때 나는 충분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충분한 대답을 해줄 자신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색의 그러데이션을 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불연속적인,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경계를 보고 만다. 거꾸로 불연속적인 점과 선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이어서 연속된 모양을 만들고야 만다. 즉, 우리는 원래는 관계 없는 것들에 인과 관계를 부여하려는 성향이 있다. 왜 그럴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속을 분절하고, 뿐만 아니라 경계를 강조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 불규칙적으로 추이하는 자연현상을 억지로라도 연관지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가 익혔던 지각과 인식의 수로(水路)는 지금도 엄연히 우리 내부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수로가 정말로 생존하는 데 유리하고, 정말로 안심할 수 있게 해주며,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져다 주었을까? 사람의 눈이 오려낸 ‘부분’은 인공적인 것이며 사람의 인식이 발견한 ‘관계’의 대부분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보려고 하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봤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헛것인 것이다. 세상은 나누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눴다고 해서 정말로 아는 것도 아니다. ‘Powers of ten’(책 앞부분에서 언급한 영상물)의 저편에서 마이크로적인 해상도를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 ‘Powers of ten’의 이편에서 매크로적으로 조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우리는 한눈에 세상 전체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왜냐하면 목적 없는 해상과 조감의 반복이 세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 거칠다. 거칠게 보이는 것은 사실 한없이 매끈하다.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 현실의 실상을 알기 위함이다. 후쿠오카 신이치,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과학자들은 왜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일까』, 은행나무,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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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라는 이름의 환상 여기 책상이 있다. 의자가 있다. 연필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물체다. 아기들도 몇 개월만 지나면 그것들이 하나가 아니라 따로따로 별개의 물체라는 걸 안다. 그렇다. 개별적인 기능을 하는 개체다. 책상의 각 기능적 부품들, 네 개의 다리, 모서리, 판은 책상을 구성하는 요소다. 다른 곳에서 떼어서 붙이는 게 가능하다. 컴퓨터, 자동차, 냉장고, TV, 시계 등등 온갖 물건들은 많은 개별 부품들이 모여져서 하나의 물체가 된다. 그 개별 부품들은 다른 부품들과 구별되고 분리되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나사로서, 엔진으로서, 문짝으로, 다리로서 비슷한 스펙의 어느 곳에 접합해도 가능한 특수한 기능들을 가졌다.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사람 얼굴을 그릴 때 동그라미 속에 눈, 코, 입처럼 생긴 모양들을 채우고 그 얼굴에 선으로 팔과 다리를 그린다. 그렇게 아기들은 사람들의 눈과 코와 입을 개별적인 기능적 모듈로 인식한다. 과학 시간에 무지개의 색깔이 빨주노초파남보 7개라고 배운 어린이들은 무지개를 그릴 때 7개의 색깔로 무지개를 표현한다. 그런데 색과 색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아, 어떤 문화권에서는 무지개 색깔의 개수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7개의 색깔들 사이에는 우리가 명명하지 않은 수많은 색깔들의 점차적인 변화가 있다. 우리가 경계로 인식한 것들 사이에는 사실상 수많은 점진적 변화가 있다. 얼굴 위에 붙어 있는 입술과 얼굴 판 사이에는 명확하게 선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수많은 점차적인 변화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신경망과 근육과 세포와 그 사이를 통과하는 화학물질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우리의 모든 기관들을 하나의 개체로 묶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들은 로봇의 부품처럼 하나씩 살살 돌려서 떼어낼 수 없다. 따로 떨어진 것 같은 부분들은 사실상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용함으로써 한 사람의 정체를 형성한다. 경계는 인위적으로 그은 선이다. 인간은 분류를 좋아한다.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그라데이션 띠를 보면 사람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한다고 한다. 뇌는 경계 없는 색들의 변화 사이에서 경계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얼굴 속에서 눈과 코와 입들을 떼어내어,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세포들, 신경망들, 혈관 등 보이지 않는 연속적인 변화들의 사이에서 엄격한 경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과 교감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봄에 섬진강변에는 벚꽃이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이 있는데, 그곳을 운전하고 가다 보면 어디부터가 전라도인지 어디부터가 경상도인지 모른다. 실제 땅에는 우리가 지도에서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지도가 그어놓은 경계선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억양과 정치적 성향과 출신 같은,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할지도 모를 것들을 그 가상의 경계선이 결정한다. 세상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아주 작은 세계를 평생 연구하며 사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흩어져 살면서 이곳저곳에서 다른 작은 구멍을 판다. 그렇게 파가는 아주 작은 구멍은 깊고 또 깊어서, 언젠가는 지하 수맥에 도달하고 '어두운 곳을 흐르는 물들이 서로 소통하는(p.8)'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지식의 확장은 그런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 그중에서도 트립토판이 타이로신을 만드는 과정의 중간 단계에서 생성하는 퀴놀린산이라는 독성 물질을 연구한다. 퀴놀린산이 과다하게 많으면 글루탐산 수용체에 결합하여 신경을 흥분시키고 뇌세포를 손상시킨다. 퀴놀린산은 전용해독 효소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므로, 해당 효소가 분비되는 이상 뇌세포의 손상은 없다. 저자가 파는 작고 깊은 우물은 이 퀴놀린산 해독 효소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좁고 깊은 우물에 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과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수필집이다. 그가 가진 그 좁고 깊은 지식의 원리가 드넓고 무한한 세계로 확장되는 과학자의 사색과 상상력에 대한 내용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문학적이고도 아름다운 문체가 줄곧 책을 놓을 수 없도록 시선을 끌다가, 마지막 장은 실제 있었던 조작 실험 내용을 마치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으로 흥미진진하게 엮었다. 서로 다른 주제의 글들이 서로 다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들은 책의 전체 주제로부터 미묘하게 결합된 지점이 있고, 또 장과 장 사이에서도 연결고리들이 있다. 전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하나 모래알갱이처럼 흩어져 있는 개별 문장들, 개별 언어의 지식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모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5장 이식 TRANPLANTATION은 다른 장의 많은 주제들과도 만나며 전체를 통합한다고 느꼈다. 경계라는 것의 인위성에 대한 성찰로 시작되는 이 글은 과학적 지식과 통찰로 관찰하는 세계가 실제로 생활하는 세계와 얼마나 절묘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름답게 사유한다. 작가는 와타나베 고라는 사진작가가 TRANSPLANT라는 제목으로 완성한 시리즈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 사회 안에 있는 베트남 이주민 주거지구, 독일에서 브라질로 건너온 사람들의 집과 교회, 싱가포르에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의 모스크,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이식된 문화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진들이다. 그 중 'Boarder and Sight'라는 국경의 어떤 지점을 쌍방의 관점에서 찍어 두 장이 한 세트를 이룬 작품들에 대해 주목한다. 이 국경 사진들에서 작가는 '경계'를 포착해서, 그 경계의 개념을 다시 인간의 몸을 향해 들이댄 현미경 속에서 찾아낸다. 아기들이 그리는 사람은 아기들이 본 것, 전체에서 본 부분이다. 인간의 몸은 실제로 단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출발한 세포의 연속적인 변화일 뿐이다. 그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자의 교환, 에너지의 교환, 그리고 정보의 교환이 흐르면서 생명이 유지된다. 개별 장기는 별도로 만들어진 기능성 모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세포의 그라데이션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기라 부르는 '부분과 신체 사이에는 기능적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점차적인 변화만 있을 뿐 그 어느 곳에도 뚜렷한 경계인 여기부터 자르시오를 의미하는 점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이러한 경계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서, 인공적인 장기 이식에 대해 사유하고, 또 그 이질적 공존 관계를 더 넓은 차원의 세계 속으로 확장한다. 식물들의 이식, 문화적인 이식 같은 것들 말이다. * 네이버 오늘의 책 4월 마지막주에 올라왔습니다. 책이 어려운 부분과 공감되는 부분이 섞여 있어,통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은 2달 전쯤 따로 리뷰로 올려서 원성을 샀습니다. ** 비교적 이해가능하고 특히 깊게 공감한 부분만 남은 리뷰인데, 최근 제가 쓴 리뷰 중에서 가장 정성껐(?) 썼는데, 네이버 오늘의 책에 발행된 다음 날 보니, 악평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뭐 리뷰에 대한 악평인지, 책에 대한 악평인지 알 수 없었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악평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유치원생도 쓸 수 있는 글을 썼다는 표현을 봐서,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개인블로그에 쓰는 것과 네이버 오늘의 책에 선정되는 것과는 교통량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부담을 가지고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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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오늘의 책 리뷰에 넣으려고 썼는데 너무나 길어져서 통편집. 네이버에서는 못보고, 예스24에서만 볼 수 있는 미공개 본문 정리 쯤. 나머지 본문은, 발행 후 공개~ 생물의 세포 안에 존재하는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다. 국제 약속에 의해 이 20종의 아미노산에는 알파벳이 할당된다. 알라닌 A, 아스파라긴 N, 타이로신 Y, 글루탐산 E. 영어 알파벳 중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것은 E이다. 아미노산 중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것도 E 글루탐산이다. 단백질이 있는 곳에 글루탐산이 있다. 생물체는 글루탐산을 맛으로 느낀다. 반대로 사용빈도가 가장 낮은 아미노산은 트립토판 W 이다. 트립토판이 뇌 안에서 대사되면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으로 변한다.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이 우울증/수면장애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독자들은 그것들의 생성을 위해 트립토판을 취하면 어떨까 생각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극도의 영양부족이 아니라면 트립토판 결핍으로 멜라토닌/세라토닌이 부족한 경우는 없다. 엉터리 상술은 언제나 작은 지식의 누수를 먹고 자란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만, 일본에선 건강식품으로 나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트립토판이 단백질 중 가장 희귀한 필수 아미노산이라는 희소성이 부족에 대한 공포와 강박증에 대한 결과로 이어진 거다. 타이로신 역시 희귀한 방향족 아미노산으로 뇌내에서 도파민, 아드레날린 노르아드레나드 등의 주요 신경전달물질의 재료가 된다. 역시, 각성효과, 집중력 향상, 항우울 작용 등의 효과를 내세와 영양제화 되어가고 있지만, 인공적 섭취의 효과는 없다. 뇌내 대사는 타이로신 섭취와 관계 없이 항상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 글루탐산은 뇌안에서 신경전달물질을 주고 받을 때 쓰이는 신호물질로 뇌 안에서 합성된다. 뇌의 방어 시스템은 글루탐산 수용체와 반응하는 독성물질인 퀴놀린산이 혈류를 통해 뇌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트립토판은 타이로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퀴놀린산이라는 중간단계의 독성물질을 생성하는데, 퀴놀린산이 과다하게 많으면 글루탐산 수용체에 결합하여 신경을 흥분시키고 뇌세포를 손상시킨다. 뇌의 방어벽이 글루탐산은 차단하지만, 필수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은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퀴놀린산은 전용해독 효소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므로, 해당 효소가 분비되는 이상 뇌세포의 손상은 없다. 저자가 파는 작고 깊은 우물은이 퀴놀린산 해독 효소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아미노산은 아미노기(NH2-)와 카복실기(-COOH)라는 구조가 있는데 아미노산의 결합은 한쪽 아미노산의 카복실기와 다른 아미노산의 아미노기가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카복실기의 OH가 떨어져나오고 아미노기의 H가 떨어져나와 한쪽은 안정화된 물H2O가 생기고 남은 -CO와 NH-도 파트너를 찾아 합체하여 -CO-NH라는 안정적 결합을 성립시킨다. 생명현상의 질서는 여러 종류의 아미노산이 어떤 순서로 연결되느냐에 의해 구축된다. 아미노산은 말하자면 알파벳이고,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는 알파벳으로 쓰인 문장에 해당한다. 생명체는 고유의 문법과 문체(DNA)에 따라 구성된 단백질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소화효소는 단백질에게 다가가 간지럽히고 비틀고 잡아당겨 아미노산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CO-NH 결합을 흔든다. 다양한 소화효소에 의해 단백질이 다양한 형태로 잡아당겨지고 비틀리면서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된다. 소화란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원래 생명체였던 전주인(음식)의 정보를 분해하는 것이다. 아미노산 배열 형태로 가득들어있는 전주인의 고유 정보가 우리 몸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면 몸 내부의 고유의 정보계가 충돌, 간섭, 혼란이 일어난다. 이것이 식품 알러지, 이식거부 반응이며, 소화효소는 끊임없이 다른 생명체였던 단백질의 이야기와 문장을 해체하여 그들을 의미없는 개개의 알파벳 즉 음소단위로까지 철저히 분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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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이자 책벌레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찌기 '도쿄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강조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수재들의 모임이기도 한 도쿄대 학생을 한순간 '바보'라고 부르는 까닭이었으며, 이어서 이 책의 내용은 서울대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불똥이 튀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란 다름 아니라, 이른바 고교시절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문과생만이 '인문, 철학'을 공부하고, 이과생만이 '수학, 과학'을 공부해서는 결국 반쪽짜리 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얼른 인지하지 못한다면 <도쿄대>도 <서울대>도 희망을 엿볼 수 없다고 따끔하게 충고한 내용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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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재는 소설을 싫어한다. 폼재는 사람도 싫고 폼만재는 인생도 싫다. 폼재는 책은 더더욱 싫다. 왠지 분위기 띄우면서 내용 헷갈리게 오리무중으로 쓰는 글이 싫다는 얘기다. 자연과학책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자연과학책을 쓰는 사람들중엔 다행히 분위기 띄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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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굉장히 많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 깊이 겸손해지는 내 모습, 그저 책속 이야기가 신기하고 감탄스럽다. 글의 소재가 내가 그동안 관심 있게 생각해 온 것들이 아니라서, 낯설고 처음엔 확 와 닿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저자님의 생명과학에 대한 연구 집념이 느껴져서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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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현상의 본질인 세포와 그 화학물질의 차원까지, 그리고 회화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한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그야말로 경외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유쾌하고 지적인 산책길로 안내한다. 분자생물학, 생리학의 시시콜콜한 실험과정으로부터, 때론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으로부터, 대학의 생물실험연구소의 일화로부터, 편의점 삼각 김밥 포장지에 명기된 함유물질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과연 진실인가, 아니 어느 한 부분에 불과한 것,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생명의 안전한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환상은 아닌지를 사색한다. 저자가 안내하는 사유의 여정은 화려한‘게티 미술관’에 걸린‘비토레 카르바초’의 작품, <라군에서의 사냥(Hunting on the Lagoon)>과 이태리 베네치아의 차타레 강변과 인쿠라빌라(Incurabill)라는 수로에 얽힌, 한 일본 작가의‘비토레 카르바초’작품 <코르티잔>의 감상과 얽혀 낭만적 골목길에서 멈추어 서게 한다. 그러나 마냥 두 걸작품에 대한 소회에 머무는 것은 아니고, 미국과 이태리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 걸린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거대한 한 작품의 부분임을 알게 되면서 소위 미술평론가들이라는 전문가들이 떠들어대던 그 호사스런 해석이 초라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앎이란 것의 실체란 것이 그리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만큼 미세한 분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래서 우리 비전공자들이 이해하기 수월한 예를 든 것이 곧 김밥이다. 편의점에 놓인 김밥의 유효기간, 납품돼서 진열대에 놓여 판매되는 시간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첨가되는 물질에‘소브르산’이란 것이 있는 모양인데, 임상실험결과 인체에 유해하지 않기에 사용되고 있단다. 이러한 실험이란 것이 인간의 생체에 진정 무해한 것인지는 사실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임에도 부분적일 밖에 없는, 고작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분석에 의존하여 판단을 내린다. 사람의 대장에는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보다 많은 장내 세균이 있고 이 세균이 정장작용을 도우며 공생하고 있다. 소브르산이란 일종의 방부제는 미생물의 번식에 장애를 일으켜 그 증식을 억제하여 부패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사람의 장기 내에서 사람의 생명활동을 지원하는 세균들은 무차별적으로 이 소브르산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니 결국 간접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란 얘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신뢰 할 수 있는 앎, 진정 아는 것이기나 할까? 이 저술의 현미경 배율을 예로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배율을 갑자기 높여 대상물을 가까이 끌어당기면 그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즉 그 물체가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 그 화면의 우측에는 좌측에는 위에는,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도리가 없게 된다. 이 확대된 대상물은 본래의 세계 속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우린 전체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주변의 전경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부분을 정밀하게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일게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예가 소개되고 있는데, ‘지도 의존형’ 인간과 ‘지도 무시형’인간의 행동 양식으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은 정작 누구일까 하면 지도 의존형이란 것이다. 전체를 조감하고 목적지의 그 방향과 위치를 찾으려는 행위가 감만 가지고 자신의 전후좌우와 관계성만 가지고 찾는 지도 무시형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에 익숙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포가 타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인데, 세포는 결코 자신이 인간의 신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성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으로, 오직 주변과의 관계성에만 의지하여 모든 세계를 구축하는 분산적 행동을 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보성이라 하는데, 생명의 신비, 자연,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경외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정상적 세포의 행동,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증식과 억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포와 달리 어느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무한 증식하는 세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암세포이다. 마치 그 행동이 인간 사회에 만연한 탐욕스런 속성의 그 파괴성과 닮은 꼴 같기만 해서 우리 눈의 해상력이 0.01밀리미터의 식별까지만 가능하기에 망정이지 해상력이 더 뛰어났다면 끔찍했을 것 같기만 하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눈의 해상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딱 이만큼만 보이도록 진화한 것은 기막히게 균형적인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조금은 겸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 아는 것이 결코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낭비적이고 몽매한 암세포의 얘기는 코넬대(大)의 한 연구실험의 일화로 이어지는데, 이 암세포의 증식과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을 밝혀내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다. 이러한 인간의 갈망은 한 대학원생 연구자의 강박과 지도교수의 보고자하는 기대감이 결합하여 실험을 조작하여 가설을 입증하는 쾌거를 창조하는 것인데, 결국은 과학계의 대 스캔들로 과학의 깊은 불신만 낳았을 뿐이라니 그‘앎’에 대한 과욕이 실질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안타까운 얘기이도 하다. 이처럼 흥미로운 분자생물의 세계와 여러 에피소드들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 사람의 인식이 발견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의 보기들이다. 우리들,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밀하게 이해하고나면, 또한 이들 부분들을 모으면 올바른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데 기초하고 있다.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여 선명하게 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들은 보충해서 보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앎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눈, 세포의 행동양식, 밤하늘의 별빛,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 아미노산과 같은 분자생물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앎의 본질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보는 것은 망상, 인공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임을. 세상에 부분이란 것은 없다. 어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쪼갤 수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면 그 본성, 본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을 모두 집합하면 우리가 된다. 허나 그 세포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란 존재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계의 순간이란 것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인가? 생명의 본질, 안다는 것의 본질, 그것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에너지와 정보가 유발하는 효과, 그 흐름에 있다는 통찰력은 아마 이 저술의 차원을 저 높이 올려놓는다 할 정도로 거룩하게 인식된다. 명확한 구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린 모두 볼 수 없으며, 결코 모두 알 수도 없다. 우린 아는 것이 없다. 더욱 겸허해져야 할 터이다. 지금보다 더욱 더....그것이 바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되뇌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