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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 1) 학자가 썼으니 딱딱하겠지? 아닙니다. 2) 신학생만 보면 되겠지? 그것도 아닙니다. 3) 난 기독교인 아닌데? 그러므로 그대에겐 4) 쉬운 책은 내용이 별 것 없더라? 이 책은 다릅니다.
2. 편집과 구성 1) 표지 눈길 끄는데? 신학서적다운 고전적인 느낌과 2) 디자인만 좋은 거야? 표지의 질은 놀랍습니다. 3) 양장본은 다 똑같다? 오, 노~!
4) 속지는 다 그게 그거겠지? A4 복사용지 70g짜리와 80g짜리의 차이를 느껴보셨나요? 5) 그래봤자 별 차이 있겠어? 음식의 맛을 알려면 눈으로만 봐선 안 된다는 건 상식이죠? 6) 인쇄 상태가 그렇게 좋아? 그럼요. 3. 가격 슬프도록 싼 가격입니다. 12,800원. 4. 선물 고민 끝! 다가오는 어버이날, 스승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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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동건교수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친구가 빌려줘서 그냥 별 기대없이 이 책을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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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벌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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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면서 품었던 많은 고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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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신학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 한권으로 인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신앙적 고민을 신학적인 명쾌함으로 답을 제시하며 저자의 깊은 기도의 땀방울이 스며있는 글임을 알게 될 것이고, 또 저자가 한국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비판 일색의 학문적인 신학 책이 아니라 독자를 향한 진한 사랑과 관심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신앙적 고민을 풀어주는 명품강의이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독자는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읽어보시길 그러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적극 추천하는 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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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구나' 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신학서적들이 나왔지만 이렇게 명쾌하면서도 쉽게 내용이 전개된 것을 보며 저자의 학문적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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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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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저는 목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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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현대인을 위한 신학 강의
김동건
대한기독교서회
올바른 신앙관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에서
이리저리 듣고 배운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생활과 행동 속에 적용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러다보면
지금 내가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그저 막연하고 정확하지 않은,
대략적인 생각으로 내 신앙이 둘러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단들이나 믿지 않은 이들의
몇가지 툭툭 던지는 질문과 반박에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류의 책은 읽어 둘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성경, 죄/율법, 고난, 운명, 기도, 거듭남, 성령의 은사, 타종교와의
관계, 은혜, 죽음, 부활, 유토피아라는 주제에 대해 기독교인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아주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해 준다.
마치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데, 그 내용이 쉽게 이해되지만 그 무게는 묵직하다.
믿는자에게 고난은 어떤 의미인가, 기독교의
구원은 배타적이지 않은가? 복을 비는 것이 옳은 일인가? 운명론과
예언은 비슷한게 아닌가? 등등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면 답하기 까다로운 내용들에 대해 신학적인 내용을
조곤조곤 풀어낸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실뭉치처럼 두리뭉실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느낌이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어 그게 뭐였지?'했던 것들도 조금 명확해지고, 알고 있던 내용들도 체계적으로 정리되다보니 '맞아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제목에 '신학'이라는 말이 들어가 너무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서두에서처럼, 이 책은 '신학'이라는 것이 단지 이론적인 작업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성경의 내용을
일관되게 보도록 하는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며, 신앙과 사회 생활의 분리를 막아줄 수 있는 토대이며,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나아갈 바를 보여주는 것으로 거창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학을 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사실, 신학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이 학문이라기보다는 신앙인의 자세, 관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
과연 나는 어떤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내 삶과 교회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는게
어떨까? 특히 내가 어떤 관점에서 어떤 생각으로 내 삶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내 삶의 방향과 질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통해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위치를 다시한번 점검하는 것은 투자한 시간에
대해 훨씬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익이 되는 일이니 해볼만 하지 않은가
#56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결코, 단 한순간도 인간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가지고
와서 자기 앞에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이 주체입니다. 말씀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주체로서 다가오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구원의 주체는 오직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64
율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죄의 개념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율법에 대한 해석에 따라
율법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관점과 인간이 지켜야 되는 율례로
보는 관점이비다. 예수님에게 죄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 것이었고, 바리새인에게는
율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66
성경이 율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빼버린다면, 율법은 화석처럼 경직되고 인간을
정죄하는 법이 될 뿐입니다.
#68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삶의 목표와 의미를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보았습니다.
#74
주일성수나 헌금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인들에게 주일성수를 권하고, 헌금의 의미에 대해 잘 가르쳐야 합니다. 경건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중에 신앙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가 있으면, 목회자는 잘 권유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 잘하고, 헌금 잘하고, 성경 공부에 잘 참석하는지
여부가 죄나 신앙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일 성수, 헌금, 경건생활, 성경공부
모두 그 자체로 귀하고 중요하나, 결코 이들을 율법적으로 만들어서는 은됩니다.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것은
율법이 됩니다, 이를 행하면 거룩한 자가 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됩니다. 이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화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죄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을 벗어나 인간이 지키는 율례가 됩니다.
#78
젊은 분들은 삶의 목표를 설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죄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지치더라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인내하십시오. 다시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끈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79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표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해서 겁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큰
성취를 해야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삶의
의미'를 다시 율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취 여부에 따라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취가 기준이 되면, 삶의
의미가 율법화된다는 말입니다.
#92
신앙인이라고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난이 피해가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도
사고를 당하고 질병에 걸립니다. 여기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당한 후, 어떻게 응답하는지에서 차이가 납니다.
#94
진정한 신앙인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나아가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주는 물리적 고통과 심적 고통을 겪지만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고난을 통해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105
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결정론에서 말하는 예언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의 예언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뜻은 현재적으로 전하는 행위라면, 결정론의
예언은 무신론적이고 기계적으로 고정된 미래를 지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자는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복술자나 점쟁이가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섭리해 나갈지를 알리는 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의 역할은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106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정된 기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잘못을 보시고 진노해서 심판하려다가도 인간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용서해 주시는 예가 무수히 나옵니다.
#109
하나님이 현재의 역사를 인도해서 역사의 완성까지 다스리는 것에 대한 주제는 '섭리론'입니다. 섭리론의
근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해서 그냥 버려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끊임없이 관계하면서 이 역사의 완성까지 인도하신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역사와 우주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123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정한 시기에 당신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선한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 순간에는 알아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의 방법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124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기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기도의 모든 응답을 물질이나 부귀같은 몇가지의 세상적 기준에 국한시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134
거듭남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자기 변화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거듭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137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다'는 의인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은 '오직 은총'으로 의로워진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칭의 교리의 핵심은 '의'가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의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의'는
덧입혀진 의이며, '그리스도의 외래적 의'입니다. 인간에게는 생소하고 이질적인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오직 은혜로
인간에게 전가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칭의이며 의인의 의미입니다.
#143
말씀을 읽고 기도만 하면 신앙이 활력을 잃고, 봉사만
하면 신앙적인 영성이 흐려진다. 이 두 요소를 함께 병행하면 신앙이 튼튼해지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165
성령님은 인간의 특정 측면에만 작용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그 '인간'에게
임합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형태' 속에서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인간에게 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인식의
깨달음을 통해서도 가능하며, 설교나 대화를 통해서도 임하실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과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애쓸 때도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 노력하다가 깨닫게 되는 성령님의 지혜 역시 같은 은사입니다.
#186
성경에 바탕을 둔 구원론의 구조를 보면,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구원자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려면, 성경의
중심 진술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 정체성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187
그 종교의 정체성이 없어지면 타종교와 대화하기 위한 토대도 함께 없어지는 것입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중략).. 기독교는 구원의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는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기독교에게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라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경전성을 포기하고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포기하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배타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주장입니다.
#188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지에만 초점을 맞춰 배타성을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정신에서 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오직 예수'는 우선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헌신을 지시하는 말이지, 배타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누구나 많은 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함께했고, 당시 유대교에서 죄인으로
칭해지는 창기와 세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모두를 받아들였고,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차별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은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구원의 총체입니다. 성경의
구원론의 기저에는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개방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203
'일방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행위가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지, 인간의 요청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적'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기 위한 어떠한 선제적인 노력이나 자격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은혜를 받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207
뒤늦게 포도원에 온 일꾼처럼, 탕자처럼, 1만 달란트 빚진 자 처럼, 간음한 여인처럼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대가없이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에 대한 책임성은 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자에게 무슨 책임성을 묻겠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단지 은혜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10
아무런 헌신도 없이 은혜와 책임의 영역을 질문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거나, 혹은 '책임성'의 개념을 모호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체험하면 그에
따른 소명이 올 것입니다. 이 때 소명은 책임감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자시에 대해, 가족에 대해, 이웃에 대해, 민족에 대해, 역사에 대해 명확한 기독교적 책임성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211
기독교인의 책임성은 건조한 의무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실천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책임성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므로 언제나 감사의 모양을 가집니다. 책임감은 은혜받은 자의 사명으로, 즐겁고 힘찬 신앙의 표현입니다.
#263
기독교인은 현재의 가능성에만 의지해 희망이나 절망에 처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미래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믿습니다. 현재 자신을 볼 때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에 대해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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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
“신학과... 나오셨어요?”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마다 듣는 이야기다. 신학을 공부 했다는 자체가 상대방에게는 굉장히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들에게 자연스레 생기는 편견. “딱딱함, 고리타분함, 재미없음”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는 일반 교인들도 신학에 대한 인식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는 ‘신학’을 너무 열심히 공부하면 신앙의 열기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신학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틀을 깰 수 있으며, 신앙인을 보다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만든다.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의 저자 김동건이다. 저자는 신학 공부를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성경의 내용을 일관되게 보게 하며,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나아갈 지평을 보여준다. (8~11p.)’고 말하며 신앙의 ‘중심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주제들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역사적 산물인가?,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율법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복을 바라는 기도는 잘못된 것인가? 기독교에서의 죽음과 그 이후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희망과 유토피아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같은 목차들만 보더라도 신학이 우리의 생활과 얼마나 긴밀히 밀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사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신앙인들은 모두 다 자기만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 그 신학은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부터, 그리고 자라오면서 주위의 사람들과 책으로 만들어진 신학 즉 하나님에 관한 체계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성경과 신앙생활을 한쪽으로 왜곡되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앙인들의 특징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상이한 신학들을 가지고 누군가 접근하거나 대화하려 할 때 굉장히 불쾌해 하며 거부하며, 심지어 이단시 여기는 경우도 많다. 이같은 상황에서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는 우리의 신학을 균형 잡아주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틀(frame)을 깰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가 12개의 주제들 가운데 ‘고난, 타종교, 나라’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단어들이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이 단어들에 대한 선동의 이야기들이 난무하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물질과 건강의 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이 같은 고난을 겪는 것이다.” 이같은 언급은 잘못된 신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이웃의 아픔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독선적인 주장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물러서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난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에게 구별없이 옵니다. 세상에서의 고난이나 성공이 신앙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도 신앙을 측정할수 없습니다.”(91.p) 더 나아가 저자는 타 종교의 배려없이 사원에 가서 찬양을 하며 동영상을 찍는 다는지, 기독교의 신앙을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교리만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바른 신학을 제시한다.기독교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류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만인 제사장 주의를 따른다. 따라서 개신교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체계 즉, 바른 신학이 중요하다. 바른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누리고 교제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신학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내려놓고 다시 한번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출처] 나에게 필요한 강의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작성자 맑은 하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