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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어느 프로에서 사학을 강의한다는 어느 아주머니가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박물관에서 '고종황제는
우리나라의 최조의 황제에요' 그럼 충렬왕 이전의 고려황제들은 무언가 백제 수장들도 황색옷을
입었다. 이 책의 내용도 똑같다.
책의 내용 하나하나 짚기전에 기본적인 책부터 나열해보자
대쥬신을 찾아서(다른 책을 안읽으시더라도 이 책만은 꼭 일어보세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풍수화 성서의 뿌리p63,254 돈가스의 탄생 헌혈,사랑을 만나다 국운풍수p294~297 거란제국사연구 대망 노래하는 역사 살아 있는 백제사/이도학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정수일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일본의 상도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요시츠네 후쿠자와 유키치 료마가 간다 풍신수길 백제와 백제한자음 백제어 팍스 몽골리카와 고려 아나타는 한국인 구태훈의 일본사등 일본사책들 낙선재의 마지막여인 덕혜옹주 오키나와 현대사 딱정벌레 박해일p287,483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 원흉과 원훈의 두얼굴
페이지142 대쥬신을 찾아서 먼저 읽으신후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국운풍수 294 읽고
장예모감독이 만든 '진용' 을 보신후 다시 p142 읽으시면 중국의 교묘한 동북종정트로젝트가
보이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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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 거란 위의 동북공정 내용이 의심이 가신다면 10세기 중엽에 나타나기 시작한 거란에 대한 이야기
<거란 잊혀진 유목제국이야기> 리뷰에 제가 [만일 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동해,일본해&성폭력범죄자의 특징] 제목의 글 올렸으니 참고삼아 보아주십시오p85 이성계는 나라를
통채로 중국의 식민지로 만든 역모의 수괴입니다. 대마도공략등 전쟁은 공민왕과 우왕시절의
이야기입니다.<욕망하는 지도>
이 책 리뷰읽는데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꼭 좀 한번만 읽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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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36만주가 한반도의 몇배 넓이인데 한반도보다 작다 다른지도도 마찬가지다 p56은 더 작다.
또 거란은 이당시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나라이다.
쓰쓰는 백제식한자음입니다 <풍수화68>
진구황후란 나라를 잃은 백제유민들이 자신들의 울분을 풀기위해 지어낸말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갔을때 도술을 보렸다는이야기를 우리가 어렸을적 믿었던것처럼..
진구황후할떄 아기가 나오지 못하게 하기위해 배위에 바위를 얹고 줄로 묶었다는 황당한이야기등
여러가지 허구적 이야기들을 빼고 그냥 기승전결이 아닌 기결로 끝낸다.
흐지부지식논법.
일본말로 물은 미즈인데 한국어 미꾸라지,미역,미나리 모두 물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의 잔재들입니다.
페이지52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김춘추를 뛰어난 외교관이라고 평가하다니요
당신 정신이 바로박힌 사람입니까 그런 지금의 한국외교부장관이 중국의 시진핑수석과 만나 통일에
도움을 주면 평안도와 함경도를 넘겨주겠다고하고 평양이남을 우리가 차지하고 통일이 되었다고
기뻐한다면 제 정신이라고 생각됩니까 생각좀하시고 글을 쓰세요
일본천손강림신화를 보면 천신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남매간으로 그 부모는 이자나기,이자나미였다
[삼국사기]에는 고령 대가야의 시조는 이지아키로 그후 16대가 520년간 이어졌다고 쓰여있다
[풍수화/김용운]
박제상의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하시려면 김용운교수님의 책 2권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풍수화 꼭 읽어보시고 시간나시면 헌혈,사랑을 만다다p54 읽어보시면 왜가 어디소속인지 아실겁니다.
야마토는 고대한국어로 야마는 산,하늘,높다,신령한이고 토는 땅,터,마을이란 뜻입니다.
하늘밑 신령한마을 높을고 신령령자를 쓰는 경상북도 고령땅에 있었던 대가야입니다.
1930년대 국사교과서를 보는 것 같다.
페이지66 삼국통일 정말 좋아하십니다 말갈을 고구려인과 따로 분리시킨 사람은 식민지사학자
시라카와 구라키치입니다. 만주로부터 한민족을 분리시키려는 술책이었습니다.<대쥬신을 찾아서>
말갈은 마가,우가,저가에서 마가를 다르게 부른 이름입니다.
금은 신라인 경주김씨 김함보의 5대손 아골타가 세운 나라로 그래서 '금나라'라고 한 겁니다.<송사>
윤관의 갈라전은 쏙뺏다.
페이지68 1867년이 아니라 1868년에 메이지유신이 일어납니다.
페이지70 항복했고요 이때 태자가 왕자로 격하되지요 삼별초는 박정희정권이 국민들의 애국애족읂 고취
시키기 위해서만든 신화입니다. 고려왕조실록/백지원,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p93/
페이지134 오희문 [쇄미록] - 한국,번영의길p73~77/공병호
페이지123 그림에서 신사앞 동물 두마리의 이름은 고마이누로 '고려'를 뜻합니다 <일본의 신사>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건 670년이 아니라 669년부터입니다.
임진왜란 <풍수화p406> 참조바랍니다. 중국의 이이제이전략에 놀아난게 임진왜란입니다.
무령왕릉 매지권의 사마와 스다하치만신사 인물화상경의 사마는 동일인물입니다.
지적할게 너무 많다. 임진왜란때 일본사신 야스히로의 이야기는 쏙 뺏네..
개로왕이 왜로 보낸 목만치와 소가노 우마코와의 관계도 없다.
페이지 42 가네가 중국4성조의 영향으로 금씨로 조선시대엔 오행에 의해 김씨로 바뀝니다.
페이지85 위화도회군이 아니라 위화도 역모다 조정래씨의<세종대왕>리뷰 간단하게 달았으니 확인부탁
페이지132 사대교린 초한지란 소설에도 성우에게 조공을 바쳤고 갈석산에 대해선 들어보셨는지요
당송은 거란에 조공했어요 그외에도 있으니 공부좀하세요
페이지111 오키나와 상인의 첩보가 명에 전달 <풍수화p406>
야마토를 지도로 표시할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정도로 노란색의 선도를 약간 조정해서
표시했다 얼핏보면 19세기말에 일본영토로 편입된 무쓰번 이북에서 대마도까지 야마토의 영토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제발 진지하게 책 좀 쓰십시오.
페이지119 경복궁에 불 안질렀습니다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페이지172 단식 안했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 한국사 상식바로잡기 꼭 읽어보십시오
페이지 164 당시 아랍국가들은 모두 영국식민지였는데 이 책에 제대로된 지도가 없다.
(그레이트게임,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호치민평전,팔레스타인 현대사)
페이지163 신미양요때 조선을 침략한 미군이 물러간건 링컨의 남북전쟁 때문입니다.
페이지158 마한,진한,변한을 합했다하여 큰한국 대한제국이라 부른겁니다.
이왕가에 대해선 그냥 '화족'이라고 통일해 부르세요
제목 :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고
한일어는 의태어 의성어가 발달했다. 슬슬 소로소로, 터벅터벅 토빠토빠, 깔깔 가라가라, 벌벌 부루부루, 줄줄 주로주로,
술술 스라스라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 삼천궁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썪은 무신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얼추 맞다. 군사정권에 목을건 삼별초도
어찌보면 조선말 사대주의자들의 시각에서 해석된건 아닐까.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그 뿌리다. 일본은 천황을 상징으로 남겨둔 채 중앙집권기인 에도시대 전까지 막부로 대표되는
지방군벌간의 천년 가까운 싸움으로 지방자치의 틀을 다지다 중앙지배로 하나 된 나라로
역량을 집적해 우리의 세종시대라 할 수 있는 메이지시대에 일본인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등장한 가스라 고고로, 후쿠자와 유키치, 도고 헤이하찌로, 무쓰 무네미스와 같은
근대사의 선각자들의 등장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져 막부로 다져진 지방자치와 에도시대의
중앙지배가 조화된 가운데 메이지시대를 거치며 현대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나라가 된다
. 이 복받은 역사를 가진 나라는 근원이 어디일까 최근 250만에서 1000만으로 늘어난
만주족의 정체성의 근원도 같이 느껴보자.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일본인 구다라(백제),만주족(고구려),한국(신라)는 같은 언어
같은 핏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란 증거를 제시하고자 구체적이고 긴 글을 올렸다. 만일 누군가 제 이론을 반박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와 같이 구체적인 자료로 반박해주시길
바라며 그냥 감정에 복받치는 소리치는 글로 반박하신다면 정신은 사라지고 단지
시정잡배들의 싸움으로 변질된 뿐입니다. 2002년 우에다 마사아카(일본의 저명한 원로사학자)교수는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조
대원진인은 비다쓰천황의 손인 백제왕의 후손이란 대목에 대해 우리 기자에게 어떠한
대답도 못한 채 우물거리다 인터뷰를 끝맺는다. 구다라나이는 가치가 없다란 뜻이다. 구다라는 백제의 국명이고 나이는 무엇이 없다 이니
원뜻은 백제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란 말이된다. 2001년 12월 23일 월드컵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천황이 자신의 몸속에도 한국인의
피가흐른다 는 즉 백제인의 후손이란 언급했고 일본언론은 아사히신문에서만 기사화했다.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이라 발언’ 함. 이방자여사도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천황가에선 숭늉을 마신다고 언급. 동경대 인류학담당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동료교수들과 공동으로 일본 각지의
고대 무덤의 두개골등을 통한 연구조사 결과 2300년전부터 건너온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인의 조상이란 사실을 규명하고 7세기초 백제유민이 대량으로 건너가기전
고대선주민인 조몬계와 도래계인 야요이계의 비율이 1대8.6으로 나타났다 이건
현재 일본인구 1억4천만명중 도래인의 숫자가 1억1천2백만명이 넘는다는 수치이다. 교과서에 실린 것만 보자 왕인, 한고안무, 수수보리, 아직기, 왕류귀, 오경박사, 호류지, 시
텐노지, 금당벽화 우리의 국보5호 일본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미륵보살은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고 한국인이 귀히 여기는 약지를 세웠으며 왕건릉에서
나온 인물상과 같이 유희좌를 하고 있다. 8.15광복후 우리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1호’가 백제관음상인데
일본사찰에 내려오는 기록에 백제에 서 건너왔다고 자세히 나오나 일본인들은 유럽에
순회전시할 때나 자국에서 전시할 때도 일본 고유의 작품이며 조선에서 안나는 녹나무로
만들었다고 떠들지만 녹나무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벚나무와 함께 건너간 수종이다. 스다하치만신사인물화상경이란 고대 청동거울은 503년 백제 25대 무녕왕이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에게 보내준 이 거울에 ‘사마’란 휘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에서 나온 매지권에 사마가 무령왕의 휘란게 밝혀졌고 거기
명문에 적힌 무령왕의 친동생인 왜왕의 쾌유를 빌며 이 청동거울을 내린다라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무녕왕은 물에서 태어났다하여 무녕왕인가 일본의 가카라섬 즉 왕이난섬이다. 무령왕의
껴묻거리중 여러 목재유물이 가카라섬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게 발굴직후
일본인학자에 의해 증명되기도 했다. 다른 이야기가 많지만 칠지도가 발목을 잡아 우선 거론한다. 전통은 계승된다. 군수뇌부가 결정되면 대통령은 칼을 장군에게 하사한다. 장군이 나라의
수반에게 칼을 올리는 일은 없다. 칠지도를 누가누구에게 올렸느니 내렸느니는
중요하지 않다. 칼을 만든 사람이 칼을 받는 사람에게 하사체로 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칼을 가진 자는 어떠한 적병도 물리칠 수 있다’란 명문, 어느 미친분이 그런 칼을
아무에게나 주겠는가 믿을 수 있는 같은 핏줄 아니면 어림없는 소리다. 백강전투에 패한 직후 왜군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며 왜군들이 귀소처의 상실로
눈물을 흘린 사실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712년에 지은 고사기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 그의 부친은 황산벌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백제장수의 아들이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안톤 오노 그냥 우연한 일이다. 알타이의 아사달 아사달은 고조선의 수도로 아침해 뜨는 언덕이란 뜻이 담겼고
고조선의 남하한 6부족유민이 세운 신라는 아사달과 김씨의 나라 김연아 그리고
아사달이 일본으로 건너가 받침이 사라져 아사다 마오 아사히 신문 아스카문명
그냥 우연이다 로또의 6자리 숫자처럼 가야 노부나가 이에야스, 백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도 사실은 김씨다 노루하치의 성인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해석하면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말자가 된다. 고사기보다 후대인 772년에 쓰여진 상표문엔 아스카 인구중 80-90%가 백제인이라
적고 있다. 아스카땅에 호류지의 찰주를 세우던 날,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대신과
100여명의 만조백관은 모두 백제옷을 입었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기록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치다 미치루 노루가 노로 미역, 미나리, 미늘, 미숫가루, 미꾸라지 모두
미즈(일본말 물)로 통한다 미는 즉 물이다. 김춘추는 왜사신과 대화에서 통역을 쓰지 않았고 백제 여인은 왜인과 대화했다고
일본서기는 남기고 있다. 어느 신문사의 일본 속 한국이란 제목으로 일본문화답사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구르다+마(싣는 기구)=구르마란 답이 나온다. 하나의 언어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불과 2세대안에 끝난다
어중간한 상태의 단계는 아주 짧다. 8세기중엽 만엽집과 10세기초의 고금집은 그 실린 시구가 크게 다르다. 시모노세끼 근방 해안에 도이가하마라는 야요이시대 공동묘지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유적이 있다. 모두 마한땅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귀소본능이 이런 것일까. 일본인들은 백강전투의 분을 풀기위해 신공왕후를 통해 신라정벌이란 글로써 복수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분을 풀기 위해 우리가 임난후 통신사로 보낸 사명당을 통해 글로써
복수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두나라 사이에 대한해협이 끼어 있어서 조선동란(삼국전쟁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은 보다 일본적으로 바뀌어갔다. 신라는 백제의 문화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많이 가져갔으며 남은 백제의 명맥을
섬에서 나오지 못하게해 결국엔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잡아갔으며 조선이 반도국에서
주저앉도록 반도사관을 심고 우리의 옛강토인 간도를 빼앗아버렸다. 신라는 백제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다.
역사에서 일방적으로 주는건 없다 뿌린대로 거둘뿐이다. 고대 백제와 일본은 누가누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안에 경기도지사
강원도지사가 있듯 그냥 하나의 나라였을 뿐이다. 백제의 아비지는 황룡사탑을 조선의 심수관, 이삼평은 사쓰마 야끼를 선사했다. 삼국사기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녕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 일제대에도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다 일본수상으로
옮긴 경우도 있다. 생소해서 안믿기는가 중국사료엔 구려의 추를 유인해 죽였다고 했고
삼국사기엔 추(주몽)의 밑에 장수가 잡힌 것이라 다르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엔 백제 26대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 말을 관리하던 하급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적고 있지만 일본서기 왜로 건너와 긴메이천황이 되었다 적고있다. 누가 그랬다 재료를 살 때 바가지를 안쓰려면 재료상 세 군데 들러서 값을 알아보라고... 중국측 자료엔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흐르던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었지만
중국에선 해석하길 선조들이 실수로 적은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떤것이 진짜일까 왜국도 잃어버린 강토와의 연을 끊고 새롭게 나가야 자기들의 살길임을 알았을까 천무천황은 고대 영토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없앨것을 명하고 한일 양국은 동종이라는
책들이 불태워진다 간무왕은 나라땅 선주민 세력등으로부터 질시와 견제를 받아 왕도를
두 번씩이나 옮길 정도로 애를 먹었고 간무시절 분서사건에 대해 14세기 일본의 거물
정치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도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간무 연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신황정통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교류가 없으면 언어도 이질화되고 결국엔 2개국어가 된다. 몽고어와 한국어는 유사점이
매우 많지만 현재 지리상의 장애물도 많다 한국어 만주어 일본어는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도 생각해봐야할 언어다 북한어와 남한어는 분리가 시작되는 단계의 언어다. 만주어, 고대한국어, 일본어는 모두 받침이 없는 개음절이지만 현대한국어만 받침이
있는것도 한번 생각해보자. 또 현대한국어도 조사가 붙으면 개음절이 된다. 조선 일본 몽고 거란 고려 부여 여진 신라 모두 국호가 해를 상징하며 유목민은 해를
숭상했다는 점이다. 유목민은 살찐 양과 큰 뿔 가진 순록을 귀하게 여겼는데 고려란
글자를 풀이해보면 그게 나온다 신라의 금관이 사슴뿔과 자작나무를 상징하듯 생태학적으로도 시조는 같으나 오랜 기간 떨어져 있으면 별종처럼 보이는 종이 참 많다. 고구려 사람들은 668년 이후 당으로 일부는 신라로 편입되고 일부는 돌궐방향으로 서진한다.
일제시대 우리는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 구라파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졌고 결국 우린
한반도에 남아 있지만 고구려는 민족 전체가 그 땅에서 사라졌나보다. 일본이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국물에 건더기가 없어서다 그네들은 수저가
있을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 천황만은 한국사람처럼 수저를 쓴다. 고구려벽화엔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이 많다. 우리도 왕비가 주름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명왕이 큰 강을 만나 거북에 올라타 쭉 갔고 일본초대 천황인 진무도 동정하다
바다를 만나 거북의 등에 올라타 쭉갔다. 거북을 신성시하는 것까지 공통이다
거북 참 오래도산다. 고대 우리 역사의 흔적은 고베를 비롯한 세토나이카이(내해)를 따라 지명,유적,유물이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된 신라인들은 그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완전히 없앴다고 해야
조상의 위신이 서지 않았을까 만일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이 다른 곳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면 신라의 최대치적인 삼국통일을 했다는 역사가 더럽혀질게 뻔하다
고려에 궂이 ‘구’자를 집어 넣어 고구려로 만든 건 어쩌면 거란,여진이 고구려를
대신하고 남부의 일본이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자기들이 섬기는 나라 고려가
그 위에 고려인들이 세운나라와 더불어 열도백제까지 같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위신이
무어가될까 그래서 우리의 역사서엔 통일신라를 강조했고 한반도 남북부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까 그래서 소송녕과 서희가 옛고구려를 들먹인 것일까.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둔갑한 이유도 붓으로 싸운 조선군을 칼을 가지고도 못이겼으니
무언가 그럴듯한 패전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1995년 8월 동몽골 다리강가에서 고구려식무덤과 성곽을 손보기교수가 발굴했다
7세기흉노는 10만가구를 남겨두고 서진해 질지(아프가니스탄)를 거쳐 훈족,
헝가리로 이주한다. 7세기말 동몽골에서 발원한 종족이 몽고인의 실질적인 조상이된다. 그리고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진건 668년이다. 한국사학계에선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지목한다.
헌대 그는 1933년 발해에 관한 논문에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민은 말갈인이라
발표했고 현재 우리사학계는 그 논문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말갈이란 말은 5세기 부터 사용된 고구려인의 별칭이란게 이미 정설이 된지 오래다. 우리아기 사진첩에 우리아기보다 다른 아기사진이 더 많이 실려 있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처럼 일본엔 일본서기와 고사기엔 백제의 역사가
일본역사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 그들은 우리의 정수리에 앉아 조선을 통치하고 물러났다.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다스린걸 기리기 위해 일본궁,일본강, 일본마을을 만들진 않았다. 교토 천황궁엔 죠메이천황을 안치하기 위해 구다라궁 북쪽에 지은 빈궁의 이름
역시 구다라대빈(백제대빈)이었다. 백제교,백제문을 비롯해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가
호류사에서 행사할때도 귀족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었다고 일본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군부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수도 없이 없앴는데도 백제강,백제역
백제신사 백제마을등 너무 많은 우리고대 지명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규슈 기리시마공원에서 가장 거대한 산봉우리는 한국악이다. 일본땅을 만든 두신중 남신인 이자나기가 요미노쿠니(황천)를 탈출하여 온 곳도
히무키노쿠니 현재의 규슈 아와키하라 해변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섬 규슈는 일본 고대사가 시작하는 땅이다. 우두산이 한국엔 거창, 소양강등 여러곳에 있다 일명 소머리산 일본엔 소시모리가
고대역사의 중요한 지명으로 쓰인다. 소에 남부억양이 참가되어 시 머리는 모리로 변한다. 단군이 천부인인 거울, 북, 칼을 가졌고 천황가의 3종신기인 구리거울 ,칼 ,곡옥을 가졌다. 신들의 이사를 간나즈키라 한다. 10월에 신들이 일본을 떠난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고,
동맹은 10월에 한다.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다. 평안도말에 간나새끼가 있듯이 백강전투 후 한국과 일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후에 각각에서 독립적으로
생긴말이 가까운 것은 그만큼 한국과 일본의 기초어와 사유방식이 비슷했음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나오는 농업신 ‘히요우케 히매가미’가 죽자 그의 몸에서 곡식이 나오는데
머리에선 소,말 눈에선 누에가 배에선 벼 귀에선 기장 코에선 콩 보지에선 보리라는
한국남부어가 등장한다. 또 우케를 훈민정음에선 찧지 않은 벼라고도 말했다. 고대 한국어에는 ㅆ이 없었고 받침도 없었지만 중국식 원음대로 한자를 읽어온 한국은
이두로 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음운범위를 확장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혁명적인
한글이 창제되었으며 고대의 음운변화를 그대로 유지해온 일본어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져 한자의 뜻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만일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언어는 영국과 미국이
영어를 쓰는 것처럼 백제어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수상 솔스베리가 남미에 대한 이권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남북미대륙의
이권 독점을 내세운 먼로주의의 파기를 요구하자 미국대통령은 의회에 영국에 대한
전쟁 선언을 요청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중남미에서의 이익이 엇갈리자 전쟁
일보직전의 험악한 관계가 되고 미국민은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되새기게 된 것이다. 이때 영국 외상 밸포어의 ‘서로 같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
한마디로 전쟁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간 한일 사이에는 거듭되는 전쟁, 침략의 역사로 얽히고 있는데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지난 역사와 같은 극단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일본장군 도고가 대한해협에서 격파하고 이순신장군을 칭송하는
한마디를 한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으면서도 무사가 갖추어야할 덕목을 두루 갖춘 명장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우리가 나폴레옹, 링컨을 이야기하듯 민족적 동질감을 상실한듯한
느낌을 받아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합쳐지기 위해선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많음을 느낀다. 우리가 하나되면 유물도 다 찾을 수 있다 통일이된 후 국립박물관이 평양에 있으면
어떻고 제주에 있으면 어떤가 초기엔 반발도 국가적으로 거세겠지만 대한민국의 경상도,
전라도의 현실이 나은가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싸우는게 나은가 밥을 들고 먹으면
우린 상놈이라 한다. 일본은 밥그릇을 내려놓고 먹으면 짐승이라 한다.
우린 산꼭대기에 올라가 쉬고 일본은 꼭대기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쉰다.
그 차이가 무슨 상관인가 서로 차이가 있는게 무슨 야만족의 척도인가 이세상엔
야만족이란 없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 못하는 외부인만 존재할 뿐이다. 우린 일제식민사관을 심각하게
여기지만 인조반정 공신들의 여진, 몽골에 대한 더러운 협잡을 우리 뇌리에 깊이
심음과 우리를 오랑캐로 생각하는 중국을 사모하는 소중화 사상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생각한다. 충렬왕 같은 부마왕을 몽고가 만들었다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상할대로 상한
무신정권을 뒤엎고 노련한 외교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몽고와 왕실혼을 제안한걸
우리는 반대로 알고있다. 고려는 역사서를 본기로 적고있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집현전학사들은 우리역사를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세기로 낮추어 적고있다는걸 우리는
지나치고 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33배를 했다고 배웠지만 그런 일은
우리사서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의 100만대군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대장금에서 중국사신이 그녀를 인정해주니 기분 좋은가 일국의 왕위계승 문제도 별볼일
없는 중국사신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게 조선왕조는 좋았나보다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이 아니라 이인임의 아들이라 그들의 사서에 적어놓았기에 우린 주청사를
보내고 건국후 180년 동안 굴종적인 자세를 유지했다는 걸 인조반정공신들은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사대사관만 후손들에게 심는 걸 최고의 덕으로 삼아 우리의
학창시절에도 소중화사상을 참 많이 주입받은 기억이 난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국호가 없어지지만 왜국은 669년부터 왕 또는 대왕의
호칭을 천황이라 고치고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백제의 강돌문화를 넘어 마한을 정복한 후 백제가 일본열도를 백제땅으로 끌어들인 것은
오진왕 때부터라는게 통설이다. 일본문화와 조선문화가 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일본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또한 그들의 고분에서 삼국의 유물이 나왔다고 우쭐대며
식민지시절의 분풀이를 하듯 우쭐대기 보단 80년대초 잃었던 피붙이를 만나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상봉 같은 느낌을 가지라면 나의 욕심일까. 여진족은 중국각지에 만성(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세워 260년간 350:1이란
민족비율로도 팔기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해왔다. 18세기초에 옹정제는 “앞으로 시위와 호군 및 황궁을 지키고 파수보는 모든 인원은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한어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된다. 훈련시 병사들이 소집되어
연병장에 있을 때에도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할 정도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리” 즉 일어서다란 만주어인
일립비의 명령형인 일리뿐이었다고한다. 뇨후루씨의 뇨후루는 만주어로 늑대를 뜻하는 뇨허이고 한어로 늑대랑이라고 쓰다가 후에
젊잖은 의미의 동음이의어인 사내랑으로 바꾸어 랑씨가 된다. 만주족의 한화의 원인은 만주족의 후손들에게 중국이라는 또 다른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1750년쯤에 건륭제는 신강원정을 단행하고 시버와 솔룬은 탁월한 전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고 신강을 병합키 위해 수천명이 영구 주둔 임무를 띠고 가족과 함께 파견되어
현재까지도 4만명가량의 시버족이 남아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이거나 자신들의
말이 만주어라고 알지못한 채 현재 지구상에서 만주어를 말하는 마지막 사람들로 남아있다. 누루하치가 칼카몽골에게 보낸 서신에서 “중국과 조선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그들은 입는 옷도 같고 생활방식도 같다. 몽골과 여진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우리는 입는 옷과 우리의 생활양식도 같다.” 또 흑룡강일대 시보, 솔론, 다우르,
부트족은 지리, 언어, 생활양식 면에서 여진과 몽골의 중간단계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대한해협이 있어 한일어는 중간지대가 없다. 그래서 두 개의 언어로 착각하게 된 건 아닌지 건륭제는 서몽골인 준가르제국을 정복할 때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도시를 점령하면 그곳의
주민을 모두 죽이는 작전을 구사해 서몽골의 준가르제국을 점령한 후 서몽골에 남아 있는
몽고족은 전쟁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어있었다. 현대에도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뚱이 국토정화 명목으로 내몽골의 원주민
수십만명을 죽이거나 몽고로 쫓아 보냈으며 대만의 20%의 소수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인 정권의 수장인 장개석도 2만명의 대만원주민을 학살했지만 이들의 행각은
건륭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고 건륭제는 알타이유목민이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같은
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군사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하여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무신정권은 개성을 지키기 위해
모집된 정예군을 왜 자기집 대문앞에 배치하는가 군사정권에 목을건 삼별초도
어찌보면 조선말 사대주의자들의 시각에서 해석된 건 아닐까.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그
뿌리다. 대륙을 넘어 정복활동을 한 몽고와 후금은 대양과 대해에서 무수한 수전을 경험한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지만 고려는 정책상 하위에 있었기에 강화도를 안건넌거 뿐이다. 금태조 아골타와 후금의 누루하치는 모두 아이신자오뤄란 성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즉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두 사람도 모두 경주 김씨를 쓰고 있다. 금나라는 고려를 아버지의 나라라 보듬어 안았고 후금은 조선의 계속된 호전적 태도에도
국채를 유지시켜 준다. 현재까지도 청대 만주족 팔기의 후손들은 과거의 만성이었던 여러 도시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렵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고구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말조차 잊은채 250만으로 줄어들어 중국에 흩어져 있다. 중국이란 나라가 만들어진 후 그들의 국시는 한결같이 주변 민족을 거란처럼 흡수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인조반정 공신들과, 이성계가 신앙처럼 여기는 새끼중국인 사상인
소중화사상을 언제까지 중국의 전통인 장자세습, 과부의 재가금지, 남존여비, 시집살이 ,
항렬(돌림자)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점점 인식하고 있는
남아있는 주변의 형제들과 다시 한 집에 살 것인가. 문화적 특징인 언어가 사람들을 결합시킨다면 구성원이 모국어를 포기할 때 그 집단은
해체된다.
제목 : 미즈노교수와 종로피맛골이야기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 부모님에게 가서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야만이란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말로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명보다 우수함을 말하기위해 만든 말이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고 그 이후가 700년간의
무신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현재 천왕이 사는 도시 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가문의 수장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난립해 싸우는 전국시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청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현단위의 땅에 지배자인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집단이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시킨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
욕이라 알고있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5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소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를 발달시키게
되었고 일본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이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과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부는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이룬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논다는 겸손의 뜻이 원형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으로 부르던 정자를
지은후 그곳의 뜻이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나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령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 담장의 일부,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자는
사람들,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시원스럽게 밀어버린 사람들,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조선시대 세운 단성사가
헐릴때 우리 영화인들은 돈세는 일만했다. 돈에 미친한국영화인들,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어버리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바로 종로의 '피맛골'이다. 종로통 대로변 정승판서행차의'말을 피하다'에서 유래된 피맛골은 종로통의 뒷골목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은 한국이 지닌 약점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혀지는 법이지만 역사의 현장은 고이 보존되고 간직되어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하고 있는 것일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으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부순사람을 지지한다.
옛날 것을 없애는 것은 한국의 약점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떄
도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살아야할까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서울, 북촌에서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세계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사랑 백석 맨큐의 경제학 페이지230 (역사적건물의 외부효과)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역사이야기
Reborn -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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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가 한창이던 3세기까지도 일본에는 번듯한 통일 국가가 없었다. 3세기 말에 일본 일부 지역에서 등장한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본격적인 고대 일본역사가 시작되는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어느 한 나라에 지속적으로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낮다.
대마도에는 고대 일본과 관계되는 전설과 유적도 있지만, 고대 한반도와 삼국, 가야의 흔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융기문 토기'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유물로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와 대마도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대마도는 우리 고유의 동이족의 땅이며 우리 민족의 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