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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석양이 좋아서 매일 바라보았더니 교회의 여학생이 ‘노을 소년’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한참 꿈을 가질 소년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아니지만 분명 노을을 바라보며 나름의 개똥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20대 초반에는 문학에 대한 갈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찬바람이 부는 11월에는 신춘문예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 증세가 더욱 심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담양을 여행하며 정철의 흔적과 가사문학에 대한 공부와 소쇄원에서 본 여유로운 선비의 삶 등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긍지와 공부가 절실하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이렇게 내 삶에도 ‘철학, 문학, 역사’가 있는 삶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 인문학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과 함께 한다. 이것을 보면 평범한 소시민이라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인문학의 영향을 받고 산다.
‘길 위의 인문학’은 이렇게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현장의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캠페인’이란 구호를 내 걸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삶을 배우고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목표를 갖고 만들어진 책이다. 마치 옵니버스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니면 Various Artists의 음반을 듣는 것처럼 이 책은 다양한 경력을 가진 12명의 저자를 통해 인문학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1부는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이란 제목처럼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남명 조식, 허균, 허난설헌, 추사 김정희 등의 지적 거장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통해 그들로부터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배운다. 2부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이란 제목으로 역사 속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이제는 그 모습이 거의 사라졌기에 더욱 소중한 서울의 성곽과, 역사의 아픔을 통한 교훈을 잊었기에 아직도 분단의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강화와, 병자호란의 슬픔이 남아있는 남한산성 등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돌아본다. 역사 속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은 ‘문학,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인간의 감성과 이성의 본질을 탐구하거나, 그로부터 이뤄진 인간세계를 분석해 미래의 보다 나은 새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현재의 인간과 세계에 정신적인 풍요와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학문분야다.‘(7쪽) 라는 정의에 동의 한다면 이 책을 통해서 얻는 삶의 교훈 때문에 인문학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교훈은 주로 이름만으로 만족했던 인물들을 배움으로 인해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인문학이 사변적이고 엘리트 중심의 학문이었기에 대중과 사회로부터 괴리가 되었다는 것을 반성한다면 이 책을 통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자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배운다. 퇴계 이황은 내면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살았기에 위대한 스승, 교육자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남명 조식은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 옛날 오덕계가 스승을 찾아왔다가 돌아갈 적에 남명 선생이 10리 밖 큰 나무 밑까지 전송을 나와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덕계는 취해서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는데 사제지간에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아름다운 작별을 후세 사람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때 남명의 나이 64세였고 오건은 43세였다고 하니 흔한 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추사 김정희는 글씨만 잘 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만하고 타협할 줄 몰라 세상으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아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의 쓰라린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글의 저자인 한승원 선생은 청나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하려는 북학파인 추사를 지긋지긋하게 탄핵하고 공격해 죽이려는 세력 때문에 세상을 올바로 바꿔 놓으려다가 추사가 보수 반대파들에게 고난의 삶을 살았다고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의 첫 거처였던 강경의 사의재(동문 밖 우물곁에 있는 주막) 에서 살았던 다산의 초라한 삶은 그의 성정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그는 항상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다산은 제자인 15살 소년 황상에게 이런 글을 써 주었다.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나!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않도록 해라 어떻게 하면 부지런할 수 있을까? 네 마음을 다 잡아서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그렇게 할 수 있겠니? “(111쪽) 스승의 말씀을 들은 소년은 그로부터 61년의 세월이 지난 76세의 나이가 되도록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자나 깨나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노라고 지금 눈물겹게 고백하고 있다. 다산을 통해 멘토의 삶을 배운다. 불운한 천재 허균은 10살 때부터 그의 이름을 알렸지만 부모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등의 비난을 받고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 허균은 도무지 썩은 세상, 치졸한 선비들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전혀 없었다. 그런 탓으로 그는 불우한 문인, 시인들과 어울렸고 또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 승려, 무사들과 한패가 되어 술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철저히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허균은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그 당시에 권력의 실세였던 이이첨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 보다 더 인간적인 삶에 충실했던 저들을 통해 삶은 외형적인 자기과시가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나라를 사랑했기에 아웃사이더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지만 저들의 삶이 진정이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라를 걱정하고 바른 삶을 산 위인들이 있다 할지라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았고 우리가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여행에는 민초들의 고통과 임금과 신하들의 어리석음만 보이기에 더욱 큰 아픔이 있다. 작년에 돈암동에서 시작해 서울의 성곽 길을 조금 걸었는데 이 길에도 아픈 상처가 있다. 1907년 일본의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콜레라가 유행하자 통감부는 통행과 경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성벽을 철거했다. 서울의 인구가 급증한 1920년대 중반부터는 성벽의 돌을 들어내어 건축 재료로 쓰였는데 지금의 혜화동과 성북동의 큰집들이 성벽파괴의 주범이 되었다고 한다. 강화도 이제는 다리가 놓여 얼마든지 쉽게 갈 수 있는 땅. 그러나 그곳은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는 땅인가? 우리나라의 개국 역사가 서려있고 고려시대는 39년 동안 군, 관, 민이 대몽 항쟁을 했고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렀고 병자년에는 일본의 운양호 사건으로 소위 강화수호조약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어 35년 뒤에는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만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것뿐만 아니 라 강연자 구준서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산을 덮던 삐라의 추억으로 말한다. 북쪽 것은 총천연색 삐라였고 남쪽은 흑백 삐라였는데 한눈에 보아도 북쪽 것이 훨씬 좋았는데 땔감으로 쓸 만큼 삐라가 많았다고 한다. 남한산성 병자호란의 아픈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으로 인조가 오랑캐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항례를 올렸다. 그 여파로 수십만의 포로가 청군에게 사로 잡혀가 가족이 헤어지고 돌아오기까지 가슴 아픈 가정사와 사회문제가 속출했다. 더군다나 끌려간 부녀자들은 첩으로 전락했고 질투심에 눈이 먼 만주족의 본처들은 조선여인들에게 끊는 물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이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해 강연과 공연으로 기획된 된 것을 책으로 다시 만들었기에 현장의 열기나 각 강연자들의 특색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정신적인 풍요이고 인문학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깨닫는다. 물질적인 풍요만이 인생의 최고 목적인양 살아가는 삶속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라진 세대에 본연의 인간을 찾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다. 그러기위해 삶의 방법은 여유와 관조적인 삶을 산다. 삶의 원칙은 감동과 느낌이 있는 삶을 산다. 삶의 자세는 재미와 유익을 추구한다. 이런 삶의 모습이 인문학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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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은 책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안철수에 관련된 어린이 책을 읽으면 “어, 이 사람 착한 것 같아.” 이 정도의 느낌을 갖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Why? 시리즈를 제외하고서 가장 열심히 읽는 책이 생겼다. 바로 그 책은 『교과서를 믿지 마라!』였다. 그 책을 약 3일 동안 열심히 읽었는데 대략 150 쪽 정도를 읽었다. 그래서 그 책이 왜 그렇게 재밌는지 물어 보았다. 다음은 둘 간의 대화다. 우리 아들 : “우리 학생들의 마음을 정말 잘 알아주는 책이야. 학생들은 교과서를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선생님은 목이 다 쉬어 가면서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데, 아마 이 책을 만든 사람은 천재인 것 같아.” 나 : “그래도 한자 2급 책이 더 어렵지 않니? 외울 것도 많고 모르는 단어나 사자성어도 많이 나오잖아?” 우리 아들 : “감히 남기탁 선생님을 비판하다니(최근에 우리 아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한자급수 책을 만들고, 닌텐도 마법천자문 2를 감수한 남기탁 선생님이다)... 그래도 교과서가 훨씬 어려워. 왜냐하면 남기탁 선생님 책(우리 집에 남기탁 선생님이 쓰신 책은 총 9권이 있다)은 전부 원리가 설명되어 있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데 교과서는 원리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 알 수 없고 별로 알려주지도 않는데 온갖 어려운 질문들이 넘쳐나거든. 예를 들면 남기탁 선생님은 蚊이란 한자는 원래 虫 +民(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이었는데 나중에 民이 文으로 바뀌어서 모기 문이 됐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교과서에는 친절함과 논리 모두 없어.”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한바탕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교과서는 요약본이다. 나는 요약본이란 것은 항상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본은 논리를 따져 차근차근 길을 찾아 가는 책이 아니라 그냥 중요하니 외우라는 책이다. 그래서 원래 아이들에게 요약본을 무작정 외우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어려서부터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기존 권위에만 복종하게 되고 결국 그들이 사회의 기득권을 얻게 되면 창의성은 말라 가고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우리 아들에게 한 번도 교과서를 외우라고 말하지도 않고 학교 시험공부를 시키지도 않으며 학교 공부 안한다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권위에 복종을 잘 하는 아이가 초등학교 때는 시험 성적이 좋게 나오지만 어느 순간부터 공부의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공부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원리를 찾아 차근차근 연역해나가는 과정인데 학교공부나 시험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우리 아들의 학교 시험 성적은 학교 학생들의 평균 성적과 비슷한 점수가 나온다. 나는 그 정도 성적에 만족하는 편이다. 그 정도면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말(특히 학교 선생님)을 무조건 무시하는 것도 아닌 정도이다.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풍토는 세종대왕에서부터 추사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개탄해왔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에는 이 문제가 개선이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창의성과 속도의 시대라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진정으로 공부에 대해 알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은 요약본과 달리 논리를 가지고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예를 들어가며 설득한다. 즉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남는 책은 미래의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책이 써진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책이 고전인 것이다. 바로 그 치열함이 수백 년 후에도 살아남아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우리의 선조 중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는 우리가 사는 땅에 대해 이야기한다. 1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김이재, 허난설헌, 신사임당, 허균 등이다. 2부에 등장하는 지명은 서울, 강화, 남한산성, 강릉, 금강, 양동마을 등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김이재를 제외하면 각 인물들의 글을 거의 다 읽어 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없었지만, 따로 보았던 인물들과 중요한 글들을 한꺼번에 비교해서 보니 전혀 새로웠다. 특히 각 인물들의 위대함과 한계가 명확히 보여 한 장의 유명음악가 컴필레이션 음반 같은 느낌이었다. 비교를 통해 각 인물들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예컨대 이황과 김정희, 허균을 상호 비교하면 조선시대의 아름다움과 한계를 동시에 느낄 수 있게 된다. 유교적 신분제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교만함을 허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각 인물들이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비교하니 역사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추사 김정희가 ‘인재설(人才說)에서 쓴 글은 지금의 부모들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들을 위해 모아놓은 어려운 어구풀이’들만을 읽힘으로써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부는 지식적인 측면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었는데 각 지역의 역사와 지명유래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그 연원을 쉽게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서울의 역사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 수 있어 정말 좋았다. 다만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대부분 각 문화재의 해당 관청의 사진을 등재해 놓았는데 조금 더 정성을 들여 따로 이 책의 주제에 맞는 사진을 사진가가 직접 찍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움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정약용이 제자인 황상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필적한 만한 글을 찾기 힘든 명문이다. 임술기(壬戌記)의 일부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선생님!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저도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잔뜩 주눅이 든 소년에게 선생은 기를 북돋워준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항상 문제는 제가 민첩하다고 생각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단다. 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세 잊고 말지.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지.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니?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으면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게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아무런 거칠 것이 없겠지. 미욱한 것을 닦고 또 닦으면 마침내 그 광채가 눈부시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니?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않도록 해라. 어떻게 하면 부지런할 수 있을까? 네 마음을 다잡아서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그렇게 할 수 있겠니?”」 나는 항상 천성이 둔해 다산의 이 말을 들은 이후에는 이 말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나의 스승들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니라 항상 훌륭한 고전들이었다. 만약 학교 선생님들도 입시 같은 걸로 학생들을 공부하라고 협박할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정약용의 책을 인용하며 학생들에게 수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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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문학을 일상 생활 속에 심고, 대중과 인문학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취지로 인문학의 뼈대인 문,사, 철을 전공한 학자와 문인, 대중이 함께 우리 역사 속 주요 인물들의 삶의 현장을 답사하고 서로의 체험을 교감하는 인문학 대중화 사업인 '길 위의 인문학' 강의와 답사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신문사에서 답사 진행 당시 폭발적 인기를 끌어 엄청난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지원자들이 많았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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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4월 20일자 보도에 의하면, 1996년 문을 연 서울 건국대 생활도서관이 예산 낭비와 프로그램 편향성 등의 이유를 들어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에서 총학생회 예산 지원 중단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학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4500여권의 장서를 대여해주고, 진보인사들의 강연이나 영화제도 개최했던 생활도서관이 15년만에 퇴출될 위기에 놓인 것은 대학생들의 인문학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경향신문 4월 27일자 보도에 의하면, 지난 25일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이 기자들과 만나 “청년실업률이 높은 것은 대학에서의 ‘문사철(문학·사학·철학 전공) 과잉 공급’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의 위상을 절감하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돈이 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IMF 구제금융 사태와 경제 위기 속에 은연중 널리 퍼져갔다. 대학 및 학과 통폐합, 신입생 정원 축소 및 교원 감축 등 구조 조정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정부의 교육 정책도 한 몫 거들었다. 더불어 각 대학에서는 경쟁적으로 취업 위주의 실용(?)적인 전공·학과를 개설하느라 인문학 등 기초 학문은 등한시했다. 인문학(人文學)은 인간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그러기에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이고 미학적이며, 역사적인 자기 성찰의 경험으로 표출된다. 서양에서는 인간성을 중시하고 문화적 교양을 위해 그리스·로마 저작에 주목하였고, 이것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데에서 인문학이 시작되었다. 동양의 경우 인류사회의 문화, 인간의 도리와 질서, 예악(禮樂)의 가르침, 즉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현들의 저작을 읽고 탐구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문학·역사·철학’이라는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동양 전통에서의 인문학은 물론 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차적으로 주요 고전과 같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고단한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인문학 자체가 어렵고 딱딱한, 때로는 메마른 학문으로 비춰지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면은, 개인적인 느낌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을 읽을 때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이라는 마음공부로 자신의 삶을 가꾼 퇴계(退溪) 이황(李滉). ‘안으로 밝히는 경(敬), 밖으로 끊어 자르는 의(義)’를 통해 산수(山水)와 인간 세상을 보려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경전 읽기와 글씨 쓰기로 세상을 바꾸어놓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보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자신과 세상에 관하여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이라는 4가지 원칙으로 마주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예기치 못한 유배지의 고통을 다산과 나눈 유력 가문 출신 강우(江右) 김이재(金履載). 불우한 사람들의 벗으로 불같은 의지로 세상을 뜯어고치려던 개혁사상가 교산(蛟山) 허균(許筠). 이처럼 1부에서는 선인들의 자취를 따라 인문학 여행을 떠났으나, 퇴계와 남명, 추사에게서는 역시 텍스트 읽기의 한계, 직접 강의를 듣지 못한 아쉬움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에 비하면 2부는 비교적 쉽고 흥미롭게 읽혀진다. 자본과 역사가 공생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뇌하는 서울 성곽. 향토적·토속적인 ‘안’과 지리적·역사적인 ‘밖’이라는 인식의 간극을 살피게끔 한 강화도 기행. 비극적인 병자호란이 오늘의 한반도에 던지는 역사적 화두를 생각하게 한 남한산성. 세월의 변화 속에 이젠 속 깊은 후회와 감동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날의 꿈이 남아있고 상처를 달래주는 대관령 말랑과 옛길을 따라 강릉 가는 길. 한반도의 새로운 문화권으로 부활하려는 금강(문화권)을 따라 되돌아보는 재화와 문물의 일방적인 유출의 역사. 자연과 인위가 하나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경주(慶州) 양동(良洞) 마을과 ‘관계’ 속에서 은유와 상징을 직조(織造)해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향단(香壇). 탐방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2부는 텍스트만으로는 2%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들 정도, 그러니까 후일 이 책을 들고 직접 찾아가보고 싶을 정도다. 확실히 대중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은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피부에 와 닿는 인문학을 요구한다. 문화유산과 역사 인물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감하고, 일상의 삶에서 재미와 유익, 감동과 느낌, 여유와 관조를 얻으려 한다. 참된 인문학, 통찰의 인문학을 위해서 인문학자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과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중의 자세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재단, 대학 등에서 진행하는 여러 인문학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함께 걷는 길 위에 인문학의 발자국을 새기는 여러 학자들과 경희대의 후마니타스 칼리지(Humanitas College) 설립 등 다양한 모색과 참여의 노력 속에서 인문학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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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외 지음, 경향미디어
표지를 보면 초록색 길이 나있고 인문학자들의 웃음띤 사진들이 수놓아져있다. 음... 심각한 사람이 한명 보이긴한다.
인문관련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더해지는거 같다. 고전이 시대가 갈수록 더 빛나는 것처럼 말이다. <빛난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어린왕자가 떠오른다. 서점에 갔는데 어린왕자가 출판사별로 진열되어 있는거 보고 완죤 황홀했다는... -또 얘기가 딴길로 ..ㅜ 요새 내가 이리 정신이 없다- 아냐아냐,, 표지에 있는 길을 보다가 나도모르게 옆길로 샌거 뿐이야.. 하하하
특히 열두명이 쓴책이라서 다 단편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그 감질맛이 장난이 아니다. 첫번째 이야기만 해도.. 원래 퇴계의 일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신창호 선생님이 너무 재밌게 썼기 때문에 짧은 이야기가 아쉽기만 했다. 나중에 꼭 퇴계 이황 책을 다시한번 찾아 읽어야겠다!!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가상 대담을 적은 한승원님의 글을 읽을때는 약간 낯설어서 적응이 필요했지만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바로 요 편을 보고 박제가에 대해 관심을 처음으로 가진것이다. ㅎㅎ
그리고 남존여비 사회의 세 여성과 불우한 사람들의 벗, 허균을 쓴 이이화님의 글도 이덕일 선생님이 쓴 세상을 바꾼 여인들과 연관이 되어 개인적으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읽었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역시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라 그런지, 인간에 대해 깊이 있고 재밌게 잘 엮어내는거 같다.
다 됐고,, 10점 만점에 10점 주련다.
2011. 6. 23.
낮은 길고 밤은 짧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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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마음은 인문학 책은 어렵다는 것이다. ![]()
"2010년 3월부터 인문학을 '일상생활 속에 심고, 대중과 인문학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취지로 시작된 '길 위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학문적 뼈대인 역사, 문학, 철학을 전공한 학자와 문인, 대중이 함께 매월 두 차례 우리 역사 속의 주요 인물들의 삶의 현장을 답사하고 서로 체험을 교감하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인문학 대중하 사업이었다. 이 책은 그동안 진행된 강의와 답사의 결과물이다. (p4) '길 위의 인문학'은 바쁘게 무심코 지나쳐 가는 길이 아닌, 무관심과 무감동의 길이 아닌,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의 교감을 길 위를 스쳐 지나가는사람들과 소통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생활과의 괴리감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이 너무 피상적이고 암기위주의 교육이었던 것도 한 몫을 하리라 본다. 일례로 이황과 이이의 사상의 비교에 있어서 학습자들과는 무관한 듯한 "이"와 "기"를 논하니,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처럼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학습이 이루어졌다면, 그렇게 어려운 이론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 ![]() 퇴계, 남명, 추사, 다산, 김이재, 허균 등을 만나러 그들의 삶의 모습이 어려있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지금부터 100 여년전 중국의 최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던 양계초와 려원홍의 칭송을 받았던 퇴계. 그의 인품과 사상적 깊이는 어떤 유학자보다 뛰어났었음을 그가 살았던 곳에서 삶의 모습을 엿보면서,그리고 그가 남긴 <자성록>을 통해서 살펴본다. <자성록>은 (...) '사람은 사람답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가?'등 공부를 향한 반성과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자성록>은 인간의 내면적 '성찰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데, 특히 정밀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적 사색, 열렬한 구도자의 자세로 일관하는 퇴계 스스로의 수양과정은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p26) 유,불, 선이 공존하던 곳, 다양한 지식인들이 깃들어 살던 곳, 지리산. 그는 유람을 하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역사 속의 고인을 보고 그들이 살던 세상을 보라. (看水看山看人看世)"고 했다. (p75) 산수를 보면서 고인을 생각하고 고인이 살던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남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 ![]() 그러나, <길 위의 인문학>팀은 이런 일을 매월 두 차례씩에 걸쳐서 실행했던 것이다. "신명이 난 난초를 쳤지만 그것은 난초가 아니고, 난초가 아닌 것도 아니다. (...) 이것이 '불이선란'이네" (p102)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명필 추사. 그러나, 추사는 명필가를 뛰어 넘는 권력의 역사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다산 정약용과 김이재의 만남, 다산에게 다산초당이 단순한 유배지의 의미가 아닌, 다산의 학문을 꽃피웠던 곳이고 이 세상에 나온 보람을 가져다 주었던 곳임을 알기 위해서는 강진을 찾아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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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대관령 말랑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내 어린 날의 꿈이 아직도 숨 쉬고 있고, 지금도 나의 상처를 달래주는 곳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관령을 그린 단원의 그림 앞에서 마음이 울컥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p231) ![]() 마치 대학시절 답사를 떠나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고, 현지에 도착하여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답사 보고서를 쓰던 그 시절이 생각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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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무엇일까? 책은 글이 담아두는 상자일 것이다. 표지가 있고 종이가 그 안에 가득하고 그 안에는 가장 중요한 '글'이 있다. 결국 책은 글을 읽기 위해 존재하는 글의 모음집이다. 그 책이 좋은 책인지 안 좋은 책인지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좋은가, 안좋은 가에 따라 달라진다. 책을 읽고 내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는가, 내가 얼마나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감정의 움직임이 있었는가, 책을 통해 내 마음가짐과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가가 바로 책과 그 안의 글이 가지는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조금 오묘한 책이 한 권 있다. <길 위의 인문학> 보통의 책은 제목을 보면 아 대충 이런 내용이겠구나 하고 짐작이 가능하련만 이 책은 내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얼른 한 챕터 꺼내어 읽어본다. 퇴계 이황에 대한 삶과 그의 공부를 통하여 인간다운 공부, 현대 사회에서 인간다운 휴식과 일, 삶에 대한 글 속에서 주옥의 알갱이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그 뒤로 남명 조식과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인물들의 삶과 그 삶의 발자취에서 우리가 느껴봐야 할, 생각해봐야할 알맹이들이 역시나 오밀조밀하게 눈과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 하나하나의 글 들에서 버릴 것이 없다. 그런데. 먼가 좀 읽는 내내 이상하다. 분명 좋은 글들을 읽고, 아 좋다. 하고 있는데 무어가 좋은지,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하나 하나의 챕터 안의 내용은 참 좋건만 그 챕터를 마무리하고 다음 챕터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서 하나의 '책'으로 완성시켜감에.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제목 역시 책의 절반을 읽어봐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드디어 2부가 되면 책 제목이 감이 잡힌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의 흔적을 따라. 서울의 성곽부터 강화도, 남한산성과 강릉가는 길까지. 드디어 우리는 왜 이 책의 제목이 길 위의 인문학인지 조금 감이 잡힌다. 이제서야 무언가 내가 글이 아닌 책을 읽고 있는다는 느낌이 난다.
결국 나는 빠른 시간안에 충분한 몰입과 감정을 가지고, 충분한 공감을 하면서 <길 위의 인문학>을 다 읽었다. 각각 하나의 챕터가 모두 버릴 것 없이 비슷하지만 그래도 구별할 수 있는 색색의 빛으로 독자들과 교감하고 유혹한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책의 제목과 그 취지. 인문학은 우리 생활 곳곳에, 우리의 길가에 차고 넘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그 뜻에는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아쉽다. 정말 비싸고 질 좋은 천으로 멋지고 이쁜 상하의 한 벌을 만들어야 하건만, 상의와 하의가 따로 놀고 있는 것만 같다. 자켓과 베스트, 하의와 벨트, 구두가 모두 명품이건만 미스매치의 극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조금 더 책과 편집자의 의도가 명확하게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아주 강렬하다. 책은 글의 모음이지만 그 모으는 구성과 방식, 그 의도에 따라서 더 좋은 책이 될 수도, 그냥 좋은 글 모음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아쉬움을 이 책을 통해서 한번에 느꼈다면. 편집자에 출판사에 대한 실례일까. 그래도 아쉽다. 좋은 글이라서 더더욱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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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소설'이란 장르에서 벗어나 '인문학'이란 이름을 가진 작품을 손에 집어든다. 너무나도 잘 짜여져,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어느 한순간 한눈 팔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게 촘촘히 쓰여진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중 하나는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로 대변되기도 한다. 먼저 '인문학(人文學)이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과 관계된 철학, 문학, 역사학, 언어학, 종교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들이 모두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일까?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대학 진학이라는, 구직과 사회 생활로 이어지는 하나의 맥락 아래에서 비롯된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위해 특정 과목만을 공부하고, 대학이란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취업자리를 따라 인기 학과, 인기 과목에만 집중되는, 취업을 위해 필요한 지식에 인문학이란 장르는 철저하게 배제되는 현실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 통칭되는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빨리 빨리, 앞으로만 돌진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더라도 이런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또한 인문학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관심 혹은 무감동이란 말로 대변된다. 이렇듯 일반 대중과 약간은 괴리되어 있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작은 첫걸음을 기록한 작품이 바로 <길 위의 인문학>이다.
'일상생활 속에 인문학을 심고, 대중과 인문학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취지'로 시작되었다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진행된 강의와 답사의 결과물을 정리해놓은 작품이 바로 이 책 <길 위의 인문학>이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 되었다는 이 인문학 대중화 사업은 이제 이 작품을 통해 더 많은 독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인문학의 나아갈 길, 인문학의 방향과 조금은 더 인문학을 가깝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이상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사람을 통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통해 느껴보는 뜻깊은 시간이 책 속에 그려진다.
<길 위의 인문학>은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과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추사 김정희과 정약용, 허균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인문학 이야기와 함께 서울 성곽, 강화도, 남한산성과 양동마을을 아우르는 역사의 흔적들이 녹아있는 길 위의 인문학 등 재미있고 유익한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자극적인 스토리를 뒤쫓던 독자들에게 어쩌면 이 작품은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작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의 여유를 갖고 잠시 걷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 삶의 쉼표 한가운데서 이 작품을 만나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책'을 즐겨 읽기 시작하던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이야기가 '문사철 500'이란 말이었다. 젊었을때 문학책 200, 역사책 200, 철학책 100권은 읽어야 한다는... 요즘들어 되돌아보면 문학책은 그렇다지만 역사와 철학 분야에선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게 사실이다. 왜 문학책만을 그렇게 편식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재미와 오락 위주의 독서 편식이 불러온 결과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문학을 제외한 역사와 철학은 그렇게 재미가 없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조금은 재미가 떨어지는 인문학에 어떻게 그에 접근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문학이 앞으로 지향해야할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재미와 유익', '감동과 느낌', '여유와 관조'를 아우르는 통찰의 인문학! 이것이 바로 작가가 추구하고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말한다. 대중들과 더욱 가까이 할 수 있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인문학, 정신적 여유와 풍요를 제공하는 인문학의 길, <길 위의 인문학>은 작가가 말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통찰의 인문학을 담아낸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되밟고, 현대의 시간속에 묻혀있던 역사의 시간을 꺼내면서 들려주는 작가의 따스하고 느낌 가득한 이야기들이 화선지에 번지는 붓자욱 마냥 가슴속에 퍼져 흐른다.
맹자(孟子)의 가르침중에 이런 말이 있다. '유수지위물야(流水之爲物也)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라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자극적인 재미와 흥미만을 담아낸 문학뿐만이 아니라 깊이있고 감동과 느낌을 담아낸 역사와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어느 한가지 소홀하고 부족함 없이 가득 채워져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인문학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통찰의 인문학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 <길 위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요즘 '인문학의 기회'를 되돌아 보게 만든다. 모든 분야에서 사람 중심으로 재편되는 인문학적 접근의 사회 분위기도 인문학의 기회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준다. 선인들을 만나고, 역사의 땅을 걸으면서 여유와 멋을 즐기고 느끼는 느림의 미학을 배운다. 기회가 된다면 이 인문학 대중화 사업에 한번쯤 참여하고 싶어진다.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귀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멋진 기회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해도 다시한번 여유있게 <길 위의 인문학>의 첫페이지를 되넘겨 봐야 할 것 같다. 더욱 차분히 더욱 진지하고 재미있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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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인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