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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내 사춘기, 그러니까 딱 주인공인 여울이의 나이대쯤인 그 시절이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드는 소설이다. 17살 고1 여고생 여울이를 통해 한참 방황하던 내 16살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집도 싫고 때론 친구사이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엄마도 싫고, 어릴때부터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더더욱 싫었을 때이다. 그래서 참 반항도 많이 하고 아버지께 맞기도 많이 맞았다. 모든게 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그때, 세상이 내 뜻대로 돌기만을 바라던 시절(물론 세상은 평생 내 뜻대로 되진 않지만 말이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차 있던 그때의 나만큼 여울이도 현실을 지극히 벗어나고 싶어한다. 아니, 어쩌면 나의 경우보다 더 여울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속된말로 재수똥구멍이었을거다. 사람도 각자의 개성이 있듯이 그 구성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족을 이루는 집단에, 딱히 누구네 가정이 옳고 누구네 가정이 그르다는 저울질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같이 꼴통에 사고뭉치에 심신이 병약한 구성원들이 모여있는 여울이네 가족이지만 난 그들을 불량가족으로 보지 않았다. 구석구석 낱낱이 살펴보면 이보다 더한 불량가족들도 널린고 널린게 세상이다. 드라마나 소설속에서 만나는 가족들을 보고 때로는 어떻게 저런 경우가 있어 혹은 말도안되는 구성이야..라고 말들을 할때가 있지만 그보다 더 쇼킹한 일도 많이 일어나는게 세상 아닌가 이말이다.
새학기가 막 시작된 무렵 도덕꼴통이라고 불리우는 도덕선생님께 수행평가의 일원으로 자서전숙제를 받게 되면서 여울이네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족의 이야기도 반드시 곁들여져 있어야 한다는 이 자서전쓰기는 물론 시작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현실을 탈피하고자 여울이가 취미로 하고있는 코스튬플레이의 자금을 마련하려면 무조건 자서전숙제를 잘 써내서 장학금을 받아내야 한다. 사춘기 시절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을지라도 가출 생각쯤이야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헌데 여울이에게는 가출이 아니라 출가이다. 막무가내인 어리시절 객기로 똘똘뭉쳐 집떠나 개고생 하는게 아닌, 모든걸 철저하게 준비해서 떠나는 출가. 출가를 꿈꾸기에 여울이는 지금의 이 막돼먹은 현실도 묵묵히 참고 견뎌낸다. 코스튬플레이로 자신이 아닌 만화나 영화속 캐릭터로 분장해 더는 어떤 나은 기대도 미래도 없는듯한 현실을 잠시 차단하는 오롯이 사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며. 그렇기에 여느 공주들의 전철을 따르지 않는 피오나 공주를 선택했을 것이다. 마법에서 풀리면 멋진 공주가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추녀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언제까지고 마법이 풀리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그 나이대의 소녀가 꿈꿀수 있는 바람.
여울이의 자서전 쓰기는 한 학기가 끝나가도록 끝맺어지지 않는다. 아니, 자서전 따위 쓸 수는 없을만치 이 콩가루 집안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서로가 매일 물어뜯고 할퀴고 붙어사는게 신기하게 보일 정도로 철저히 개인적으로 보이던 이 가족이 좋게든 나쁘게든(사실..다 나쁜 상황이었지만)정말로 각자의 길을 찾아서 뿔뿔히 흩어졌을 때는 안도감보다는 서글픔이 더 커지는건 왜였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그 구태의연함 때문에?? 싸우고 상처줘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바람막이가 되 주기 때문에? 이 지리멸렬한 가족들 안에서는 더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지만, 또다시 구태의연한 한마디를 하자면 바닥을 치고 또 쳐야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다. 더이상 칠 곳이 없으니 날아오르는 수 밖에 이들에게 답은 없다. 아니, 어쩌면 답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가족이기에, 가족이라서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밖에 없는, 가족이라서 당연하다는 당위성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가족에게 굳이 무슨 이유를 부여하고 어떤 해답을 갖다 부칠수 있겠는가. 가족인데 말이다.
점점 핵가족화가 되고 있는 사회를 생각하면 지극히 개인주의,이기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울이네 가족에게는 예외가 아닐지 모르겠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게 딱 드러맞을 정도로 여울이네 가족이 흩어진 그 순간 이들 개개인은 힘을 잃어버린다. 할머니는 기력을 잃고, 아버지의 어깨는 땅에 붙을만큼 내려앉고, 삼촌 또한 마찬가지다. 여울이를 제끼고 차례로 집을 나간 언니와 오빠의 상황도 어린나이의 객기지 더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이럴때 보면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내 가족이 최고고 내 사람이 최고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출가를 잠정적으로 미룰 수 밖에 없게된 여울이에게 지금의 이 시련은 사춘기의 성장통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말일테다. '세상은 원래 그리 녹록하지 않아'라고 말하는건 이 어린 소녀에게 아직은 시기상조인 말이기도 할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마법에서 깨기 두려워하는 피오나 공주가 아닌 현실에 당당히 맞설줄 아는 성큼 성장하는 여울이 그 자체의 예쁜 여고생이 될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해 본다. 비단 여울이뿐만 아니라 청소년기에 누구나 꿈꾸는 일탈, 방황 앞에서 그 알을 힘차게 깨부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청소년들이, 그리고 그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어른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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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한 제목의 소설 “불량가족 레시피” 우리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나는 가족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량 식구이다. 우리의 과거, 나의 어린 시절. 우리의 과거, 과거에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근대, 현대 특히 6.25 전, 후 세대는 헐벗고 굶주렸고, 다수가 가난했었고, 가난 속에서 살았다. 점점 나아지는 나라 형편에 따라서 개인들도 가난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가난에 쌓여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절대빈곤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거의 가난을, 추억을 이라는 이름으로 묻어두고 가끔 꺼내본다. 현재도, 많은 가족들은 가난을 경험하고, 돈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 말라는 글처럼, 그때는 힘든 삶 속에서도 가족의 가치가 그래도 높았다고 해야 하나, 이를 악물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님들을 보면서도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에 대해 서운함을 느꼈고, 국민학교 때 소시지 반찬을 싸오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낀 시절, 참 부자이고 싶었다. 아침 일찍 돈 벌러 나가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남겨진 우리 형제들, 이런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커가면서, 돈의 중요함 못지 않게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마 상실의 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짧은 소설, 긴 여운.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청소년 소설, 제목을 보면서, 참 특이한 제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희망이나 슬픔을 내세우지만, 묘한 제목, 이 속에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걸까? 이 책은 단숨에 읽었고, 그 순식간에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인가, 또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흔히들 말하는 문제아 이야기 같으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가족)을 변명을 해주는가? 아니면 이 시대의 아픔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나의 머리로는 종잡을 수가 없다. 시작. 이야기는 학교 수행평가(자서전 쓰기)의 장학금의 유혹(피오나공주로 변신을 위한 돈)으로 콩가루 집안의 비밀 가족사가 열린다. 고1 여학생인 나는, 차별화된 가족구성원이며 불쌍한 영혼의 집합소에서 완벽한 가출을 위한 준비를 한다. 보통 가족은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핵가족보다 더 삭막하다. 밥 먹기 위해 유대관계를 맺고 집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뭉쳐 사는 것 같다.’로 시작한다. 도대체 이 집은 어떤 가족일까? 하지만, 가족은 가족이기에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집으로부터 벗어나야지. 여울의 가족, 그들은 어쩌다가 불량가족이 되었나 우리 집은 아빠와 우리 형제들과 삼촌 그리고 할머니. 그렇게 특이할 것 같지 않은 구성이다. 단지 우리 집에는 엄마가 없으면서, 많았었고, 우리는 엄마가 다른 형제들, 우리는 어떤 사연을 가졌을까. 3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사는 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부터, 그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아버지, 역시 여자문제, 어디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부전자전이다. 다행이 아직 오빠는 그러지 않으니. 우리 가족은 상실가족이다. 하지만 다들 나름 꿈이 있지만, 그 꿈은 말 그래도 꿈이라 현실화되지 않는다. 할매의 희망은 양로원이다. 다들 싫어할지 모르지만, 불쌍한 할매는 우리들 뒤치닥거리로 아직도 고생이다. 여기서 벗어나 얻어먹는 밥과 일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하지만, 양로원비가 없다. ‘자식이 효자가 아니라 약장수가 효잔기라.’ 할머니는 외롭고, 사람들의 정에 굶주린 걸까? 덥석 사버린 건강식품, 유나언니의 희망은 엄마지만, 곧 사라져 버린다. ‘이제 엄마라는 이름을 마음에서 지워 버리는데 갈등할 이유를 못 찾는 것 같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 말라. 나 또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상상 속의 엄마를 만들고, 쉘위댄스를. 폭력을 일삼는 아빠, 어른이 되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마법에라도 걸리는 걸까? 가족의 무관심으로 병을 키운 오빠는 언제 쓰러질 줄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삼촌은 뇌경색 장애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다 말 못할 그만의 사정이 생기는 거든, 본래의 마음하고 다르게 말이야’는 멋진 말을 한다. 우리들은 가난과 버림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들. 지금은 이런가? 우리의 교육은 과거에는 대학이 우골탑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학교가 돈으로 쌓은 탑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난한 집 아이의 가슴이 말하는 ‘오히려 재능은 우리 집에서 불필요한 개인기일수도 있다.’라는 말이 가슴에 아프게 와 닿는다. 나의 친구들, 클럽 방문이 일상 된 춤추기를 좋아하는 참새, 부모의 기대에 저항하는 외동딸 세영, 모범생이며 코스튬 친구인 류은, 나의 꿈이 되는 사랑 세바스찬 등이 보여주는 학교, 하지만 친구들은 소위 교수, 의사의 딸이다. 같이 놀아도 격이 다르고, 삶이 다르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의 하기 싫음과 반항은 행복한 고민인가 아니면 나름의 아픔인가. 애들간에도 부모의 관리 받는 년과 방해 받는 년, 절대 인간은 평등하지 못하다. 그래 어찌 애들만 이렇겠냐! 그곳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그래도 약간의 희망은 ‘쌤 사랑해요’ 라는 말에 선생님(개동구)의 손은 내려간다.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한가! 아니면 아직 사랑이란 따뜻함이 인간의 마음에 품고 있는지. 하지만, 불법 매점식권복사를 작은 일로 생각하는 아이, ‘나는 30장밖에 복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생들은 진실도 계속 거짓이라고 우기는 묘한 인간들이다.’ 역시 자기 중심적인가 아니면 어리기 때문인가, 도덕불감증인가, 어른이나 애들이나 다를 바 없나 자신의 잘못은 작고 별 것 아니다. 이에 대응하는 어른들도 나은 게 없으니. 할말이 없다. 매점 중독증에 걸린 아이들은 급식 대신 매점에서 한끼를 해결한다. 왜? 급식은 먹을 것 못되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민국의 급식은 아이들의 밥이 되지 못한다.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의 탈출구. 만족할 수 없는 여울이의 해방구 ‘코스튬플레이’,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은 탈출구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케릭터)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현실이기에 돈이 점점 나를 죄어온다. 늙다리 아줌마 출현과 소문, 그리고 천사 코스튬 플레이, 엄마와 겹치는 아줌마, 그 아픈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감정도 생각도 모조리 저렇게 꽁꽁 싸맨 채 사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희망인 세바스챤의 코스튬플레이, 슈렉의 마법의 힘으로 코스튬에서 약간 이룬 꿈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다니, 그가 나를 환상에서 현실로 떨어뜨려 버린다. 역시 난 안되나. 아니야 이것이 현실이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줌마가 알려준 톨스토이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와 사랑,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산다.’와 나의 ‘영원한 생명, 욕심,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천사와 인간의 차이인가. 인간을 점점 이기로 몰아가는 것은 나를 올 가 매는 환경이다. 나에게서의 기대와 현실의 일치는 있을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없는 것인지. 현실 속에서의 자존심은 세지만,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는 아버지, 그는 자식도, 아버지도 못 되는 걸까?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그는 한 순간에 무너진다. 이미 예고된 재앙이었지만, 고3인데도 아빠의 돈벌이를 때문에 매여 있는 언니, 언니에게도 꿈은 있었지만, 도저히 이룰 수 없음을 알아버렸는지 나보다 먼저 가출해버린다. 인간과 함께 하는 동반자 술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가? 술 먹은 나, 오빠 그리고 삼촌, 우리들은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 버린다. 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인가? 하지만, 여전히 돈이 우리를 지배하고 짓누르고 있다. 아빠의 불법행위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아빠가 그런 불법행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처지가 더 슬펐다. 모래 위에 지은 집, 언젠가 무너지겠지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었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다 자기 몫의 길이 있는 법이다. 나만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곪았던 상처는 터지고,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불량가족을 만들려면, 아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각자 플레이를 하는 개개인과 이들이 절대 뭉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방해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살기 위해 흩어진다. 이제는 불량가족이 아니다. 보통 대부분의 가족들은 타인들이 모를 아픔과 기쁨을 가지고 있을 것 이다. 삶이란 것이 그렇게 호락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우리의 현실에서 부는 그렇게 사람을 지배한다. 평범하기조차 힘든 세상이다. 가난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지 않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이제는 내가 그들을 기다릴 차례다. 우리 가족의 진화가 필요하다. 답은 없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기형적인 달셋집, 특이한 이력의 가족, 가난 그리고 여울이에게는 왜 비슷한 처지의 친구는 없는 걸까? 나의 엄마는? 엄마라는 희망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인지? 유달리 여울이 엄마는 밤무대 댄스에 묶어 두는지? 멋진 춤이 아닌 밤무대에. 어떻게 보면 문제점만을 줄 늘어놓고, 어떤 해결방안이나,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단지 이 시점을 종결을 맺어버린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 할까? 약간은 평범하지 않은 다른 결말에 황당하지만, 이런 것들이 삶일 것이다.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도, 평안하지도 않다. 불행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불행에 파묻히거나, 불행을 걷어내 버리거나,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커가고, 어른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빠와 엄마 같은 삶은 안 살아야지, 하지만 그들이라고 이 사회라는 곳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도 엄마와 아빠가 되고,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 말라. 임대아파트라는 약간의 희망은 던져주지만, 돈 없는 고등학생과 할머니의 삶 그리고 설렁탕 한 그릇을 사식으로 넣으라는 철없는 아버지. 인간은 어쩌면 말뿐인 존재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존재인가? 걱정은 걱정이고, 먹는 건 먹는 것이다. 그것 또한 인간의 삶이다. 이제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아직 어리지만, 나에게는 가족은 남았습니다. 이 철없는 아버지도 톨스토이의 책을 읽으며 사색을 시간을 가지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 가족 같은 모습으로 살 날을 기다리며.
가난했지만, 그때도 행복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도시의 산동네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근처에도 작은 집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리 집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별로 가난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가끔 그 근처를 지날 때 그 위를 올려다 보면 가마득히 높은 저런 곳에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서러운 기억, 전셋방 한 칸에 부모님과 우리 삼형제가 살았던 적도 있었고, 연탄가스로 일가족이 다 죽을 뻔한 적도 몇 번 있었고, 한겨울에 보일러가 터져 물바다를 이룬 적도 있었다. 딸린 가족들이 많고 가난한 우리는 세들어 살면서 주인집 눈치를 참 많이도 보았다. 그러다가 작기는 했지만 우리 집이 생겼을 때 그 동안의 서러움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이 모든 과거의 가난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부모님들을 우리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루 종일 일하셨다. 그 당시에는 맞벌이가 거의 없었지만, 아버지는 직장으로, 어머니는 시장에 장사하러 나가셨다. 심지어, 국민학교 전학 갈 때도 나 혼자서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똑똑하다고 칭찬을 하시면서도, 부모를 탓하는 눈치였다. 부모님이 일 하시는 동안, 형은 장남이라고 자신보다는 우리를 보살피고, 지키며 부모님 역할을 했다. 이후 조금씩 가정 형편이 나아져서, 이때까지 살아왔지만, 어머니는 그때 우리를 보살피지 못하고 돈 벌러 가신 것을 미안해하며, 후회하신다. 하지만 정작 미안한 것은 나다. 나는 자식으로 과연 부모님들께 무엇을 해드렸는가? 할말이 없다. 그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하는 가족이 있었기에 이겨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직도 그때 생긴 절약정신은 아직도 나의 몸에 배여 있다. 비록 남들은 조금 궁상스럽다 하지만… 책장을 닫으면서. 감사하며 살아가자. 내가 이 책의 주인공이었다면, 내가 그 나이에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어떻게 하였을까? 흔히들 문제아는 문제부모나 문제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이 참이면. 더 삐뚤어졌을까? 아니면 이런 환경을 이겨내고 의지의 한국인이 되었을까? 우리는 항상 평범함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평범과 보통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바라봐야 할 나은 환경에서 사는 소수의 사람들과, 우리와 비슷한 많은 보통 사람들과, 우리보다 환경이 안 좋은 소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보통임을 만족하고, 현재 위치를 만족하고, 부모님께 감사하라. 형제, 자매들에게도 감사하라. 이들이 있어 나의 삶이 더 밝아지리라. 물론 인생에도 도움이 되리.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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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가족들을 위한 불량 요리 재료… - 여울이의 완벽한 출가를 위한 지침서 1장, - 아버지의 주머니와 할매의 손지갑을 가끔씩 여는 여울이의 나쁜 손버릇 2큰술, - 불곰(아버지)의 손바닥 2장, - 슈퍼 할매의 잔소리 10뿌리, - 배다른 언니의 저주받은 입에서 나오는 욕설과 고자질 각 1큰술, - 뇌경색 걸린 삼촌의 주식에 대한 허영심 1큰술 - 다발성 경화증 걸려 한참 나이에 기저귀를 차야 하는 오빠의 수치심 1큰술, - 답답하고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술 3병(1병은 삼촌용, 1병은 오빠용, 나머지 1병은 여울이용), - 광견(생활지도부 선생님)과 매점 아저씨의 의심하는 마음 각 1작은술 불량 가족 레시피 속으로… 불량가족 이야기의 화자(話者)이자 막내인 여울이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다. 그녀는 지금 도덕 선생님이 내주신 자서전 쓰기 숙제 때문에 대략 난감하다. 하지만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코스튬플레이의 캐릭터를 위한 의상비를 마련하려면 상금이 꼭 필요하다. 자서전을 쓰려면 자신의 가족에 대한 참모습을 까발려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 여울이는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이놈의 집구석으로부터 완벽한 출가를 위해 지침서까지 준비해 놓은 그야말로 계획성 있는 꽤나 야무진 소녀이다.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상상 속의 엄마는 항상 우아하다. 여울이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서, 피오나 공주로 분장하고는 친구들과 코스튬플레이에 참여한다. 그곳엔 꿈 속의 슈렉 왕자님인 세바스찬도 있다. 하지만 빠듯한 용돈으로는 코스튬플레이를 위한 캐릭터 의상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가끔씩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지곤 한다. 손버릇이 좀 안 좋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체격 좋은 아버지는 불같이 욱하는 성질에다가 두툼한 손바닥을 잘 움직여 자신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곤 한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불곰이라고 불리운다. 송장을 칠 나이인 할머니는 소위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닌 재원인데, 그만 남편을 잘 못 만나 고생만 바가지로 하고 자식에게도 효도는커녕 오히려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느라 손에 물기가 마를 날이 없다. 이러니 불평을 안 할 수 있나. 가족들은 따발총 같은 슈퍼 할매의 잔소리를 듣느라 귀가 아플 지경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 희망 요리 재료… - 삼촌의 따스한 말 1마디와 주유소에서 번 돈으로 산 홍삼 엑기스 1팩, - 불곰이 할매를 위해 사온 순댓국 1컵, -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춤추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 1작은술, - 슈렉으로 분장한 세바스찬의 키스 1작은술, - 마리아 아줌마의 따끈한 보리차 1컵, - 친구 - 톨스토이의 책<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권(1권은 여울이용, 나머지 1권은 불곰용) 불량 가족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국에서 추방당한 천사 미하일이 알아내야 하는 첫번째 질문의 답처럼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이다. 서로에게 불평과 험한 말만 오가는 가족들의 미래란 그다지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미래를 보는 지혜가 없다. 그래서 지금 처한 상황만을 가지고 이들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 단정짓는 일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미하일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의 답처럼 사람의 마음 속엔 사랑이 깃들어 있으며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간다. 레너드 코헨이 “모든 것에는 갈라진 틈이 있어 빛이 스며들 수 있다네.”라고 읊조린 것처럼 서로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이 불량 가족에게도 희망의 햇살이 언뜻언뜻 비친다. 겉으로는 불량스럽고 콩가루 같은 가족의 모습 속에서도 사랑은 깃들어 있고… 이틀간의 가출 끝에 힘없이 돌아온 할매(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평소에 좋아하던 순댓국을 한 그릇 사다 놓는 것을 보면 툭하면 아이들에게 욕을 하면서 참을성 없이 욱하는 성질에 두꺼운 손바닥을 여지없이 내리치는 불곰에게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는 한 조각의 사랑이 엿보인다. 그리고 남들이 해주는 세끼 밥 먹으면서 주위 친구들과 말동무도 하고 편하게 살기 위해 양로원으로 가고자 그토록 원했던 할머니도 혼자 남은 여울이를 지켜주기 위해 곁에 남는다.
이제 필요한 건 이해와 사랑으로 뜸들이기… 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행복 재료들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필요한 건 깊은 맛이 우러나도록 이해와 사랑의 시간을 들여 뜸들이는 일만 남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언니와 오빠, 삼촌의 발 빠른 가출 때문에 철이 들은 걸까 아니면 슈렉의 키스를 받고 피오나 공주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 왔기 때문일까.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은 건 더더욱 많은 열일곱, 가족의 고난을 온몸으로 껴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이다. 하지만 상처를 내는 것도 가족이고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결국은 가족일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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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불량 가족 레시피>라니. 책제목에 어울리게 책표지에 있는 그림 또한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아니 사실은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한다.
사실 이 책은 우리 승훈이가(14살) 교보문고 서점에 가서 직접 골라운 책이다. 우리 승훈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사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같은 느낌인가? ㅋㅋ 아니면 자기도 이제는 청소년이라고 이쯤은 읽어줘야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작가 손현주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2010년 평사리문학대상이 눈에 들어와서였을까? 생각 해본다. (사실, 내 고향이 경남 하동이다. 박경리 님의 토지로 유명한 토지문학제에 승훈이가 어렸을 때 참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고향 하동에 대한 글은 언제나 내 가슴에 울림으로 다가오기에 이 책의 작가 손현주 님에 대한 더 친근함이 묻어난다.)
아무튼 이 책은 초등학교 졸업전인 승훈이의 바쁜 틈을 타서 내가 먼저 단숨에 읽어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인 권여울이는 자서전을 쓰라는 숙제를 생각하면서 누구보다도 불량스러운 자신의 가족을 생각 해 본다. 가출을 꿈꾸며(자신은 가출이 아닌 '출가' 라고 생각하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불량 가족을, 있는 그대로 우리 집 이야기를 쓰는 건 자타가 공인하는 콩가루 집안을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다 생각하면서도 담임이 내준 숙제인 자서전을 외면하기에는 장학금의 유혹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는 솔직함이 엿보여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우리의 청소년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문제적 가정의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서글프고 신랄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낸 듯 했다. 나역시도 이 책을 통해 평소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던 코스튬플레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위태로운 가족을 보면서, 나 역시도 불량 가족의 일원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내 가정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토록 술술 읽히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 대해 나 스스로도 참 많은 생각을 해 봤다. 1.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 2.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사랑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사랑 에 대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으며, 이 책을 읽게 될 우리 승훈이는 어떤 대답을 할까, 생각해 봤다. 또한 195쪽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가난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지 않는 것들을 놓치게 한다. 나는 그걸 참을 수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뭐든지 참고 견뎌야 한다면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불 보듯 뻔한 상황에 끼여 아등바등하느니 다른 길을 가 보고 틈도 엿보고 싶다. 언제든 상황은 바뀐다. (우리 가정 또한 많은 위기가 있었음을 잘 알기에 우리 후니는 그 누구보다 더 희망향해,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야 함을 잘알기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지도 모르겠다.기특한거,,)
알고 보면 다들 자기 앞에 놓인 일들이 감당이 안 되어 본의 아니게 서로를 괴롭혔는지 모르겠다는 여울이의 말에, 아니 작가의 마음에 공감 해 보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화하는 거야." 에 공감하고 또 공감 해 보면서 이 책을 읽는 모든 청소년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네이버블로그도 구경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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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는 요리법을 말한다. 개인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요리법을 소개하는 사이버 공간이 많아지고 이들이 올린 정보를 검색을 통해 유용하게 획득하는 대중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요리가 어떤 집안의 맛을 이어오는 ‘전수’의 의미보다는 ‘습득’의 의미로 변화한 것 같다. 정보원천자는 온전히 내 것으로 가지고 있기보다 개방을 통해 자신의 요리방법을 나누고 방문자수의 증가에 성취감을 느끼면서 물리적 댓가가 없어도 기꺼이 나의 새로운 레시피를 포스팅한다. 그러면서 단순한 요리법 제공에서 더욱 맛깔스러운 사진과 전달력 있는 포스트로 이웃들의 발걸음이 줄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서서히 ‘레시피’라는 단어는 대중화되어 갔고 이제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에서만 굳이 갖다 붙이지 않는다. 온갖 책 제목에 레시피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요리책이 아니어도 ‘레시피’라는 단어가 즐비하다. 그래서 『불량가족 레시피』를 보는 순간 책 제목부터 신선함이 떨어졌다. 읽기 전 당장 내가 결정해야할 것은 삼십 넘은 나이를 먹은 어른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야할지, 청소년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십대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가 책을 읽어야할지 이것부터 결정해야했다. 그런데 책에 몰입하는 순간 원래 나이 그대로의 독자로서 책이 읽혀졌고 내가 의식적으로 ‘나는 십대 소녀야, 나는 십대 소녀야’ 할 정도의 산만함은 갖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보니 읽는 동안 나의 나이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 읽고 난 후, 십대의 소녀로 돌아가 이 책을 판단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마음 먹어놓고도 막상 다 읽고 나니 이것도 저것도 설정할 일이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억지로 하려고 하니 어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심대의 독자의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해버렸다. 분명 청소년들에게는 아주 잘 읽혀질 소설이다. 그들의 요즘 말투와 관심상을 녹혀 내려 노력한 흔적이 다분했고 이제까지 접했던 청소년 소설 대부분이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이 소설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이 일단 참신했다. 소설 전반의 중심공간은 가족의 기본 울타리인 ‘집’과 소설 속 주인공 여울이의 취미인 ‘코스프레 행사장’이다. 청소년 하면 떠오르는 ‘학교’와 ‘입시’, ‘친구’, ‘꿈’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부분의 청소년 소설과 달리 인간의 근본적인 인성이 시작되고 단단해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초점으로 소설 전반이 흘러간다는 것이 반가웠다. 가족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많이 봐온 터였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게 가장 큰 영향력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 생각이 많이 나는 작품이었다. 두 소설 모두 세상의 잣대에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불량 가족’이 소재가 되었고 그래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온기가 배여 있고 보호해주는 최후의 보루라는 플롯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권여울의 가족구성원은 그 누구도 평범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다. 죄다 평균이하인 사람들, 요즘 유행어로 하자면 ‘루저’이다. 여울이부터가 혼외자식에 엄마는 댄서였다는 사실만 알 뿐 엄마의 생사조차 모른다. 화자가 17살 소녀이기 때문에 세세한 개인사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주워듣고 눈치로 대충 식구들의 상황을 평가하기 때문에 특히 어른들 즉 할머니와 아버지, 삼촌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지금 드러난 상황만을 가지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잔소리꾼 할머니와 계속된 사업실패와 여성편력으로 복잡한 가정사만 만들어낸 아버지, 주식에 미쳐 가족들마저 등을 돌린 삼촌의 경우에는 여울이의 눈에는 이해불가한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어른의 범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핏줄이니까 얼굴 맞대고 살고 있긴 하나 언제나 ‘출가’를 꿈꾸며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어서 독립하고 싶기만 하다. 완벽한 ‘출가’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보지만 당장 숨통이라도 트이고자 ‘출가’ 전까지 견뎌내기 위한 방편으로 ‘코스프레’에 선택했다. 이 순간만큼은 현실의 여울이를 벗어날 수 있어 살 것 같다. 배다른 언니와 오빠도 정상치 범주에 넣기 어려운 인물이다. 입에는 욕을 달고 몸에는 살집을 달고 사는 언니와 겉보기엔 멀쩡해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병에 가끔은 기저귀까지 차고 있어야 하는 오빠까지, 도저히 이 집에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식구는 하나도 없다. 여울이는 이런 집구석에서 미련 없이 떠나고 싶기만 하다. 그 욕구를 여울이가 아닌 만화캐릭터로 변신함으로써 그녀의 욕망을 분출한다. 그러나 여울이는 그 마저도 시들해진다. 화려한 분장과 옷을 입어도 12시가 되면 미천한 신데렐라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여울이의 현실은 짧은 코스프레 분장으로 막아보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피오나 공주로 변신해도 그녀 옆에서 보호해주는 슈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늬만 공주인 척 해야 하는 자신에게 씁쓸함만 밀려들 뿐이다. 누가 봐도 불량식구들로 구성된 불량가족일 뿐이다. 모여 있으면 불량도만 높아진다. 불량식품을 먹고 나면 영양가 없이 배만 더부룩하고 온갖 첨가물만 내 몸 어딘가에 쌓이듯이 불량식구들이 모여 있으면 서로를 곪게 하고 곪은 것을 터지게 만들어 오히려 악취만 나게 하는 집구석이 되어 버린다. 여울이의 눈에는 아빠는 가족에게 짐만 지워주는 무능력자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한을 여울이에게 무대포 잔소리를 쏘아대는 마귀할멈이다. 그리고 삼촌은 스스로 뇌조절도 못하는 장애자에, 언니는 미운 정만 쌓일 대로 쌓여 더 이상 쌓을 情도 없는 밉상인데다 오빠는 소심의 극치만을 보여주는 존재감도 없는 사람이다. 요리로 치면 불량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모양새도 없고 맛은 자극적이기만 한데나 영양적으로는 배나 아프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라고 할까. 어쩌면 레시피 자체가 엉망이어서 볼품없이 만들어진 요리인지도 모른다. 여울이네 가족 구성은 그렇게 조립이 힘든 DIY 제품마냥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식구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여울이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던 ‘출가’를 언니가 먼저하고 뒤이어 삼촌, 오빠, 할머니까지 집을 나가버린다. 말 그대로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린 순간, 여울이는 이 생경한 상황에 자신이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보기 싫었던 면상들이 사라져 주었음에도 그녀는 사라진 식구들을 걱정하기 시작하고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진다. 여울이의 시선을 통해 어른들을 평가하고 열일곱 여울이의 수준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온통 불만 투성이었지만 결국은 여울이가 이겨 내야하는 성장통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른들은 쉽게 10대 때의 고민과 불만을 잊어버린다. 그 시절을 지나온 어른부터 아이들을 이해해주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부모를 이해하라고 다그친다. 어른의 이해 폭이 훨씬 넓으면서 아이들 사이즈엔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어른의 수준에서 아이들이 갈 길을 정해준다. 그것이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번데기로만 있지 않는다. 그들에게 껍질을 벗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아 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자신의 그 시절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던질 것인데, 어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고 기다려 주지 못한다. 사춘기 시절 한창 썼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그 유치함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이지만 당시의 내가 견뎌야했던 무게감은 가출과 반항을 무기로 지탱하지 않았던가를 깨닫고는 그 성장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진짜 용기를 내 출가한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생각이다. 수첩을 꺼내 출가에 대해 잔뜩 끼적거려 놓은 면을 뜯어냈다. 그 메모들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심각하게 적어 두었던 출가 지침이 이제 진부해보였다. 195p 여울이가 수첩을 뜯어내는 순간 여울이는 훌쩍 커져 번데기 껍질을 벗어던지고 있다. 그녀가 위기를 가족의 진화로 승화시키기로 마음먹는 순간 이미 불량가족의 불명예가 살짝 지워진다. 여울이가 이제까지 정의내린 ‘불량’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각 자의 삶과 사정과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함부로 ‘불량’이라는 딱지를 빨간 차압딱지처럼 붙여놓을 순 없다. 그녀가 세상의 프레임을 넓혀서 보기 시작하자 봄눈처럼 녹아내리는 자신의 불만과 반항심 자리에 애틋함과 규정짓기 힘든 따스함이 채웠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가족이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흐름이 쉼표 없이 달려가는 기분이라 금방 읽혀 대중성이 있다. 요즘 아이들의 관심을 소재로 끌어와 친숙함까지 더했다. 세련된 문장이나 서술의 기교는 구경하기 힘들지만 청소년 소설답게 십대의 시선에서 호흡하고자 한 노력이 역력하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통해 청소년 독자의 간접 경험의 확장을 제대로 선사해주고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시선을 좀 더 곱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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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은 신의 분탕질인가, 이런 조합의 가족이라니...
운명이라 하고 팔자라 부르기도 하는 인간사의 보이지 않는 영역을 관장하는 신은 한번 얕보인 사람에게는 무자비하게 냉정하고 잔인한 힘을 휘두른다. 시련 앞에 나약한 모습으로 주저 앉아있는 사람은 몇 배 더 강력한 시련으로 시험한다. 절벽에서 던져진 새끼들 중 절벽을 기어 올라오는 녀석에게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창을 열어둘 심산으로 가혹하게 군다. 열일곱 살 여울이네 집에 오래도록 짙게 드리운 신의 분탕질이 갈수록 위세가 등등하다. 여든셋의 나이에 남들은 며느리의 따뜻한 밥상을 받을 때이지만 육아와 살림살이에서 놓여날 여유가 없는 할매. 양로원의 예치금을 마련해서 자식과 손주들 뒷바라지에서 해방되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순경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멀쩡한 허우대의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이미 두 명의 여자와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분통을 터뜨린다. 아마도 이 집에 운명의 신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낸 순간을 되짚어 가면 이 시점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여울의 아빠는 채권추심대행업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만 여자를 지나치게 밝히는 위인이다. 그 결과가 엄마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엄마가 제각각인 세 명의 자식이다. 특히 나이트클럽 댄서 출신의 엄마에게서 혼외자식으로 태어난 여울이는 이 집안에서 더욱 겉도는 존재다.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언니와 오빠도 상황은 좋지 않다. 전문대생인 오빠는 다발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어서 스물한 살의 청년이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 중학교 때 발병한 증세를 바로 치료했더라면 완치도 가능했을 텐데 아빠와 할매는 오빠의 고통을 외면했다. 아마도 병원비가 두려워서 치료의 엄두를 못 내고 무관심으로 포장했을 법하다. 고3 수험생인 언니는 채권추심업체는 늘어나고 일은 줄어드는 바람에 사무실을 정리해버리고 가족들을 동원해서 일을 꾸려나가는 아빠의 일을 돕느라 공부도 제대로 할 상황이 아니다. 수험생이 매일 컴퓨터도 채권자 리스트 작업만 하고 있고 대학은 꿈도 못 꿀 처지다. 명문대를 졸업해 투자자문가로 꽤 성공한 위치에 올랐다가 주식투자로 재산을 탕진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가족에게 버림받고 여울이네 얹혀사는 삼촌까지 보태진 여울이네 가족의 우울한 조합은 여기까지다. 이 가족의 ‘불량’함은 결핍과 궁핍에서 비롯된다. 핏줄이라는 연으로 묶이기에 독특한 가족 구성이다. 온갖 궁상과 비루한 삶의 집합소다. 겉보기엔 멀쩡한 40평대의 아파트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기형적인 월세를 내며 살고 있는 집은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있는 이 가족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빠는 치료비 걱정에 방치해둔 병이 이제 평생 안고 살아가야할 고질병이 되어버렸고, 언니는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만 갈수록 쪼그라드는 살림에 대학은 꿈도 못 꿀 수험생이다. 위장이혼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집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삼촌은 결국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수술비로 어머니의 노후자금까지 빼먹고 얹혀살고 있다. 자식 둘과 손주 셋의 뒤치다꺼리에서 해방될 마지막 보루였던 양로원 예치금마저 아들 수술비로 털어 넣고 신세 한탄하는 할매와 직원들 밀린 임금과 가족들 생활비를 위해 불법추심을 하다 구속 수감된 아빠. 이런 가족에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원이 된 여울이는 아빠의 주머니를 슬쩍 뒤지고 학교 매점 식권을 복사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근근이 모은 돈을 코스튬플레이에 쏟아 넣으며 살아간다. ‘가난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지 않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는 여울이의 말이 깊은 공감을 불러온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조금 불편할 뿐이다.’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가난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돈이 그어놓은 한계를 뛰어넘을 특출한 재능이 있다거나 세상사의 불편함 쯤은 초월한 득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다. 가난 때문에 ‘오히려 재능은 우리 집에서 불필요한 개인기일 수 있다’며 꿈조차 꾸지 못하는 여울이와 밀린 월세로 대부분을 대체해버려 얼마 남지 않은 보증금마저 차압당해 길거리로 나가게 된 가족에게 가난은 죄가 아니고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말은 사치이고 분노를 촉발하게 하는 언어유희일 뿐이다. 조금씩 잠식해온 가난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결국 가족 해체 상황까지 맞이한 이 가족은 ‘불량’한 가족이 아니라 ‘불쌍’한 가족이 아닐까. 이 ‘불쌍’한 가족을 바닥까지 몰고 간 표면적 원인은 궁핍한 생활에서 찾아야겠지만 엄마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가 이 가족의 근저에 깔려 있다. 모성의 부재는 버려졌다는 상처와 직결되고 절름발이인 마음으로 쩔뚝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아픔을 예고하는 말이다. 이 집안의 금기어 ‘엄마’. 누구도 엄마의 존재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며 가슴을 짓눌러대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라는 묵직한 바위덩어리 하나씩 품고 살아가고 있다. 이십오 년 전부터 부재중인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해봤던 아빠와 삼촌은 아버지의 말소된 주민등록증과 묘연한 행적으로 객사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포기를 했지만 아빠와 삼촌 또한 부성에 목말라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스스로도 ‘부재중인 아버지’인 삼촌과 자기만의 투박한 방식으로 아이 셋의 아버지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구치소에 수감됨으로써 ‘부재중인 아버지’가 된 아빠는 어느덧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됐을 것이다. 세 명의 아이들을 버린 세 명의 엄마들 중 한명이라도 엄마의 자리를 지켜줬더라면, 사고만 치고 허황된 꿈만 쫓는 남자였어도 아버지 자리만은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이 가족은 어떠한 고난에도 의식주의 근간을 흔드는 가난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고 견디고 이겨냈을 거라는 측은함이 든다. 지나치게 묵시록적이지도 터무니없이 발랄하지도 않은 학교와 아이들.
불량 가족, 헤쳐 모여~~~
그 중심에 여울이가 서 있다. 사랑이 자신에게 가장 취약한 영양소라고 하는 여울이는 코스튬플레이라는 마법의 힘을 빌려 잠시나마 많은 시선과 사랑을 받는 주목받는 生이고 싶었을 거다. 진정한 사랑을 찾아 스스로 마법을 풀어버리고 원래의 못생긴 모습으로 돌아온 피오나는 가장 용감하고 멋진 공주다. 여울이 또한 용감하게 자신의 운명과 세상과 맞선 피오나 공주처럼 세상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길 바란다. 학창시절을 죽을힘을 다해 버텼던 나에게 보내는 응원처럼 나는 지금 여울이를 응원한다. 여울아 힘내라. 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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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좀 씹고 다리 좀 떨어보지 않은 애들과는 친구하지 않는다는 여울이를 보며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실풍경이 떠오른다. 학기초가 지나고 서서히 얼굴이 익혀지면서 그룹이 나뉘게 된다. 공부에 열중하는 학구파, 까불거리거나 조용한 아이들,여울이처럼 껌 좀 씹어대고 다리도 좀 떨어주시는 일명 날나리들. 그 중에서도 대놓고 욕을 입에 달고 살거나 껌을 쫙쫙 씹어대는 아이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세계랄지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사립 중학교에서는 유난히 극과 극의 아이들이 많았다. 끼리끼리 논다고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비교적 두루두루 잘 지냈던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중간층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정쩡한 그룹. 여울이네처럼 복잡한 가족사는 아니었으나 그다지 평온한 형편은 아니었던지라 늘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꿨지만 그것도 성격탓인지 대놓고 삐뚫어지진 못하는 나는 그런 그룹과는 부러 어울릴 생각은 하지 못했고 관심사도 달라서 내 성격에 흔히 말하는 좀 노는 아이들과는 평생 어울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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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새까만 차여야 한다. 거대한 먹물 통에서 방금 건진 것처럼 새까만. 그래야 뽀대난다. 철컥, 아니 척! 짧고 경쾌하게 열리는 도어. 눈매의 주름이 부드럽게 잡히자마자 방울져 구르는 눈물. 단순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품위가 2초쯤 후에 감지되는 투피스 차림의 여성. 마네킹처럼 하얀 손에 쥐어진 실크 손수건으로 눈가를 적절한 순간에 찍어내지 못해 마스카라가 얼룩진다. 그러나 그녀의 우아함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옥의 티는 오히려 더 아름다운 법. “네가…… **이구나.” 내가 네 애미다, 아이고 내 새끼, 식의 신파조 한탄은 곤란하다. 외국어 발음에 익숙한 어조는 괜찮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지만 여인의 향수는 이를 충분히 견디게 한다. 향수 이름 잘 모르는데, 어쩌지. 그래, 마릴린 먼로가 잘 때 입었다는 샤넬 넘버 5의 향기라고 쳐두자. 향기에 취해 그만 나도 덩달아 껴안을 뻔하지만 왜 이제야 날 찾아왔냐는 눈빛의 언어를 보내며 어깃장 놓는 것도 빼먹으면 안 되겠지? 고개를 돌린다는 게 사모님 하차를 제때 도와드리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역시 거대한 먹물 통에서 방금 건진 정장을 입은 미끈한 기사 아저씨와 맞닥뜨린다. “도련님.” 당황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슴이 쿵쾅거리고 만다. 수없이 이런 상황을 대배해 연습했는데도 현실로 다가온 나의 진짜 현실에 적응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뒤를 돌아보자 며칠 전 나한테 몽둥이찜질을 선사했던 죄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아무래도 그만 뻗대야 할 것 같다. 한때 엄마라고 불렀던 정을 생각해서 그만 내 눈치를 살피게 해야겠다. 그게 사람으로서의 도리겠지. 기구한 부모의 사연만 없었어도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았을 것을. 허나 또 다시 몽둥이를 드는 아줌마를 보게 된다면 나중에 엄마라고 부를 여인에게 다 까발릴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던 어린 날, 이런 상상을 하며 종종 현실을 잊곤 했다. 여울도 이런 상상을 곧잘 했을 것 같다. 할매로부터 ‘송장 칠 나이에 똥 걸레 빨게 한 년(P. 15)’이라는 지청구를 들을 때마다. 자기 엄마가 나이트 댄서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나이트 댄서이기 전에 가출한 재벌가의 외동딸임을 짐작도 못하는 가족들은 나중에 놀라 자빠지겠지. 뭐, 곧 가족이라 부를 필요도 없겠지만. 외할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이른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으나 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으로 본래의 생활로 복귀했을 게 뻔한 엄마를 충분히 이해하는 딸이 되어야겠어. 귀하게만 대접받다 세상이 꽤나 고단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테니까. 수시로 내가 보고 싶을 텐데, 대체 어떻게 참고 있는 걸까? 거대한 먹물 통에서 방금 건진 듯 새까만 차를 몰고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으리으리하게 시작한 가족로멘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를 여염집 막내딸쯤으로, 굴곡 심한 청춘을 보냈으나 여전히 미모를 뽐내는 여인으로, ‘돈 없는 가난한 엄마에 사기꾼 딱지까지 붙어 있다면 나 역시 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P. 41)’르는 귀찮은 존재로 바뀌면서, 현실에 가까워졌겠지. 성장하면서 꿈이 소박해지는 동시에 현실적으로 바뀌는 아이들처럼. 참 여울은 손현주 소설 <불량가족 레시피>의 화자이다. 아빠 불곰의 숱한 여성 편력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증거물이 되어버린 각각 배 다른 삼남매 중에 막내다. 세 아이의 엄마 중 한 사람도 남지 않은 집의 살림은 팔순 넘긴 할매가 도맡게 되면서부터 양로원은 죽은 후에나 갈 수 있는 극락과 같은 곳이 되어버리고, 뒤가 켕기고 게다가 점점 기울어가는 아빠의 사업은 무대는 거실로 바뀌어버리고, 한때 잘나가던 삼촌은 가정의 붕괴를 막으려다 가족으로부터 독박 쓰고 쉰에 가까운 나이에 홑몸으로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되고……. 나이가 어릴수록 미래가 밝아야 하는 법인데, 이 집구석에선 통하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듯 대학생 장남은 기저귀 차고 다녀야 하는 다발경화증 환자로 노심초사 살아야 하고, 둘째 장녀는 살과 관련된 온갖 별명을 자석인 양 끌어당겨야 하지만 당당하게 수저질하며 살아가고, 여울은 언니처럼 엄마도 만나보지 못하고 살뜰히 품었던 사랑마저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오래전부터 준비하며 고대해오던 ‘출가’ 계획은 실행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유일하게 잘 지내는 가족이 있다면 여울이 주워온 고양이밖에 없다. 할매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때때로 여울의 체온을 느낄 때마다 전달되는 끈끈한 무엇이 전달되므로. 여울에게 있어 가족은 고양이만 못한 존재들의 집합이다. 비빔밥 위에 놓인 계란 프라이나 당근 따위를 걷어내듯이 쉽게 관계를 끊을 수 있다면 열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한 장, 한 장, 수평을 봐가며 견고하게 쌓아올린 벽돌집이 아니라 날림으로 대충 완성한 집 같은 가족. 태풍 한 번 들이닥치면 흔적 없이 사라질, 그 전까지만 가까스로 구성원의 관계가 유지되는 가족. 강력접착제 유대감은커녕 딱풀만큼의 접착력도 기대하기 힘든 가족. 이런 가족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살 것 같은 여울. 그런 까닭에 출가는 여울의 살아가는 목적이 된다.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한다면 얼씨구나 하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씨도 먹히지 않는 노래는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 하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안정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집에서 당장 떠날 수 없는 여울은 코스튬플레이의 달콤한 상상으로 삶의 위로를 얻으며 간간히 버텨간다. 가족로멘스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쳐 시들해지자 보다 적극적인 현실 이탈을 강구한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옷과 몇 가지 소품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다니! 마리아 아줌마는 이 책에서 차지한 비중은 적지만 결정적인 역할로 등장한다. 한참 늦은 나이에 코스튬플레이를 시도한 아줌마의 용기는 가상하지만 치기는 어쩔 수 없어 멀리하고 싶으나 끈덕지게 여울에게 따라붙는다. 아줌마가 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보리차의 따스함을 삼키며 끈끈한 무엇이 자꾸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감지하는 여울. 여하튼 아줌마 덕분에 좀처럼 펼치기 힘든 책, 그것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책 내용과 가족의 생활을 비추어보고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P. 104)’는 진리를 짜 맞추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아주아주 고리타분한 교훈(P. 180)’을 얻기도 한다. 책보다 가출한 딸에 대한 걱정으로 생긴 아줌마의 멍 자국은 고리타분한 교훈에 힘을 싣는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는(P. 180)’ 어른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알고 보면 노상 구박하는 할매도, 평생 어른이 될 것 같지 않은 불곰도 죽어라 날 싫어하진 않는다. 꼬깃꼬깃 접어놓은 애정을 어디에 두었는지 자꾸 깜박해서 저렇게 무심한 척 하는 거였다. 욕쟁이 언니가 가출하고, 뒤미처 오빠와 삼촌이 짐 사들고, 불곰은 구속되고, 할매마저 부산 이모집으로 내려가는, 여울의 숙원이 얼떨결에 이루어지려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가족의 끈끈한 무엇이 우리 집에도 있지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손녀를 걱정한 할매가 끝내 떠나가지 않자 우리에게도 끈끈한 무엇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 더없이 불량한 가족이지만 우리에게도 있다. 끈끈한 무엇이!
성이 각기 다른 세 자녀와 이들의 생모로 구성된 가족. 불행의 조건을 두루 갖춘,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혼 가정에 대한 이야기인 공지영 소설 <즐거운 나의 집>은 끈끈한 무엇이 있으면 여느 가정보다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짐작하지 못할 생물이 여전히 많듯이 짐작하지 못할 사람도 많다는 것을, 이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가족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들에게도 끈끈한 무엇이 있기에 일흔을 넘긴 엄마는 다 크다 못해 늙어가는 아이들 끼니를 준비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아이들은 더 늙은 엄마가 해대는 밥을 아귀처럼 먹어댈 수 있는 것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역시 가족의 형태가 바뀌어 가지만 이에 반해 가족을 바라보는 견해는 바뀌어 지지 않는 사회의 모순을 꼬집고 있다. 수정확대가족, 독신가족, 비혼입양가족, 딩크족 등 다양한 가족의 신개념이 만들어진 지 오래다. 물론 여울이네 집처럼 여러 번의 이혼과 경제적 곤란으로 부실하게 형성된 대가족도 있다. 설사 가족이 붕괴되더라도 가족간의 끈끈한 무엇이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금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사회의 냉담함을 고깝게 바라보고 있다. 각기 다른 가정의 요소가 아이들의 핸디캡이 되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십대 소녀의 눈을 빌려 유쾌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 ‘각기 자기의 독특한 방식으로 불행(톨스토이 소설 <안나 까레리나> 중)’한 청소년들에게, 한때 가족로멘스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청소년들에게 힘차게 한걸음 내딛게 하는 힘이 된다. 평균치 행과 불행을 오가는 보편적인 가정의 청소년들에게는 개개인이 다르듯이 가족 또한 다를 수 있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만약 성인 독자라면? 어서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태반의 청소년들에게 이런 멋진 말을 던져줄 수도 있고 말이다. “나도 네 나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지. 근데 어른 되니까 책임감만 있고 별 재미가 없어. 여울아, 흥미가 가는 건 뭐든지 해 봐. 그러고 나서 천천히 어른이 돼도 늦지 않으니까.(P.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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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문학동네청소년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그러고보니 청소년 문학상이 여러개 있는 거 같다. 1회라고 하니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또 만든 모양이다.
청소년 문학상 작품이 거의 그렇듯 이것도 성장소설이다. 할머니, 아버지, 삼촌, 그리고 딸 둘, 아들 하나.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다 다르다. 그런데 그 세명의 엄마중 단 한명도 같이 살고 있지 않은 거다. 참으로 불안한 가족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돈 버는 것 때문에 아이들 공부 보다는 일을 시킨다. 여기에 며느리가 할 일을 모두 떠맡아 해야 하는 할머니의 악다구니는 일상이다. 읽는 내내 불안감을 느꼈는데 역시나 가족이 해체되고 만다. 우선 언니가 집을 나간다. 그리고 오빠와 삼촌이 연이어 나가며 주인공과 할머니 아버지만 남는다. 그것마저도 깨어지는 건 오래지 않아서다.
해체되고 분해되는 가족 속에서도 그나마 아이는 코스프레 따위로 위안거리를 가지고 있다. 책은 그다지 충격적이거나 재미있지는 않다. 말그대로 한 위태로운 가정의 위태로운 고등학생의 이야기이다. 책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이 가족의 의미를 잃고 그냥 동거하는 사람들로 되어가는 것이 현실의 요즘 세태 같아서 좀 그렇다.
중고등학생은 이런 류의 책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니, 어떻게 평가할까? 갑자기 그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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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청소년 관련 책을 볼때 소설속 주인공인 그 청소년이 되어 혼자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좀 바뀌었다. 아무래도 십 대의 아이들 둘을 키우는 엄마라서 일까. 내 아이를 보듯 그렇게 안타깝고, 상처받고 아파하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만든 어른들을 탓하고 있다. 나쁘다고 하면서 혼자 막 화도 내게 된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어른으로서 잘 행동하고 있나, 엄마의 입장에서만 아이를 보고 있지는 않나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나이를 먹은 사람이지만 마음속엔 아직도 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지라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