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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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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화국 시리즈를 좋아한다.  승자의 기록만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이 책을 어디서 부터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드문드문 읽어내려서, 역사의 맥이 끊긴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고싶었는데, 위만조선부터 들어가기엔 시간이 걸릴 것 같고, 고려의 마지막과 조선을 이어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부터 읽어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중간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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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공화국 시리즈를 좋아한다.  승자의 기록만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이 책을 어디서 부터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드문드문 읽어내려서, 역사의 맥이 끊긴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고싶었는데, 위만조선부터 들어가기엔 시간이 걸릴 것 같고, 고려의 마지막과 조선을 이어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부터 읽어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중간중간 읽은 책들도 있지만, 그 부분은 그때가서 다시 읽기로 하고, 고려 말 북벌정책을 폈던 우왕과 최영.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해버린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요동 정벌에 성공했다면 고려는 고구려의 옛영토를 회복 할 수 있었을까?

 

 

 고려 말의 명장, 최영이 김딴지 변호사를 찾아왔다.  그가 소송을 건 사람은 태조 이성계.  최영장군은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반역자에 불과한데, 후손들이 그를 영웅처럼 높이 평가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는 장수라는 오명까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요동 정벌을 성공시켰더라면 한반도가 이렇게 작아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국력도 지금보다 훨씬 커졌을 테니 말이다.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가졌던 이성계는 백 보 이상의 거리에 있는 투구나 날아가는 새 따위의 표적을 정해놓고 '저것을 맞추면 이번 전투는 우리가 승리한다'라는 식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던 인물이었다. 물론 그 화살이 1388년에는 아군을 겨냥했다고 김딴지 변호사는 이야기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성계는 전쟁을 끝내고 백성들을 토탄에서 구하려면 개혁이 필요했다고 이야기를 한다.  개혁이 필요했다?  그당시 고려가 어떻길래 개혁을 운운하는 것일까?   1374년 불과 열살에 왕이 된 우왕은 힘이 없었다.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로 나가기 위해 권문세족에게 뇌물을 바쳤고,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고려는

왕과 조정 대신만 있는 나라였다.

 

 

 요동정벌은 우왕입장에서는 왕권강화를 위한 꼭 필요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조정 대신들은 반대를 했고, 이성계 역시 사불가론을 이야기한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좋지 않다. 셋째, 거국적인 원정으로 왜가 그 허점을 틈탈 것이다. 넷째, 지금은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붙임이 풀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군대가 질병에 걸릴 것이다.  사불가론과 함께 이성계는 회군을 하고 가장 먼저 최영을 제거한다.  그리고 '페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창왕을 폐위할때 명분으로 내세운것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에 진의는 여전히 알수 없지만,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내세우면서 <고려사>에 '페가입진(廢假立眞)'을 열전에 넣고, 끊임없이 왕씨의 존재를 없앤다. 고려 400년 역사속 모든 왕이 왕씨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500년이 지나면서 왕씨를 찾아 볼수 없다는 것은 이성계가 왕씨의 자립을 얼마나 두려워했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달은 차면 기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것은 아니다.  고려 왕실을 수호하려는 보수 성향의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최영과 현실 개혁 성향이 강한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이성계.  군대의 시각에서 본다는 충실한 무장이었던 최영에게 이성계는 반역자지만, 당시의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측면에서 보면 이성계는 그 시대의 요구를 잘 읽어낸 사람이다.  지나간 역사는 만약에라는 말로 되돌릴수는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숙고해야만 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  시대도 상황도 다르지만 이 돌고 도는 역사를 제대로 끌어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니 말이다.

 

 



d****2 2012.06.26. 신고 공감 2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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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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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김갑동 글 / 조진옥 그림 (주)자음과 모음 펴냄       이성계가 살던 14세기는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습니다. 국내에서는 권문세족의 수탈과 국가 경제의 붕괴로 인해 새로이 관직에 진출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했으며 국외에서는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탈이 아주 심했습니다. 이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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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김갑동 글 / 조진옥 그림

(주)자음과 모음 펴냄

 

 

 

이성계가 살던 14세기는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습니다.

국내에서는 권문세족의 수탈과 국가 경제의 붕괴로 인해 새로이 관직에 진출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했으며 국외에서는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탈이 아주 심했습니다.

이럴때 백성들의 생활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원나라의 막대한 공물 요구와 경제적 수탈로

인해 고려의 경제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나라의 관계 속에서 권문세족이 새롭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몽골어를 배워 역관으로 활동하거나 원나라에 바치던 응방이라는 기구에서

활동하면서 부를 축척했습니다.

권문세족의 자식들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유학보다는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지냈습니다.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토지를 소유했고, 일반 양민을 노비로 삼는등

권문세족의 힘이 점차 커졌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습니다. 신진 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은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한 지방의 중소 지주들이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는 권문세족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불법적인 인사 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과

권문세족이 소유한 농장을 혁파하라고 주장했습니다.또 홍건적은 원나라 말에 몽골족의 압제에

시달리던 한인이 중심이 되어 백련교와 미륵교라는 비밀 종교 결사 단체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원나라에 대항했던 농민 반란 세력이었습니다.

 

홍건적은 공민왕때 두번의 침입을 했는데  안동까지 피란을 간적도 있습니다.

그때 고려의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을 해서 조세 저장 창고인 조창과 조곡 운반선인 조선을 약탈했고

차음 세력을 키워 고려의 내륙 지방은 물론 개경 근처까지 출몰하여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때 전쟁을 이겨 공을 세운 최영과 이성계가 등장했는데 딸이 우왕의 비가 되면서

권문세족을 대변하게 된 최영과 중앙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고 개혁정치를 추구하던 신진사대부를

대표하여 이성계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명나라가 고려에 대한 우위와 이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했으나 고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일때 최영과 우왕은 명나라가 고려를

공격하기 전에 요동을 공격하여 잃어버린 고구려 땅을 되찾자고 했지만 이성계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에게 전투 명령을 내렸고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나섰지만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최영을 잡아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하였습니다. 개인소유의 논밭을 없애고 기구를 개편하는 등 실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상황이 생겼을까요?

아마 장단점이 모두 있을것 입니다.

 

그때 이렇게 밖에 할수 없었던 이성계와 반대였던 최영을 보면서 그 시절 역사를 되돌아 보게 되고

장단점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YES마니아 : 로얄 y*****0 2013.11.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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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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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지만 한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다른 한 사람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위화도 회 군당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최영 장군 이성계가 왕명을 따르지 않고 위화도 회군을 하였지만, 당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 정벌에 성공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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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지만 한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다른 한 사람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위화도 회 군당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최영 장군 이성계가 왕명을 따르지 않고 위화도 회군을 하였지만, 당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 정벌에 성공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는 사실입니다. 우왕과 이인임,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 많은 역사 속 인물들의 증언과 함께 한국사 법정에서 만나보게 될 '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와 함께 하기로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출세보다는 나라의 앞날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하 장수들과 병사들보다 자신이 먼저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기도 했습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 최영보다는 열아홉 살이나 어린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습니다. 움직이는 표적도 백발백중으로 맞히기까지 하였으니까요. 왜구와의 전투 중 대승을 거두었던 황산 대첩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최영과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위화도 회군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정당했는지,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 주도권은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법정싸움처럼 느껴지지만 법정에서 역사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고, 흥미로운 역사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은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원고와 피고의 이야기, 증인들의 증언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한면만 보는것이 아니라 다른 면도 보면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인것 같습니다.

k*****7 2013.09.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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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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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제21호, 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편을 통해 최영 VS 이성계 고려말을 장식한 걸출한 두 장군 최영과 이성계가 역사법정에서 다시 만났다. 자! 오늘은 김딴지 변호사와 이대로 변호사가 어떤 열띤 공방을 벌이게 될런지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어서 법정 안으로 들어가 좋은 자리를 잡고 기다려 봐야겠다. 최영 장군, 이성계가 고려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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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제21호, 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편을 통해 최영 VS 이성계 고려말을 장식한 걸출한 두 장군 최영과 이성계가 역사법정에서 다시 만났다. 자! 오늘은 김딴지 변호사와 이대로 변호사가 어떤 열띤 공방을 벌이게 될런지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어서 법정 안으로 들어가 좋은 자리를 잡고 기다려 봐야겠다. 최영 장군, 이성계가 고려말이 아닌 한참 잘 나가던 시대에 만났다면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지키는 사이가 될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 많이 아쉬워진다.

이성계가 왜 요동을 정벌하러 가던 도중에 위화도에서 회군하게 되었는지를 알려면 그 당시 고려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최영 장군과 이성계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같지만 사랑하는 방법에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최영 장군이 왕을 위주로 한 사랑이라면 이성계는 백성을 중심에 둔 사랑이었다.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는 원이 점유했던 고려에 대한 이점을 계속 유지시키고 싶어하고, 그를 위해 철령 이북땅을 고려에 요구한다. 재판을 지켜보다보면 꼭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게 되는데 이번 재판에서는 그것이 무척 힘들다. 최영 장군이나 이성계나 내게 있어서 둘 다 영웅으로 보여졌다. 그래서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라도 두 분이 잘 지내셨으면 싶다.

최영은 명나라가 원나라처럼 쌍성총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요동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들어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옳지않음을 주장한다. 결국 이성계를 대장으로 요동을 정벌하러 출발했지만 계절은 여름, 전쟁을 치르기에 부적절한 기후였다. 당시 권문세족들이 고려를 장악하고 뇌물로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모든 토지를 자신들의 소유로 삼아 백성들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 또 전쟁이 일어난다면 모든 피해는 백성들의 몫이 되는 것, 이성계와 정도전은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고 돌아와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장군을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처형시킨다.

급진개혁파(이성계)와 온건개혁파(정몽주)는 사사건건 부딪히게 되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을 죽이면서 급진개혁파가 권력을 잡게 된다. 창왕,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폐위시키는 끝에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다.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권력은 이동했으며 신진사대부의 주력은 이성계, 정도전 등이 있다. 그들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회수 국가의 재정으로 확충했으며, 정방 폐지, 상서사 설립, 삼군도청제부를 설치한다. 최영장군은 자신을 죽인 이성계가 오명을 씌운것에 대해 법정에서 옳바른 판단을 해줄것을 요청했다.

[판결문]
본 법정은 피고의 무고죄는 유죄, 반역죄는 무죄임을 판결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다. (이방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s*******1 2011.07.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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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의 수괴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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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에서 젊은 아나운서 몇명이 월드컵공사중 남산도로에서 어느 친일파가 버린 비석이 나온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프로가 있었다.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워 해방후 이곳에 버렸을 것이는게 결론이었다. 다들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한다. 이건 그 방송에 나온 모든 패널들,방청객들,시청자들의 조부나 증조부를 욕하는 것이다. 만일 그사람이 자신의 행적이 담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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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에서 젊은 아나운서 몇명이 월드컵공사중 남산도로에서 어느 친일파가 버린 비석이 나온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프로가 있었다.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워 해방후 이곳에 버렸을 것이는게 결론이었다. 다들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한다.

 

이건 그 방송에 나온 모든 패널들,방청객들,시청자들의 조부나 증조부를 욕하는 것이다.

 

만일 그사람이 자신의 행적이 담긴 비석을 버린후 내려와 아들이나 손자에게 자신의 행적을 숨기겠는가

 

자랑하겠는가 그사람의 증손자는 대학에 가서 친일청산을 외치고 이 패널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럼 친일파는 대체 얼마나될까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유추는 가능하다.

 

16세기 콜롬부스시절 스페인땅의 98%를 2%의 귀족이 가지고 있었다.

 

19세기까지 러시아인구중 90%가 농노였다.

 

1865년 링컨이 남북전쟁으로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이들 노예들에겐 피부색이란 차별화가 있어 우리는

 

아직도 피부색만으로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는지 아닌지를 판별해 낼 수가 있다.

 

일본은 무신정권시대인 에도시대(도쿄)가 260년만인 1868년 막을 내리고 4년뒤인 1872년 조선의 갑오경

 

장에 해당하는 개혁인 '폐번치현'을 단행해 노비나 천민 일반 양인들에게 성씨를 나누어준다.

 

조선은 95%가 백정,노비,소작농 같은 상놈이었고 5%만이 양반인 사회였다.

 

1909년 일본의 폐번치현처럼 조선도 '민적법'을 단행해 성씨가 없는 하층민에게 전주이씨,풍양조씨등

 

세도가의 성씨를 마음대로 골라가지라며 나누어주어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때부터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

 

길을가다보면 가끔 대문앞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란 표시가 된 집이 있다 그런데 조선의 신분구조처럼

 

20배나 많았던 친일파의 후손이란 표지는 어느집 대문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김해김씨족보를 보자 수로왕의 10아들중 7아들이 구름을타고 바다를 건너 왜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일합병후 일본이 최초로 한 일이 김해김씨족보의 출판을 못하게 금지한 것이다.

 

4세기 야마토의 뿌리는 고령 대가야로 지난 1985년 일본고고학자들이 후지노키 고분의 발굴을 중단하는

 

사건도 이 고분에서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크게 염려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천손강림신화를 보자 천신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남매간으로 그 부모는 이자나기,이자나미였

 

다, [삼국사기]에는 고령대가야의 시조는 이지아키로 이후 16대가 520년간이어졌다고 쓰여있다.

 

임진왜란 때 20만의 왜군이 왔고 그중 1만명이 조선의 문화에 크게 감화되어 귀화한다.

 

이 중 일부는 인조반정때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반정무리에 참여하기도 한다.

 

1600년부터 오미(대마도 남쪽섬 큐슈북부지역)상인은 일본최초로 복식부기를 사용하였다.

 

복식부기는 네덜란드 상인이 1637년경 세계최초로 고안하여 사용했다고하는데 일본의 오미상인이 오히

 

려 더 빨랐다. 고려 개성상인이 1392년경 고려가 망하자 일본 오미지역으로 집단이주하면서 그들이 쓰던

 

복식부기가 그대로 오미상인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도요타자동차의 메카도 바로 이 오미지역이다.

 

일제시대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섞였지만 지금은 모두 순혈한국인,순혈일본인이다.

 

백제의 유중광은 본래 전주를 보관으로 하는 문화 유씨이지만 그를 일본으로 초청한 장본인이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였던 쇼토쿠태자가 '곤고'라는 성을 하사했다. 곤고 시게미쓰는 586년부터 593년까지

 

오늘날 오사카 최대사찰인 시텐노지(사천왕사)를 짓는데 앞장선다 그리고 593년에 시텐노지가 완공되자

 

그는 쇼토쿠 태자로부터 또 하나의 지시를 받는다. 앞으로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관리하라는 명이었다.

 

그 뒤 오늘날까지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1,400여년간 시텐노지의 보수,관리를 맡고 있다.

 

이후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곤고구미라는 사찰전문 건축회사를 설립하였다.

 

일본에는 지금도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열도가 흔들린다"란 말이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할때 열도에 있는 백제로 본국 백제인 20만명이 건너간다.

 

그리고 200년후 열도 전체인구는 600만명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일본군 총사령관 우히다 수가는 백제인의 후손이란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다가 도요토미의 명

 

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나서기도 한다.

 

1598년 정유재란때 남원성에서 조선인 포로 80명이 일본으로 잡혀갔는데 그 가운데 심당길과 박평의

 

두 도공이 있었다. 심당길은 사쓰마(가고시마) 도기의 종가인 심수관가로 일가를 이룬다.

 

박평의의 후손 박무덕은 도쿄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직업외교관의 길을 걸어 태평양전쟁 시기에 도조

 

히데키내각의 외상을 역임한다 1945년 종전협상에 참여했으며 A급전범으로 감옥에서 옥사한 도고 시게

 

노리가 바로 박무덕이다.

 

이 정도만봐도 한일 양국의 피는 거의 같다고해도 될텐데 이제 감정대립 그만해도 될때가 되었다.

 

전라도 남서해안지방과 큐슈북부지방에만 있는 CIS-AB형의 분포도.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왜구로 왔다 조선군에 포로로 잡혀 양반집에 하인으로 분급되어 나누어준 왜구

 

들 그리고 1909년 성씨를 받은 그들의 후손들 너무 많이 섞였다.

 

서재필 훌륭할까 훌륭하다 이완용 훌륭할까 글쎄

 

서재필은 독집지사가 맞지만 이완용은 어떠한 길을 걸었을까 우선 이완용은 이승만과 더불어 왕실에 출

 

입하던 전주이씨 종친이었다.

 

이완용은 명성황후를 측면에서 도와 일본의 침탈을 막고자 친러파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의 열네명 발기

 

인중 한 사람이었고, 곧 운영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다.

 

학부대신(교육부장관)에서부터 외무대신까지 요직을 두루거친 그는 외세의 조선지배를 반대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독립협회에서 탈퇴할 때도 그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후 1898년 윤치호가 부회장,남궁억이 총무, 이상재와 윤호정이 서기로 뽑혔을 때 그는 그 쟁쟁한 인물

 

들을 물리치고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에서 그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그를 전라북도 감

 

사로 임명하여 먼곳으로 보냈을때도 그는 회장의 직책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는 변절이

 

란 카드를 꺼내들어 지금도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완용하면 연결되는게 독립문이다. 이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그들이 지났던문 '영은문' 무슨 뜻일까 인터넷검색을 해보자.

 

'모화'란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고 '영은'은 은혜로운 대륙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이란 중국의 동쪽에 붙어 있는 중국에 종속된 나라라는 뜻이다.

 

오죽했으면 강화도조약 제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란 립서비스조항이 포함되었겟는가

 

500년동안 조선왕조의 강압에 의해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어야 했으니 백성들의 분노가 독립문을 만든

 

것이다.

 

쿠데타로 왕조를 수립한 이씨왕조는 극도로 군비 확장을 기피하고 의도적으로 문명의식만을 고취한 것이

 

다.

 

조선사회는 의식주 모두 자급자족으로 기존의 생산양식에 만족했으며 금속인쇄술과 한글, 복식부기같이

 

조상이 만든 창조물에는 무관심했다. 조선왕조는 세계적인 장수왕조이면서도 너무나 허무하게 국권을 빼

 

앗겼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이성계.

 

현대 군사정부들에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끌어들여야할 역사적 인물을 찾아야했으니 그가

 

바로 쿠테타로 집권한 이성계이기에 드라마마다 그를 미화시키기 열풍이 집권시기마다 일고 그래서 아직

 

도 한국인들의 머릿속엔 이성계가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는것이다.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금 중국이 랴오닝성(요동성)이라 부르는 요동(랴오닝)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의 뒤를 봐주는 댓가로 세운 건축물 영은문 그리고 모화관.

 

천안이 한국땅이기에 천안함이라 이름이 붙는다.

 

중국이 건조한 최초의 항공모한 랴오닝(요동)호 왜하필 하고 많은 이름중에 랴오닝(요동)을 붙였을까 자

 

신들이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원주인(고려)에게 되돌려줄뻔한 위화도회군이란 위기가 있었기에 자신의

 

것이란 영역표시를 단단히 하고자하는 의도가 담긴 이름 항공모함 랴오닝(요동)호.

 

이성계의 첫재부인 신의왕후 한씨 그녀는 고려시대 명을 다하고 정릉에 묻혀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계획

 

에 의해 조선건국의 밑그림이 설계되고 결국 고려는 멸망한다.

 

신의왕후 한씨가 고려 공민왕 16년에 함흥부 귀주에서 점치는 사람 문성윤에게 이방원의 사주를 물었더

 

니 대답하기를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하였다.

 

중국인이 지은 환타지소설 '수호지'를 보자 고려황제와 송나라황제는 친구사이로 나온다.

 

한국인이 만든 드라마 '대장금'을 보자 조선임금이 명나라사신의 아랫사람으로 나온다.

 

왕위외교부장이 문재인대통령의 팔을 두 번이나 때린건 괜히 때린게 아니다.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제례악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전주 이씨라고 자랑할일만은 아니다.

 

영은문,모화관을 보자

 

위화도역모를 보자

 

대장금을 보자

 

1909년 민적법을 보자

 

종친중 95%이상은 노비나 백정,소작농의 후손들중 성공한 사람들이 족보사서 으스대는 것일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은 남산의 어느 친일파처럼 자손들에게 조상의 행적을 말하지 않은것뿐이다.

 

제대로 알고 살자./

 

참고도서

 

풍수화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구대훈 일본사

일본의 상도

대쥬신을 찾아서

노컷 조선왕조실록

한국분 한국인 한국놈

김두규교수의 풍수강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식민의 바다 제국의 바다

광해군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

헌혈 사랑을 만나다

후쿠자와유키치

한국 보수세력연구

성서의 뿌리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s*****6 2018.05.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