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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논점이 명확하게 제시돼 있다. 한명회가 남이장군을 제거한 배경을 파고 들고 있는데, 역사 법정의 형식을 빌어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남이가 자신을 모함해서 죽게한 주모자로 한명회를 무고 및 살인 지시 혐의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남이가 원고 한명회가 피고가 돼, 재판이 열린 것이다. 세차례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남이, 한명회를 비롯해 당시 노사신, 권근 ,유자광 등 당시 인물들이 줄줄이 소환돼 진술하는 법정풍경은 어린이들에게 역사의 엄정함을 되새겨보게 했을 것이다.
남이장군은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한 것이고, 그를 제거한 인물은 한명회라는 것. 훈구대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남이 측 주장이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는 능력까지 겸비해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여기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가하면 여진족 대장을 죽이면서 국경지역을 튼튼히하는데 일조하면서 백성과 임금의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됐다. 혁혁한 공을 세운 남이가 병조판서에 오른 것은 당연지사였겠지만,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남이를 견제했고, 남이가 신진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훈구대신들 역시나 남이를 축줄할 궁리를 했고.
훈구대신들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좌에 앉는 것을 도와주는 것으로, 공신의 지위를 획득했고, 관직과 토지를 매개로 그 지위를 공고하게 굳혀갔다. 기득권 세력이 된 것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한명회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유자광이 남이를 고발하자, 남이에 대한 문초가 시작됐다. 결국 남이는 문초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게 되고, 그의 사후 유자광은 공신이 되고, 무령군에 봉해졌다.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남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내용들이 나왔다. 이후 한명회의 권력 남용에 대한 증언들이 이어졌고 이 소송은 남이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재판형식의 장점은 양쪽 입장을 사실 위주로 들어볼 수 있다는 점과 당사자들의 입을 빌어 증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후세대의 입장에서 소환 당사자들의 변명이나 태도를 재구성할 수 있었던 점도 흥미로웠다.
지배세력이 신진세력들의 진입을 막기에 급급하게 되면, 그 사회는 활기를 잃어간다. 기득권 세력으로 관직이나 토지도 독점하려는 탐욕은 나라는 물론이고 결국은 자신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남이장군에 대해 다각적인 측면에서 평가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집권세력은 결국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실체를 확인해주고 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었다. 역사적 평가는 당대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또 설사 살아서는 당대의 호사를 누린 권력자라 할지라도 결국 역사적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 교훈적이기도 했는데, 한명회는 사후 부관참시 당했고,남이장군은 신으로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한한 권력보다 백성들, 후세의 평가가 더 오래 남았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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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질때는 지도자는 탁월한 능력, 리더십이 필요하고, 지도자 주변에 뛰어난 장수들과 책사가 있어야만한다. 그뿐인가? 백성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 지도자로서의 모든것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할때마다 하늘은 영웅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 영웅은 백성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었다. 이중 백성들의 지지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고, 그러기에 백성들에게 신뢰받는 자는 기존 정치 세력에게는 늘 위험한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왕 밑에 있는 고관대작들에게는 더욱더 무서운 '공공의 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 신왕에서 장군으로 모시는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남이 장군이다. 얼마나 대단하면 무속인들이 장군으로 모실까? 이 남이 장군은 어려서부터 백성들의 믿음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태종의 넷째 딸 정선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남이 장군은 한명회와 함께 훈구파의 양대 산맥이었던 권람의 사위였다. 어려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뛰어난 무예와 지략으로 변방의 여진족을 무찔러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고, 1467년 조선 개업 이후 가장 큰 반란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면서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지만, 세조 사후 예종떄 '남이의 옥'으로 인해 거열형으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남이 장군에 이름만 알고 있었기에 남이 장군이 이렇게 젊은 인물인줄 역사공화국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번 한국사법정에서는 남이장군이 자신을 모함한 훈구 세력의 중심인물 한명회를 법정에 세워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 하고 있다.
조선 역사속에서 한명회만큼 많이 등장하는 인물도 흔치 않을것이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두고 '자신의 자방'이라고 할 정도로 꾀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하기에 수양대군을 세조로 만들었고, 한평생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이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왕을 모시며 예종, 성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앉았었을 뿐 아니라, 세조의 유언으로 예종 즉위 3개월 동안 왕의 권한을 가진 원상으로 있기도 했다. 이만하면 개국공신 못지않다. 태조의 왕조 설립에 도움을 준 인물들을 개국공신이라고 하는데, 개국공신들의 자손은 나라에서 보상차원으로 관직을 주었다 한명회는 그 덕으로 처음 관직에 오르게 되지만, 그의 야망은 '계유정난'을 통해, 정난공신이 되고, '남이의 옥'을 거쳐 익대공신이 된다. 일흔이 넘는 나이까지 장수를 하였고, 압구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지만, 사후 연산군 시대에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또 한번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나오게 된다.
훈구공신은 세조의 집권을 도운 인물들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과는 차이가 있다. 신봉하는 학문과 사상도 훈구파들은 대부분 성리학을 신봉하였고, 이를 나라 운영의 기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정변이 있을때마나 깊숙이 개입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대표적 인물로 한명회, 권람, 홍윤성,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김국광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 집현전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국가 체계를 정비하고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사화를 일으키고 관직과 특권을 독차지하여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였으며 부정부태를 일삼기도 했다고 하니, 권력은 물과 같아서 그대로 두면 썩는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권은 '남이 장군 vs 한명회'로 왜 한명회는 남이 장군을 제거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본 법정에서 피고인 한명회는 자신은 남이장군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고, 남이 장군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역모죄와 유자광의 고발로 시작을 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유자광이 남이 장군의 시를 엿듣고 男兒二十未平國(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이라는 문장을 男兒二十未得國(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꿔서 권력에 쟁점에 있던 남이 장군을 역모죄를 씌었다는 것이다. 유자광의 고발로 남이 장군이 옥에 갇히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몰라서 법정에 세운것은 아니다. 이번 법정을 통해 한명회가 당시 왕을 능가하는 핵심 권력 기관의 수장으로 나라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결재하던 위치에 있었다는 것. 훈구파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의 대표로 훈구파에 맞서는 남이 장군을 탄압하였으며, 세조 사후에 숙청이 이뤄진 거으로 미루어 당시 혹은 이후로 예상되는 적대 정치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왕도 부럽지 않을 권세를 누렸던 한명회. 조선 전기에 뛰어난 활약을 하며 임금과 백성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남이 장군. 하지만 그는 불과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말았다. 역사의 가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항상 꿈을 꾼다. 그랬다면 어떘을까하고 말이다. 만약 남이 장군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무속인들의 신이 아닌 살아있는 장군으로 나라를 위해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조금 더 윤택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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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는 알 수 없는 역사이야기를 조선 최대의 권세가였던 한명회가 이번에 한국사법정을 읽고 우리나라 무속 신왕에서 남이장군은 잡귀를 물리친다는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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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한명회는 자주 만날수 있습니다. 주변 인물이 아니라 한명회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있었던 걸로도 기억을 합니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최근 '관상'이라는 영화에서도 한명회를 만났습니다. 문종, 수양대군, 김종서 장군과 같은 큰 비중은 아니였지만 영화 속 중요 인물이였던 한명회. 보통 책사로 그의 이름을 남겼듯이 그 영화에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 밀린 사건으로 골치가 아파 두통약을 먹을 정도로 힘든 이대로 변호사를 찾아온 한명회. 남이 장군이 그에게 소송을 걸어와 참을수 없다며 이대로 변호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번 역사공화국 법정에서는 한명회와 남이 장군의 사건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종의 넷째딸인 정선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남이 장군. 세종대왕이 그의 외삼촌이고 1457년 열일곱의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를 합니다. 1467년에 조선개국이래 최대의 반란인 '이시애의 난'을 잠재우고 1468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가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과 예종의 견제를 받게 됩니다.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남이장군은 그 사건의 중심에 있는 한명회에게 소송을 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명회는 어떤 인물일까요.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이 되고 1466년에 의정부에서 최고 벼슬인 영의정이 됩니다. 1468년에는 이번 재판의 사건이 되는 남이의 역모를 파헤쳐 남이를 제거한 공로로 익대공신이 됩니다. 또한 임금으로부터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원로들에게 주는 궤장이라는 지팡이까지 받을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한명회는 두 번의 죽임을 당합니다. 1487년 72세에의 죽음과 함께1504년 연산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들을 절단당하는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닐까합니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하는지 혼란스러운 사건입니다. 우리들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역사공화국에서는 판결을 내립니다. 원고 남이 장군의 손을 들어주며 한명회에게 사죄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판결이 내려집니다. 우리들은 이 판결의 내용보다는 사건이 일어날수 밖에 없는 이유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나 재판과정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누가 피고이고 원고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들이 이렇게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게 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온 시간들의 이야기를 무조건 믿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의심할수도 없는 부분들입니다. 다시한번 역사를 바르게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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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명회와 남이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 [왜 한명회는 남이 장군을 제거했을까?]에서는 원고로 남이장군이, 피고로 한명회가 등장한다.
남이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조선 제 3대 임금인 태종의 넷째 딸 정선 공주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백성들의 믿음과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훈구파 조정 대신들은 역모죄를 씌워 조선 최고의 무장이 될 수 있었던 그를 스물 여덟의 나이로 죽게 만든다. 남이장군은 1467년 임금의 명을 받아 포천과 영변 지역의 도적 무리를 없애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그 반란을 잠재운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병조 판서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한다.
피고 한명회는 성종때 영의정에 병조 판서까지 겸임하며 권세를 누렸으나, 1504년 연산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꺼내져 팔다리를 절단당하는 부관참사형을 받는다. 이유는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갑자사화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명회의 호는 압구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강남의 압구정이 한명회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 [왜 한명회는 남이장군을 제거했을까?]에서 가장 쟁점은 한명회가 남이 장군의 역모 혐의를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 여부와 그 뒷처리 과정에서 얼마나 관여했는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한명회가 책에서 주장한 것은 모든 책임을 유자광에게 떠넘겼지만 사건의 여러가지를 유추해본 결과 당시 왕을 능가하는 핵심 권력 가관의 수장이었던 그가 피고의 역모 사건을 몰랐다는 것은 억지로 본다. 훈구파의 선봉이었던 한명회는 반대파인 남이 장군이 눈에 가시였을 것이고 세조 사후 곧바로 남이 장군에 대한 숙청이 이뤄진것을 볼때 앞 뒤 사건은 자연스레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누구에게 누구의 관점으로 배우냐에 따라 영웅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을 느낀다. 어릴 적 봤던 사극 드라마에서는 한명회가 충신으로 멋있게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 머릿속 고정관념에는 한명회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읽은 여러가지 역사 서적 속에서 그의 여러 모습을 보건대 그는 술책과 계략에 뛰어난 자임은 분명하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능력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남이장군이 불쌍하고 조선에게 꼭 필요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평가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