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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자의 여행법이라고 할까.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 실존주의의 정의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따라서 권리의 ‘여행에세이’를 표방한 철학서 내지는 문학에세이에 가까운, 기묘한 이 책은 그녀의 바람대로 애매한 선반에 애매하게 놓아두어야 할 책이 확실히 맞다.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 말로, 프란츠 카프카를 읊조리 듯 그녀의 책을 읊조려 본다. 암보스 문도스는 그녀의 정의에 의하면 짧은 정열을 작품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세계의 안과 박, 양쪽의 세계를 들락거리며 정력적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예술을 통해 허기를 채우는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사전적인 의미는 스페인어로 ‘양쪽의 세계’를 뜻한다. 정적인 실존주의자들은 이 두 세계의 가운데에 있을 테지만, 이 글의 저자처럼 동적인 실존주의자들은 양쪽 세계를 들락거리며 ‘허기’를 채우는 사람이다. 그녀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45개국을 여행을 했을 정도로 굶주린 사람인 듯 보였다.
따라서 그녀의 여행법은 여타의 여행에세이집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 책에는 그림이 없다. 온통 글뿐이다. 글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여정을 촘촘히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 들게끔 그녀의 묘사가 자세하기도 하거니와 친절하다. 이런 독특함은 읽는 사람입장에서는 ‘시각’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마치 거울을 통해 내가 여행을 한 것처럼, 그녀의 여행 과정이나 결과 풍경, 그 안에 소소한 이야기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억에 새기고, 그 순간의 감정까지도 느껴지는 착각에 빠진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소유’ 중에 가장 멋진 것은 바로 그녀가 쓴 남편론이다. 「내가 책을 펴는 한, 책의 저자들은 철저히 내 남편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술과 도박과 여자라는 3대 악에 찌든 방탕한 남편이라면, 카뮈는 남편이 없는 사이에 바람을 피우고 싶은 상대였다.」 그가 드러내놓은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남편들에 대한 이야기는 멋지다 여흥구를 아낌없이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녀의 남편들이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고, 어쩌면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또 한 편으론 나의 남편이기도 하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녀의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7.5퍼센트의 일치함과 25퍼센트의 불일치, 그리고 3.5퍼센트의 허풍과 9.1퍼센트의 양보, 54.9퍼센트의 진심이 나에게도 있으니까(그녀와 같은 표현법을 사용한 것임) ‘여자 혼자 여행하는 법’이라는 서적을 뒤적이며 ‘홀로’ 해외여행을 꿈꾸는 지극히 소극적인 달팽이족의 입장에서 [유럽에서의 6개월을 돌아보건대, 나는 늘 엉뚱한 곳에서 잠을 잤다. 폭식을 했고 미친 지푸라기처럼 거리를 떠돌아다녔다.]라는 글귀는 가슴을 콕 콕 찔러대었다. 그녀의 여행기가 멋더러진 수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도 처절했음은, 그녀가 ‘실존’하는 인물임을 검색해 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아, 그녀는 살아있구나!’ 누군가의 글을 읽고서 ‘글’을 벗어나 ‘글을 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 본 기억이 손에 꼽을 만한데, 이 글을 읽으면서 한 사람을 더 ‘꼽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안고서 그 먼 고행 길을 떠났음에도, 같은 물음의 답을 알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어제와 같은 무던하고도 평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녀가 영감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녀의 고향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의 답으로써 완성되기를 빌어보면서 나 역시도 그녀의 흔적을 뒤쫓고 싶다. 헌데 우선은 ‘이 책’으로 대신해 본다. 지금은 이 책만으로도 사실 버겁기에…… 조금은 숨차게 그녀의 사유를 좇아가는 여정이 그래도 즐거웠다. 시적인 낭만과 자유로운 구성과 문체, 비슷한 생각이라는 공감을 깊게 파고드는 일상의 사유, 그녀의 이름은 <권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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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여행기는 지극한 사랑의 기록이다. -권 리 『암보스 문도스』 (소담, 2011)
여행은, 사랑과 닮았다. 낯선 세계에 들어가 자신을 기꺼이 타자로 만든다는 점에서 여행과 사랑은 쉽게 겹쳐진다. 우리는 사랑을 앓으면서 타자의 바닥까지 알고자 애쓰지만 사랑이 끝난 후에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낯선 곳을 알고자 떠나지만 결국 확연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건 우리 자신이다. 낯선 대상을 향해 나아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삶은 계속되니까. 하지만 낯선 대상을 통과하고 난 후,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행의 기록을 아무리 세세히 남겨도 그 곳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여행이란 사진 속 풍경으로 존재하던 곳에 직접 찾아가서 눈을 호사시키고 사진을 찍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자아 찾기’ 라는 거창한 테마를 혼자 설정한 뒤에 고독을 씹으면서 막연히 다른 삶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철없는 낭만이거나. 전자에게 여행은 어딘가를 가봤다는 확인(사진)이 중요하다. 불필요하게 들어가는 돈은 덤이다. 상관없다. 사진 속 풍경으로만 접했던 동경하는 장소에 내가 가 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후자에게는 마음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위안’이 절실하다. 그들은 자신이 여행에 돌입한 이유를 타인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들은 여행이 끝난 후의 변화를 찾기 위해 애쓴다. 여행의 기록은 대부분 그렇게 시작된다. 여행을 다녀와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성장했다는 투로 일관하는 기록들에서 어떤 피곤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삶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짧은 여행으로 삶에 대한 통찰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삶은 “나는 어딘가에 가봤다”, “그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생각으로 바뀌기에는 훨씬 견고한 무엇이다. 시각을 통해 충족된 쾌락은 시간이 갈수록 엷어지고, 다시 일상은 삶을 잠식한다. 여행의 기록은 그래서 지독한 자위와 다를 바 없다. 다들 그것을 알면서도 여행기를 펼치고, 기억에서 사라질까봐 서둘러 사진을 업데이트한다. 연애의 흔적을 부지런히 업데이트시키는 행위와 여행의 기록은 닮지 않았는가. 그 연애와 여행의 흔적은 둘 중 하나로 전락하리라. 타인의 결핍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시. 아니면 외로울 때 들춰보는 과거의 훈장. 과시나 훈장은 짧은 위안을 주지만, (외로운) 현실을 비루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독이다. 조금씩 쌓이는 일상의 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그녀는 다시 새로운 각오로 여행을 떠나고 사랑을 찾는다. 단순한 반복을 새로움이라고 착각하는, 소비의 판타스마고리아와 흡사한, 반복. 지겹다. 여행이라거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불신하게 만든 것은 그렇게 무수한 풍경들의 반복이었다. 소설가 권 리가 쓴 여행기 『암보스 문도스』를 끝까지 읽은 이유는 그녀가 에필로그에서 언급한(대부분 여행기는 에필로그를 보면 바닥이 보이기 마련이다) 한 줄 때문이다.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을 떠나서 쓴 글을 여행기가 아니라고 우기는(?) 그녀의 자기부정이 흥미로웠다. 동의하기 싫은, 유쾌하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이 여행이지만, 그녀의 여행은 돈을 뿌리는 유람이 아니었다. 시각의 즐거움만을 쫓는 어리석음을, 그녀는 반복하지 않는다. 서두에 적힌 까뮈의 말처럼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성급한 삶에의 충동”이 그녀의 여행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다. 그녀의 첫 여행지는 유럽이다. 일정 인원을 패키지로 묶어서 일주일이나 보름간 꽉 짜인 일정을 소화시키고, 사진을 찍으며 희희낙락하게 만드는 여행사의 ‘기획 상품’ 중에서 가장 노른자위는 유럽이다. 좁은 공간에 다양한 나라가 섞여 있으며 대부분 우리의 동경을 자극하는 관광지가 많다. 그녀는 색다른 방식으로 유럽으로 향한다. 속초 동명항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간 다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는다. 타이가 숲의 아름다움이나 신비한 바이칼 호수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풍광에 대한 장광설 대신 그녀는 기차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남들처럼 졸업과 동시에 번듯한 회사에 취직했더라면 인생이 평탄하게 흘러갔을텐데.”(15쪽) 이것은 탄식이 아닌 질문이다. 스스로 불안정한 삶을 택한 것과 흡사하게 불편한 여정을 택한 그녀는, 문학책 때문에 형성된 유럽에 대한 환상을 깨기 시작한다. 유명한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겉핥기식 여행객들과는 달리 그녀는 철저하게 유럽 도시의 뒷골목을 헤맨다. 에든버러의 슬롯머신 게임장에서 부랑자들의 손때가 묻은 동전을 교환해주고 남자 변기를 닦는 일을 하는가 하면, 돈을 아끼기 위해 염치 따위는 버리고 카페에 머물면서 “삶의 불완전성과 우연성”(61쪽)을 만끽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마주한 유럽의 도시는 관광지로 포장되어서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창부의 얼굴이 아닌 민낯의 속살이었다. “유럽에서의 6개월을 돌이켜보건데, 나는 늘 엉뚱한 곳에서 잠을 잤다. 폭식을 했고 미친 지푸라기처럼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 여행이 일상의 계단으로 내려오자 런던과 파리, 더블린은 더 이상 환상적이지도, 신비롭지도 않게 되었다. 부랑자와 찌그러진 콜라캔으로 지저분한 전형적인 코스모폴리스일 뿐이었다. (……) 어디에도 특별한 도시란 없다. 특별한 의미와 시선을 갖고 대하는 곳만이 특별한 도시가 된다.” (67쪽) 조명과 화장이 제거된 창부의 얼굴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그녀가 부랑아처럼 떠돌면서 마주한 유럽의 도시들은 여느 도시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공간은 없고, 단지 특별한 시선만이 존재할 뿐. 어떤 시공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의 특별함은 바래지게 되지만, 그 시간은 상대적이다. 낯선 여행지가 익숙한 일상으로 포섭되는 과정도 이와 같다. 단지 타인이 심어놓은 환상 때문에 사랑과는 달리 여행은 가짜인 표면만을 훑게 되거나 속살을 보는데 오래 걸릴 따름이다. 권 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럽이라는 공간을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녀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생성된 동경이 단순히 풍광에 대한 확인으로 그치고 마는 클리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머문 공간에 관련된 문학 작품과 영화, 역사적 인물들에 관하여 서술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안정된 삶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보면서 『삶의 한가운데』의 니나 붓슈만을 떠올리고, 지루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는 고독한 활자의 세계에 눈을 떴던 대학 시절에 읽은 책들을 떠올린다. 문학 작품을 경유한 사유는 자신이 스쳐가는 곳을 특별하게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매력적인 서술로 이어진다. “내가 책을 펴는 한, 책의 저자들은 철저히 내 남편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술과 도박과 여자라는 3대 악에 찌든 방탕한 남편이라면, 카뮈는 남편이 없는 사이 바람을 피우고 싶은 상대였다. 전자가 나랑 한바탕 싸우고 집을 나가버릴 것 같은 남편이라면, 후자는 내게 외투를 입고 정오에 산책을 나가자며 차를 대기시키고 있을 것 같은 남편이었다.” (32쪽) 이런 사유에 이르게 되면, 여행지는 더 이상 사진을 찍으려고 가는 낯선 곳이 아닌, 독특한 ‘남편’들이 창작하고, 고민하고, 방황하며 살아 움직였던 곳으로 뒤바뀐다. 이 유쾌한 사유야말로 그녀가 궁상과 불안으로 점철된 여행을 견딜 수 있게 한 버팀목이 아니었을까. 익숙해져서 “전형적인 코스모폴리스”으로 변질된 유럽을 떠나 진출한 남미에서도 권 리의 유쾌한 사유는 계속된다. 비행기 안에서 마르께스의 작품 「하늘에서의 사랑」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몸으로 부딪히고 문학을 매개로 한 그녀의 사유는 남미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극도의 궁핍과 발랄함, 천혜의 자연과 유서 깊은 고도가 공존하는 남미에서 그녀는 마르께스와 네루다, 에스테반 가르시아와 이사벨 아엔데의 작품을 지금-여기에 소환한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군부독재, 빈부격차를 앓은 남미는 혼돈 그 자체였지만, 아픈 현실을 뚫고 나온 문학 작품과 노래들을 통해서, 낙천적인 사람들과 조우하면서 그녀는 ‘명랑’에 대하여 다시 정의한다. “나는 명랑함이 세상을 구원하며, 모든 창조적인 존재들은 명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신념이 있다. 내가 칠레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명랑성의 회복이다. (…중략…) 상상력은 모든 것을 이룬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명랑해야만 한다.” (127쪽) 엄혹한 군정시절에 숱한 작가들이 억압당했으며, 민중들의 삶은 피폐했지만 남미의 문학은 암흑 같은 현실을 명랑한 상상력으로 이겨냈다. 마치 바보 같은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게 되는,『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주인공인 우르비노 박사의 천진스런 웃음과 같은, 명랑함으로. 하지만 아무리 명랑한 상상력으로 무장해도 ‘없음’에 대한 공포는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권 리는 그것을 쿠바에서 느끼게 된다. 쿠바에 도착한 순간 당연히 존재하던 재화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하여 그녀의 여행은 “살기 위한 투쟁”으로 바뀐다. 돈을 인출하는 것조차 전쟁이며 과일과 빵, 휴지 따위의 생필품이 부족할뿐더러 전산화나 자동화는 꿈도 꿀 수 없는 나라인 쿠바는 그녀의 무모하고 충동적이며 대책 없었던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방황하는 그녀가 모든 것이 부족한 ‘저개발의 섬’을 사랑하게 된 것은 두 남자 때문이다. 그녀가 쿠바를 여행하며 두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느냐고? 아니다. 그녀가 사랑한 두 남자는 과거의 인물이다. 그들의 이름은 혁명전사 체 게바라, 그리고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체 게바라의 투항하지 않은 삶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콰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웠던 - 과 체 게바라에 못지않게 극적인 삶을 살았던 작가 헤밍웨이. 1967년,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사살당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가장 사랑했던 나라는 쿠바였고, 스페인 내전과 세계대전을 온 몸으로 겪었던 작가 헤밍웨이가 가장 아끼던 나라도 바로 쿠바였다. 체 게바라는 미국과 투쟁하여 승리한 나라 쿠바를 잊지 못했고, 헤밍웨이는 말년에 쿠바에서 역작『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 두 남자를 권 리의 ‘남편론’에 대입해 보면 어떠할까. 두 남자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지만 뜨거운 피를 감당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떠돌다가 죽은 무책임한 남편들일지도 모른다. 혹은 짧고 강렬하게 사랑한 뒤로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애인들이거나. 그래도, 모든 사랑은 깨달음을 남긴다. 다시 그 사랑을 할 수 없기에 더욱 절실한 깨달음을. 성공한 혁명은 현실의 궁핍을 남겼고, 헤밍웨이의 파란만장한 삶은 허무한 자살로 종지부를 찍었지만, 두 사람이 머물렀던 쿠바에서, 그들을 사랑한 작가 권 리는 그 삶들을 반추하며, 그들의 사랑을 나름의 언어로 정리한다. "『노인과 바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의지와 지혜밖에 없는 나에게 맞서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저 고기가 부럽구나.’ 의지와 지혜가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존경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의지와 지혜는 아집과 잔꾀로 바뀌기도 한다. 인간을 끝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힘없는 자들에 대한 태도이다. 노인은 한낱 자신의 저녁밥이 될지도 모르는 물고기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헤밍웨이 자신의 태도이기도 하다." (242쪽) 약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인간에게 남은 윤리를 가장 적실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체 게바라도 헤밍웨이도 바로 그 윤리를 지키려고 온 생애를 바쳤으니까. 그녀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면서, 그들이 꿈꾸었던 세계의 모습과 점점 멀어지는 현실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왜 다시 체 게바라인가? 이 질문은 틀렸다. 왜 체 게바라가 아니면 안 되는가? 우리는 그렇게 물어야 한다. 체 게바라의 망령이 아직도 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환상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246~247쪽) 점차 파편화되는 세계는 더 이상 연대나 저항을 꿈꾸지 않는다. 파편처럼 흩어진 개인들은 타인의 시선과 위로가 더욱 절실함에도 불구한데도 말이다. 이 기묘한 역설 위에서 우리의 삶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그녀가 만난 어느 이스라엘 여행객의 욕설(“Communism sucks!")처럼 현재의 쿠바는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곳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유효한) 물음표를 던진 두 남자를 회상하면서 쿠바라는 공간을 새로운 질문을 잉태하는 곳으로 다시 정의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호텔 ‘암보스 문도스’(양 쪽의 세계)는 오랜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썩 잘 어울린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들은 모두 ‘양쪽의 세계’를 오가며 살아간다. 과거와 현재, 익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과 이상, 냉소와 혁명, ‘나’와 ‘너’의 사이를. 쿠바의 궁핍함이 단지 처연한 가난이 아님을, 그리고 남미 대륙의 가난과 혼란의 내부에는 마술적인 환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면, 양 쪽의 세계에 설정된 경계는 더 이상 ‘단절선’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랑이 낯선 타자의 세계로 진입하여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듯이, 그녀의 여행 또한 낯선 공간으로 틈입하여 익숙한 자신의 세계를 다시 보는 과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완벽한 타자가 된다. 그러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자의 경계를 보면서 절망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절망은 무엇보다도 힘이 세다. 그로 인해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시작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설정한 얇은 이미지에 경도되었다가 금방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오고 말지 않는가. 그러므로 사랑은, 에리히 프롬이 역설했듯이, 기술이며 능력이다. 권 리의 여행 기록은 그 사랑에 대한 지극한 은유이다. 여기서 ‘나타나엘’을 호명하며, 자유로운 삶을 속삭이는 지드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나타나엘이여, 그대를 닮은 것 곁에 머물지 마라. 나타나엘이여, 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면, 또는 그대가 주위를 닮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그 곳을 떠나야만 한다. 너의 집안, 너의 방, 너의 과거보다 더 너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남들이 설정한 익숙한 여로를 택하지 말라. 낯선 우연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사랑일지니. 사랑과 닮지 않은 여행은 익숙한 반복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면,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빠질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의무’로 바꿔도 무방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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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 중에 세 개의 소요를 반복했다. 육체와 정신 안에서 작은 흔들림이자, 산책이자, 떠들썩한 소동이 번갈아 일어난 30년의 여행. 나는 나에게 좌절과 불가능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던 세계들을 용서하는 힘을 기르기로 했다. 내가 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수없이 나와 세계의 충돌은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한 쪽의 세계가 나를 힘겹게 할 때마다 나는 유럽의 냉정함과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아프리카의 배고픔과 아시아의 열정 따위를 떠올리며 다시 일어서는 꿈을 꿀 것이다. 타인의 기준과 상관없이 나만의 암보스 문도스 왕국에서 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런 꿈에 부푼 지금의 나는, 칠레인의 속담을 빌려 말하건대, 벼룩이 득실거리는 개보다 행복하다(256-257). 작가는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면 좋겠단다. 여행기 코너에 놓아야 할지, 철학 코너에 놓아야 할지, 예술 일반에 놓아야 할지, 아니면 문학과 취미 코너 사이의 애매한 선반에 애매하게 놓아두어야 할지(263쪽) 토론하게 만드는 책이면 싶단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훔치고 싶어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263쪽)단다. 이 책은 '딱' 작가가 희망한 바로 그대로의 책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여행서이지만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문학적이다. 더군다나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레포츠들의 세계로 안내한하다(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사람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이런 삶의 역동성, 멋지다. 예를 들면 사막 사구에서 보드를 타고 내려온다거나, 산 정상에 올라 썰매를 타고 내려오든 활강을 한다거나, 폭포에서 뛰어내린다거나… 오, 읽기만 해도 흥미진진. 이런 걸 좋아하는 여성이라니, 매력적이야). 이 작가, 암보스 문도스 왕국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라 할 만하다. 글쎄… 나는 지나치게 윤리적 인간이라 책을 훔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꼭 소장해서 두고두고 읽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책임에는 분명하다. 최근에 읽었던 책 중 가장 즐겁고 유쾌하고 진지하게 읽은 책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디지털 치매’ 환자가 되었다. 노래 가사 하나 못 외구고, 전화번호도 가물거린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가 일상화가 된 이후로는 사진을 보지 않고는 어떤 곳의 풍경이나 장면을 연상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사실 맨 처음에 이 책을 봤을 때 뭔가 좀 어색하고 낯설다는 생각을 했는데, 중간쯤 읽은 후에야 빙그레 웃었다. 맞다. 요즘에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는 여행서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사진이 전혀 없다. 단 한 장도. 그런데 그래서 좋다. 온전히 문자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 그 곳을 더 동경하게 만들고 상상하게 만든다. 문자에 집중함으로써 작가와 혼연일체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육체와 정신 안에서의 작은 흔들림(小搖), 산책(逍遙), 떠들썩한 소동(騷擾), 이 모두를 작가와 함께 하게 된다. 작가는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라고 글에 들어가기 앞서 천명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므로 여행기이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은 여행기이기 때문에 여행기가 아니다. 나는 단 한 단어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이 책이, 그리고 이 작가가 무척 마음에 든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모험을 좋아하면서도 신중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아주 솔직하면서도 지적이고 현학적이면서도 명랑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대개는 작품들이 좋아 특정 작가가 좋아지고, 그래서 그 작가의 산문집도 읽게 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반대다. 뭔가 하나의 단편을 읽은 것 외엔 작가의 작품을 전혀 읽은 적이 없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인상적인 단편이었던 듯하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 책까지 읽을 생각을 한 걸 보면), 산문집을 읽고(작가는 이 책이 에세이처럼 읽힐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호기심이 발동해 이 작가의 작품도 궁금해졌다.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볼 것 같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작품을 쓸까? ‘암보스 문도스’는 쿠바에 실존하는 호텔로서 쿠바를 사랑했던 헤밍웨이가 집필 활동을 했던 장소이기도 한다. 이 곳은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두 개의 세계'를 뜻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전 언제나 두 세계 안에서 머뭇거리고 있어요. 인간의 삶은 느림과 빠름, 겉과 안, 멜랑콜리아와 알레그리아, 이 두 세계의 조화 속에서 완성된다고 믿어요. 그리고 언제나 그 양쪽의 세계를 오가며 살고 싶은데 어떡합니까? 양다리를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가 두려워요. 저에겐 두 가지 이름이 있어요. 저는 권리와 민성을 갈아타며 서로에게 수없이 간섭을 허용합니다. 권리와 민성은 서로 모르는 세계이며, 아마도 영원한 평행선이 될 거예요.” “이런 노래 제목 들어본 적 있나? <평행선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을 뿐>. 어쩌면 자네가 오가고 싶은 그러한 거리야말로 나를 이해하는 가장 큰 열쇠가 될 걸세.” “좋은 말씀이네요. 결국 전 길 위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군요.”(260-26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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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인 권리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며 쓴 에피소드들과 문학적 생각들이 정리된 책이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쉽게 떠날 수 없을때마다 여행 에세이를 보는 편인데, 이 책은 예쁜 사진 일색인 보통의 여행 에세이와는 조금 달랐다. 사진이라고는 한 장도 볼 수 없는 문학같은 여행에세이. 오늘 같은 비 내리는, 조금 어두운 하늘을 보며 읽기에 딱 좋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웃음을 주고 울음도 주니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 재료인 즐거움과 고통을 구분할 수 있네 당신들의 노래는 바로 하나의 노래이고 모든 이의 노래가 바로 나의 노래라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 군부 정권 하의 칠레인들을 다독이던 노래였으니 한국으로 치자면 아침이슬이나 상록수에 해당하는 곡일 것이다. 그녀의 노래에서는 눈물 냄새가 난다. 울고 싶은데 울 만한 핑계가 없다면 그녀의 노래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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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책을 읽기전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나에게 낯익은 작가도 아니었고 뜻을 알 수 없는 제목에 당연히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수 많은 에세이를 읽어봤지만 이렇게 소설스러운 표지와 제목을 가진 에세이는 처음이었으니. 작가의 이름도 강렬하지만 온통 주황빛을 발산하고 있는 책의 표지도 강렬하다. 더불어 작가의 이름이 외자에 '리'이다보니 자꾸 '북한'이 떠오르기까지 한다. 동갑내기 작가와 통했다고 해야하나? 서른 셋의 나이에 45개국을 여행했다는 그녀가 가보고 싶은 나라는 '북한'이라고 한다. 한겨레문학상 수상 작가 출신이라고 하니 내가 낯을 심하게 가리는 '수상작가' 출신의 그녀가 풀어놓는 여행담은 어떨까?(분명 그녀는 여행기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1979년. 나와 동갑내기 작가의 글.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서른 셋의 나. 그녀는 내가 가지지 못 한 자유를 한껏 누리고 있음이 부럽기도 하고 어린 나이부터 홀로 떠나는 여행을 감행했던 그녀의 용기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분명 작가는 여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과 뒤섞여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해외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등 수 많은 위험속에서 여행을 지속했다. 정말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신변의 위험은 생각지 않는 대담함이 그녀가 얼마나 당찬 사람인지를 보여주었다. 자로 재듯이 계산하는 여행이 아닌 단순함. 그것 또한 그녀의 매력이 아닐까?
첫장을 펴는 순간 이건 철학서인지 문학분류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정말 에세이가 맞는 것일까? 그 흔한 여행사진 한장 나오지 않는다. 에세이나 여행서에는 글에 딱딱 맞아 떨어지는 멋진 사진이 함께 있음을 어쩜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더불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늘어놓는 방대한 문학적 지식이란~ 동갑내기 동성 작가의 이야기다보니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질투가 날법도 했는데, 그러기 보다는 '참 많은 장점과 매력을 가진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나는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여행기에 놓아야 할지, 철학에 놓아야 할지, 예술 일반에 놓아야 할지, 아니면 문학과 취미 사이 애매한 선반에 애매하게 놓아두어야 할지 토론이 벌어져도 괜찮다. p268
글을 쓰면서 의도했던 것일까? 작가의 말처럼 과연 이 책을 '에세이'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세계 곳곳의 여행담을 기록한 이 책은 어쩜 그녀의 일기장과도 같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좋은 곳의 꼭 가봐야하는 명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활과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와중에 겪는 수 많은 일들로 인한 그녀의 생각들...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많은 문학작품에 대한 언급까지.. 어쩌면 그때그때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맞을 것 같다. 그런 느낌때문인지 남의 오래된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가 친구를 마주보고 쉴새없이 릴레이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든다.
조금은 냉소적인 그녀의 문체에 처음엔 적응이 안되어 여성작가라는 것을 몇차례나 확인하며 글을 읽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 철학적인 내용들과 잘 알지 못하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그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입담과 유머감각 때문에 그녀의 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매력을 가진 친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작가에 대한 검색까지 해보았는데 그녀의 첫 인상은 글에서 처럼 '배짱이 두둑해 보였다'는 것. 인물검색 결과 그녀는 '소설가'로 되어있지만 '여행작가'라는 타이틀이 어쩜 더 어울릴 것 같다. 오랜만에 너무 괜찮은 책, 정말 괜찮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나에겐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권리'라는 사람이 더더욱 궁금해진다. 내 평생에 걸쳐서 그녀와 같이 '무모한'여행의 경험은 오지 않을 것임이 확실하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여행이란 삶의 장기적인 계획에서 옆으로 빗겨 나온 일부이다. 다시 말해 여행은 계획되지 않은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 중에 내가 무언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면, 그 여행은 이미 여행이 아닌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p 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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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일상의 따분한 생활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어떤 영감이나 마음과 기분의 전환을 필요로 할 때 그 나름대로의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곤 한다. 물론 그런 여러 수단들을 통해 우리가 만족할 만큼 충분한 그 무엇을 채워주는지는 아닌지는 감히 예상할 수는 없을지라도 속박이나 구속과 같은 상태에서 적어도 잠깐의 해방감과 같은 자유의 시간을 제공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얻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인 것처럼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 왔을 때 리듬감이 깨져 예전처럼 적응이 잘 되지 않거나 또는 더 나은 무언가를 얻으려 하다가 오히려 잃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언제나 틈만 보이면 그런 일탈의 행위들을 마치 가슴 속에 미리 준비해두기나 한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를 행동을 보이곤 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나은 방편을 찾아보려는 우리 내부의 어떤 기본적 습성이 존재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암보스 문도스(양쪽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 스페인어)라는 표지제목에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내게는 호기심과 많은 관심을 갖게 했던 이 책은, 작가가 2002년부터 시작하여 2008년까지 독일, 영국, 스페인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칠레와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경험담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것은 작가가 책 속의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적인 여행기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들을 혼합하여 담고 있어 여러 가지 면에서 색다른 감흥과 신선감이 돋보이는 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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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이제껏 내가 읽은 여행기 중 진정성이나 공감대 형성이 가장 잘 된 작품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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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크게 3가지의 '소요' - 작은 흔들림(小搖), 떠들썩한 소동(騷擾), 산책(逍遙)를 테마로 잡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많지 않은 나이에 꽤 많은 45개국을 여행했다, 이 책에서는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큰 기대없이 , 사진 한 점 없는 불친절한 이 정체모를 책을 읽으면서 왠지 저자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이 든다. 소소하게 하루하루 써내려간 에피소드들을 적어놓은 추억을 담은 일기장 말이다. 여러나라 여러곳, 그리고 쉽게 여행지로 결정할수 없을듯한 나라들도 서슴없이 자신의 발길 따라 여행하는 그녀를 책을 읽으며 그런 용기와 자신감에 꽤 많이 부러움을 느낄뿐이다. 아직 서른 중반이 되어가도록 제대로 해외여행은 커녕 국내 여행도 다녀보지 못한 나로써는 더욱 목마름의 갈증에 그녀의 이야기는 더한 사막의 태양 같은 느낌을 준다. 활자들로만 가득차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의 분류에 대해선 여행 에세이로 분류해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활자들로 잔뜩 이야기를 써내려가지만 이 책은 분명 그녀의 여행기이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 많은 지명들이 나올때마다 생소함에 그리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백개 정도 띄운채 상상으로서만 그곳을 머릿속 도화지에 그려 넣어야했다. 이럴때 사진의 없음이 참 간절히 서운해지는건 어쩔수 없구나. 그녀의 이야기속에는 많은 인종들과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다. 아마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해도 무관할 정도로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에 피식 하며 실소도 웃음도 짓게된다.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한 이야기들 속에, 그녀는 꽤 많은 문화적인 지식들을 소유한 사람이기도 한듯하다. 여행지마다 사색에 잠기듯 작가와, 한번쯤 들어봄직한 소설책의 제목들, 그 외에도 전시회나 음악에도 다양한 지식의 해박함을 보여준다. 여러 작가 인물들의 삶에 대해서 조근조근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내 앞에 앉아 이야기 해주는듯 한 느낌이 들기도 하며, 책 속의 글들을 적절한 여행지에서 적절히 인용해 풀어주어 그 나라에 대한 나의 상상의 나래 속에 단단히 한 몫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더이상 나에게 무언가 남겨주질 않는다. 애매모호한 느낌에 두리뭉실한 마음에, 알수없는 침음에, 그냥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실소에, 그것이 전부일 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무언가 나의 여행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리라고는 진작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어쩌면 작가도 그런 의도로 쓰지는 않았을테지만) 사실 조금이나마 현실의 답답함을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대리만족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책을 덮은후 아무것도, 아무런 감흥도 없는, 왠지 이 책을 읽기 전과 별다를것 없는 공허한 마음은 어쩔수가 없구나. 분명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그녀의 독특한 매력적인 문체로 써내려간 여러 나라의 이야기들이지만, 나는 왜 챗바퀴 돌리듯 모든 여행지의 이야기가 다 같은 느낌으로 읽혀졌는지도 잘 이해가지 않을뿐.
어쩌면 부끄럽게도 한번도 이 나라, 나의 조국을 떠나보지 못함의 갈증을 나는 여행에세이들을 읽으며 나름의 방식대로 갈증해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환상과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오롯이 책속에 박혀있는 작은 사진들과 작가가 주관적인 생각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들을 보면서 말이다. 여행에세이를 종종 즐겨 읽기도 하고, 늘 TV프로는 드라마 , 오락 프로보다는 여행다큐나, 휴먼다큐를 즐겨 보기도 한다. 네모난 티비 박스를 보면서 그속의 현지인들의 삶과 그곳의 공기를 눈으로 느끼고 감상하며 가끔은 여행의 스트레스를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껏 누비며 떠나지 못하는 지금의 나의 현실에 씁쓸한 고소만 흘릴 뿐이다. 비록 나에게는 조금은 부족한 느낌의 그녀의 여행기였지만, 지친 일상에 잠시의 휴식같은 책으로 읽기에는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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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특히, 성인 독서량 수준이 OECD에서 언제나 뒤에서 멤돌기만 하는 한국에서는 꽤나 많이 읽는 편이라고 할 만하다. 대졸이 80%인데, 일 년 평균 독서량은 두 자리수를 못 넘기다니. 한국은 신기한 사회다. 그러니, 나 같은 듣보잡에게 책 추천을 의뢰하는 햏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또 난 좋다고 말해 준다. "뭘 원해?" "머리 식히게, 소설 책." 그때 내가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답이 조금 달라지지만 꼭 호명되는 이름이 있다. "정치색은 더럽게 맘에 안 들지만 도스토옙스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다던 헤르만 헤세. 한 문단이 한 문장인 박상륭. 이기호 죠낸 웃겨, 최순덕 성령 충만기. 극 우울하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인걸, 프란츠 카프카. 아멜리 노통, 요즘은 좀 별로지만 초기작은 대단해.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곁들여 보면 좋은 다자이 오사무. 정통파 직구의 위력, 심윤경. 김언수의 캐비닛과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꼭 봐. 그리고!!!! 권 리." 고백합니다. 권 리, 당신은 제게 정말 여신입니다. 그녀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건 별 5개 만땅을 채워야 한다. 왜? 권 리가 쓴 책이니까. 끝. 아, 좀 더 써 볼까.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건 너구리에 계란을 푸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한 짓이다. 그녀가 세상에 낳은 문장에 난, 할 말이 없다.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념무상 언어도단 교외별전 불립문자 이런 의미다. 언어가 끊어진 곳에 진리가 존재한다. 뭐, 대충 여신님에 대한 내 신앙은 절대충성 불퇴심의 경지라는 말이지. 난 이런 문장이 맘에 든다 이제 나는 서른이다. 10대와 20대가 인생의 봄이라면 30대는 여름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른을 사하기(思夏期)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여름을 준비하는 나는 인생이 사실 몇 가지 요소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0년이나 살았는데, 겨우 '반복'이 인생의 핵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엇을 때의 허탈감. 신문은 더 이상 신문이 아니다. 파키스탄에선 언제나 자살 폭탄 테러, 미국에선 언제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다. 국회는 올해 예산을 엉뚱한 데 책정했고, 정부는 여론 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수능 시험 날은 이상하리만큼 춥고, 거액을 복지 재단에 기부한 사람은 김밥 장수로 평생 살아온 여든 노인이다. 나는 인생의 자잘한 법칙을 완전히 하나의 고치 안에 꿰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틀 안을 벗어날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183쪽) 또 이런 문장도 맘에 든다. 성숙이란 것이 환상 대신 현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면, 나는 성숙을 거부하고 싶다. 인생은 험난한 파도이고 가파른 해협이고 좁고 비탈진 도로이며 세상은 언제나 과도기다. 그러니 영원한 성숙도 영원한 미성숙도 없는 것이다. (68쪽) 사실, 권 리는 그리 대중적인 작가는 아니다. '싸이코가 뜬다', '왼손잡이 미스터 리', '눈 오는 아프리카' 등 총 3권의 장편을 썼지만 골수 팬을 양성한 만큼 안티도 만들었다. '싸이코가 뜬다'에서 실험한, 소설에 각주 달기 방식에 대한 문단의 반응은 '냉소'였다. 하지만 난 소설에 각주를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여신님의 글쓰기에 완전 미쳐버렸다. 작가론에서 염상섭과 김동인이 중요하다. 염상섭은 목격자, 김동인은 창조자다. 난, 대언자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김동인 입장은 틀렸다. 데리다나 바르뜨가 말했듯, 작가는 그닥 별 게 아니다. 텍스트주의. 모든 건 텍스트 안에 있다. 작가 역시 텍스트 속에서 하나의 구성 요소로 존재한다. 구조주의로 실존을 지워버리자. 결국 작가는 지금까지 쌓여온 정보를 자신의 요리법으로 전혀 새로운 것처럼 - 이지만 별로 새롭지는 않은 - 꾸미는 자다. 작가가 사기꾼이 안 되려면 적어도 각주는 달아 줘야지. 아니면 후주라도. 문단에서 그랬다지. 조경란이 '풍선을 샀어'에서 니체를 끌고 왔더니. 왜 문학에서 철학을 얘기하느냐고. 저 말이 소문이 아니라 정말 진짜라면, 중간점 6개와 온점 1개로밖에 반응하지 못하겠다. 글쓰기로 작가 정신을 해방시켜야 할 문학이, 오히려 문학주의로 작가를 옥죄는 꼴이니까. 그런 면에서 보드리야르를 자유자재로 말하는 권 리는 내게 와서 신이 되었다. 만 세. 개인적으로 보드리야르를 높게 평가한다. 그가 자살만 했더라도, 아마 그 역시 내게 와서 신이 되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실재 - 이미지는 그가 이미지 -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다. 마케팅이 메뉴팩쳐를 능가하는 사회다. 2,500년의 사상사를 꿰뚫은 그의 혜안. 물론 보드리야르가 탄생하기까진 소쉬르의 구조주의부터,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그리고 바르뜨, 라캉, 데리다, 폴드만 등의 지식 깡패들이 있었다. 보드리야르 이론의 귀결은 : 자살 『싸이코가 뜬다』는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인생 왜 사니, 걍 죽어.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섣불리 제단하지 말자. 이런 소설은 오히려 살아갈 힘을 준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 어딘가에도 나오지만 냉소적인 사람이 훨씬 성실하다. 그런데 품절이네... 씁. 학생 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사야지 생각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품절. 아!!!!! 슬퍼. 이제 자야겠다. 마지막으로 한 대목만 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세상은 체 게바라의 세기와는 많이 달라졌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점점 복잡해지고 마이크로화되어 가고 있다. 미시사가 또한 새 역사의 경향이 될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대가 갈수록 사회 구성단위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국가라는 단위는 이미 1980년대에 끝났다. 1990년대의 사회 구성단위는 개인이 되었고, 2000년대에는 말 못할 정도의 파편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제 타인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모두의 관심을 받는 타인보다는 나의 관심을 끄는 한 명의 타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러다 진정 쿼크quark 단위의 사회로 갈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사람들에게 역사를 재정의할 기회를 주었다. 미시의 시대, 현대인들은 저마다 각자의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 블로그에, 트위터에. 좀 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미시사를 한 편의 책으로 펴내기도 한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승자들이 쓴 일기가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역사를 구리기 시작했다. 타인의, 승자의, 가진 자의 역사가 아니라 나의, 우리의,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역사에 더 집중한다. 작은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가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이어나간다. 딜레마는 더 이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택일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자본주의의 승리는 밝혀졌다. 자본의 세계는 또다시 두 가지 축으로 나눠져 버렸다. 비이성적이고 냉소적인 세계와 이성적이고 혁명적인 세계. 어느 한 축이 계속해서 세계를 부수는가 하면, 다른 한 축은 부서진 세계를 재건하려 애쓴다. 그렇게 세계는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균형추 빠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이고 서변적인 딜레마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 딜레마는 2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낳게 되는 불안 가중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문제의 원인 제공자와 피해자가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이 두 가지 짐을 떠맡게 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계층적 불합리성을 안고 있다. 이는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문제의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는데, 문제의 해결은 피해자 개개인이 해야 한다는 모순. 이 딜레마에 대해 체 게바라라면 어떤 대답을 주었을까? (중략) 왜 다시 체 게바라인가? 이 질문은 틀렸다. 왜 체 게바라가 아니면 안 되는가? 우리는 그렇게 물어야 한다. 체 게바라의 망령이 아직도 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환상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세계의 균형을 맞추려는 환상 속에서 본 듯한 균형추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잊을라치면 깨어나 알람처럼 혁명의 중요성을 외쳐댄다. 그의 의지와 행동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체 게바라 알람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유다.(244-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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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의 세계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