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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와 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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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이라도 뜨거웠을까?"라는 제목을 보고 정말 나도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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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땅 따먹기란 놀이를 한 적이 있다. 그 흔한 장난감 하나 없었던 시절이라 놀이의 대상은 항상 주변의 물건이었다. 땅 따먹기는 조그만 돌과 운동장과 같은 공간만 있으면 언제든 가능했다. 놀이는 간단한 규칙을 지키면서 최대한 자신의 영토를 넓혀 가면 되는 것이었다. 왜 당시 이런 유치한 놀이가 유행했는지 모르겠지만 땅 따먹기가 우리의 사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 세상은 여전히 땅 따먹기가 통용되고 있다. 작은 돌이 총과 무기로 바뀌었고 간단한 규칙은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로 바뀌어 버렸다. 정복자들은 우월주의, 이상주의, 세계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만이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평화를 남기지 못했다. 오히려 불안과 불신, 두려움과 공포라는 필요치 않는 분란만을 만들어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인간의 야욕은 더욱 치밀해지고 교활해졌다.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의 행태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아프리카는 극심한 내전과 분열에 휩싸인다. 그런데 내막을 살펴보면 독립을 위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침입으로 인한 내부분열이 훨씬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 케냐 역시 마찬가지다. 땅 따먹기에 성공한 영국인들에게 케냐는 그야말로 신천지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복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에겐 최소한의 배려나 양심조차 없었다. 오직 식민지화를 통한 개인의 영욕 확대가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던 케냐인 들에겐 날벼락이 떨어진다. 그들은 땅 문서라는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영국인들에게 수백 년을 살아온 땅을 내놓아야했다. 원주민들은 빠르게 정복자의 하인이나 노예로 전락해 갔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쪽은 선택의 주체가 되었고 한 쪽은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원인을 제공해준다. 정복자들은 공허한 정복이 가져다주는 울타리를 치기에 바빴고 원주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순종적인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메슈는 정복자의 아들이다. 흔히 작은 브와나(주인)로 불린다. 2살 많은 무고는 브와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있다. 메슈는 눈길이 매서운 무고에 존경과 격멸이라는 두 가지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인인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주인인 자신을 돌본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무고의 말이 틀린 적이 없기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 메슈 역시 아버지 세대와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을 하인으로 고용해 평온한 일상을 꿈꾼다. 케냐에 독립운동이 꿈틀거린다. 브와나와의 삶을 거부한 원주민들이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정복자는 원주민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서 자신의 땅을 지키려한다.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일까? 물론 잘못이 있다면 정략적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정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브와나들이 느꼈을 불안이 원주민들이 느꼈을 공포를 뛰어넘진 못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겐 권력과 자본 그리고 폭력이 있었다. ‘나는 한 번 이라도 뜨거웠을까?’ 폭풍 성장소설이라기 보단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저자의 회고록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베벌리 나이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태생이다. 그녀가 전 생애를 통해 보았던 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은 더 이상 문제의 소제도 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은 ‘용기’ 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린 누구나 양심과 가치관이란 소중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무고가족에게 처해진 운명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메슈는 용기를 내어 잘못을 인정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세상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메슈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당시를 기억할 것이다.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순응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어떤 선택이든 정답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보단 주위의 반응이나 입김에 영향을 받는다. 끝까지 브와나에게 충성을 다했던 무고의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독립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선언했던 무고의 형을 비판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할까? 분명 둘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았지만 결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어버렸다.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리들이 인생을 뜨겁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을 것이다. ‘나는 한번 이라도 뜨거웠을까?’ 무엇이 나를 뜨겁게 만들 수 있을까?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성장소설, 추천하고픈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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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에 끌릴 때가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넌 한 번이라도 뜨거웠냐고 물어오면 난 열정적인 삶을 산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기 때문에 입을 꼭 다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라는 그 말이 아프고 한심하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반기를 들지도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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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선할지라도 그 사람이 만든 제도까지 선한 것은 아니다.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많은 결정들이라 하여 머리에 뿔이 달린 요상한 존재가 만들지는 않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악에는 한계가 없음을 우린 지난 역사를 통해 숱하게 경험해 왔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저자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 같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자란 백인인 작가는 사실 체제에 순응한다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성장하며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먼저 눈을 떴고 그 결과 재판도 받지 아니한 상태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그의 나이 불과 21세 때의 일이다. 견고한 체제는 그에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순응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유지될 수 있는 법이다. 아마도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쌓이고 쌓인 침묵이 빚어낸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악명 높은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가장 먼저 생각났던 국가, 감옥에서 무려 27년을 버틴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이 국가에서 흑인에게 열린 길은 그리 넓지 못했다. 그런데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절대 가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 잡은 많은 국가들이 유난히도 부자연스러운 국경선을 가지고 있다. 인위적으로 자를 대고 그은 듯해 보이는 그 선에는 사람들이 이제껏 제 삶을 영위하며 형성했을 어떠한 생활도 반영되지 않았다. 타자의 입장에선 이들은 너무도 어린 아이까지 총을 들고 사람 사냥에 나서는 비극이 미개함의 반영이라고 해석하고는 한다. 자신이 이제껏 누려온 부유함이 착취의 결과임은 결코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작품의 배경은 케냐였다. 1952년 10월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그 기간 동안 5만 5천명의 영국 군인이 케냐로 파병되었다. 백인 지배자들에 맞서 싸운 마우마우들이 있었고, 모두가 마우마우와 같은 노선을 지향했던 건 아니었음에도 백인들은 흑인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존재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현실과의 이러한 괴리에 대해 눈 뜨기에 두 주인공은 한없이 어렸다. 그들은 같이 성장했고 두 사람 사이에 피부색이 지니는 의미가 끼어들 틈은 그리 커 보이지가 않았다. 작가는 변화하는 인간상을 유감없이 이야기에 담았다. 처음에는 학비까지 지원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매슈의 부모는 스스로가 만든 허황된 이미지에 사로잡혀 마침내 랜스 가족이 지닌 적대적인 사고에까지 도달하고야 만다. 심지어 발생한 사고가 제 아들의 잘못이었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무고와 카마우는 어쨌건 유죄라며 제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이와 같은 유연성의 실종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났을 땐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보인다. 하지만 그런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국가를 이룬다면 가상의 적을 설정하는 것도 아마 가능할 것이다. 어린 아이의 눈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눈물 젖은 비스킷을 건네려 하는 아이의 행동에서는 아무런 적대감도 느낄 수 없는데 왜 아이가 성장해 어른이 되면 그토록 달라져야만 한단 말인가!
“당신은 한 번이라도 뜨거웠습니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심이다. 엄연히 존재한다고 하는 ‘룰(rule)’도 진심을 거스른다면 과감히 폐기해야만 한다.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린다면 비극을 낳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진심에 다가갈 용기를 내기보다 작은 상자 안에 자신을 가두는 쪽을 택해왔다. 크면 그게 옳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거짓임을 애써 부인하면서... 지금 우리는 충분히 진실한가? 그렇다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면 비로소 우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 갈 길은 멀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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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도 삶의 방식도 다른 두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본 마우마우 이야기!
1951년 11월
케냐의 농장에 사는 두 소년은 울타리가 망가진 틈사이로 농장 울타리 밖인 수풀로 나온다. 총을 가지고 있는 매슈는 당당한데 반해 그를 따르고 있는 무고는 불안하다. 언제 어떤 위험이 그들을 덮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무고의 불안은 임팔라의 등장으로 점점 사라지고 오로지 사냥을 성공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무모한 감정이 매슈를 감쌌다. 허나, 임팔라를 잡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워낙 속도가 빠른데다 아직 수풀의 지리까지 파악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기저기 임팔라를 찾아 헤매던 두 소년은 물을 마시고 있는 임팔라를 무고가 발견하게 되면서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가늠쇠 사이로 임팔라를 보며 사냥을 하려는 순간 무고가 놀란 눈으로 매슈에게 코끼리가 온다고 말한다. 놀란 매슈는 근처에 있는 나무로 올라가려 하지만 총 때문에 손이 불편하여 올라 갈 수 없다. 그런 매슈의 모습에 무고는 자신에게 총을 맡기라고 손을 벌린다. 그러자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잠시 망설이던 매슈는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총을 맡기고 나무 위로 올라간다. 제발 살려 달라며 나무위에서 기도를 올리는 매슈의 말을 신이 들었는지 다행스럽게도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무고에게 요시야의 불벼락이 떨어진다. 대체 저녁준비를 하지않고 어디를 갔었냐는 요시야의 다그침에도 무고는 매슈와의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없다. 그날 저녁시간 두 소년의 비밀은 온전히 무고의 잘 못으로 내 몰리고 만다. 울타리의 망가진 부분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억울했지만 무고는 자신을 다그치는 브와나(주인)에게 고개숙여 사과한다. 그 순간에도 무고가 걱정하는 것은 브와나의 신망을 잃었다는 것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바바(아빠)의 질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 어느 때 보다 엄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바바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바의 모습을 보자 그 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해 눈물을 쏟아졌다. 울먹이며 사실을 말했지만 바바의 화를 풀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 들이게 된다. 다음 날 브와나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무고를 살짝 불러낸 매슈는 자신과의 비밀을 지켜준 무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바바에게 혼이 났지만 매슈에겐 나쁜 감정이 없던 무고는 괜찮다며 웃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모두가 쉬쉬했지만, 언제 자신들 차례가 올까 걱정했던 낯선 이들이 그 농장에 침입한 것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며 누가 누를 위해 아파해야 하는 걸까? 판단 할 수 없다.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아프게 하며 성장해 왔고, 그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또한 일본인에게 피해자였으며, 베트남인에게는 가해자였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서 정당할 수 있는 인류 따윈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 간악하고 잔혹한 현실을 디테일하게 그려 나가거나, 누구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대목은 없다. 두 소년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앞 날도 모르는 체 서로를 의지하다 서로를 잃어버렸다. 누구를 탓 할 수도 누구를 원망 할 수 도 없는 역사에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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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나는 한 번이라도 뜨거웠을까?’ 이다. 책의 표지그림은 흑인 소년과 백인소년이 서로를 보고 있는 모습이다. ‘무슨 얘기인데 제목과 그림이 이럴까?’ 하는 의구심으로 책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백인 밑에서 일하는 흑인 소년과 백인주인 소년간의 이야기가 관점을 서로 바꿔가면서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다. 처음의 앞부분은 생소한 지명과 이름으로 헷갈리고 진행이 느릿느릿한 감이 없지 않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에 진행이 되어 갈 때는 속도가 붙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책의 표지만 보아도 대충 어떠한 이야기가 진행될지 알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라는 말이 있듯, 이 이야기는 흑인 백인 소년간의 우정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양반제도도 그렇듯 지금 와서 보면 ‘어떻게 그런 세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은 평등하다. 이 말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노예제도, 양반제도보다 더한 세상일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중 하나가 비정규직이라는 제도인 것 같다. 똑같이 일하지만 누구는 모든 혜택을 다 받고 인정을 받지만 또 다른 이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세상의 또 다른 양반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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