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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의 말년 150여일을 재구성해낸 소설이다. 츠바이크를 흠모하여 자신의 의학박사 논문까지 그에게 헌정했을 정도의 저자이니, 소설 행간 사이사이 엿보이는 <어제의 세계><모르는 여인의 편지><체스>등 츠바이크의 영향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빈의 황금시대에 태어나 그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츠바이크는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그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의 파괴를 목격한다. 2차 대전 발발 후, 그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지만 고향에서 들리는 친지들의 암울한 소식과 전쟁 확대, 브라질에서도 자행되는 유대인에대한 테러 현실에 절망한다. 1942년 2월 22일, 늘 소지하고 다니던 약물로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다'며 자살한다. 27세 연하의 두번째 아내 로테와 함께.
이제는 신성한 안식처도, 고정 거주지도 없었다. 삶은 영원한 방랑의 장이 되었다. 기억할 수도 없는 아득한 탈출기가 되었다. - 본문 12쪽에서 인용
그가 알던 세상은 폐허가 되었다. 그가 살뜰히 여기던 이들은 죽었다. 그들에 대한 추억마저 무참히 훼손당했다. 그는 인류의 가장 풍요로운 시간을 증언하는 전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야만의 시대를 아무 생각 없이 기록만 하는 글쟁이는 될 수 없었다. 그에겐 너무 많은 기억과 너무 큰 두려움이 있었다. 노스탤지어는 그의 글쓰기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만 글을 썼다. - 본문 47 -48쪽에서 인용
카스텔리오, 에라스무스, 몽테뉴,,,, 지난 시대 유럽의 야만에 맞선 역사적 인물들을 즐겨 그려냈던 그에게,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유럽의 야만, 아니 전 세계로 확대되는 야만은 결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한 츠바이크 신봉자가 쓴 이 책을 통해 나는 그의 아픔과 두려움을 읽는다.
하지만 그의 시대와 그가 그려낸 작품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나. 그란 남자와 그란 남자가 숭상한 남자들을 그리워하는 나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츠바이크의 어린 아내 로테처럼 이 소설과 그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난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요. 현재와 과거 모두를요. 당신 인생의 매순간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품에 안겨 오롯이 당신에게 속하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베토벤 카페에, 부르크 극장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함께 폴크스가르텐을 산책하고 막시밀리안플라츠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싶어요. 당신과 나란히 오페라 극장의 계단을 오르고 마리엔바트의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요. 운명이 나를 너무 늦게 태어나게 했으니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고 싶어요. 내가 당신과 떨어져 살았던 그 세월을 모두 다 이야기해줘요!“ - 본문 60쪽에서 인용 내게 먼 남자를 읽고 뒷북치며 사랑하는 일은, 고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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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 있다. 최근에 자주 듣게 된 이름은 "슈테판 츠바이크"였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슈테판 츠바이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하고, 더불어 회상록 [어제의 세계]가 언급되기도 했다. 이 작가에 대해 누구는 휴머니스트라고 하고 누구는 영혼의 탐구자라고 했다도 드었다. 소설가라고 하는데, 시, 희곡, 전기 등의 다양한 저작을 했다고 들린다. 이런 저런 이야기 속 호기심에 선택한 책이, 이 책이다.
이 소설은 1941년 9월부터 1942년 2월 22일 작가가 삶을 마감할때까지의 이야기다. 이미 유명한 작가였지만 유태인이라는 이름으로 내 몰리기 시작한 츠바이크는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저작이 금서로 지정되는 모욕과 여러가지 압박에 1934년에 런던에 피신하여 시민권을 획득하였지만, 몇 년 만에 다시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마지막에는 브라질로 망명하고, [어제의 세계]를 출간하고 아내 로테와 함께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할때까지의 삶이 서술되어 있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이 이야기를 쓴 로랑 세크직은 저자에 대한 30년 '애정'을 담아 이 책을 썼는데, 츠바이크의 작품을 아는 독자들은 그 속에서 저작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고 그렇지 않은 독자들도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 한다. 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아주 흥미로운 독서를 했다. 츠바이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예민하다는 작가가 느꼈을 절망감과 엄청난 상황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정신적인 대표자 같은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할 뿐이다. 모두가 빠진 절망 속에 낯 모르는 사람들이 내미는 처절한 손과 외침을 얼마 만큼, 언제까지 듣고, 돕고, 이겨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릎에 힘이 빠진다. 브라질 망명 후, 잠깐의 평온을 맛보지만 미군의 군사개입으로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날아온 유태인의 학살 소식이 작가의 정신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을까라는 짐작을 할 뿐이다. 츠바이크의 시선과 로테의 시선을 오가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선 때문에라도 더욱 공감된다. 그런데 문득, 이 책이 앞으로 읽을 츠바이크의 책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을까 걱정된다.
책 상태는 양장이지만 갈피끈이 없다. 230페이지의 손에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로 손에 들고 읽기 좋은 사이즈다. 읽고 영화 [피아니스트]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속으로 또 외친다. 전쟁 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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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그러나 페이지 몇몇 군데에서 발견되는 묘사 때문에 집어들었던 작품이었는데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저로서는 그랬네요. 이렇게 다소 소극적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이 과연 보편적이기도 한가, 하는 의문 때문이라지요. 일단 요즘 저로 말씀드리자면 뭔가 이제까지 밍밍한 밥만 먹다가 된통 걸쭉한 뭔가가 당기던 차였습니다. 소설로 치자면 묘사가 질펀한, 말하자면 화려한 묘사를 자랑하는 작품이 읽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묘사가 많은 작품을 쫌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으시지요? 깔끔하고 담백한 문장을 선호하는 분이 더 많은 걸로 아는데, 저 역시 그런 문장도 선호합니다. 다만 최근엔 진한 칼국수 국물같은 느낌의 소설이 읽고 싶었던 거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의 군데군데가 제가 원하던 바와 매우 흡사한 문장을 가지고 있었고 읽어보니 아주 만족스러웠다고까진 할 수 없었으나 제법 괜찮았던, 나름의 갈증은 해소시켜줄만한 정도의 수준은 되었습니다. 문장에 능숙한 번역자는 아니신지 문장 하나하나의 꾸밈은 좋았으되 전체적인 문장의 리듬은 별로 좋지 않아 호쾌하게 좋은 문장이었다고까지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좋은 표현력을 지녔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전반적으로는 마음에 드는데 뭔가 여러모로 2% 정도 부족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랬습니다.
이 소설은 저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주인공으로 세운, 그의 삶의 마지막 6개월을 그린 소설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 로테의 삶을 말이죠. 일단 츠바이크는 제가 많은 사람에게 홍보하다시피 했던 걸작 장편 <연민>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전기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이기도 하시지요. 저는 장편 <연민>과 단편 <체스>, <낯선 여인의 편지>를 읽어보았는데요, 이 분의 작품은 단편 장편할 것 없이 대단합니다. 심리 묘사의 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한 감정을 그야말로 실감나게 표현하는 대가시니까요. 개인적으로 제 책장 첫 번째 코너에 꽂혀 있는 작가입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순으로 책이 정리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고서야 그가 유대인인 줄 알았네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서 그냥 단순하게 그런 줄로만 생각했지 유대인이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가 아, 맞다 오스트리아면 유대인일 확률이 매우 높구나, 하고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가 유대인인 것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요. 그의 말년의 삶이 2차 세계대전 한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명한 작가, 혹은 학자들은 독일 군에게 쫓겨 망명한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슈테판 츠바이크도 그중 한 명이네요.
츠바이크는 자신이 사회 참여적인 문인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꽤나 고민하는 말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독일군에 저항하는 문구 하나 쓰지 못하고 도망치듯 타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자신의 나약함을 견디지 못했달까요? 자신을 짓누르는 그 두려움이 다른 저항 문인들의 과감한 행동들을 보며 더욱 골이 깊어지는 형편이더군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츠바이크를 이해합니다. 저는 오히려 저항만이 용기라고 생각지는 않으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대에 편승하여 나대는 꼴을 더 싫어하는 쪽입니다. 두려워 숨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성입니다. 부딪혀 저항할만한 사명감을 가슴 깊이 느껴 싸우는 사람은 그러한 운명을 택해 나아가는 것일 뿐, 무조건 그의 선택이 옳다고는 할 수 엄따꼬 저는 생각해요. 물론 그런 사람이 옳은 선택을 했을 경우엔 칭찬과 존경을 받아 마땅하겠지만, 세상엔 그런 사람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그런 유니크한 수의 영웅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못한 정말 많은 수의 범인들은 마치 기준 함량에 못 미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되고 마는데요, 영웅화를 기준으로 정의를 부르짓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치명적인 오류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모두가 모자란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남들보다 뭔가 뛰어난 한가지를 가졌다고 해서 그를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운다고 세상이 발전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편타당한 상식 선에서의 노력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이고요, 그러므로 츠바이크의 말년이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지는 1인이었습니다구리. 뭐, 그러나 심약하여 고민하는 자신 또한 그가 선택한 그의 운명, 거기서 어떤 감동이나 드라마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 점이 이 작품의 심심함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유명한 전기 작가를 주인공으로 그의 마지막 생을 소설로 쓴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은 아니었겠습니다만, 그건 작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알아서 할 바이고 어쨌거나 실존 인물의 삶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그릴 것이냐와 좀더 드라마틱한 연출이 필요할 것이냐의 간극을 두고 고민을 좀 했을 것 같긴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작가는 전자를 택한 듯 싶어요. 츠바이크의 삶을 이해하기엔 수월했으나 작품으로서의 재미는 덜했습니다. 화려한 묘사를 선호하거나 슈테판 츠바이크를 각별히 애정하는 독자 분들에게는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분들에게도 그렇게 느껴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궁금하면 보시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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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1942년 2월 22일
재혼한 젊은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고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 런런, 미국 뉴욕을 거쳐서 정착했던 브라질에서였다. 그가 남긴 유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원컨대, 친구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 마침내
동이 트는 아침을 보기 바란다. 너무나 조급한 이 사람은 먼저 떠난다." 츠바이크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에 더더욱 절망을 하고, '너무나 조급하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너무나 시대에 예민했던 사내는 광포한 시대에 희망을 찾기가 힘들었지만, 그 후의 역사를 보면 그는 조급했다. 그의 나이
갓 예순을 넘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물론 지금 기준으로 그런 것이긴 하지만) 역시나 너무 안타까운 조급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 결정은 그가 남긴 글들을 해석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고, 또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유언장 같은 회고록, 『어제의 세계』를 영국 런던에서 그의 생애에서 두 번째 맞는 세계대전
소식으로 맺었었다. 로랑 세크직의 소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은 그 다음 이야기, 즉 미국 뉴욕, 브라질 페트로폴리스의 이야기다. 그는 세상에서
쫓겨났다. 가장 예민한 작가였기에 가장 먼저 탈출했고, 그래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모든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그가 폭력(히틀러의 독일을 비롯한 주축국)을 제거하기 위한
또 다른 폭력(미국의 군사 개입)을 옹호한다는 것도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사랑스러워했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게 쉽지 않으리라는 절망적인 예감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 "그는 사라지기로 되어 있는 상징이었다." (182쪽) 로랑 세크직은
바로 그 슈테판 츠바이크의 죽음을 앞둔, 수 개월의 시간을 두고 짧은 소설을 만들었다. 소설이지만, 기본적인 사실 관계에 충실한 기록물
같은 거라, 마치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이 기록한 느낌이 든다. 저자
자신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체마저 흉내내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를 흠모해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감정 이입까지 이루어져 더더욱 츠바이크의 글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이다. 츠바이크의 죽음
이후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70년도
더 된 그의 죽음을 그린 이 소설을 읽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 시대와는 또 다른 광포한
시대에 우리가 서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 "여러 시대를 아우르며 메리 스튜어트와
마리 앙투아네트, 푸셰와 보나파르트, 칼뱅과
에라스무스에 대한 책을 쓴 그였다." (17쪽) - 그래서 그가 기억된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먼저 도망친 자요,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비겁한 자, 가장 나중된
인간, 최후의 츠바이크였다." (49쪽) "독일에서는 기생충, 영국에서는 역병 환자였다." (55쪽) "세상은 몽테뉴가 살았던 세상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불살라진 대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자신의 삶도 몽테뉴의 삶과 비슷한 행로로 흘러가는 듯했다." (103쪽) "타인을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중략) 쥘 로맹이 그의 평전에는
인물에 대한 거리가 없으며 작가의 자기고백이 난무한다고, 그의 글에는 작가와 인물의 동일시가
너무 심하다고 비꼬았던 데에는 일리가 있었다. (중략) 몽테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야만의 회오리 속에서도 사람다움을 흠 없이 보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105쪽) - 츠바이크의 전기를 읽으면 츠바이크가 생각이
난다. "그 죽음은 끔찍한 예속과 이름 없는
잔인성을 더 이상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121쪽) "그는 한 번도 투사였던 적이 없었다. 그가 비호했던 중유럽은 시인과 몽상가의 세상, 마법의
세계, 어린아이들의 동화 같은 것이었다. 지금
씌어지고 있는 역사는 어둠의 결혼 이야기였다." (182쪽)
"그가 보이게는 패자야말로 숭고한 존재로서 도덕적으로는 승리를 거둔 자였다. 치욕을
당한 족속이 주인 된 족속보다 우월했다." (183쪽) (2014.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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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츠바이크의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었다.당장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책장에 얌전히 꽂아 두었었다.최근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에 대한 소개를 듣고,오래도록 꽂아 두기만 했던 '체스 이야기....'를 먼저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던 소설집이였는데,체스 이야기'매력에 빠져서 그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을 내쳐 읽었다.너무 흥분(?)했던 나머지 츠바이크 쓴 소설로 착각했던 것.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해 그의 흔적을 따라간 소설을 쓴 이가 있듯,이 책 역시 츠바이크에 대한 존경을 담아,그의 역사를 고증한 이의 헌정의 마음이 가득 담긴 책이였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기에 소설을 읽는 느낌도 있으나,츠바이크에 대한 고증이 바탕이 되였기에 에세이를 읽는 기분도 들었다.츠바이크가 다른 작가들의 평전을 펴낸것처럼,로랑 세크직이란 작가 역시 츠바이크의 평전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책은 평전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매우 짧지만 말이다. 결론 부터 말하면 츠바이크에 대한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읽었으면 더 좋았겠구나 싶다.그가 쓴 다양한 책들의 역사가 츠바이크의 수많은 분신들처럼 책장을 넘겨 다닌탓에 아는 만큼만 보인 아쉬움이 남는다.다행(?)이도 인상적으로 읽었던'체스 이야기'에 관해 소개된 에피소드가 있어 반가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책은 마냥 신나게 읽을수 있는 책은 아니였다.오롯이 작가로서 혹은 평전 작가로서의 시선에만 주목한다면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하겠지만,한 개인의 삶으로 바라 봐야 하는 츠바이크의 삶은 안타까움과 연민과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마지막 나날'이란 제목은 그래서 츠바이크에 대한 삶을 상징적으로 읽어낸 듯한 느낌마저 든다.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할수 없었던,죽음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츠바이크에 대한 애정을 가득 가진 작가의 입장에서 츠바이크를 객관적으로 옮기는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그럼에도 담담하게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억지스러운 눈물이 아니라,전쟁이란 재앙이 한 예술가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릴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놀라운 건 그런 역경 속에서도 엄청난 글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책을 통해서 읽어야 할 책,읽어 보고 싶은 책들에 관한 리스트가 만들어졌다는 것.
"얼마 전부터 세계 최고 체스 대가들의 시합을 복기한 작은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그였지만 체스 실력은 변변치 않았다.(...)그는 브라질로 향하는 배에서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단편소설에 대한 발상을 얻었다."/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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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휴머니스트 츠바이크는 16세기의 휴머니스트 몽테뉴에게서 운명의 형제애를 느꼈다. 400년이란 세월의 격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영혼의 탐구자' 츠바이크와 세계 최고의 모랄리스트 몽테뉴의 경이로운 전이였다. 유대계 포르투갈인의 증손자였던 프랑스인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종교전쟁으로 불살라진 대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그리고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고향인 보르도를 탈출한다. 400년이 지난 후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 역시 나치즘, 크리스탈나흐트의 대학살,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해 1934년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떠나 런던, 뉴욕, 페트로폴리스로 떠돌게 된다.
"이제는 신성한 안식처도, 고정 거주지도 없었다. 삶은 영원한 방랑의 장이 되었다. 기억할 수도 없는 아득한 탈출기가 되었다."(12쪽)
하지만 무엇보다도 둘의 공통점은 죽음에 대한 철학에 있었다. '운명의 형제애'는 다름아닌 자살찬미론에 놓여 있었다. "죽음은 모든 고통에 대한 처방이다." 몽테뉴의 말이다.
1942년 2월 22일,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곤살베스 디아스 거리 34번지. 츠바이크 부부가 침대 위에 잠든 듯 누워있다. 당시 츠바이크는 61세, 그의 젊은 아내 로테는 34세였다. 둘은 동반자살이라는 방식으로 고통, 공포, 절망, 야만, 분노, 비인간적인 만행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도주한다. 1941년 11월 28일 그의 예순 번째 생일에서 낭송한 그의 자작시 마지막 구절은 이런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다.
"체념의 그늘에서만 진심으로 삶을 사랑할 수 있네."(117쪽)
츠바이크의 주위는 여전히 암살, 고문, 수용소, 굶주린 이들의 행렬, 망명자 집단, 자살한 사람들의 비참한 이야기로 들끓었다. 평소 "시인과 몽상가의 세상, 마법의 세계, 어린이들의 동화"를 비호했던 츠바이크는 자신이 이런 참혹한 세상의 허깨비나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단편소설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남녀 주인공의 운명적 도식을 그대로 따라갔다. 바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파국을 맞는 텍스트, 광기 혹은 죽음으로 운명을 마감하는 남녀 주인공"처럼 말이다. 츠바이크는 이런 유서를 남긴다.
"내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원컨대, 친구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 마침내 동이 트는 아침을 보기 바란다. 너무나 조급한 이 사람은 먼저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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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츠바이크의 전기물들을 꽤 읽었다. 그러다보니 츠바이크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졌다. 특히 브라질로 옮겨간 츠바이크가 어째서, 그러니까 아직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화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그곳 브라질의 리우에서 아내인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 구상중이거나 집필중인 책이 있었음에도 그예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자신을 몰아갔는지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 원인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이제 바로 그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한 전기물이 등장하였으니 어떻게 읽지 않고 배겨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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