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에 대한 관심이 큰 편입니다. 개인의 기억 뿐 아니라 집단의 기억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도시사학회가 기획한 <도시는 기억이다>는 일종의 집단 기억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자들은 “인류 문명이 등장한 이래로 도시는 인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활동성과물을 집약해 발전해왔다. 도시는 인간의 모든 삶의 흔적을 기억하고 전승하기 때문에, ‘도시는 기억의 산물이자 기억 자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억은 개인의 기억일 도 있지만, 아무래도 집단기억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자들은 도시에 세워진 공공기념물이야말로 해당 도시의 역사문화경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아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13개의 도시의 공공기념물의 의미를 조명하여 이 책에 담았습니다. 모든 도시가 기억할만한 공공기념물을 가지고 있지만, 도시의 역사 등을 고려하여 지중해 권역에 속하는 아테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4개 도시를, 서유럽 권역에서는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베를린 등 5개 도시를, 동유럽과 아메리카를 같이 묶어서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멕시코시티, 그리고 뉴욕 등 4개 도시를 대상으로 합니다. 물론 이들 도시를 선정한 것은 서양사의 전개과정을 보면, 도시마다 특별한 공공기념물을 만드는 전통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3개의 도시 가운데 물론 도시 전체를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암스테르담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2개 도시를 제외하고는 가본 적이 있어서 책에 적은 내용들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로마에서는 로만 포럼을, 베네치아에서는 산 마르코 광장에 세워진 마르코의 사자상을, 마드리드에서는 엘에스코리알과 망자들의 계곡을, 런던의 경우 트라팔가 광장만을, 파리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의 동상을, 독일에서는 뮌헨, 뉘른베르크, 베를린 지역에 나치가 세운 공공기념물을, 빈에서는 링슈트라세를, 러시아에서는 해체 이전에 세웠던 ‘대조국전쟁’ 기념비를, 뉴욕에서는 9.11으로 무너져 내린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도시에 있는 많은 공공기념물들 가운데 특정 주제에 국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공공기념물의 유래나 의미를 비롯하여 건립동기,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건들, 건립주체와 건립과정, 건립 이후에 대두된 갈등 등까지 상당한 깊이로 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읽다보니 가본 도시에서도 미쳐 챙겨보지 못했던 기념물들이 있는 것을 보고, 진즉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물론 언젠가 다시 가볼 기회가 생긴다면 빼놓지 않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의 경우는 두 번이나 갔는데도 산 마르코 광장의 원주 위에 세워진 마가의 사자상은 보았지만, 도제궁에 올려놓았다는 마가의 사자상은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여행은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제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정리된 내용도 없지 않은 것 같아 다시 확인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암스테르담이 번영하게 된 것은 스페인의 기독교세력이 국토회복에 성공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라공과 카스티야의 연합군이 이베리아반도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세력인 나스르왕국을 몰아낸 뒤로 들어선 가톨릭왕국의 종교탄압을 피해서 이슬람은 모로코로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이재와 상업에 밝은 유대인들이 유입되면서 네덜란드는 유럽의 상권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종교적 기적이나 청어잡이와 같은 경제적 요인이 핵심은 아닐 것 같습니다.
상당한 부피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흐름이 좋아서 금세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번쯤은 다녀온 곳이고, 다녀온 후에 관련 지역의 역사나 볼거리에 대하여 정리를 해두었기 때문에 이해가 쉬웠습니다. |
|
우리의 신체는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하고 모든 부위에서 끊임없이 분해와 합성을 계속하고 새로운 세포로 바뀌고 있다. 한 달 후 나의 내부는 과거 내 몸의 일부였던 원자나 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대체 무엇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과학자는, 그럼에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억은 내 정체성을 밝혀주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존재다. 그렇다면 나라는, 도시는, 건물들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이런 화두를 들고 있다. 그들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도시는 기억이라고. 인간의 모든 삶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전승하는 도시는, 그중에서도 크고 작은 공공기념물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억을 안고 있는 아테네를 시작으로 우리와 낯설지 않은 유럽의 도시들을 순례한다. 과연 도시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들고 가야할 과제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당장 가방을 꾸려서 떠나야 할까? 어쩌면..
대체 피렌체는 어떤 곳이기에 연인들을 사랑에 빠지게 하고 예술가에게 뮤즈를 선물해주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일까. ‘냉정과 열정 사이’의 아오이는 피렌체를 연인들의 성지라고 말한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다시 만난다. 그런데 저자는 이 달콤한 환상을 깨는 이야기를 한다. 준세이와 아오이가 만나 사랑을 확인했던 두오모는 이 도시의 정치적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매혹적인 도시가 꽃피우는 것은 신의 선물도 아니고 운명의 장난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말은 희망의 다른 이름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랑, 예술 같은 아름다운 일들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도시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게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 늘 보듯이 성공한 이들의 행보는 겸손하지 않다. ‘군주의 권위를 위해 베키오 다리에 가득했던 푸줏간들이 쫓겨났다. 그 자리를 금 세공사들이 차지하면서 아름다운 피렌체의 기념물이 또 하나 조성됐다’로 이 도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2023년의 대한민국은 이와 다른 모습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이다.
마드리드 엘에스코리알과 망자들의 계곡은 영광과 비극의 기념물이다. 비교적 생소한 에스파냐제국의 상징물이라는 이 수도원은 왕궁이면서 성당, 도서관 그리고 공동 무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 중심과 종교적 중심이 분리된 피렌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각 나라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이렇듯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다. 이 건물은 그것을 건축한 인물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들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후대 사람들이 떠올린 이미지가 투영되었다는 것을 알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영광의 기념물이 환영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감추고 싶은 유산에 대한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집단 기억의 힘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망자들의 계곡은 아픈 역사인 에스파냐내전에서 숨진 병사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세계 최대의 납골기념물이라고 한다. 거기에다 공사 과정에서 많은 죄수들이 사고로, 노동 과정에서 얻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 공간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이다. 전문가들이 말해주지 않으면 스쳐지나가지도 않았을 장소이고 그렇게 묻혀버릴 역사의 하나이다. 알면, 보이는 것이 커진다는 것은 어느 곳을 여행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저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여행을 하고, 역사를 배우고, 그리고 내가 갈 길을 찾는다.
땅이 물보다 낮은 나라 네덜란드는 어떤가. 군주의 위엄을 과시하는 궁전이나 종교 권위의 구현체인 성당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조성한 거대한 사업물의 결과물인 암스테르담의 운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도시의 역사다. 대체 물보다 낮은 지대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늘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연과 한없이 싸우면서 일궈낸 결과물에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기적이란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누군가 귀에 속삭일 것만 같은 공간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공간이 가지는 힘은 알고 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이 내뿜었던 숨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이루어진 공간 말이다. 거기에 내가 한줌의 숨결을 보태고 기도와 축복을 보탰을 때 그 공간은 특별한 것이 되고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때의 결과가 후대의 원인이 되고, 그것이 다시 후대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고 함부로 미워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잊어버리더라도 우리가 내뱉은 말들은 그 도시를 떠돌다 하나의 전설이 될 테니까.
마지막 여정은 뉴욕 9.11기념물이다. 사건 현장 지척에 위치한 인연으로 구조 활동을 돕고 지금은 전시 공간이 되었다는 세인트폴 교회나, 비영리단체가 만들어낸 작은 추모관이 호응도가 높다고 한다. 관람객들의 쪽지나 기타 다양한 방식의 방명록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테러 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미국은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전쟁을 일으켰고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저자는, ‘온 힘을 다해서 애도하자. 하지만 함께 바보가 되진 말자. 약간의 역사의식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또 계속해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지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는 수전 손택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이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아도, 심지어 다시 만날 일이 없더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또한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져서이다. 좋은 책들도 그러하고 이 책도 그렇다. 그곳들에 앞으로 가볼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이 도시들을 알고 있고 그곳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지 느끼고 있다. 아픔, 욕망, 게다가 아름다움까지 간직하고 있는 도시들을 둘러보면서 이 지구가 그래도 살만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유럽의 도시 13군데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밖에 나가야 내가 있는 곳이 보이는 법이다. 동양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나에게 이 여행은 색다르고 값진 것이었다. 언젠가 저 따사로운 햇빛과 시끌벅적한 도시의 언어들을 찾아 길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책에서 보았던 지식들을 소환하며 나만의 감상을 보탤 것이다. 어디를 가든 보이지 않는 안내자가 있어 인도해줄 것을 믿는다. 그 도시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을 호흡하며 길을 따라 가다보면 사는 것이 조금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