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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무의 주변부는 껍질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면서 이 껍질부분이 안으로 밀려들어가면서 점점 단단해 진다. 그리고 종내 연한 속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중심부로 들어가게 되면, 그 나무의 중심부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단단하게 굳어진다. 하지만 아무런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쓸모가 없어진 그 나무의 중심부가 그 큰 나무를 지탱하는 핵심 부분이 된다. 쓸모없어 보이는 그 나무의 중심부가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에 온갖 모진 시련 속에서도 나무는 서 있게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틀딱’과 ‘꼰대’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다. 은어로 늙은이나 선생을 이르는 ‘꼰대’라는 말의 역사는 비교적 오래되었지만 - 그래서 그 의미가 늙은이나 선생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일방적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로 의미가 확장이 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 비교적 최근에 사용되는 ‘틀딱’이라는 말은 비하의 의미를 넘어 경멸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노인’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어르신’들로 상징되던 기성세대들에 대해 이렇게 불신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가 아직 산업화의 과정으로 들어가기 전의 농경 사회에서는 ‘노농(老農)의 징험(徵驗)’(<농가월령가>)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경험 자체가 삶의 지혜였으며, 배워야 할 중요한 삶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거쳐 정보화 그리고 제 4차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급박한 시대를 거치면서, 이제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은 현실에 쓸모없는 뒤쳐진 것이 되거나, 극복해야 할 잔재(殘滓)로 인식된다. 한때 산업화 사회를 이끌었던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이제, 치사하고 힘들고 아니꼽지만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젊은 세대의 언어와 사고,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배우거나, 아니면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상징되는 ‘틀딱’이나 ‘꼰대’의 멍에를 써야하는, 선택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부패하지 않고, 발효되는 많은 이 시대의 어르신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신영복 선생님과 박완서 소설가가 대표적으로 그런 분들이 아니었을까?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한 삶의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후배들 세대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지표를 던진, 그리고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여전히 젊은 세대들의 멘토가 되고 있는 그들의 가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최일남의 소설 <서울 사람들>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도시화된 세속 세계에 익숙해져버린 동창들이 이제는 사라져가는 시골의 옛 정서를 찾기 위해 농촌으로 떠났다가, 그 세계가 주는 불편함을 느끼고 다시 서울로 상경한다는 이야기 속에 펼쳐진,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세속 사람들의 본질을 파악해 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흐르는 북>(86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에서,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이어지는(흐르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을 통해, 19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현실의 문제점을 포착하는 그의 예리한 시선과 가장 민감한 현재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그의 솜씨는 물론 그가 기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60년 이상 꾸준히 현역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2017년, 그의 나이 85세에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노인들은 하물며 살아낸 연월이 길수록 먹통으로 몰리는 판이다. 노회(老獪)는 소년의 클릭 한 방만 못하고, 경륜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치여 별무소용이다. 나이와 함께 상승하고 속실이 찌기 마련이던 권위는 뒤를 받치는 콘텐츠가 부실하고 앙상한 만큼 하강 곡선을 긋기 바쁘다.(<밤에 줍는 이야기꽃>, 129쪽)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췌장암 말기의 아내는 내놓고 말했다. 살기가 정녕 팍팍하거들랑 마누라를 새로 얻으라고. 박교장은 빙긋 웃으며 퉁겼다. 그거야 내 맘인데 염라대왕 품으로 들어갈 당신이 시퉁스럽게 이래라저래라 할 것 없잖느냐고. 그 같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당신이나 어서 털고 일어서라고 진심으로 부추기면서.(<물수제비, 87쪽) 어떤 사람들은 노년을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평균 수명’ 근처를 거닐다 어느 날 죽음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마주치게 될 그 ‘노년’의 시기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노년의 시기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의 곁을 떠나고 있음을 깨달는 순간의 고독과 두려움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이 시대의 어르신들을 싸잡아서 ‘틀딱’이나 ‘꼰대’로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광고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에서 ‘나이를 먹는다고 누구나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시대에서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85세인 작가 최일남은 이 시대의 여전히 큰 나무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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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생인 현역 작가 최일남의 소설집이다.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노년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듯, 소설의 인물들은 상당한 노인들이다. 오래 전 홀로 자취 중인 나를 방문한 어머니께 박완서의 《저문 날의 삽화》라는 소설집을 읽어 보시라 들려드린 경험이 있다. 아직 환갑이 되기 전의 어머니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뒤척이시는 중이었고, 한참을 그렇게 아들이 건넨 소설을 읽었다. 《저문 날의 삽화》가 어머니께 들려드리고 싶은 책이라면 최일남의 《국화 밑에서》는 잠 못 이루는 아버지께 들려드리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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