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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왜 그래? 부처님 오신 날에는 왜 연등을 다는 거야? 일주문에는 왜 문이 없어? 원불교는 불교야?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차이가 뭐야? 불교에도 종교전쟁이 있었어? 붓다는 왜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어? <불교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집필노동자 장웅연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한다.《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에서 다루지 않거나 미처 다루지 못한 주제들을 다뤘다고 한다.《불교는 왜 그래?》의 부제는 ‘불교가 궁금한 이들에게 전하는 속 시원한 해답 33’이다. 속 시원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쉽다. 불교의 역사, 인물, 문화, 경전 등을 확인할 수 있어 불교입문서로도 손색없다. 게다가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에서는 석가탄신일을 부처님오신날로 변경해달라는 입장을 지속해왔다. 한자어여서 어감이 생경하고 무엇보다 ‘석가’는 붓다가 속한 부족을 지칭하는 단어(사캬Sakya)이지 예경의 대상인 붓다 자신을 가리키지 않는 탓이다. 문재인 제19대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라며 이를 공약으로 수용했다. 2018년부터는 드디어 어느 언론이나 ‘부처님오신날’이겠다. (p. 88)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도 알 수 있다.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이다. 다음 생에는 기필코 천상에서 태어나자는 게 아니다. 욕심을 뿌리까지 끊어 아예 육도를 벗어나자는 거다. 그리 먼 길도 아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갈 수 있다. “자신의 성품이 어리석으면 부처님이 중생이요. 자신의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님이다. 그대의 자비로운 마음이 관세음보살이요, 번뇌를 떨친 마음이 석가모니부처님이요, 평평하고 곧은 마음이 미륵부처님이다(《육조단경》).” (p. 26)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저자는 ‘도대체 불교란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불교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리고 싶다’는 화두를 품고 살았다고 한다.(p. 5 저자의 말) 간화선은 화두를 발판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조계종의 정통 수행법이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든다. 문제를 풀어내는 실마리와 같다.(p. 265) 그런데 선사들은 화두에 전혀 맥락이 없는 답변을 내놓고는 한다. 저자는 “그들의 동문서답은 부처의 삶을 고민할 시간에 부처로서 열심히 살라는 핀잔이다.”, 라고 말한다.(p. 272)
‘왜 사는가’란 의문은, 덜 살아본 자들의 어리석음이거나 노력이 부족한 이들의 변명이기 십상이다. 살아 있다면, 살아내면 그만이다. ‘부처의 삶’이란 별것이 아니다. 삶과 하나가 되어 걷거나 견딜 뿐, 삶을 따로 떼어내어 손가락질하거나 닦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완성! 달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막 오고 있다. 바람이 분다. (p. 272~ 273)
저자 역시 자신의 화두를 통해 별것이 아닌 ‘부처의 삶’을 목표로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그 연장선이고 말이다. 말하자면 독자들 역시 부처의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절로 부처로서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得之本有득지본유 失之本無실지본무’라는《벽암록》의 구절은 아무리 봐도 정신건강에 이롭다. ‘얻었다고 하나 본래 있었던 것. 잃었다고 하나 본래 없었던 것.’ (p. 281)
어쩌면 불교가 본래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럴 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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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세 개의 질문과 하나의 질문 - 장웅연, 『불교는 왜 그래?』 불교는 ‘나’를 내려놓는 데 집중한다. ‘나’는 욕망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욕망하는 ‘나’를 진짜 나로 생각한다. 배가 고프면 우리는 밥을 먹는다. 배가 아프면 우리는 약을 먹는다. 밥을 먹는 나와 약을 먹는 나는 같은 나일까, 다른 나일까? 불교는 이러한 ‘나’에 집착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욕망하는 나는 바깥 세계를 욕망하는 우리가 만든 ‘나’일 뿐이다. ‘나’를 내려놓으면 욕망은 사라진다. 욕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깨달음에 이른다. ‘나’에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불교의 원리를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 이 생각도 허상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허상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불교는 오리무중의 세계로 빠져버린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곧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역설에 우리는 직면하는 셈이다.
장웅연은 『불교는 왜 그래?』(담앤북스, 2017)에서 불교가 궁금한 이들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질문에는 곧바로 대답이 따르지만, 그 대답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33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이 책이 33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3개의 질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지은이가 제시하는 불교의 핵심 사상과 자연스레 마주한다.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최악의 지옥은?”이라는 질문은 “부처님이 고기를 즐겨먹었다고?”라는 질문과 다르면서도 같다. 한편으로 두 질문은 “붓다는 왜 마지막에 발을 내밀었나?”라는 질문과 다르면서 같고, “마음이 아플 땐 왜 불교를 공부해야 하나?”라는 질문과도 다르면서 같다.
33개의 질문은 개별적인 질문이면서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하나의 질문은 ‘불교란 무엇인가?’이다. 불교는 왜 최악의 지옥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지은이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상황이 바로 지옥이라고 갈음할 수 있겠다.”(18쪽)라고 말한다. “마음속의 지옥만큼 서슬 퍼런 곳도 없을 것이다.”(18쪽)에 이르면 지은이가 ‘지옥’에 대한 물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된다. 석두희천(石頭希遷) 선사에게 누군가 “해탈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누가 너를 묶었니?”라고 선사는 반문한다. 아무도 해탈로 가는 이 마음을 묶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해탈을, 지옥을, 극락을 묻는다. 지은이의 대답은 간결하다. 해탈은, 지옥은, 극락은 우리들 마음에 있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오직 탁발로써만 먹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각자가 일곱 집에 들러서 주민들이 주는 밥을 얻은 뒤 돌아와서 함께 먹었다. 끼니를 받는 대신 보시한 사람들에게 법문을 해주고 앞날을 축원해줬다. 일종의 카운슬링이고 물질과 정신의 교환인 셈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여전히 지속되는 전통이다. 탁발을 강요해서도 안 되었다. 비구들은 먹을거리를 주지 않는다 해서 툴툴대지 않았고 말없이 돌아섰다. 탁발에서 또 하나의 원칙은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지에게는 먹고 남은 밥을 줬으나 스님들에게는 아직 자신들도 먹지 않은 밥을 드렸다. 곧 음식을 가린다는 건 그들의 정성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발우에 고기가 있으면, 먹어야 했다. 주는 대로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자비이니까. (39쪽)
붓다가 고기를 먹는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각자가 일곱 집에 들러서 주민들이 주는 밥을 얻은 뒤 수행지로 돌아와 함께 먹었다. 주민들이 주는 음식을 그대로 먹어야 했다는 얘기다. 야채니, 고기니 가리며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주면 주는 대로 맛있게 먹는 게 그들에게는 수행이었다. 고기를 먹는 일로 붓다는 비난하는 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열반에 든 붓다가 장례식에 늦은 가섭에게 두 발을 내보인 상황 또한 지은이는 마음의 문제로 풀고 있다. “발은 신체에서 가장 학대받는 부이다. 온몸이 내려찍는 하중을 견디면서도 그 야속한 몸뚱이를 군말 없이 이리저리로 옮겨다준다.”(193쪽)는 부분에 드러나는 대로, 지은이는 이 고사에서 “발의 고마움을 알아, 발을 본받고 발처럼 살라는 당부”(193쪽)를 이끌어낸다. 하층민이라고 차별하지 않았던 부처의 마음을 본 것이다.
붓다의 이 마음을 알면 여성 출가를 반대하던 붓다가 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붓다가 왜 자살을 인정했는지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붓다는 자기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붓다는 의붓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가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걸 처음에는 거절했다. 이후 붓다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해 석가족 여인 500명이 울면서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빌었다. 코살라의 왕 비루다카가 대군을 몰고 와 카필라를 함락하기 직전이었다. 학살당할지 모르는 여인들을 붓다는 외면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두려움에 떨며 오열하는 여자들을 외면하는 건 마음 약한 붓다로서는 불가능했다”(223쪽)고 이야기한다. 여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대다. 불교의 ‘자비’에 어떤 의미가 스며들어 있는지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찬나의 자살에 대한 붓다의 반응에서, 안락사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명확해진다. 자아가 실재하든 안 하든 고통은 엄존한다. 더구나 고통이 끝날 기약이 없고 더군다나 그 고통을 다른 이들까지 떠안아야 한다면, 고통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최소한 악행은 아니게 된다. 몸도 지독하게 아픈데 자기 병수발에 지친 가족들의 마음까지 아프다면…. 죽을병에 걸려 겨우 연명이나 하는 노구老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붓다는 “찬나는 생전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니 비록 자살을 했더라도 다음 생에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찬나의 자살은 삶에 대한 갈망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에 무죄다. (250쪽)
찬나(channa)는 붓다의 제자이다. 늘그막에 중병이 들어 고통스러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혜제일 사리불과 논의제일 가전연이 ‘무아無我’를 이야기하며 자살을 만류하였지만, 찬나는 끝내 몸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붓다에게 찬나의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물었다. 붓다는 “그에게 큰 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찬나의 자살을 인정한 셈이다.
지은이는 찬나의 경우를 예로 들며 안락사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자아가 실재하든 안 하든 고통이 엄존한다면, 그리고 그 고통을 다른 이들까지 떠안아야한다면 제 몸을 죽이는 일도 악행은 아닌 거라고 지은이는 해석한다. 거기다 찬나는 생전에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지은이는 사리불과 가전연도 붓다가 열반하는 걸 볼 수 없다며 자살했고, 최초의 비구니인 마하파자파티도 같은 이유로 자살했다고 이야기한다. “탐욕과 분노로 저지른 죽음이” 아니라면, 그리고 “진정 자아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났다”면 자살해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은 질문은 “마음이 아플 땐 왜 불교를 공부해야 하나?”였다. “잃었다고 하나 본래 없었던 것”(274쪽)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得之本有득지본유 失之本無실지본무’라는 《벽암록碧巖綠》의 구절은 아무리 봐도 정신건강에 이롭다. ‘얻었다고 하나 본래 있었던 것. 잃었다고 하나 본래 없었던 것’”(283쪽)이라는 말로 지은이는 마음이 아플 때는 왜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지 답하고 있다. 아픈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다. 없는 걸 아프다고 하니 깨달은 이들은 우리 중생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선사들의 가르침을 빌려 지은이는 말한다. “일언이폐지하면, ‘그냥’ 살라는 것이다.”(283쪽)
마지막 질문인 ‘부처님은 운運을 부정했을까?’에서 지은이는 인연(因緣)을 이야기한다. “‘인因’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지와 정진이라면, ‘연緣’은 주변 환경과 변수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연이 순조롭게 받쳐주지 않으면 인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297쪽) 지금까지 ‘나’를 이야기했지만 나는 곧 너라는 걸 지은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곧 너이면서 만물이라면 우리는 만물=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란 이런 것이 아닐까? 온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다면 온 세상이 내 집이라는 말이 된다. 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는 말은 이리 보면 변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내 마음속에 있는 부처는 모든 생명의 마음속에도 있다. 지은이는 이를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는 여섯 글자로 정리한다. “자등명이 내가 밝힌 등불이라면, 법등명은 세상이 밝힌 등불이다.”(306쪽) 생명을 다한 자등명은 법등명의 일부로 녹아든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 앞으로 우리가 살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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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튜브에서 스님이 노래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노래하는 지관 스님'이라는 현수막까지 걸어놓고 안산의 재래시장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다. 거기에는 '묘연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도 등장한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두 스님의 노래 실력에 깜짝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스님들의 선곡이 대중음악이라는 사실이다. '님의 등불, 안동역에서, 보릿고개, 여자의 일생, 남자라는 이유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후회없는 사랑, 그집앞, 훨훨, 사랑만은 않겠어요, 시계바늘, 천년바위 기타 등등'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처음에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스님이 대중음악을 부르고 대중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스님이 왜 그래?'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노래하는 지관 스님'의 영상을 몇 번 보고나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지관 스님처럼 노래하는 스님들이 진짜 많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지관 스님은 가수로 데뷔하여 '훨훨'이라는 자신의 음반도 제작한 실력가이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이 내 머릿속을 까맣게 채우고 있을 무렵에 <불교는 왜 그래?>라고 물음표를 던진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불교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속 시원한 33개의 해답이 실렸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작년 가을에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은 49>라는 책을 읽고 여러 가지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 궁금했던 불교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소개해주고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의 좋은 기억에 이끌려서 오늘 또 <불교는 왜 그래?>를 읽게 되었는데, 역시 참신하고 좋다. 이 책 역시 나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내 속을 가장 시원하게 풀어준 스토리는 발 냄새보다 고귀한 수행의 향기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나서 붓다가 왜 마지막에 발을 내밀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세간의 '저출산'은 출세간의 교단에서도 걱정거리라고 한다. 아이들을 좀체 낳지 않으니 스님이 될 아이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이 스님들하고는 하등의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한불교 최대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연간 출가자 숫자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400~500명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200명을 채우기도 버겁다고 한다. 세속에서 크게 이슈가 된 사회문제는 불교종단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새로운 사실에 알 수 없는 연민이 일었다. 불교문화와 스님들의 일상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이 리뷰는 담앤북스에서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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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에 이끌려 다니던 절. 향 냄새는 익숙하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위안이 되었다. 할머니 뒷모습을 따라하며 절을 익히고, 공양을 하고 그 일이 마치 불교를 믿는 신도의 도리인 것 처럼 굳어져 버렸다. 성인이 되고 절에서 만난 신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기본도 안된, 오만하기만한 얼치기 신도였던 자신에게 실망과 부끄러움을 느껴, 늦게서야 교리 공부를 해보려고 힘 쓰던 중이였다. 때마침 장웅연 작가님의 불교서적을 접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배웠다. 불교는 왜그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끊임 없이 의구심이 든다. 책을 넘기는 첫 장 부터 심장이 내려 앉긴 했지만... "마음의 감옥엔 창살이 없다" (10쪽) 불교에서 말하는 최악의 지옥은 마음이다 희망의 유무에 따라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는 곳 아니면 영원히 갇혀서 괴로워하다 지옥으로 갈 수도 있는 곳, 바로 창살없는 마음이다. 어쩌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울림이 아닌가 한다. 마음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해 타인에게 시련을 주는 죄를 짓고 마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마음의 창살에 갇힌 것은 아닐런지...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으로 건너왔다. 불교의 최초 번성지는 네팔을 포함한 인도 동북부 지역이며 붓다가 태어나고 깨닫고 설법하고 열반에 든 장소가 한구석에 몰려있다. 불교 용어에 많이 나오는 룸비니 동산은 붓다가 태어난곳을 말한다. 이런 사소하고 기본적인 용어조차 가늠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약점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게 불교다" (189쪽)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자기가 싼 똥 자기가 치우는게 불교요 치우고 나면 잘했다고 안아주는게 불교다" 서로를 짓밟지 말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며 서로에게 칭찬을 해 주는 세상이 된다면 살 만 하지 않을까? 종교를 떠나 참으로 명언 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불교에 대해 무지했던 많은 부분들이 해소 되었다. 소중한 말씀들이 많았지만 특히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 다행히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295쪽) 많은 질병속에서도 발달한 의학과 과학으로 삶을 지탱해야하는 고통이 죽음이라는 해결책이 없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다행히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니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불자는 물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읽어본다면 삶에 대한 가치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고 생각이 흔들릴 때 언제라도 펼쳐볼 수 있도록 머리맡에 두고 읽어보기를 바란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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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 있던 불교 동아리에 가입하여 7~8년 정도 활동한 적이 있다. 종교가 불교여서 그랬다기보다는(실제로는 무교에 가까운 편)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아서 체험을 해보고 싶었고, 같은 학교 친구들이나 선배님들을 알 수 있다는 것도 동기 중 하나였다. 꽤 오랜 기간 활동을 하면서 법회도 매주 드리고, 1080배나 3000배의 엄청난 양의 절도 해보고, 다양한 행사에도 참석해봤지만 불교의 심오한 이론이나 조계종 등과 같은 불교 내부의 모습 등은 거의 알지 못 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좀 쉽게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책을 찾다가 '불교는 왜 그래?'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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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강진 무위사에 있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중에 아미타불의 모습이다. 아미타불은 '아미타구품인'이라는 수인을 맺는데, 위의 불상이 하고 있는 수인이 아미타구품인이다. 손가락을 O자 형태로 만들고 오른손을 위로 드는 형태라고 하는데, O자를 만드는 손가락이 어떤 손가락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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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에 갖고 있었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책. 이 책을 읽으면서 남자 스님은 비구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비구니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비구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그만큼 불교는 나에게 익숙한 동시에 낯선 종교이다. 주변에 불교신자가 없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종교였는데 이 책을 읽고 불교는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불교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야할 33가지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잇는 책이다. 왜 33가지 일까 궁금했는데 제척선이 다스리는 도리천의 도리가 33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서 따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석천은 퇴마록에서나 봤었는데 불교과 연관 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불교는 전래된지 오래된 만큼 여러가지 종교가 뒤섞여 있어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게 불교인지 도교인지 무속신앙인지 헷갈린다. 채식하는 문화가 도교에 가깝다는 것도 이 책을 보고 알았다. 스님에게 육식은 금지되고 당연히 채식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스님들이 육식을 허용해 달라고 했구나 싶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불교를 잘못된 관점으로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불교의 공 사상에 대해 말해 주기도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무슨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 인상에 남는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이 되면 연등 장식을 깅에서 종종 보는데 연등회를 그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연등과 관련된 난타 여인의 일화를 보니 기독교의 비슷한 얘기도 떠오른다. 어느 종교든 중요한 것은 돈보다 마음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예전에 여자는 목사가 되기 어렵다는 말을 보고 충격 받았었다. 지금은 여자도 목사를 할 수 있지만 종교내 성차별은 결국 종교도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거구나하는 깊은 실망감을 준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생식기 차이일 뿐 누구나 출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좋게 느껴졌다. 성차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불교는 막연히 신비로운 종교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보면서 불교가 전보다 친숙해졌다. 불교는 왜 그래?라는 재미있는 책 제목처럼 어렵지 않게 불교에 접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리뷰는 제작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