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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이 느린 영화라 리뷰 중에서 지루하단 평이 많았지만 신문을 보면서 같이 보니까 볼만했다. 영화의 기능 중에 하나는 생각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예전에 경험했던 것이나 느꼈던 것을 살짝 끄집어 내어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지석(현빈)은 영신(임수정)이 결혼 5년만에 바람을 피고 집을 나가는 판국에, 짐 싸는 것을 도와주고 마지막 만찬을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에 예약을 한다. 영신이 아꼈던 식기를 완충제로 하나하나 싸고 스카치테이프로 마무리한다. 맛있게 커피를 내려 영신에게 대접하고, 바람난 남자에게 온 전화도 친절히 바꿔준다.
참다 못한 영신이, 왜 화를 안 내냐며 묻는다. "정말 궁금해 당신은 태어날때부터 화를 못내는 사람인지 아님 화가 나도 정말 잘 참을수 있는사람인지." 지석은 내가 예상했던 대답을 내놓는다. 화낸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한 번 마음먹은 거였으면. 그리고 영신이 먹고 싶다던 파스타를 해준다. -_-
욱하는 성격의 나는, 지석이 신기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화를 내 봤자 소용이 없는 단계.
보통 친구들 하고는 싸울 일이 없다.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니까.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가깝다는 뜻일까(내가 싸우는 건 주로 부모님과 기르는 고양이. 남사스럽다 -_-) 아니면 체면이고 뭐고 잃을 게 없다는 뜻일까. 길에서 '자존심 긁었다'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들은 뭘까. 참, 교통사고 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던데. 요즘은 블랙박스가 있으니까 뭐.
실은, 그 영화를 보고 예전에 대판 싸우던 전남자친구 생각이 났다. 참고 참다가 임계질량을 넘어서면 톡하고 빗장이 무너지며 화가 분출한다. 나는 화나면 입이 닫히고 심장이 떨린다. 무장해제하던 관계에서 갑자기 창에 찔리는 순간. 방패를 준비못한 심장에선 피가 난다. 찔리는 쪽은 더 사랑하는 쪽이다. 애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나도 차가운 목소리로 따박따박 훈계할 수 있어. 화도 나지 않지.
온몸이 방패로 된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속은 갑각류의 속살처럼 여리기만 하다. 하지만 그 껍데기가 부서진 후에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난 이후로도 근육질과 지방만으로 된 맨 살갗으로 버텨낼 것 같다. 단지 앞으로 만나는 창들이 좀 덜 매섭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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