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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떼가 나타나 우리 마을을 점령하고 부터 사람들의 인심은 몰라보게 흉흉해졌다. 어디서건 부리를 부딪히며 먹이 다툼을 하는 비둘기를 닮아 간 것이다.
이 소설, 참 친절하다- 라고 생각한 건, 갑작스레 이야기를 끊고 소설의 인물들을 하나 둘 밖으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페이지를 맞닥뜨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생각치도 못했던 등장인물의 섬세한 소개글을 훑어 본 후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튀어나오길래 등장인물 소개까지 하나 싶었는데 소설의 끝과 마주해보니 그게 아니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작가의 마음도 눈치챘지만 읽는 독자에게 정확하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읽는 방법을, 전봇대 뒤에 서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새침데기인 척 하며 일러준다. 그래 이 소설, 끝까지 친절하다. 그리고 이러한 친절 역시 작가의 의도란다. 작가의 말에 버젓이 친절한 소설이 쓰고 싶었다는 말에 진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내 자신이 대견했을만큼 놀라웠으며 기뻣고 탄성까지 내질렀음이다. 비록 작가가 의도한대로 흘러간 내 생각들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내 생각과 작가의 의도가 일치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유유자적 날아다니고 싶을만큼 기쁘다. 에정대로였다면, 2월에 출간이 되었을 책인데 좀 늦은감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도언 작가의 이 책을 2월 부터 내내 기다려왔다. 그렇다고 내가 김도언이라는 작가를 잘 아는것도 아니다. 좀 솔직해지자면 난 겨우 김도언 작가의 소설집에 실린 단편 하나만을 읽었을뿐이다. 그런데도 왜 기다렸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이다, 정말. 기다리고 싶었을뿐이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랬기때문에 누구보다 더 먼저 읽고 싶었고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쑤시며 나와라, 나와라 주문을 걸었으며 결국엔 가장 빠르게 배송이 되는 곳에서 배송비까지 들이며 -인터공원은 신간도 배송비를 받더군- 주문을 했다. 두근 두근, 책을 받아들고는 마냥 웃음만 나왔더랬다.
소설 「꺼져라, 비둘기」는 제목 그대로 비둘기에게 점령당한 특색 없는 소읍인 토담리에 사는, 비둘기를 구워 먹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열여덟 살의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이산이라는 이름의 순박한 소년의 시선에서부터 시작한다.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 비둘기가 토담리에서는 불행의 상징이자, 이 마을에 '악'을 불러 온 근원이었다. 마을 변두리에 타이어 공장이 들어서면서, 몰려드는 비둘기는 토담리를 병들게 했으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과 평화를 쪼아먹는 흉물과도 같은것이었다. 이산의 어머니 역시 이 비둘기로 하여금 목숨을 잃었고,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으며 결국, 이 작은 소읍은 비둘기들이 싸지르는 똥으로 범벅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더럽혔다. 유해 동물로 발표 된 비둘기, 그것은 토담리의 중심이었으며 마을의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똥을 싸지르는 비둘기들로 인해 더럽혀진 옷과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세탁소 주인 박씨 아저씨와 목욕탕을 운영하는 주씨 아저씨가 작가가 배치해놓은 소설의 대표적인 '악'이다. 작당하고 비둘기에게 닭 사료를 뿌려대니 살이 찐 비둘기들은 하늘이 아닌 땅을 딛고 사는 동물이라 치부해도 모자라지 않다. 또한, 이산이 불의의 사고로 씨름을 그만두고 아버지와 새엄마가 운영하는 '비둘기네 해장국' 식당에서 일을 거들면서 이상한 알약을 매일같이 건네는 새 엄마 옥미희와 그의 아들 조만세 그리고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기도 한 오토바이 상회의 계씨네 형제가 '악'의 표본이다. 이렇게 소설의 악역을 맡은 인물들을 적고 보니 꼭 소설에서 그랬던것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와 부당하다고 소리를 지를 것 만 같다.
어떠한 사회든, 단체든 그것이 크든 작든 선과 악은 공존한다. 단지 이 사회는 '악'을 발설해도 되는 것과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나뉠뿐이고 '선'은 적당히 걸러내어진 불편함일 뿐이다. 진실이 불편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건, 위선과 오만과 패악으로 뒤틀려버린 사회의 '발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선'이란 누군가가 '선'의 지반 자체를 흔들거나 알려하지 않는 이상 발각되어지지 않는다.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소멸을 해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이런것들을 구태여 발설하지 않거나 숨기지 않는데서 집중 할 필요가 있다. 때려 죽일만큼 나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착하게 구성되어진 소설이라는 것, 그것은 시인을 꿈 꾸는 두 번째 화자인 '선'의 역할을 맡은 영민의 시선이 소설에 닿으며 확실해진다. 소설에서의 '선'은 전직 씨름 선수였지만 이산의 어머니인 아내를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이산의 아버지와 이산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몸을 의탁해 온 실래씨 그리고 첫 번째 화자였던 이산이 '악'과 대조되는 대표적인 '선'이다. 또한, 비둘기가 들어서고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워지면서 손님 없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비둘기 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을 이끄는 영만의 부모가 그들이다. 대체로 영만은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인 실래씨에게 시선을 맞춘다. '사랑' 그것은 위대했다, 라고 말해도 무방할만큼 영만은 실래에게, 실래는 또 영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라는 것을 증명키라도 하듯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선'은 '악'에게 위협당하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선' 또한 '악'을 평정하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귀신에 홀린 듯, 극악스럽고 앙칼진 이산의 새엄마, 옥미희를 받아들였던 이산 아버지의 넋 나간 외로움과 공허가 불러 온 '선'의 포효, 그래 그것은 묵묵히 숨을 고르던 '선'의 발각이었다. 소설은, 영만의 어머니가 비둘기를 잡기 위해 만든 그물을 던지며 화자들의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꺼져라, 비둘기」라는 이 소설이, 아주 소설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악'은 떠나고 '선'은 남는다는 것이다. '필요 악'으로라도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악'은 다양한 형태로 '선'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잘 지키고 있음이 사실이다. '선'과 '악'의 공존, 그것은 불변이자 진리이며 명백한 사실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드러내놓고 비판하거나 소설과 엮어 대립이라도 시켜보면 좋으련만 지식이 빈약해 더 깊이 들어서지는 못하지만, 소설은 소설다웠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바라고 희망하는 소박하고 단아한 유토피아- 그래, 나는 그저 이 소설만큼이면 충분 할 것 같다. 영롱하게 빛나던 영만의 사랑처럼, 애틋함에 타오르는 사랑을 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어 나에게 주어진 적절한 삶의 속도로 걸어가고 싶다. 다만, 그것이 한 낮의 꿈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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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대립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제시하는 김도언의 장편소설 『꺼져라, 비둘기』. 촉망받던 씨름 선수 이산과 젊은 시인 영만이 사는 토담리. 마을 사람들은 선량했고, 인정이 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이어 공장이 들어서면서 비둘기와 장사치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탐욕스럽고 무례한 그들. 힘도 돈도 빽도 없는 마을 사람들은 미약한 힘으로 그들과 맞서지만, 그들과 그들의 분신인 비둘기들은 점점 포악해지는데…. 비둘기 똥으로 얼룩진 '더러운' 세상에서 평화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기가 펼쳐진다. 소설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분위기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오히려 이 <꺼져라, 비둘기>라는 내용에 더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야기가 너무 역동성을 가지고 굽이치듯 펼쳐졌다면,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서사를 따라가느라 인물들의 생각과 인식들, 가치관 등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 <꺼져라, 비둘기>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인물들이 왜 이렇게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만약 계산을 해 넣었다면, 김도언 작가가 정말 대단하도 생각된다. 소설을 쓰다보면 사소한 이야깃거리보다도 큰 서사나 이야기에 중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런 것들을 의도했다고 하면, 독자들이 말 그대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인물들에 빠져들게 만든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마지막 결말부분이 조금은 황당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너무 급마무리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인물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싸우면 읽는 입장에서 조금은 버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했다. 이야기가 완전히 잘 여물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앞에서 말 한 것처럼 소설의 이야기를 극대화 시킨 것은 아니었나 싶다. 여백이 있으면서도 잘 짜인 소설을 만난 기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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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싫어한다 비둘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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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은 ‘불안’, ‘권태’, ‘우울’이란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해 준 작가다. 『불안의 황홀』이라는 산문집은 말할 것도 없이 소설집 『랑의 사태』에선 (위협받는 포로처럼 우울해요.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 우울해요. 한쪽 발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울해요. p.118)처럼 황홀한 우울을 전염시킨다. 그는 우울과 권태란 단어가 가진 고귀한 진심을 들려준 것이다. 그러니 신작 『꺼져라, 비둘기』를 읽으면 살짝 당황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당황함은 이내 기분 좋은 유쾌함으로 바뀌었다.
『꺼져라, 비둘기』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소설에서 비둘기는 정말 꺼져버려 마땅한 존재다. 선악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사적 견해라는 부제를 통해 비둘기는 선보다는 악에 가깝다고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작은 읍 토담리란 동네에서 비둘기로 인해 변화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반과 후반으로 나눠 두 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전반의 화자는 이산으로 고교 씨름 선수였는데 시합 중 사고로 씨름을 그만두고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도와준다. 그는 사고 후 ‘서번트 증후군’을 앓게 된다. 후반의 화자는 시인 영만으로 그는 이산에게 멘토 같은 존재이다.
이산의 부모님은 토담집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토담집은 비둘기 해장국집으로 바뀐다. 토담리는 평범한 동네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비둘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많은 비둘기가 등장하고 근처에 타이어 공장이 생기면서 외부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선과 악의 두 부류로 나눠진다. 비둘기로 인해 이익을 보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이다. 비둘기가 많아지면서 어디서나 비둘기 똥이 가득하다. 낮게 날아다니며 노약자를 위협하고 노점상인이 늘어 놓은 물건에 똥을 싼다. 하여 노인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노점상은 사라졌다. 대신 목욕탕과 세탁소는 장사가 잘 되는 것이다. 여기에 오토바이 가게가 들어오면서 마을은 오토바이 천국이 되어 버렸다. 짐작했듯 오토바이 주인 역시 악의 집단에 속한다.
‘비둘기 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을 이끄는 한의사 고붕 내외와 시인인 그의 아들 영만과 세탁소, 목욕탕, 오토바이 가게를 제외한 꽃집이나 자전거 가제 주인은 선의 집단이다. 그렇다면 이산의 가족은 어떠할까? 이산과 친척 누나 실래는 약자이며 선이고, 경제권을 쥐고 이익만을 추구하며 아버지를 농락하는 새엄마와 실래를 괴롭히는 그의 아들 만세는 악이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격을 지닌 전직 씨름선수인 이산의 아버지는 모호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은 그 자체로 소설의 중심이며 소설의 전부라 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과 사고나 선과 악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은 악에 비해 대부분 늙고 약자이다. 작은 무리의 선은 악을 이겨낸다. 대표적으로 불량한 만세로부터 실래를 보호하는 영만이 그러하다.
특이한 점은 전반과 후반이 끝나며 등장하는 소설가이다. 소설가와 등장인물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역할이나 소설의 흐름에 대해 말한다. 『꺼져라, 비둘기』는 사건의 구성이나 발단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입장은 모두 다르다. 이런 소설을 쓰게 된 소설가의 진심을 듣는 시간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소설 속에서는 시도 들어갈 수 있고 사진이나 악보도 들어갈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소설은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간 시마저도 빨아들일 수 있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소설이 빨아들이는 것들 중에는 유의미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것도 있다는 거예요.’ p. 135
소설 속에서 선은 악을 이긴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악을 이기는 게 선이며 결국엔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올 꺼라 우리는 믿고 싶은 건 아닐까. 선과 악은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선은 정말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지녔는가 묻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아니, 소설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독자가 그 답을 해주길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가 말의 운명에 대해 쓴 글에서 말 대신 선과 악을 넣어 읽어 보았다. 선과 악은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 생각한다. 정의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어떤 말이든, 그것의 운명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나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 사이의 긴장에서 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p. 47
‘정의는,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악이 그런 것처럼 선도 지식의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이 먼저 가서 상대의 눈과 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그 높이는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 그냥 딱 들어맞는 것이다.’ p.248
선과 악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놓고 보면 심오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지극히 맑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소설이다. 바로 영만의 역할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나란히 길을 걸을 것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며 별을 함께 바라볼 것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함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만의 길을 만들 것이다. 이 길의 초입에, 삶이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삶을 비겁으로 내몰지 않는 바르고 착한 이들을 초대하기 위한 불을 켜둘 것이다.’ p. 196
소설에 흐르는 아름다운 글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사랑에 대한 시)읽는 건 정말 황홀하다. 작가 김도언은 시인을 통해 그의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내게로 전해진 기분 좋은 즐거움을 많은 이가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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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을 나쁘다 하고, 좋은 사람을 좋다고 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틀리다 하고, 올바른 사람을 본받자고 말하는 소설, 그러니까 이처럼 너무 뻔한 이야기를 그렇게 뻔하게 쓰고 싶다는 소설가의 욕망이 반영된 소설이다. 이분법적인 구분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세상을 향하여, 그렇다고 해도 구분되어야 할 것들은 분명히 구분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과도한 혼돈의 세상에서 소설이 그 혼돈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친절을 발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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