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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블루와 먹색의 표지를 거쳐 펼치자 보여진 작가의 이력은 너무 대단해 시샘을 불러올 정도였다 (사진의 배경색깔도 코발트 불루, 물색, 화이트 느낌이라 어느덧 아직 오기 먼 여름이지만 시리게 느껴졌다. 아, 봄인데 왜 이리 추운거야~). 작가, 싱어송라이터 가수, 시인, 영화배우, 애니메이션 음악담당 등. 글쎄, 일종의 트렌드가 만들어낸 반짝 스타가 아닐까도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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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고지마 그리고 '나'! 대왕고래를 닮은 커다란 고래 등 위에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소년 소녀. 상처를 보듬듯 소년의 얼굴을 향하는 소녀의 손, 수줍은듯 아래로 내린 고개는 순수함 그 자체이다. 너무나 예쁜 표지를 가진, 제목조차 환상적인 <헤븐>이란 책 한권이 앞에 놓여있다. 문득 아이들의 예쁜 성장소설이 아닐까 기대를 해보며 손 자욱을 낸 그 속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교복을 입은 두 소년 소녀의 그림속 간격! 그 거리의 의미는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우리는 같은 편이야!' '나'의 표현에 의하면 흐릿하고 작은 생선 뼈 같은 글씨로 쓰여진 종이가 필통속에 보인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은 다른 눈, 사시로 표현되는 눈 때문에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중학생이다. 그런 나에게 던져진 이 작은 쪽지의 주인공은 바로 왕따의 폭력에 시달리는 같은 반 소녀 '고지마'였다. 고지마 역시 다른 이유로(지저분하고 더럽다) 여자 아이들에게 외면받고 폭력에 희생당하는 소녀였다. 왕따로 맺어진 이 소년 소녀의 인연과 안타까운 따돌림의 모습들이 순수함속에 더러움처럼 대비되듯 솔직하고 무섭도록 섬세하게 그려진다.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니노미야가 중심이 된 패거리들이다.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잘생겨서 언제나 주변에는 아이들이 북적이고 선생님들조차 그 아이를 인정한다. 니노미야 패거리들은 '나'를 사팔뜨기라고 놀리며 분필을 먹게 하고, 온갖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고지마 역시 냄새나고 더럽다는 이유로 갖은 따돌림에 시달리는데... 그런 소녀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작은 쪽지를 시작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하게 된 '나'와 '고지마'는 그렇게 친구!가 되어간다.
외로움에 지친 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듯,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따스한 우정을 키워나간다. '나'는 아이들과 다른, 아니 차이가 나는 '눈'으로, 고지마는 아이들과 다른 '그것?'으로 연결되어 그들만의 비밀을 키워나간다. 방학을 맞아 '헤븐'이란 그림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 몰래 편지와 대화를 주고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 들켜 더 큰 폭력과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 그렇게 지켜오던 그들의 비밀과 우정은 어느 한 순간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다. 따돌림이라는 소재를, 작가는 눈을 돌려야 할 정도로 가슴 아프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상처를 주고 받는 아이들의 심리 또한 순수함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도록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처입은 그 소년 소녀에게 '헤븐'은 존재할까?
'이지메', '따돌림', '왕따',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GO'에서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따돌림에 대한 이야기가, 미나토 가나에의 미스터리 '고백'에서도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보이지 않는 따돌림이, 그리고 하야시 미키의 '미안해, 스이카'에서도 장난처럼 시작된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이 가져온 충격적인 이야기가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왕따, 따돌림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이로 인한 아이들의 정신적 피해와 자살로 이어지는 폭력들이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복을 찢어 알몸을 찍은 동영상을 유포하고, 잔혹한 폭력에 상상하기 힘든 치욕까지 서슴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폭력에 희생된 아이들은 어린시절의 이런 상처를 안고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이들의 경우 피해자, 가해자 모두 상처를 안고,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두드러진다.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갖게된 아이들, 자신들의 이런 잘못조차 대수롭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아이들... 모두가 이 사회의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연인들한테는 말이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어. 아주 슬픈 일이 있었거든. 굉장히. 그렇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은 최고의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어다는, 그런 이야기야. 둘이 극복하고 도달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방이 사실은 헤븐인거야.' - P. 62 -
'헤븐'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고지마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찬 소녀의 바램이 온전히 유지되고 이루어질 수 있을지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제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된 입장에서 이런 상처를 가진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그리고 아이들이 앞으로는 이런 아픔에 노출되지 않게 하려면 어떤 노력들을 해야할지, 그들의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져 주어야할지 걱정스럽다. 아프지 않고,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어른들이 해야될 일은 무엇일까? 어디에서부터 무엇부터 만들어 가야할까?
'사람은 결국 '사랑'을 위해서 태어나는 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언젠가 그 사랑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 '미안해, 스이카'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에 사랑받지 않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지금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가 올것이고, 언젠가 누군가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가장 급선무일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 사랑스럽지 않은 아들, 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반대편에선 '너'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어른들의 불신과 우리 사회의 잘못된 시선과 물질 만능 풍조 또한 아이들의 눈과 행동속에 고스란히 비쳐진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상처와 아픔이 없는 '헤븐'을 선물하는 일, 이 작품을 통해 그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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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당시 샤갈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벨라와 결혼했고 그 기쁨 때문인지 계속해서 결혼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내어놓고 있었다. 이 그림은 당시는 연인 관계였던 벨라가 샤갈의 생일날 서프라이즈를 위해 찾아갔을 때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 연인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뜻하지 않은 연인의 축하를 받은 샤갈은 그야말로 더 높이 붕붕 떠다닌다.
이 그림을 두고 고지마는 이렇게 말한다.
그 연인들에게는 말이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어. 아주 슬픈 일이 있었거든. 굉장히. 그렇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은 최고의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야. 둘이 극복하고 도달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방이 사실은 헤븐인거야. (P.62)
진짜 그림이 어떻게 해서 그려졌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고지마는 자기식대로 그림을 해석한다. 그녀가 이러는 것은 이 그림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공해'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등으로 발길질마저 예사로 당하는 등, 온갖 괴롭힘을 다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고통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이겨나가면 언젠가는 저 그림 처럼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그림 '헤븐'은 고지마에게 고통의 이유이자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고지마와 같이 그림을 보고 있는 주인공 역시도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날마다 뒤통수를 세게 맞거나 학교를 결석하기만 해도 책상 서랍이 오물로 가득찬다거나 분필을 억지로 삼키거나 걸레를 입에 물거나 청소도구함에 갇히거나 하는 온갖 괴롭힘을 날마다 당하고 있다. 주인공 역시도 고지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고지마와는 달리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어서 이 모든 괴롭힘들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고지마와 주인공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은 바로 고통의 원인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고통을 당하는 건 태어날 때 부터 사시였기 때문이다. 즉, 그건 자기와 상관없이 주어진 제약 때문에 받게 된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지마는 엄마가 버린 아빠를 잊지 않으려고 초라하고 궁색하게 사는 아빠의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즉 고지마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차이, 즉 고통의 원인이 외부로 부터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초래한 것인지의 차이에 따라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소설 '헤븐'은 그렇게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러한 소설의 모습이 그리 생경한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 인간들은 주어진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다. 아마도 그것이 잘 드러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의 '욥기'라 할 것이다. '욥기'는 그야말로 이유없이 주어지는 고통에 대해 그 까닭을 알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중세 이후로 고통은 철학과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사유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었던 중세인들에게 고통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고통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니 '악'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주재하지는 이 세계에 그런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요한 의문이었다. 성경에서도 중세인들에게서도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도 고통은 세상의 주권자라는 하나님과 어긋나는 모순된 존재였다. 그래서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고통의 존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일련의 흐름들을 '변신론'이라고 불렀다. 즉, 고통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변호하는 논의들이라는 것이다.
변신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둘 있는데 하나는 라이프니츠고 다른 하나는 칸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또 소설 속의 주인공과 고지마의 입장과도 겹친다. 라이프니츠는 고통은 이 세상이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고통은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 따르는 잔여이고 오히려 고통이 없다면 존재는 제대로 존재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그저 현상되는 고통을 긍정하고 그저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과 유사하다. 이에 반해 칸트는 '요청론'을 끌어들인다. 즉 우리가 고통의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견디면 언젠가는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는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의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통 끝에 도달하는 천국을 그것에 보상을 주는 신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그림 '헤븐'을 보며 보상의 희망 속에 고통을 인내하는 고지마와 겹친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은 유신론이라는 가정하에서 내려진 것이다. 신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고통 역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내려진 견해들이다. 그렇다면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무신론이라면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는 무신론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무신론 아래에선 모든 사물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도 그 어떤 의도도 이유도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고통 역시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당하는 존재는 하필이면 그 공간 그 시간에 우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과 겹친다. 우리는 이 무신론적 입장을 바로 '모모세'에게서 보게 될 것이다.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모세에게 주인공은 왜 자기를 그토록 괴롭히냐고? 그러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모모세는 주인공이 당하는 고통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물론 양심의 가책 또한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고지마로 부터 고양되었던 고통에 대한 의미에 대해 기울어져 있는 주인공은 모모세에게 그야말로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면 그 때 주인공은 인간 축구공이 되어 무수한 발길질을 당하는 학대를 경험한 후 그 인내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이상 무의미하게 쏟아지는 폭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한 편 이 모든 고통에 이유가 있다는 고지마를 믿고 싶어했다. 그건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을 만큼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모모세는 그 모든 게 다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하게 고지마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그는 정확히 모모세의 세계와 고지마의 세계 중간에 있게 된다.
우연한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소설은 고통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입장을 한 인물에 대입하여 하나하나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적 형상화'를 통해서 우리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들을 좀 더 가깝게 살펴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는...
주인공과 고지마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점 뿐만아니고 그 가족관계마저 어쩐지 유사하다. 주인공은 엄마가 없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 새엄마다. 한 편 고지마는 아빠가 새아빠다. 둘 다 어느 한 쪽이 부재한다. 이에 더하여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얼마든지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후에 사시가 수술 가능한 것임을 알고 놀란다. 그것도 너무도 손쉽게. 고지마는 언제든지 스스로 몸을 씻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 고통이 숙명적이 아니라는 것이 똑같다. 이 둘의 이러한 비슷함은 가와카미 미에코가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입장과는 또달리 고통을 대하는 어떤 자세 같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둘은 아주 비슷한데도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만큼은 또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껴안으려 하지만 주인공은 어떡하든 그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그 둘의 관계는 눈 수술로 파국을 맞는다. 고지마와 주인공이 마지막 만나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고지마는 주인공에게 고통을 당하는 의미에 말하면서 사실은 그들이 주인공과 고지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옳았음을 스스로 주인공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지메란 다름이 아니라 무리에 들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폭력이라는 걸 이 장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결국 고지마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괴물이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못한다. 고지마 처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이지메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애초에는 포기했던 가능성이 조금 빛을 발하자마자 얼른 그것을 부여잡는다. 그렇게 그에겐 오로지 회피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와카미 미에코가 손을 들어주는 것은 '모모세'쪽이다. 그토록 무겁게 고통을 천착해왔던 것과는 달리 결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낙관적으로 끝맺는다. 주인공은 눈수술을 감행했고 결국 제대로 된 시야로 보는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수술 전 의사와의 상담에서 의사는 수술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냥 조금 바꾸는 정도로 생각하라고. 사실 주인공은 그 전에도 수술을 받았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돌팔이가 그 수술을 맡았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돌팔이의 말로 더이상의 수술을 불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계속 고통의 굴레를 둘러써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만일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났더라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거라고... 이런 생각은 모든 건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며 고통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모모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니 가볍게 생각하라고. 모든 건 언제든지 변한다. 내일엔 내일의 바람이 부니까... 이런 속삭임이 저절로 들려오는 듯한 이 소설의 결말은 어쩌면 가와카미 미에코가 그래도 어떤 희망적인 것을 가지게 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지 싶다.
하지만 그 눈부신 세상 속 어딘가 고지마가 분명 존재한다. 아빠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통의 굴레를 둘러쓰고 살아가는 존재가. 생각해보면 주인공에게 '사시'의 존재도 그랬다. 그것은 엄마로 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가 눈수술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엄마와 단절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지마는 아빠를 간직하기 위해 고통을 껴안았지만 주인공은 엄마와 단절하면서까지 고통을 회피했다. 고집스럽게 껴안으려는 자와 바람처럼 가볍게 떠나버리는 자가, 절대로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고지마의 고집과 별로 정든 사이도 아니지만 새엄마 곁에 있으려는 변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뚜렷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걸 '고집과 변화의 문제'로 풀어 변화를 택하는 쪽으로 조금은 성급하게 결론내린 것 같지만 과연 그런 정도로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고지마의 존재다. 그 눈부시도록 환한 세상에 끝끝내 하나의 검은 얼룩으로 남으려는 고지마의 존재다. 이걸 어떻게 대해야할까? 끝없이 우리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존재를 어떻게 붙들어야할까? 여전히 그렇게 책을 덮은 후에도 의문은 계속된다. 지금도 그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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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없던 “왕따 문제”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인해 일본의 “이지메(イジメ; 괴롭힘)” 문화가 우리나라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당시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도 분명 “왕따”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다만 지금과는 정도가 차이가 있고 - 물론 당시 괴롭힘을 당했던 아이들이 느꼈을 상처와 아픔은 지금과 다르지 않겠지만 -, 그 당시에는 그런 괴롭힘을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겪는 일종의 “성장통(成長痛)”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지금과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런데 2009년 기준 15~24세 청소년들의 사망원인 1위가 바로 “자살”- 2011.5.3. 통계청 자료 <2011 청소년 통계> - 이라고 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왕따로 인해 자살한 청소년들 기사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이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보니 왕따를 소재로 한 국내 소설들도 여럿 만나볼 수 있는데, 특히 왕따의 원조격인 이웃 일본에서는 조금만 둘러보면 소설 뿐 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 참 다양한 장르로 만나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가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의 <헤븐(원제 Heaven/비채/2011년 4월)>도 바로 이런 “이지메”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다만 기존 이지메 소재 소설들이 피해자의 상처와 아픔만을 강조했다면 이 책은 가해자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남들과 다른 눈(사시(斜視)) 때문에 아이들에게 상습적으로 집단 괴롭힘(이지메)을 당하는 중학교 2학년생인 “나”에게 4월이 끝나가는 어느날 “우리는 같은 편이야”라는 쪽지를 받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의 못된 장난으로 밖에 생각이 안되어 무시해버리지만 편지는 계속되고, 5월 접어들어 만나자는 편지에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나는 편지에서 일러준 약속 장소로 나가게 된다. 약속 장소에 나와 있던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니노미야” 패거리가 아니라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불결하다고 해서 괴롭힘을 당하던 같은 반 여학생인 “고지마”였다.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한 둘은 계속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고즈미의 편지들은 갈수록 심해지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의 괴롭힘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위안거리가 된다. 고지마는 “나”의 “사시”에 대해 “있잖아 나는 네 눈이 참 좋아”라고 말하며 아이들이 “나”의 눈이 기분 나쁘다느니 뭐니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무서워 그런 거라고 이야기한다. 둘의 우정은 계속되지만 괴롭힘은 더욱 계속되고, 급기야 인간 축구 놀이라고 해서 축구공 가죽을 머리에 씌우고 구타당해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던 나는 의사에게서 천형(天刑)처럼 여겨온 사시가 쉽게 교정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런 말이 고지마 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어 버린다. 오랜만에 만나자는 고지마의 편지를 받고 처음 만난 장소인 “고래 공원”에 달려 나간 “나”, 그곳에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이 고지마를 둘러싼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고지마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에게 옷 벗김과 성행위를 강요당하기에까지 이르게 되고, 망설이고만 있는 나 대신 고지마가 패거리들에게 달려든다.
작가의 실제 경험담이었을지 아님 취재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잔인한 이지메 장면들과 어린 소년 소녀들의 사실적인 심리 묘사 장면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했던 책이다. 둘 다 이지메의 이유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 - “나”의 사시는 간단하게 교정될 수 있으며, 고지마의 더러움도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이혼하고 가난하게 사는 아버지 때문에 일부러 씻지 않는, 일종의 “의리”라고 볼 수 있다 - 임에도, 그리고 괴롭힘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듯한 두 소년 소녀의 태도가 영 마땅치가 않다. 특히 고지마가 “나”에게
“너도 나도 약하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는 게 아니야. 녀석들이 하라는 대로 그냥 복종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냥 복종하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우리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강한가 약한가 하는 기준으로 말한다면, 그건 오히려 강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야.”
라는 말처럼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그냥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이해하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살아남기 위한 서글픈 생존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두 아이의 생각이 왠지 처량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또한 병원에 치료하기 위해 갔다가 마주친 “니노미야” 패거리의 “모모세”와의 대화는 이지메 가해자의 변(辯)이라 할 수 있는데 괴롭힘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 “나”는 “사시”가 괴롭힘의 원인으로 여겨왔었다 -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나”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양심의 가책 은 전혀 받지 않는다는 모모세의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잖아? 하고 싶으면 하면 돼. 아무도 너를 제지할, 그야말로 권리 같은 것은 안 갖고 있어. 그렇지만 문제는 말이야, 그런 비유가 아니고, 왜 너는 죽일 동기라든가 타이밍이 충분히 있는데도 지금 우리 중에 누구라도, 나라도 상관없지만, 죽이지 않는가 하는 것 아닐까? (중략) “왜 너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을까? 왜 못할까? 문제는 그거야. 왜 너는 우리를 부엌칼이나 뭔가로 찌르지 않을까? 막상 하면 예상 외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왜 너는 그것을 못할까? 잡히는 게 무서워서? 그렇지만 우리는 14세 미만이니까 처벌을 안 받거든. 소년원에는 가겠지만.”(중략) “하면 죄책감이 생기니까? 그럼 왜 너는 죄책감이 생기고 나는 안 생길까? 어느 쪽이 제대로 된 걸까?” “이 세상은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괴롭히는 것이고 괴롭힘의 대상인 “나”는 저항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 이것이 지금 이지메 문제의 진정한 원인일까?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니, 그저 즉흥적인 답변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곰곰이 생각한 흔적까지 엿볼 수 있는, 14세 소년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 말에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극단까지 치달은 이지메가 고지마의 저항으로 일단락되고, 주인공도 사시 교정 수술을 받아 더 이상 놀림을 당하지 않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만 그 해피엔딩이 결코 행복하지 않은 “슬픔”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가. 그런 괴롭힘이 정말 이유 없는 그런 것이라면 괴롭힘에 저항했다고 해서, 놀림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눈을 교정했다고 해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현재진행형(ing)이 될 것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따문제”를 제3자의 동정이 아니라 당사자인 가해자와 피해자, 둘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 다는 것을 일깨워준 소설이었다. 나에게는 지극히 불편했던 이야기였긴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라는 어느 일본 중학생의 독후감처럼 이지메를 당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작품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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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온갖 폭력과 착취, 조롱 속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 우리는 왕따라는 결코 아름답지 못한 단어가 너무나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빵 셔틀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고, 대장점퍼라는 해괴한 단어마저 익숙한 지금, 과연 아이들은 어떤 삶을 학교에서, 가정에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어른들이 말하는 우정과 정의와 질서, 상식이라는 것들이 모두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까요. 해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개미지옥과 같은 입시제도 하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착취하고, 갉아먹다 결국 모조리 소진되어, 그렇게 삶을 마칩니다. 과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지옥 같은 삶을 견뎌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온전히 우리의 학교, 우리의 아이들과 겹쳐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욱 더 잔혹하게 와 닿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이것이 이제야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자, 어른들은 또 다시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그렇게 끝내 진실은 외면한 채 아이들에게 ‘폭력 없는 학교’‘폭력 없는 교실’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모조리 낙선했을 인간들이 국회의원이란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한, 입시지옥과 무한경쟁이라는 포악한 살상무기를 집어치우지 않는 이상, 아이들에게 폭력 없는 교실은 꿈일 뿐입니다. 일본의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이 과연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포악하고 악랄한 이들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교육제도와 시스템, 사회에 만연해 있는 천박한 경쟁의식과 약육강식의 논리, 돈이나 통계, 치수가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린 이 더러운 시스템 자체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지 않을까요. 정부는 떠듭니다. 교육청도 떠듭니다. 경찰도 떠듭니다. 하지만 떠들기만 합니다.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건방지게 굽니다. 오직 신고하랍니다. 친구들이 간첩입니까. 테러리스트입니까. 강한 처벌만이 답이랍니다. 이런 말들을 지껄이는 어른들을 보면 아이들은 뭐라고 할까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스펙을 자랑하는 한국 청년들. 그러나 취업할 곳은 없고, 유혹은 많습니다. 등록금은 살인적인데, 취업은 대량학살 정도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하루하루 고통과 불안 속에 생계를 꾸려야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을 뜯어고치지 못하고 무슨 얼어죽을 폭력 없는 행복한 학교란 말입니까. 애초에 학교라는 시스템이 권력의 수월한 통제와 훈육, 세뇌를 위한 것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은 분명 그 이상의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서로 죽여 없애야 할 적으로 규정해 버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끔찍한 왕따와 폭력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서로 힘이 되어 준 두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의 감수성과 따뜻함이 눈물겹습니다. 또한 포기하지 않음이 애절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 저자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단 한 숨에 읽어 내려간 책. 하지만 여전히 무겁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이들에게 진정한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아이들 모두의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하루를 생각해보며 정책을 펼치길 바랍니다. 적어도 내 자식에겐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적용해보길 바랍니다. 최근 교육 쪽의 공무원들을 상대한 적이 있습니다. 한심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일선의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드실까 절절히 느꼈습니다. 아무리 단체의 수장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면 뭐합니까. 그 아래 철밥통이 그대로인데. 그들에게 주는 세금이 아깝고 아까울 따름입니다. 어서 어서 그들의 정년이 오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해 말이죠. 학교 폭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이 땅의 교육자들을, 교육 공무원들을, 정책 담당자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었습니다. 우울합니다. 이 땅의 공무원들이 참 우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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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쁘게 달려오면서 소설책을 읽는 재미를 느껴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내가 다시 '소설'책을 손에 들었고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읽어 내려간 책, 바로 '헤븐'이다. 제목을 봐서는 뭔가 예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들려질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은 이 시대 사회문제 중 하나인 "왕따"문화에 대해서 각성을 촉구하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절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저자는 아주 자세한 '폭력행위 묘사'도 서슴치않았다. 혹 어떤 독자는 이런 여과없는 왕따 학생이 당하는 '폭력'묘사가 거북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메세지를 전하는 소설로서 나는 오히려 이런 저자의 의도가 이 책의 가치를 더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사팔뜨기다. 그리고 "같은 편"이라는 작은 편지를 시작으로 주인공과 우정을 나누는 또 한 명의 "왕따"친구 고지마가 등장한다. 주인공 '나'는 니노미야 패거리에게 '사팔뜨기'라는 이유로 심한 폭력과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다. 예를 들어, 니노미야 패거리는 주인공 '나'에게 분필을 먹게 하고 머리에 배구공을 씌우고 인간축구놀이를 하고 급기야 고지마와의 우정을 눈치챈 후에는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하라며 옷을 벗기기까지 한다. 고지마는 불쌍해서 아빠와 결혼했다는 엄마가 끝까지 아빠를 불쌍하게 생각지 않고 이혼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빠와 헤어져 재혼한 엄마와 함께 살면서도 항상 고된 노동으로 지저분하고 땀냄새가 났던 초라한 아빠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도 씻지 않고 빗자루 같은 머리카락과 때타서 새까만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결국 냄새나는 고지마도 친구들에게 "왕따"와 폭력을 당한다. "과연 정말 중학생밖에 안된 아이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서 저렇게 했을까? 이런 일이 지금 우리 사회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진실이란 말인가...?" 가히 충격적인 "왕따"문화의 현실을 다시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니노미야 패거리 중의 한 명인 모모세라는 아이가 하는 말은 더 큰 심각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단지 기분에 따라서 약자인 '희생양'을 정해 아무런 도덕적, 윤리적 죄의식 없이 그런 비인격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 모모세의 자기합리화 논리에 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바닥까지 드러내보이는 인격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고통 속에서 철이 너무 빨리 들어버린 것일까... 중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성숙한 이들의 존재의미를 찾아나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 그 애들은 말이야, 반의 모두는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자기들이 하고 있는 짓의 의미를 모르는 거야." (p 96) "언젠가 전부 알게 될 때가 올 거야. 그 애들고 틀림없이 깨달을 때가 올 거야. 언젠가, 절대로 모든 것이 제대로 될 때가 온다고." (p99) "...그리고 그렇게 이 약함으로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강함이거든. 이것은 그 애들이랑 우리랑 아빠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약한 것,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함을 위한 의식인 거야. 학대받고 괴롭힘당해도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거든." (p192)
주인공 '나'는 수술을 통해 사팔뜨기가 아닌 정상적인 눈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신세계에 감동한다. 이제는 정확히 양쪽 눈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주인공 '나'가 새로운 세상 속에서 멋진 새출발을 할 수 있었기를 소망해본다.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그 큰 고통의 무게를 감당했던 주인공 '나' 와 고지마의 바람대로 이제는 우리가 변해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냥 철부지 시절 아이들의 실수라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다름에 대한 이해"가 뿌리내린 문화와 "서로 돕고 약자에 대해 배려할 줄 하는 인성교육"이 미래를 책임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시급히 필요한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점에서 한 번쯤 읽어볼만한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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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인 따돌림때문에 고통을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사회문제화된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않는것 같다. 만성적인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해서 범죄로 이어지는 일 또한 심심잖게 오르내리지만 현장에서의 상황은 그리 돌파구가 보이지않는것 같다. 누가 왜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드는것인지 궁금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다름'이 따돌림의 원인이라고 믿던 나의 믿음이 흔들리면서 위태로운 상황을 함께 헤쳐가던 고지마와의 우정 또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남들과 다른 눈인 사시때문에 니노미야패거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수시로 폭력에 노출된채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던 나에게 어느날 한통의 쪽지가 건네진다. 또다른 장난질일까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달려간 그곳엔 나와 같은 따돌림을 당하는 여자아이 고지마가 있었다. 진짜로 내가 나올줄을 몰랐었다고 하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못하고 그저 반아이들의 폭력을 무방비로 받아내던 우리에게는 위안을 얻을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교실에서 따로 아는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고지마와의 편지교환을 통해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조금씩 볼 수도 있었고 약간은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한켠으로는 고지마앞에서 니노미야패거리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을 보이기도 싫었고 반여자아이들이 고지마에게 함부로 하는 행동을 제지하지못하는것도 싫었다.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약하기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지마는 오히려 강한자만이 지금의 상황을 견딜수 있는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를 수시로 괴롭히는 아이들은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고 있다며 언젠가는 그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배우고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면 니노미야패거리들이 나를 괴롭히지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잠깐 갖기도 했지만 변한것은 없었다. 여전히 똑같은 상황. 이번에는 폭력이 많이 지나쳐서 병원에 가게된 나는 그곳에서 니노미야의 패거리중 한명인 모모세에게 왜 이런일을 벌이는지 물어보게 된다. 충격적인 사실은 내눈인 사시인것과 그들이 나를 괴롭히는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것, 그들은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어했고 그때 내가 거기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시를 고칠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변화려고 하지만 고지마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못한다. 같은 한편이었던 우리는 이제는 더이상 무리가 아니다. 그런 나와 고지마에게 니노미야패거리들은 다른 형식의 괴롭힘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오랜시간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학교를 벗어날 생각도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못한다. 아주 가끔은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생각뿐일뿐 매일같이 그 고통스런 일들을 그저 견디며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랄뿐이다. 그런 나에 비해서 고지마는 같은 상황을 겪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지키기위해 더러움을 택했던 고지마는 최악의 순간에 니노미야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였을때 내가 선택한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지킨다. 고지마가 말했던 강함이 무엇인지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들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엄마에게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할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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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단 따돌림을 왕따로도 많은 사람들이 불리는 애기들을 알고 있다.
사실 왕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 본다.
오랜도록 우리 인류가 살아 오는 과정에서 비숫한
흔히 볼수 있는 상황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지, 요즘들어 언론 매체를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이슈화 되어서 부각 되는것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와 동떨이지 않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라는 생각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20년도 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도 비슷하게 보아 왔던 모습 이었다.
오래전에 내가 보았던 모습들을 떠 올리게도 하였다.
초등학교 어린시절 아랫동네에 나 보다 한 살 많은 사시를 가진 남자아이,
또,고등학교때 힘없는 순한 친구를 패거리들이 아무 이유 없이 괘롭히고 때리는 모습,
그리고 어느날 같은 학교 7명의 학생들이 지나가는 어느 여학생을 산으로 끌고가서
강제로 성폭행하다가 이를 본 동네 어른의 신고로 다 경찰서에 잡혀가 벌 받은 애기
그때 그중의 한명의 어머니가 남자 담임선생을 만나서 퇴학만을 면할수 있게 해달라며
사정하면서 선생님을 어이 없게 한 말이 우리 아들은 옷 만 벗겼어요라고 했다 한다.
선생님이 어이가 없었던듯 ,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또 어느날 학교 뒤편에서 우리는 남학교 이지만 어느 학교인지 모르는 여학생들 20여명이
2명의 여학생을 둘러싸고 돌아가며 그들을 폭핵하는걸 보고 힘좀 쓰는 남자애들이 몰려가서
2명의 여학생을 구해주고, 여학생 무리들을 해산시키며 쫒아버렸던 모습들도 생각난다.
그런일들이 그때 그시절만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지금 껏 다른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왕따는 어디서든 보이지 않는곳과 보이는 곳에서도 일어나는 사건들이었다.
이와는 다르게 볼수 있다고 하지만 대학 신입생들을 군기 잡는다고
못먹는 술을 먹이고, 얼차레를 가하고, 몽둥이로 때리고 해서 그들중의 어느 누가
죽게 되면 서슴지 않고 뉴스로 전국에 퍼지고, 얼마동안은 이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다가 또 사건이 발생하면 이슈가 되고,
이런일들이 언제까지 사회적 모습으로 남겨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책은 사시를 가지고 있고,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를 중심으로
그의 심리적인 상태와 갈등의 모습들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고,
그와 같은 왕따가 되어있는 같은 반 친구인 고지마라는 여 학생이 있고,
집단따돌림의 우두머리 니노미야와 모모세와 일당들이 있었다.
이야기는 주로 주인공인 나와 고지미와의 관계관계 설정을 중심으로 이야기 되고,
그중에서 병원에서 부딪치는 주인공인 나와 모모세의
대화 내용에서 핵심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다.
"우연"이 그 자리에 있었고, 재수없게 걸려서 왕따가 되버리고,
약하기 때문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집단 따돌림을 가하는자들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듯
모모세와의 대화 내용에는 우리가 생각해 볼수 있는
이책의 중심 내용이 압축 되어 있다고 생각도 든다.
또 고교 시절에 같은 학교 내에서도 집단싸움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왜 싸울까?
집단 패거리중에 하나가 그런말을 한적이 있다. 소리도 손벽이 마주쳐야 나듯,
싸움도 서로간에 맞아야 한다며, 그들 나름의 서열을 위한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공부하는 학교에서 그게 무슨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거기엔
어른들의 사회 모습의 단면을 볼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생각 된다.
여러 가지로 이책은 올바른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들이 단면을 보여주고,
최후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그들과
많은 시련과 고통과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삶의 방향을 모색하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픈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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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경을 벗고 눈을 문댄 다음 가로수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깊이가 없는 평평한 풍경이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하듯이 눈앞의 경치를 그림연극의 그림처럼 네모나게 오려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 장씩 넘겨서 발치에 버렸다. -p.12
어린 아이는 천사같지만ㅡ물론 미울 때도 있다ㅡ, 조금 더 자란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상당히 악의적이다(물론 이것이 10대 후반까지 그리고 계속 이어지기도 한다.). 따돌림 등의 학교 폭력의 큰 이유 중 하나는, 따돌림 당하는 학생에게 문제가 있다는 원인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조금 다르다는 이유, 더럽다는 이유다. 그 조금 '다른' 아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나의 초등학교 시절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따돌림을 당할 이유가, 아이들에게 악의적인 언어 폭력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아이가 괜히 '거지'랍시고 고립되고 외면당했다. (이것도 참 놀랍다. 어찌 그렇게 쉽게 '거지'라고 불러댔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몸서리쳐질 정도로 부끄럽다.) 어쩌다 그 아이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면 그것에 대해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아이들은 잘못한다는 죄책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그저 그렇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 피해자는 그 폭력을 그저 묵묵히 감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왜 반박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와카미 미에코의 <헤븐>은 그 따돌림의, 그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를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남들과 다른 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악의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나'. 모두들 그를 사팔뜨기라 부르고, 학급 내의 세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니노미야 패거리 덕분에 일상적이고 빈번하게 린치는 기본, 더러운 연못물을 마시고 분필을 억지로 먹으며 걸레를 입에 문 채 청소도구함에 갇힌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지가 담긴 쪽지를 받는다. '우리는 같은 편이야'ㅡ그렇게 계속 보내오는 쪽지에 '나'는 일상에 활력을 어느정도 되찾고, 드디어 그 편지의 주인공을 만난다. 편지를 보낸 이는 고지마라는 여학생으로, 그녀 역시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여학생이다. 같은 처지의 '나'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 '나'에게 희망을 전하기 시작한다.
너도 나도 약하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는 게 아니야. 녀석들이 하라는 대로 그냥 복종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냥 복종하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우리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강한가 약한가 하는 기준으로 말한다면, 그건 오히려 강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야. -p.136
초등학교 5학년 쯤이었나, 본격적으로 '왕따'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이러한 집단 따돌림이 사회적으로 문제로 지적되어 조명(?)을 받기 시작했었다. 그 때 아마 왕따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도 쏟아져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없는 시절, 그냥 그렇게 문제가 되는구나..라고만 생각했지 따돌림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려하지도, 공감해보려 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그 때 대수롭지도 않은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아이들의 적개심과 폭력을 감당한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처음에 나를 사로잡은 '죽고 싶다'는 마음은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그런 감정이었다. (중략) 그렇게 살아갈 꿈 속 같은 세상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하고 어떻게 다른지는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p.154
슬펐다. 사시라는 이유로 폭력에 시달리는 '나'. 떨어져 살고 있는 아버지를,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했던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스러 더러워지는 것을 선택했던 고지마. 잔인한 아이들의 폭력을 묵묵히 감내하는 것이 '강함'이고 '용기'라고 받아들이며 서로를 위로하는 소년과 소녀.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역시나 끊임없고 잔인하게 괴롭히는 아이들까지.
그 모든 것을 가와카미 미에코는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심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만의 '헤븐'을, 그들만의 장소였던 '고래공원'의 콘크리트 고래처럼 받쳐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김윤아씨의 노래가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김윤아씨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휩싸여 <헤븐> 속 소년 소녀들을 지켜봤다. 그녀가 들려주었듯,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다 잘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그 무거운 짐을 벗고 행복해지기를. 어딘가는 너를 사랑해주고 위로해 줄 수가 있는 이가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걸었던 가로수길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하얗게 빛나는 저편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흐르고, 그 속에서 비로소 세계는 상(像)을 맺었고, 세계에는 비로소 깊이가 생겼다. -p.25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김윤아, Going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