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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방주'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방주의 아버지는 버들가지로 고리를 만들며 사는 백정이었다.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사람 하나는 진국이었다. 게다가 백정치고는 드물게 글도 읽을 줄 알았다. 그의 딸 방주 또한 백정의 딸로 살기에는 아까운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방주는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아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물론 외모도 빼어났다.
그런데 어느날 방주의 집에 군관의 복장을 한 한 남자가 찾아왔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하고 특히나 천대받는 백정의 집에 군관이 찾아오다니 이는 필경 좋지 않은 징조였다. 방주의 아버지는 머리를 조아리며 군관 앞에 나섰다. "어쩐 일로 이리도 누추한 곳에 찾아오셨는지요.." 그러자 군관이 어렵게 입을 뗐다. "방주를 내 며느리로 삼고 싶소."
군관이라면 지방에서는 꽤 큰 권력을 쥔 자리였다. 그런 사람이 백정의 딸에게 자신의 아들과 혼례를 치렀으면 하고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둘의 혼례는 아주 조용히 치러졌다. 실력과 지위에 더한 상당한 재력을 갖춘 군관이었으니 함부러 하기는 어려웠을 터, 그렇다 해도 그들의 혼례에 양반들은 난색을 표혔다. 모든 양반도, 모든 천민도 등을 그들의 혼례에 참여한 건 두 가족과 한 남자가 유일했다.
위 이야기는 조선 정조 때 세상을 어지럽히는 문체를 썼다는 이유로 유배보내진 김려의 <방주의 노래>의 내용을 글로 풀어 쓴 것이다. 그 혼례에 참여한 유일한 한 남자, 그는 당시 진해로 유배를 내려가 방주라는 처녀의 사연을 접하게 된 조선의 글쟁이 김려였다. 그는 당시 그 마을에서 벌어진 방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그들의 결혼식에 <방주의 노래>라는 시를 써 바쳤다.
그 후로 몇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올라온 김려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방주의 가족과 군관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이 방주의 노래를 우태라는 청년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다. 자신도 즉석에서 써서 건네주고 단 한번도 보지 못한 그 시의 전문을 완벽하게 외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놀란 김려는 그의 정체를 물었고 그는 자신을 '이옥의 아들 우태'라고 소개했다.
조선시대 명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들은 성균관 시절부터 우정을 나눈 오랜 친구로 뛰어난 글쓰기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이옥의 문장은 지나치게 뛰어났다. 여기서 뛰어났다는 것은 후대의 평가이고 당시에는 반상을 어지럽히고 법도에 어긋나는 사악한 문체였다. 정조는 지나치게 문체에 민감했던 사람이었다. 소품체를 경멸했고 성균관 유생들이 달마나 내는 작문의 답안지를 꼼꼼히 검토하며 비평하고 통제하였다. 이런 시기에 이옥의 문장은 정조의 눈을 거슬렀다.
가량 이옥의 문장은 이런식이었다. 장날의 풍경을 묘사하라는 시제에 이옥은 이렇게 답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메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복어를 안고 오는 자 ...."
"시장에 사람이 많았다"고 한 줄만 쓰면 그만일 것을 이옥은 이리도 세세한 것 하나하나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정조에게는 쓸데없는 시간과 정력낭비였으니 그에게 반성할 것을 요구했고 유배를 보내버렸다. 당시의 문장이란 격식과 형식에 맞춰 써야 하는 것이고 간결하며 이성적으로 써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옥과 두터운 우정을 쌓았던 김려도 그 여파를 받게 되었고 그와 다른 곳으로 유배보내진다.
김려는 한때 이옥을 원망했다. 그냥 반성을 하고 자신의 문체를 고치면 될 것을 이옥은 끝까지 자신의 문장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려는 이옥 때문에 자신 역시 유배되었다 생각했고, 오랜 친구의 마지막 부름에도 응하지 않아 결국 다시는 이옥을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김려는 이옥의 아들 우태를 만나게 되고, 유배지를 떠도는 오랜시간 이옥이 썼던 글들을 통해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문체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문장'을 사랑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두 조선의 문장가의 이야기에 픽션을 가미해 너무나 멋진 한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이 책의 제목인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이옥이 남긴 글, 김려가 평생 잊어 본 적 없고 이옥이 남긴 가장 멋진 글이라 생각하는 문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따왔다. 김려가 느꼈던 것 처럼 나 역시 이 문장을 읽으며 '멋지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문장 때문에 유배를 가고, 문장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지만, 이옥은 그 문장 덕분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문장 덕분에 아름다운 세상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도 유배지를 돌며 자신이 본 멋진 세상을 그렸을 이옥의 문장. 그의 마지막 문장은 이 세상에 놀러왔다간 그의 마지막 소회가 아니었을까?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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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속에서 진달래의 마지막 향기가 묻어났다.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봄은 길지 않게 마련이다. 이제 며칠이 더 지나면 여름날이 닥칠 터였다. 화전 한 장 못 먹고 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봄이 사라지기 전 사랑으로 벗들을 불러들여야 겠다. (p.9-10)
자신보다도 더 가혹하게 소품체 문체 탓에 평생을 변변치 못하게 살았던 벗 이옥의 글들을 읽으면서 김려는 이옥의 슬픔을 보듬지 못하고 외면했던 자신을 자책한다. 또한 이옥이 자신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벗은 글 속에서 걸어나와 과거를 회상하는 김려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그제서야 묻어두었던 유배시절의 아픔을 드러내고 벗에게 털어놓는다. 벗에게 자신의 유배일기를 읽어주며 그 시절을 아픔을 적극적으로 다시 겪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한다.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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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에 나오는 이옥과 김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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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세종 대왕 이후로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군주라고 일컬어지던 임금. 드라마나 역사 소설 속에서 미화된 모습 이면에 권위적인 군주로서의 또 한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책이다. 현대인들이 많이 사랑하고 연구하며 푹 파묻혀 청춘을 바치기도 하는 연암의 글. 가장 생활 속 이야기를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자세하게 묘사한 산문식의 글이 고문체의 틀에 박힌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문체반정으로 감옥에 가두고 귀양을 보냈던 정조. 고생하는 가족을 생각하면 뜻을 꺾고싶은 유혹도 생길 것 같건만 글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이옥. 이옥의 글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그와의 인연으로 반평생을 고생하며 그와의 인연에 고개 돌릴 수밖에 없었던 김려. 자존심을 버리고 겨우 하나 얻은 현감 자리, 꿈에서도 식은 땀을 흘리며 괴로운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건들건들 한량으로 보이는 이옥의 아들이 갑자기 찾아와 그 아버지의 글을 사달라 하며 글을 통해 이옥과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이 참 매력적인 글이다. 또한 애절한 분위기가 작품을 읽는 내내 가슴을 흐르고 그 끓어 넘치던 열정이 그대로 느껴져 더 안타까웠다. 끝까지 고집 부리는 아이를 일부러 더 야단치고 그게 더 괘씸해 화를 내는 것처럼 정조의 마음도 한편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 고문체라는 것만 그토록 거룩한 것이었는지 내가 다 서운해진다. 귀양길을 가는 동안 모질게 했던 이들, 그래도 인정으로 배려해주었던 이들, 부령에서의 인연과 김려의 글, 그의 행적을 좇아 다시 글을 썼던 이옥의 글. 거친 눈발 날리는 산 속에서 시린 달을 보는 기분이다. 만약 정조가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글을 인정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린 가슴에 눈물이 맺힌다. 이옥이 남긴 멋진 글, 평생 잊어 본 적이 없다던 그 순간의 기록을 마지막까지 읊조리며 나도 그들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바람이 메말라 까실까실하고 이슬이 깨끗하여 투명한 것이 음력 팔월의 멋진 절기다. 물은 힘차게 운동하고 산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 북한산의 멋진 경치다......중략 간 곳마다 멋지고, 머무른 시간마다 멋지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마다 멋지고, 함께 간 이들의 마음 마음이 또 멋지고. 그래서 놀러왔단다. 이렇게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다고. 마지막까지 붓을 꺾지 않았던 그들이, 그들의 글이, 그들의 삶이, 우정이 멋져서 나 역시 놀러갈 수밖에 없었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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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이 양서론에서 말하기를 "인생은 참으로 짧으므로 좋은 책을 읽어야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 책은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서점엘 가면 오늘도 새로 나온 책들이 있고, 다들 현란한 수식어와 화려한 수상 경력으로 저를 사가라고 강요한다. 좋은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굳이 서점까지 가지 않더라도 클릭 몇 번으로 저렴하고 편안하게 책을 받아볼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책이 홍수를 이루는 요즘 세상에서는 좋은 책 한 권 골라 읽기가 더욱 힘이 든다. 예전에는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책'이라는 단어에 무한한 신뢰가 가능했지만, 이젠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책을 고르는 독자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쩌면 가끔씩은 덜 준비된 글을 세상에 보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상과 철학에 대한 고민이 없거나 내용에 대한 확신이 덜 하거나 혹은 문체에 대한 고민이 없는 그런 막 쓴 글을 화려한 장정으로 묶은 책을 볼 때는 불현듯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책 <멋지지 때문에 놀러왔지>를 보면서 참 행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옥선생처럼 버릴 수 없는 자신의 문체를 가진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고, 요즘 세상엔 어떤 이를 이 분에게 비길까 싶어 혼자 고민해 보기도 했다. 사람 사이의 사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한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혹은 같은 사무실을 쓰기 때문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옆집에 살아서 친해지기도 한다. 그들과 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날마다 얼굴울 마주 대할 때는 가족과 친척보다도 더욱 깊은 사이가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이웃사촌'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다만, 그 공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사귐이 어떻게 되는 지도 우리는 안다. 처음엔 헤어짐에 아쉽고 날마다 연락을 주고 받기도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지만, 또 우리는 새롭게 만난 새로운 사람들로 그들을 대신하곤 한다. 그러나 이옥 선생과 김려 선생처럼 어떠한 가치를 서로 공유하고 있을 때 그 사귐은 결코 'OUT OF SIGHT, OUT OF MIND'는 아닌 것이다. 우리에겐 현명하고 개혁적인 군주로 비친 정조대왕께서 어찌 그리 문체 만큼은 보수적이었을까 싶은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옥 선생은 뛰어난 문재로 성균관에서 치르는 시험에 늘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임금은 그의 문체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김려 선생은 이옥 선생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그들은 함께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술 한 잔에 글 한 수를 지으면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의 글을 함께 읽었고 서로의 글을 사랑했다. 그러나 임금에게 이옥 선생이 벌을 받으면서 그들의 사이는 조금씩 틈이 생겼다. 김려 선생이 이옥 선생을 잊고자 하면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자 했을때도 이옥 선생은 친구에게 다가가지 못하면서도 그의 뒤를 따르고 여전이 그를 그리워했다. 진정한 사귐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생각나는 벗,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함께 이해하는 벗이 있다면 더 이상 함께 하는 공간이 없더라도 그 사귐은 영원한 것임을 그들은 보여준다. 오늘 읽은 이 책은 저 책을 읽을 시간을 빼앗았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그런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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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읽지 않았어도 제목을 보면서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죽마고우를 만나 오랫만에 회포를 푸는 벗들의 즐겁고 행복한 그림이 연상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옥과 김려는 조선 후기의 실존인물이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인물이었기에 먼저 이옥과 김려에 대한 인물 검색을 해보니 정조시대의 학자로 문체반정에 연류되어 고초를 겪은 인물들이었다. 작가는 뛰어난 문장가로 알려진 두 사람의 우정을 바탕으로 따뜻하고 감동적인 멋진 역사소설을 그려냈다.
오랜 유배 생활끝에 이제야 작은 도시의 현감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김려에게 인생의 태반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던 옛친구 이옥의 아들 우태가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옥은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글쓰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조는 그의 글을 탐탐치않게 여긴다. 소설 식 문체를 패관잡문이라 여기며 기존 고문(古文)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결국 이옥은 정조의 미움을 받게 된다. 정조는 이옥의 문체를 문제 삼아 과거시험에 낙방시키고, 군역의 의무까지 지게 한다. 하지만 이옥은 결코 자신의 문체를 바꿀 생각이 없다. 정조는 왕의 위엄에 굴복하지 않는 이옥의 고집스러움에 이옥과 절친이었던 김려를 유배지로 보낸다.
우태가 가져 온 이옥의 글을 읽으면서 김려는 이옥의 영혼과 만나게 된다. 이옥의 간곡한 애청으로 김려는 힘겨웠던 유배지 생활을 들려주는 내용이 이 책의 주를 이룬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옥을 버려야만 했던 과거의 잘못때문에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던 김려는 곤경에 빠진 우태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현감자리에서 물러난다. 그후 우태의 부탁으로 이옥을 글을 모아 문집으로 편집하는데 일생을 보낸다.
'글이 우정이 되고, 우정이 역사가 된다'란 표지의 글처럼 글로써 천하를 호령하자고 다짐했던 두사람의 우정은 이별을 통해 더욱 끈끈한 인연으로 끝맺음을 하게 된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간 친구를 부러워하면서도 함께 동문수학했던 벗을 외면해야 했던 김려와 자신때문에 유배지를 떠나는 벗을 쫓아 먼발치에서나마 벗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이옥..두사람의 진솔한 우정이 마음 한 켠을 짠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또한 조선문학에서 3.4조나 4.4조의 함축적 의미를 지닌 딱딱한 시조나 가요형식의 글보다는 오히려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고 풍류가 묻어나는 이옥의 글이 더많은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해 본다. 김려의 유배지 생활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보니 천재적 글쓰기의 대가인 이옥의 명문장 글이 너무 적어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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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을 때 행복하다. 아름다운 문장이란 꾸밈이 가득한 문장이 아닌 본 대로 묘사하고 느낀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얼마나 세세히 진실되게 쓰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었을 때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디서든 서슴없이 권여선의 문장을 이야기한다. 그런 글 쓰기를 갈망한다. 언어가 가진 놀라움에 탄성을 자아낼 책을 또 만났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을 읽으면서 진정한 글쓰기가 어떤 것인가 생각한다. 이토록 고운 글이 있단 말인가. 이 책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우선 이 책을 대해 말하기 전에 조선시대 뛰어난 문장가인 ‘이옥’과 ‘김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둘은 성균관 유생시절의 친구로 조선 정조의 ‘문체 반정’에 휘말린 인물이다. 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그들의 우정과 진정한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소설은 현감 김려 앞에 이옥의 아들이 찾아오는 일화로 시작한다. 그는 김려에게 아버지의 글을 남기고 나간다. 잊었다 믿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린다. 젊은 날 함께 글을 쓰고 논하던 벗과 어느 순간 거리를 두게 된 사건을 회상한다. 임금은 이옥의 글을 싫어했고 급기야 군역에 처한다. 그를 보고 김려는 두려움에 조금씩 멀리한다. 이옥과 함께 어울렸으므로 김려 역시 귀향을 떠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시간이 흘러 이옥이 먼저 죽고 김려는 조정에 줄을 대어 시골 현감 자리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여 이옥의 아들은 반가울 리가 없다. 그가 쓴 글을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 귀향길을 함께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혹독했을 그의 생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은 숨겨야 했던 글을 이옥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옥의 글은 살아 숨쉬고 있었으니 변화였고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이옥의 글을 읽는 동안 그의 환영과 가슴에 묻어두고 나누지 못했던 말과 글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은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메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오른손으로 엿과 떡을 움켜쥐고 먹는 아이를 업고 오는 자, 병 주둥이를 묶어서 허리에 차고 오는 자, 물건을 짚으로 묶어서 가져오는 자, 버드나무 광주리를 짊어지고 오는 자, 소쿠리를 이고 오는 자, 표주박에 두부를 담아사 오는 자, 주발에 술이나 국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오는 자가 있다. p. 41~42
이옥이 쓴 글의 일부다.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분주한 시장의 모습과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을 바로 눈 앞에 마주한 듯하다. 시장을 묘사할 때 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옥과 김려의 글은 분명 달랐다. 누구의 글이 더 멋지다 말할 수 없다.
연못에 붉게 핀 연꽃 천만 송이/연희 생각에 더욱 사랑스럽구나./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았으니/한 줄기에 나란히 난 연꽃을 어찌 부러워했으랴./평생을 살면 즐거운 이가 원망스러운 이가 되고/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이 되는 건지./하늘 끝과 땅 끝이 산하에 막혀서/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 대네./전생의 죄과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연희야, 연희야. 너를 어찌하랴. p. 157~158
김려의 글이다. 부령에서 정을 통한 기생에 대한 마음이다. 이옥의 환영과 마주하면서 그는 자신의 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부령에서의 시간과 그곳에서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가 느껴지는 글이다. 책은 문체 반정보다는 그들에게 글이란 무엇이며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에 대해 말한다. 이옥과 김려의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이 온전하게 녹아든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한다. 참된 글, 좋은 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글로 표현해야 했던 그들의 삶, 글은 곧 그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이옥의 생이야말로 진정 멋진 삶이 아니었을까.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역시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날이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 단풍도 멋지고 바위도 멋지다. 멀리 조망하여도 멋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멋지다. 부처도 멋지고 스님도 멋지다. 비록 좋은 안주는 없어도 탁주라도 멋지다. 절대가인이 없더라도 초동의 노래만으로도 멋지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p.197~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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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막걸리 한잔에 파전이 생각난다. 술을 마시진 못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김려가 시를 읊으며 나와 막걸리 대작이라도 하듯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김려의 멋진 문장에 매료되어 취해간다.
'그리워 하다 죽으리'에서 김려를 처음 만났다. 김려와 기생 연화의 사랑 이야기는 구구절절하면서도 애절하다. 김려가 연화에게 보낸 글은 멋졌다. '그리워 하다 죽으리'는 김려의 사랑이야기라면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설흔, 창비, 2011)는 그의 친구 이옥과의 우정과 삶을 그린 이야기이다. 김려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 같아 김려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임금의 눈 밖에 나 유배까지 다녀왔지만 논산의 현감이 되어 유유자적 생을 보내던 김려에게 어느 날 불쑥 낯익은 청년이 나타난다. 그는 바로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 이옥의 아들 우태였다. 한밤중에 아낙들을 모아놓고 글을 읊어주던 우태는 김려의 글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최참판에게 걸려들어 붙잡히게 된다. 그로 인해 지난 날을 떠올리며 이옥의 글과 자신의 글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 김려는 우태를 옥에서 풀어줄 묘안을 강구한다.
18세기에 살았던 김려의 이야기이다. 작가 설흔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김려를 새롭게 부활시키며 오늘의 이야기처럼 되살려 냈다. 책에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고집 센 두 문인의 개인사를 흥미롭게 접근하여 그들만의 문학세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제 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수상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과 묘사는 김려가 지금 현재를 우리와 같이 살아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김려는 친구 이옥의 글을 엮어 문집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전했다. 김려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옥의 글은 우리 문학사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정조의 눈밖에 나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도 이옥과 김려는 뜻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만의 글쓰기에 평생을 바쳤다. 김려는 유배를 가면서도 글을 놓지 않았고 매일 매일 일기를 쓰듯 글을 적어 나갔다. 이옥의 글에서는 궁상맞음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참으로 묘사가 뛰어난 글이었다. 시장을 묘사한 글이었는데 왜 그런 글을 임금이 싫어했을까 했는데 이것이 소설적인 문체여서라고 했다. 쓸데없는 묘사에 많은 시간과 종이와 먹과 붓이 아깝다는 김려. 그래서 임금이 싫어했단 말인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김려를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그가 내 친구인냥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마져 들었다. 그만큼 친근한 느낌으로 김려를 만났다. 그의 글을 읽으며 멋진 문장에 탄복하고 우정과 사랑에 감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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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고 춥고 힘들었던 유배 시절도 옛일, 조용한 고을 현감으로 늦은 봄날의 햇살을 즐기고 있던 '나', 김려의 일상을 뒤흔드는 낯선 청년.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벗 이옥의 문장에 김려는 현깃증을 느낀다. 무례하고 거친 그 청년은 바로 이옥의 아들. 그가 던져놓고 간 벗의 글들을 뒤적이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를 기억하는 려.
그 누구보다 글을 사랑하였고 뛰어난 문장가로, 둘도 없는 벗이었던 두 사람. 그러나, 고문의 신봉자로 패관소품의 해악이 요상한 학문의 해악보다 더 심하다 믿었던 정조의 견책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불운은 서로의 연을 끊어놓는다. 어색하고 거리감만 가득하였던 몇 년 만의 해후를 끝으로 이옥은 죽었으며, 그 소식을 전해들은 김려는 오히려 마음속 깊이 안도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밤.... 그의 글들과 함께 젊은 날 함께했던 모습 그대로, 소리없는 웃음을 대동하고 이옥이 나타난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려를 지나온 시간 속으로 이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하나도 잊지를 못했던 오랜 고통들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글을 잃고, 벗을 잃었다고 생각한 날들, 수치심과 허망함에 떨었던 그 날들도 삶이었음을 책장 깊숙이 보관해두었던 그 때 자신의 글들을 읽어나가며 깨닫는다. 또, 아버지의 뒤를 따라 글을 쓰고 전해온 그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옥이 평생동안 자신을 마음깊이 문우로 간직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의 삶, 참으로 기구하다. 그토록 재주가 있었던 두 젊음이, 글쓰기가 전부였던 두 사람이 글로 인해 유린당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삶을 글에 담았다. 결국 그들의 삶은 그들의 재료가 되었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거야." 라는 이옥의 글은 천상병시인의 <귀천>과 그대로 겹쳐진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그렇지. 슬퍼도, 아파도, 이 순간들은 다 멋지다. 아름답다.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있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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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장가 이옥의 극적인 삶과 상대적으로 평범한 삶의 김려의 이야기를 지금, 내가 몹시 설레이며 되새기고 있다. 책을 붙잡고 놓기까지 한장, 한장을 넘기며 품은 마음은 설렘이다.
한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그 시대에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이들의 삶은 늘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소설 속에 등장한 조선의 두 문장가들의 우정을 그것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 글로써 전해지는 그들의 삶과 애닯은 마음들은 내 안으로 들어와 고스란히 쌓여지는 느낌이다. 일상에 녹아있는 책읽기와 글쓰기가 스스로를 얼마나 힘나게 해 주는 것인지를 공감하는 이들은 이 책을 통해 글의 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역사속에 알려진 조선의 군주, 개혁의 군주, 정조의 다른 면을 소설을 통해 엿본다는 것은 의외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한 인간을 개인적으로 들여다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시간들은 애정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이옥은 조선의 사회, 조선의 군주가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바꾸지 않았기에 그 시대의 경계인으로 머물다 그렇게 떠나갔다. 그는 글에 목숨을 걸지도 않았고, 글쓰는 거창한 이유없이 그냥 쓴다 한다. 쓰지 않고 도대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기에, 글을 쓰는 것이 삶, 그 자체였기에 그는 삶의 현장을 그의 글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옥의 친구인 김려는 부족함 없는 일상에 글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다고 느긋하게 주장하는 모습으로 있지만 그는 시대의 흐름에 항거보다는 살아남기를 반복하며, 글을 멀리해야만 했던 순응주의자가 되어 '현감'이라는 안정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그에게 글은 젊은 시절 문우로서 멋진 벗, 그만큼으로 족했었나 보다.
그러나 살아나간 길은 모습을 달리했지만 그들이 나눈 멋진 벗으로서 나눈 그 우정의 힘은 서로의 모습을 찾아줄 수 있는 희망으로 남아있었다. 김려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문장가 이옥은 그 시대 속에 묻혀버렸을 것이고, 김려에게 그 멋진 벗으로서 나눈 그리움이 없었다면 내가 이처럼 가슴 설레이며 읽는 이야기도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글의 힘은 시대를 초월하여 벗들의 마음을 이어줄 수 있기에, 삶의 한 풍경으로 남아지는 이 글도 역시 내가 마음으로 흠뻑 받아들이고 있는 주변인들과 나눔이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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