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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 품는다는 말이 있다.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의 이야기다. 수심이 얕은 개천에서 물고기를 한 방향, 미리 점찍어둔 얕은 지점으로 몰아넣은 다음, 그 입구를 막고, 가둔 물을 퍼냄으로써 도망가지 못한 물고기들을 포획하게 되는, 민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검은 빛깔의 화산암이 널찍하게 펼쳐진 해안선, 제주도의 강정해변의 경우라면, 밀물 때 육지 가까이에 접근했다가 썰물 때 및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고기도 막고 (물을) 품어냄으로써, 물고기를 사냥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아, 강정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이성이 가진 힘을 그가 부정했다고 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신의 존재 못지 않게 꿋꿋하게 확신했던 위대한 철학자이다. 간명하게 말해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그는 꿈꾸었고, 조국의 안위, 그 지속가능성이 위태롭고, 정치 경제적으로 격변기를 살아가는 아테네 시민들의 몰상식을 경계하며 말하기를 소의 등에 찰싹 붙은 등에(쇳파리)처럼, 시민들의 이성이 잠들지 않도록 올곧은 소리를 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일생을 쿨하게 마무리하는 보통 사람들에겐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달갑게 처형을 받아들인다. 조국의 동포들에게 등에 역할을 죽어서도 하겠다는 뭐 그런 요지의 말을 남기고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슬픔의 대립어는 한없이 웃게 만드는 기쁨이다. 그리스에는 비극만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장르도 있었다. 그리스의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는 아리스토파네스, 그는 44편의 희극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그의 희극은 모두 11편이다. 일부 그 흔적만 남은 것들을 비롯하여 생존하지 못한 작품들이 고전으로서 길이 남을만한 작품들이 아니라서 그런 운명을 맞이한 것인지, 현존하는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있었음에도 안타깝게 살아남지 못하는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를 덧붙여 짐작한다면 워낙 민감한 사안들을 정면으로 다룬 그의 혹은 희극의 스타일로 보았을 때, '금기'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살아남지 못하였으리라. 어쨌거나 현존하는 그의 희극작품 전편이 원전번역으로 완역되어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에게는 사건이고 뉴스였다. 낯선 나라의 11명의 최종엔트리에 오를 선수들을 선발해내고, 그들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여 그라운드로 내보내는 히딩크 감독처럼 덕분에, 우리는 지금 아리스토파네스라는 희극나라의 11명의 선수들이 활약하는 축구경기를 베치에 앉아 감독의 심정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겨우 1년 철학을 전공했다는, 그리고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연년생이 동생이 입학할 예정이라는 형제들을 며칠 전에 만난 적이 있다. 녀석들을 고전공부마당에 대동하고 나타나신 분이 현직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이라, 세 부자와 더불어 이런저런 주로 서양철학이니 인문학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나눈 셈인데,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매기 시작한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가업은 꼭 크고작은 가게나 기업만을 물려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않는가. 한 녀석이 도중에 다른 길을 가게 되도라도 한 녀석은 아버지의 전공분야를 잇게 되는 것이려니, 그리고 그리고 그 선생님에게 둘째아들을 기준으로 12살, 15살 연하의 늦동이 아들들까지 있다고 하니, 아직은 어린 두 아들들도 철학 공부에 나서 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십수년에 걸쳐 지켜봐야하리라,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 비단 철학자의 게보에서 탐구하고 극복해야 하는 숙제가 될 수는 없는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만, 그동안의 그리스 비극들과 그 작품들의 작가들에게만 익숙했던 나에게 아리스토파네스는 앞서 언급한 조건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만남 자체가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와 그의 희극 작품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처한 '등에'처럼 고대 그리스를 고전으로 만나는 나에게 늘 숙제처럼 다가왔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대체로 시니컬하지만 플라톤이 완성한 소크라테스의 <향연>에서도 발언자로 등장하는가 하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본인이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당대는 물론이고 길이 남을 위대한 철학가를 말도 안 되는 죽음으로 내모는데 그의 희극(<구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여기서 '결정적'이라 함은 작품이 현실을 풍자하고 비틀는 식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그리고 하나의 상징임을 간파해낼 분별력을 잃은 당대의 민중들이 군중심리를 적절히 활용하여 소크라테스를 공격하고 있으며, 그 빌미가 되어주기에 하는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일까, 플라톤의 <국가>보다 앞서 집필된 <여인들의 민회>(BC 392)에서의 재산공유 등의 닮은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면서 연동이기도 했던 알키비아데스의 바람 같은 삶과 당대를 함께 살았기를 숱한 접점을 이루는 아리스토파네스 등등.. 아리스토파네스(그의 희극)는 그리스의 '비극'과 '역사'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나 사이에서 없는 듯 하면서도 굳건하게 제자리가 존재감을 피력하는 그런 '등에와 같은 존재로 늘 깨어 있게 하지 않았나, 해서 마음을 먹고 한두 작품이 아니라 인용 부분 앞뒤만이 아니라 앞서 민물고기를 포획하듯 "막고 품는" 심정으로 집중하여 완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서사시와 비극을 비교하는 것 못지 않게,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 사이에도 무대에 오르는 같은 극문학 작품이라는 유사점에도 서로 다른 점이 형식에서 그리고 주제를 다루는 방식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으려고 한 목표(효용, 가치) 등에서도 차이점이 많은 듯하다. 부정을 통한 극정, 있음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 '없음(없앰)' 또는 '부재'를 확인하게 함으로써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 바람직한 '있음'의 증명하는 방식이 희극이라면, 비극은 인간 관계의 '막장'까지 거침없이 다룸으로써, 그 임계점을 확인하는 절차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다. 희극과 비극의 보여주기와 말하기가 다른 방식으로 유사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웃게 하는 자연의 웃음이 있고, 풍자와 해학을 통해 거침없이 막힌 데를 뚫어줌으로써 '시원하게' 해줌으로써 웃게 만드는 웃음이 있다. 2500년 가량 묵은 작품이 작금의 현실에 적용해도 여전히 세련미와 예리함을 간직한 풍자에 이르러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만든다.
신이나 영웅들이나 신화적인 인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것들이 비극이라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당대의 현존 인물들을 무대에 올려 거침없이 비판하고 조롱하고, 몽매한 민중(데모스)들도(<기사들>) 비판의 칼날에서 새롭게 날을 벼리게 만드는 희극들, 당시의 역사, 그 사실들을 기록한 <역사>, 문학작품들과 공연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작품과 만난다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진정한 의미의 '희극'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팩트를 다룬다는 언론 보도와 그것을 받아쓰기하는 또다른 온오프라인의 기사들 자체가 더없이 희극적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이 가진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현실을 구현하는데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하리라. 이상이 제목에 담았듯이 그리스의 희극,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을 완독하는 과정에서 받은 소감들이다. 실제로 메모한 것들보다는 소감들을 상기하는 동안 새롭게 떠오른 생각들을 쏟아낸 글이 되어버렸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