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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여전히 부조리의 시대다. 위안, 힐링, 행복이라는 심리적 성형수술이 난무하는 시대다. 행복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자신의 내면아이를 더욱 어리게 만들어 책임감을 회피하곤 한다. 그리고 쇼핑과 여행이 심리치료의 수단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안정성보다는 변화를 더 좋아하고, 성취보다는 가능성을, 올바른 평가를 하기보다는 기대를, 개별성보다는 협동을, 충성심보다는 기회주의를, 관계보다는 거래를, 성숙함보다는 유아적 성향을, 참여보다는 수동성을, 적응보다는 회피를, 의무보다는 권리 요구를, 내향성보다는 외향성을, 걱정보다는 쾌활함을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이다."(61쪽)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어크로스, 2011)의 원제는 <부조리의 시대>이다. 원제에서 실존주의의 냄새가 확연하다. 다시 말해서 실존주의자가 말하는 행복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드러나 있는 책이다. 나는 실존주의를 '부조리 시대의 심학 혹은 수양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저자는 에픽테투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고대 로마의 스토아 사상가들과 쇠렌 키르케고르와 카뮈,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자의 사상과 삶의 자세를 강조한다. 스토아적 미덕의 열쇠가 거리 두기 혹은 초연함이라면, 실존주의의 미덕은 개인의 책임감이다. 다시 말해서 적극적인 책임의 윤리가 실존주의자의 실천원칙이다.
실존주의자에게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없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고 견뎌나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우연한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삶의 문제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는 자유의지를 중시한다. 그런데 과학의 이름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경솔한 주장들이 범람하고 있다.
유전학, 진화심리학, 신경과학이 바로 과학을 토대로 한 결정론의 세 가지 유형이다. 이들 학문의 맹목적인 신도들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면서 현대인들의 책임감을 박탈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특히 신문 머리기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우울증 유전자, 비만 유전자, 동성애 유전자 운운하는 흥미 버전의 유전학 담론이 대표적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동물적 본성이, 유전자 내에 설정된 프로그램이, 우리의 무의식적 행동이 개인적 책임감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었고, 옛날 '원죄' 개념의 현대적 버전이 된 셈이다.
"과학에는 결정론의 삼위일체가 있다. 유전학(인간 행동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진화심리학(인간 행동은 진화한 생존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된다), 신경과학(인간의 행동은 확고하게 설정된 두뇌의 모듈에 의해 결정된다)이 그 셋이다."(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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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은 무수히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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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행복할 권리는 커녕, 행복이라는 단어조차 몇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제목이 행복할 권리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우리의 행복할 권리를 박탈하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인 마이클 폴리는 본문에서 자신을 언급한 이야기를 빌면 '별 볼일 없는 작가'다. 하지만 세상의 부조리함을 살피는 통찰력은 별 볼일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까지 출판 된 것으로 증명 되듯.
이 책의 본제는 《The Age of Absurdity》, 부조리의 시대. 이다. 내용을 바로 알 수 있는 좋은 제목이 아닐까 싶지만, 딱닥해보이고 재미없어 보이는 제목이기에 아마 내용에서 '유추'해 온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1장에서부터 저자는 비극적 결론을 제시한다. "당신이 찾는 행복은 없다."라면서. 우리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기에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이상일 뿐이라고 한다.
또한 시대는 우리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 시대는 우리의 욕구, 욕망이 충족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듯 광고는 늘 우리 주변을 맴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수천번씩 마주하는 광고들은 자신들이 가까이 있으며 언제든 우리가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환상이며, 조장된 메시지라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원해야 하는 것을 원하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인가 싶다.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싶어서인가? 자발적인 wants?
아쉽게도 가장 설득력이 큰 이유는 "다들 그렇게 한다"는 주장이라고 한다. 어느정도 부정하고 싶었지만, 다들 그렇게 하는데라는 말에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나? 저자는 인간의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이르는 ID(이드)라는 단어에 맞추어 AD(광고)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AD가 ID를 어떻게 공략하는가? 어떻게 유혹하고 무너뜨리는가 하는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광고의 홍수 속을 살아간다는 말이 이제는 낡은 이야기 같다. 이렇듯 시대는 욕망과 욕구의 충족 가능성을 원없이 제시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까? 한 마디로 줄여놓으면 "무의미의 자각"이 될까?
흔히 우리가 바라는 멋진 차, 멋진 집, 높은 지위, 넘쳐나는 돈은 그것을 손에 넣었을 때 그것을 바라고 추구하던 때의 기대와 요구를 배반하며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룬 것엔 더이상 기뻐할 수 없게 되고 다시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다. 이것이 소망을 실현하고 소유를 달성했음에도 우리가 진정 행복을 맛볼 수 없게되는 이유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것을 '적응', '습관화', 쾌락주의의 쳇바퀴' 라고 부른다고 한다.
행복은 어디 있을까?
"모든 대안이 부조리하니, 그나마 가장 고상한 것을 고르도록 하자"는 플로베르의 말처럼 그나마 덜 부조리 한 것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제는 현실에서의 행복을 버리고 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 그만큼 욕망과 욕구는 즉시 해소되고, 그 뒤에 찾아오는 무의미함 또한 급격히 증가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사실 어떤 시대에서든 욕망이 문제되지 않은 시대는 없다. 욕망을 초월하라는 이념을 내세우는 도교의 노장사상이나, 스피노자의 주장 대표적인 것이 도교나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 니체가 주장한 초월 등, 수 많은 사상에서 행복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얻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역시 어차피 얻을 수 없다면,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의 답인지도 모르겠다. 이쯤되면 이제 최후로 행복을 기댈 곳은 '사랑'정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기대마저 무참히 무너뜨려버린다.
사랑은 과연 영원한가?
낭만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중독 상태에 불과하다면? 흔히 마약을 이야기할 때 처음에는 적은 양으로도 흥분과 매혹을 누릴 수 있지만, 점점 내성이 생기게되고 투여해야 하는 약의 양도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마약이 주는 중독에 의한 도취감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불행한 마약 중독자 뿐이다. 많은 연인들이 1년 혹은 2년 안에 헤어지는 것도 서로에 대한 '매혹'을 느끼게 했던 호르몬이 그 기간이 되면 옅어지고 사라져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 너마저.
이 책은 정말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부조리함을 흔한 것에서 불편한 것까지 모으고 해석해서는 증명하듯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으로 끝낼 것이었다면 아마 이 책을 쓰지 않았겠지? 저자는 우리를 구원해줄 대상을 물색한다. 일과 직업, 사랑, 나이듦. 우리는 최고 혹은 최선을 달성하지는 못하더라도 타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타협없이 순수한 쾌락과 만족감만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있다면 '신' 정도일까?
우리는 노자와 장자가 했듯 '안분지족'한 삶을 추구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욕망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사랑도 그 형태를 바꿔가며 지속 될 수 있다. 상대와의 로맨스가 끝이 났다해서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단지 상대에 대한 끌림, 매혹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매혹의 끝과 마주하는 비극적 순간에 이렇게 외치게 되는 것이다.
"사랑, 그게 뭔데."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는 물론 어렵다. 하지만, 포기하기도 어렵다. 이 책은 뭔가 무겁고, 어렵다. 무엇이 행복으로 가는 길인지 알려주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던 것처럼 온통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부조리함에 끌려다니다보면 세상은 역시 이런 거야, 그래 그렇지 뭐. 라며 또 다시 불행의 나락으로 직행한다.
경계를 유지하는 것, 저자가 이야기하듯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가까워진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즉시, 그것은 채워진다. 음식도, 사랑도, 섹스도.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고 나면 더 큰 갈증, 더 큰 욕망이 찾아온다. 그것이 밀착의 악순환이 아닐까?
쉽게 얻어진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 있다. 본래 우리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누가 많이 갖는 것 만이, 높이 오르는 것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일까? 요즘엔 우습게도 자신을 찾는다, 자신의 개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행이라는 하나의 강제를 만들어버렸다.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만다.
결국 삶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인 것 같다. 욕망하되 만족을 아는 삶. 모호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작은 가능성에 걸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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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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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속에는 행복이 없다고 한다. 또는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다보면 오는 부수적인 결과가 행복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튼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렇게 행복이라는게 어려울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과 권력, 명예 이런 것을 쫓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룬 후에 헛헛함을 감추지 못한다고도 한다. 아니 우리같은 범인들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삶의 행복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권리를 준다. 생각없이 산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또한 생각없음은 생과 사를 구분짓는 분기점이 된다는 관점 말이다. 소유와 지위를 중시하는 부르조아적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불행이나 고난이 닥쳤을때 쉽게 삶을 포기하지만 삶을 학자적 관조적으로 직시한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는다고 프리모 레비의 저작을 통해 통찰한다. 또한 우리가 나이듦에 대해 혐오할때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노화의 장점을 이용할때 우리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노화라는 것은 한마디로 사계절 중에 겨울에 해당하며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가능성의 잠재력을 포기하게 되고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에게 더 집중할 수 시간과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생각하는 염세주의적 관점이 아니다. 삶의 태도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다. 많은 부분들이 니체와 부처의 철학에서 가져 온 듯하지만 쉽게 우리가 접근할 수 있도록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해서 설명한 부분은 인상적이다. 다시 한번 읽고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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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가만 두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구절이 많았다. 하지만 끝까지 읽는 내내 책은 나한테 굉장히 양날의 칼과 같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