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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4기 - 6>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딘가 불편했다. 딱 어디가 아파, 라고 말할 순 없는데, 아니 병증은 없는데 氣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는 느낌. 잘 뚫려있던 혈穴 어딘가를 누군가 살포시 막아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동양인이어서 나타난 현상일 게다. 저자의 의도는 아시아가 제 자리를 찾아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나에게는 순수하게 저자의 의도대로 먹히질 않는다. 내 안에 잠재된 열등의식이 자극된 것일까? 그나저나 열등의식이 있기나 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부등식으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힘의 우열관계로 인식하여 내재화 되어 있던 것이 이 책을 읽는 계기로 표면화된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부정했지만 이미 내 안에서는 서양의 동양보다 조금은 우월하지, 라는 순위를 매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 패트릭 스미스의 주장은 한결같다. “아시아여, 서양의 길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라.”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의 근대화는 타의에 의한 개방의 영향이 컸다. 이 책에서 사례를 주로 드는 국가인 일본, 중국, 인도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개방의 방향과 정책이 제국주의 국가의 틀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아시아의 국가들이 체體와 용用을 구분하며 체는 우리의 것을 이어가고 용만 받아들인다는(예를 들자면 中體西用 같은) 골조를 가지고 문을 열었다. 그런 타이틀이라도 있지 않으면 아시아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과거는 낡은 것이고 버려야할 것들이라는 인식도 함께 수입되었다. 그러다보니 말로만 외치는 중체서용이라는 것이 유지되기 힘들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천박한 물질에 매달리는 서양의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말자고, 고유한 정신만은 유지하자고 했건만 결과적으로 몇 십 년 동안 ‘진보, 진화’란 목표 아래 달려온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아니 저자의 입장에서는 ‘당신네들, 거울 좀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해요.’라고 말하고 있다. 섬뜩하다. “근대화”를 위해 달려왔지만 “근대성”은 갖추었을까? 몸에 맞지 않아도 명품 옷을 입고 화려한 치장 속에 숨었지만 안은 곪고 있지 않았는가? 이러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준다. 그래서 불편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비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속 좁음을 탓하기 싫었다. 우리는 우리방식대로 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길을 가던 시련과 고통은 맞닥들이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가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도 아니기에, 그 장벽을 넘어가는 과정도 충분히 맛보았고 지금도 맛보고 있지만 그런 숙성의 과정이 오늘 날 우리 색깔의 국가로 잘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서 앓고 있는 속병들을 들여다보면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아이러니하게도 쉽게 공감이 되어버린다. 정신적 가치를 물질적 가치보다 우위에 두었던 동양의 사고가 어느새 물질적 가치를 더 추구하는 모양새로 변했고 시간, 자아, 자연에 대한 관념이 서양의 것과 계속 충돌했다. "아시아는 스스로 자극요소를 생성하기보다는 여전히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반응하고 있었다."(19p) 일본의 근대 문물 개방이 아시아가 서구국가들과 교류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변방의 섬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고 이것을 천황이라는 수직적 존재 아래 국가주의의 파시즘을 통해 서양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따라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근대사상의 전파가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그 내용은 학문적으로 정의한 ‘근대화 이론’ 1)을 그대로 해석한 것이라 보면 된다. 그 과정에서 대표적인 세 나라의 공통점은 부분적인 과거의 삭제와 자기 부정, 필요한 부분은 일부러 들춰내고 기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망각과 기억의 중추적인 역할에 국가가 나섰으며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강화를 통해 이를 더욱 공고히 해나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서양과 비슷해지거나 우월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달려온 아시아였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니 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100년 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것은 있는데, 일본적인 것, 중국적인 것, 인도적인 것은 어디로 갔느냐의 정체성 위기를 진단한 것이다. 여기에는 오리엔탈리즘도 옥시덴탈리즘도 없다. 우리 고유의 것, 우리의 역사,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정신이 흩어졌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구의 그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이런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물론 우려와 함께 기대를 거는 것이다. 바른 의식을 가지고 바른 말을 하는 국민이 분명 있고 이미 변화가 시작된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져가라 한다. 일부러 서양을 따라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우월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큰 골조를 이야기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훨씬 구체적이고 신랄하게 파고들기에 불편한 책 읽기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분명 있었다.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얽힌 역사 부분에서는 제 3자적 입장에서 바라본 그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렸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관하여 관대한 입장으로 비춰졌는데 ‘중국의 피해의식’2)이라는 문구나 ‘일본의 사죄’라는 문구는 당사국인 한국인 입장에서 저자가 너무 서양인의 시각에서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마치 반일감정이 아시아의 선두주자인 일본에 대한 질투와 시기처럼 비춰진 것도 납득할 수 없다.3)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저명한 중국학자’, ‘일본의 한 학자’ 식의 출처가 불명확한 인용을 하는 경우가 눈의 띄는데 이런 것은 주석을 달아주든지 정확한 이름이라도 표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전체적인 주제 때문이다. 아시아의 정체성 위기를 진단하고 갈 길을 찾아가는 물꼬가 원활히 틀 수 있게끔 조금 더 객관적인 판단을 해주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역사가 ‘다른 누군가의 세기’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기’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우리의 길로 나아가야할 것이기에.
1) 근대화 이론 : 만약 저발전국이 19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경험한 산업화 및 도시화를 그대로 답습하여 경제적인 근대화를 이루고,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가치관을 생산적인 가치관으로 바꾼다면, 모든 면에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발달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견해(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2) “특히 중국의 피해의식은 깊었기 때문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일 심리적인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은 듯 했다.”(이 책의 167p) -> 과연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 했는가부터 물어야할 일이다. 3)“아시아가 서구에게 느꼈던 열등감과 피해의식은 20세기 중반부터 반일 감정으로 전이 됐다.”(이 책의 167p) ★오타발견 : 121p, 4번째줄 : 다다가는 -> 다가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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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중에 저자가 언급한대로 그의 목적은 ‘19세기는 서구의 세기, 20세기는 전환의 세기라고 본다면 왜 21세기는 또 다른 주체가 주도할 세기로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저자는 서구를 좇아 지도받는 입장의 아시아가 아닌 파트너로서의 아시아로 거듭나기 위한 지점들을 현재의 아시아의 모습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서구 또한 자신들의 근대화에 대한 회의에(이러한 회의는 자본주의의 괴리와 환경의 문제점 등에서 자각된다) 대한 대안강구에 관심이 높은데 이러한 관심은 서양 동양, 누가 먼저랄 것 없이(아직 발전되지 않았으므로 발전의 선후발의 차이가 없이) 동일한 출발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주도자는 누가 될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저자 또한 그 주도자가 누가 되어 책 제목의 ‘다른 누군가의 세기’의 ‘다른 누군가’의 주인공이 과연 누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시아가 서구 근대화를 추구해 오던 과거와 그에 대한 한과 향수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은 이미 전통적인 모습이 아니며 그렇다고 완전한 서구의 모습도 아니다)에서 근대화의 문제점을 해결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제3의 대안을 모색할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여기에는 동서양의 구분을 거부하는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현재 세계 곳곳의 모습만 보아도 서구와 아시아의 모습은 근대화 정도의 차이만 약간 존재할 뿐 각각 모두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정한 서구와 아시아의 지배구조의 이데올로기 또한 저자가 아시아의 현주소에서 얻는 힌트로 하여금 전복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전복성에 대한 고민은 아시아의 몫이 된다. 물론 그 결과가 전복으로 인한 지배의 뒤바뀜이라기보다 동양, 서양으로 서로 구분지어 동양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받은 나머지 양면의 모습을 지닌 근대화된 아시아인으로서는 혼란스러웠던 지금 그 구분을 넘어선 대안적 정체성을 모색하기를 권유하고 있는 것일게다. 나는 저자의 중국, 인도, 일본의 사례들을 들으며 책 ‘새로운 자본주의가 온다’(스튜어트 L.하트) ‘두려움 없는 미래’(게세코 폰 뤼프케)가 떠올랐다. 경제위기와 근대화의 추구가 낳은 전지구적 환경문제에 대한 제3의 대안들을 모색하려 애쓰고 있는 책들이다. ‘다른 누군가의 세기’는 대안모색이라는 전면적인 목적은 없었지만 이 또한 이들의 미래모색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얼핏 보면 패트릭 스미스의 논의는 서구 혹은 아시아의 특정 대상을 호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논의는 전 세계가 함께 아시아의 지금의 모습에서 세계가 추구해야 할 미래상을 찾자는 의도로 읽혀진다. 그래서 그의 이 저서는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아시아를 과거의 식민지로 위치시키는 서구의 시선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고, 아시아에게는 격려이기도 하며 모두에게 새로운 정체성, 옳은 정체성 모색에 고민해야 한다는 촉구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세기가 되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그 누군가가 되는 것이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 옳은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면 그것이 그 어떤 누군가만의 이데올로기가 되겠는가. 진정 옳은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옳다는 가치로 제시될 것이며 이는 누군가의 기득권을 위해서가 아닌 진정 인류의 미래를 위한 전지구적 정체성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패트릭 스미스의 사실, 사례 위주 나열 식의 이 저서는 기득권에게 경고를 하거나 전통적 모습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등의 논리를 가진 저서들과는 분명 차별점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인도의 사례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급진적인 서구식의 근대화 추진과 서구의 노동시장, 소비시장으로서만 존재해왔던 아시아의 국가들은 그 급진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 서구보다 더 불평등과 환경오염의 문제에 부닥쳐야 했으며 그 빈곤의 문제와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을 더 먼저 시도하는 국가들이 되었다. 무조건 서로의 전통으로 돌아가자가 아닌 그 이전의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으로의 회복이 진정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저자가 들려주는 일본 기타큐슈의 사례, 인도의 사트얀 미슈라가 진행하고 있는 사우트라 마을의 드라슈티 사업 등이 인상적이다. (드라슈티 사업을 스튜어트 L. 하트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온다>의 표기로는 사탄 미시라의 드리시티 사로 소개된다.) 모두 맹목적인 근대화의 도시위주의 삶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대체사업의 결과들이다. 이 대체사업의 근간에는 근대화의 문제점과 패트릭 스미스가 말하는 르상티망과 향수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저자가 서구와 아시아 전통사회, 그리고 근대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동시에 존재하는 르상티망이라는 각각의 이중적인 현재에서 제3의 대안이 발생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적인 저자의 예로 현대식 유리건물 안의 일본식 정원처럼 이종교배된 현실, 바로 그 현재를 포용하면 제3의 새로운 정체성이 떠오른다. 바로 그 자주적인 근대성(근대화와 차별적인 이 용어가 저자가 주장하려는 핵심이다)이 근대화를 추구하는 서구시대에 대한 탈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여기에는 –저자가 제시한 사례들처럼- 자국의 피해의식을 강요하는 역사와 함께 근대화와 함께 이루어진 -인도의 종교와 중국의 정치적인 그것처럼- 폭력과 가해의 역사까지도 인정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것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르상티망과 향수를 허무주의와 상실감에 젖어있기 보다는 끊임없이 서구식이거나 전통회귀주의를 넘어선 다른 무엇인가를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딱히 패트릭 스미스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어서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시아의 허무주의와 비관론으로서는 미래 자체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대안서들이 그랬던 것처럼) 희망과 적극적인 실천에 대한 촉구를 전제로 해서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게끔 하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가 기분 좋은 긍정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일게다. (참고할만한 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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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변하는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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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이래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급성장을 이루며 가시적인 성과들을 나타내자 요즘 일부 시각에서는, 경제학적인 관점을 들어 21세기가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조심스럽고 낙관적인 견해들이 힘을 받는 듯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세계를 주도하는 힘을 경제적인 부분에서만 한정한다는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성장 동력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너무 섣부른 판단은 아닌가 하는 비판적 의견도 만만찮게 개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과연 그들의 말대로 21세기가 아시아의 세기가 될 수 있을 만큼 그 제반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 가능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우리가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관점은 조금 다르지만 저자 역시도 이 책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역사의 과정으로 볼 때, 19세기는 서구의 세기였고, 20세기가 전환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또 다른 주체가 주도할 세기라고 질문하면서, 그동안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 즉, 일본, 중국, 인도의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여러 근거의 예를 들어 그 주체를 아시아로 유력하게 보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우리가 단순하게 간주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것은, 아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어떤 면에서 보면, 서양인이면서도 동양의 흐름을 동양인 보다 더 깊고 폭넓게 꿰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같은 사실을 두고도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결과의 차이는 명확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지나온 역사와 그가 경험했던 수많은 사실의 내용들이 나름 구체적이고 객관적이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한번 주시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서구의 물결이 아시아로 그 방향을 틀면서 19세기의 동양은 서구의 새로운 물질주의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자구책으로 봉쇄라는 빗장을 걸었지만 결국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시아는 자신의 속내까지 내어주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과학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근대화라는 사실관계에 묶여 점차 함몰되어 갔으며, 이 과정에서 동양은 그의 말대로 지난 160년간의 진행된 불평등의 역사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동서양간의 문화교류기간 동안 그 이면에 동양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만연하다는 것과, 서구에대한 적개심과 분노, 그리고 침잠된 무기력이 짙게 배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지금의 아시아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존감을 되찾고 내부적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 새로운 움직임들을 우리가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아시아는 그러한 세 가지 요소들을 해소하고 그동안의 정체성과 역사를 재확립하여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대부분의 서구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동양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탈 서구화로 보아야 할 것을 서구를 따라하는 모방의 한 형태로 본다거나, 동양 스스로가 과거로 회귀하려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다소 근시안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동서양을 가름하는 임의적인 경계선을 이미 그어놓고 어느 한쪽에서만 이를 이해하고 바라보려는 인식은 자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일대학 폴 케네디 교수가 말한 “권력의 영고성쇠는 서진한다. 먼저 대서양을 건넜고 이제 태평양을 건너간다.” 말을 인용하여 이에 동감을 표하면서, 아시아는 그동안 공업화와 물질적 발전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적잖은 혼란과 자기정체성을 겪었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벗어나 동서양을 총괄하는 근대성을 어떻게 표출해 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아시아의 선두권에 서있는 일본의 경우 기타큐슈의 공업도시가 오늘날 그 모습을 바꿔 친 환경도시가 되어가고 있음을 그 예로 들고 있다. 특히 그가 바라보는 아시아의 세 나라의 시각 중 눈에 띠는 것은 인도에 관한 견해인데, 인도의 진보과정은 일본이나 중국의 순차적인 형태와는 다른 동시다발적이라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이나 중국처럼 서구에 대해 이중적 자아를 취하지 않는 다소 포용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모호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도는 물질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일본, 중국과 현격한 차이가 날 정도로 뒤처지긴 했으나, 대신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이 겪었던 뼈아픈 실수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인도의 내부적인 문제점을 들어 앞으로 다소 혼란을 겪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조만간 큰 저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하는 듯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결론적으로 서구는 더 이상의 근대의 주인이 아니라고 단언하면서, 그동안 아시아는 서구를 연습하고 학습한 뒤 서구의 관점으로 자기를 이미지화함으로서, 21세기가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을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사는 현시대가 여전히 불확실하며, 아시아의 탈 서구화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 되어갈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만 서양적인 것 혹은 동양적인 것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의 틀에서 벗어날 때 우리가 비로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가 피력하는 아시아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전망이 어떤 면에서는 반갑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가 생각과는 다르게 오늘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부정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회의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껏 아시아가 걸어왔던 역사의 과정을 충분히 되짚어 보고, 또한 실제 많은 시간을 아시아에 거주하면서 몸소 경험해왔던 여러 사실에 근거해 볼 때, 그가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관점에서 오늘의 아시아를 재조명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되며, 또한 이전과 달리 아시아의 힘이 새롭게 부상되고 있는 요즈음 그 동력의 힘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불어 이 책에 비록 우리나라가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논의했던 탈 서구화라는 큰 흐름에서 우리가 서있는 만큼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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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일본을 보자"라는 말은 이 책의 출발점이다. 흔히 서구의 사람들은 현재에도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공통점, 세계화 시대를 사는 공통점은 무시하고 서구의 모습을 삭제한 뒤의 아시아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인 모습만이 아시아의 것이며 현재 향유하는 아시아의 모습은 모방이라 보는 것이다. "아시아는 스스로 자극요소를 생성하기보다는 여전히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반응하고 있었다."는 저자의 경험은 마치 다른 서구인처럼 아시아를 보는 것 같으나, 홍콩에서 오래 일한 일본 전문가로서 아시아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이 책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아시아학에서 중요한 진보를 의미한다. 현재까지도 서구적인 요소는 모두 삭제한 채로 아시아를 관찰하는 시각이 서구인의 지배적 관점이며, 이것은 학자이든 전문가이든 일반인이든 마찬가지이다. 아시아 현대화의 가장 후발주자인 중국의 현황을 살펴 보면, 우리도 서구처럼 할 수 있다는 과시형의 모순된 행태를 드러낸다. 전통을 버려 우월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저자 스미스 씨는 이것은 중국의 이행단계의 하나에 불과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인구라는 측면에서 인도와 중국의 합성어인 친디아(Chindia)라는 말은 세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비공식 통계의 관점에서) 두 나라의 발흥이 앞으로 50년 뒤, 100년 뒤를 좌우할 것이라 평가해도 그다지 무리는 없어 보인다. 초기에 아시아 각국은 서구의 문화와 기술에 맹종/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발전을 위한 과도기적에 불과하다. 미국인들 중에도 한국인, 중국인을 보면 과거의 역사적 생활 양식이나 복식, 구관습만이 당신들의 모습이고, 코카콜라를 들거나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 브랜드 제품을 들고 입거나 서구의 주거 양식 또는 빌딩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한국이나 중국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의 경우에도 선진국민으로서 대우하기는 하나 기모노나 사무라이의 모습에 덧입혀 자신들의 것을 입고 먹고 향유한다고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 위와 같이 서구의 렌즈에서 해석되어 온 아시아인들은 정작 어떻게 자신을 바라볼까? 저자의 분석은 주로 일본, 중국, 인도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다. 인도와 중국이 추구해 온 서구화와, 인도가 추구해 온 서구화는 상당히 차이점을 내포한다. 주로 근현대사와 문화적 흐름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저자는 문물이 서구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아시아 각국으로 흘러들어간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1980년대 일본이 서구와 대등한 경제력과 위상을 갖추어 나가면서 일본의 문화 또한 독자적인 모습을 과시하던 것도 사실이다. 비교적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동아시아의 두 나라와 인도의 모습을 관찰하고 분석한 저자는 서구 없는 아시아의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물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분석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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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동서를 나누는 상상의 경계선을 번갈아 넘나드는 움직임으로 규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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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병이 책으로 소개되고 부각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위기 전후 미국의 출판계엔 아시아, 특히 중국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저서들이 무게감을 드러냈고 미국인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미국의 주요신문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20여년을 아시아에서 지낸 저자 패트릭 스미스의 이 책도 미국인(더 넓게는 서구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떠오르는 관심을 주제로 한다. 책에는 주로 일본, 중국, 인도의 세 나라의 실상을 담고 있으나 새로운 세기의 주인공으로서의 아시아에 대한 환기가 주관심이다. 비판서나 강한 주장글이라기보다는 각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내용을 글 속에 풀어놓거나 직접 방문한 곳의 인상을 편하게 기록하고 있는지라 글의 맥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는 그의 일본인식을 비롯한 아시아인식에 대한 의문점도 생기고, 한편 아시아의 주요 국가로서의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자가 길게 설명하는 아시아의 근대시기 역사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19세기와 20세기 전반의 서구열강의 난립이나 20세기후반의 미국식 패권주의의 지배의 시대에서 21세기는 또다른 세기가 될 것이며 그 본질은 탈서구이고 무대의 주역은 아시아라는 주장은 관심을 끌기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