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은 서쪽에서부터 오고 있다. 공기 속에 수증기를 잔뜩 품고서 말이다. 이층 창가에 서서 저녁이 오는 거리를 내다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 위로 서쪽 하늘이 한 겹 내려와 앉는다. 자주 서쪽 하늘을 쳐다보는 이의 하루는 남들보다 더 고단했으리. 삶의 불안감을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집의 제목은 감미롭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내려앉는 저녁의 폭격 아래 위태롭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리. 이때 몸을 숨기고 싶은 곳이 바로 ‘저녁의 슬하’다. 시집 안에서 시인의 모습을 본다.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아서 더 잘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시의 행과 행간 사이에 걸터앉아 있는 시인의 모습은 둥글게 등을 말아서 발톱을 깎고 있고, 붕어들에게 미끼를 뜯어 먹히며 오래도록 낚시를 한다. 자신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몽상가’라고 치부하면서도 누군가 연못가 벤치에 누워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커다란 연잎을’ 덮어주기를 바라는 소박한 사회인이다.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이 환자인지, 직원인지 헛갈려 하는, 그래서 어느 날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엎드려 우는 시인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시인의 몸에는 슬픔과 외로움이 곳곳에 배여 있어야 하는 걸까. 「십이월」을 읽고 있으니 명치끝이 무겁고, 「몸무게를 다는 방법」을 읽으니 육신 있는 것들이 겪어야할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제는 추레하고 늙은 “노모가 걸레 한 쪽을 까뒤집어/눈가를 닦는다 걸레로 입가를 닦” ( 「여름 」)고, 한평생 공사장을 떠돌던 늙은 인부는 “홀로 저 모래밥 다 비벼 먹고 저승길”( 「모래밥 」) 가야하는 것처럼 사는 일은 외로움과 슬픔을 꽉 껴안고 가는 것이라고 시인은 자신의 몸에 감겨있는 시의 언어를 풀어 시집에 옮겨놓았다. 그래도 삶은 살아야 맛이고, 시는 고단하면서도 슬픈 그 삶을 노래할 때 읽을 맛이 난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사람을 쬐다」)를 읽으며 그렇지 그렇지라고 수긍하고 있는 내 손등에도 어느 새 검버섯이 피었고 얼굴에도 엷은 검버섯이 진행 중이다. 언젠가는 집 앞의 어느 계단에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사람을 쬐다」)는 것을 낙으로 삼을 것이다. 다가오고 있는 삶의 저녁에는, 나도. 저녁에는 시인처럼 저수지에 가 있고 싶다. 저녁이 주는 초조함이나 적막 같은 거, 어디에도 풀 길 없어 그저 저수지로 달려가 ‘아무 돌멩이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멩이를 던지며 저수지를 배회하다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저녁의 회한을 두르고 저수지에서 열리고 있는 저녁의 잔치에 참여해보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시인처럼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이상 「저수지는 웃는다」)을 한탄하며 한 웃음 터뜨리고 싶다. 툭툭 털어내지 못한 온갖 관계의 거미줄에 휘감겨, 올라갈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저수지를 내려올 수밖에 없다 해도. 삶이 본래 고해라는 걸 알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쇠스랑을 들고 쫒아가고, 어머니는 짐승들 밥을 주면서 그 뒷덜미를 탁 치며 화풀이를 해대는 것처럼 정신병동에는 격동의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선한 사람들이 모여 그들만의 사회 안에서 둥글게 적응하고 있다. 저녁에는 우리들 안과 밖의 모든 것이 겸손해져 내려앉는 시의 살갗에 몸을 맡기고 고요해지라고, 그 안에서 신의 선물인 내일을 기대하며 온전히 정신과 몸을 맡겨 보라고 시인이 말한다. 그리하여 시집을 덮으며 저녁은 마무리가 아닌 또 다른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이라고 믿게 되었다.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들깻잎을 묶으며」) 저녁의 슬하가 따뜻하다, 내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