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아를 기억한다. 지금은 텔레비전 광고에 주로 얼굴을 비추지만, 그녀가 선수 시절에 빙상 위에서 펼친 연기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완벽한 동작, 섬세한 표정과 제스처,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정확성은 피겨 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준다. 트리플 악셀이라는 피겨 스케이팅 용어가 귀에 익게 된 것도 김연아 덕분이었다. 나는 광고 모델 김연아가 아닌 빙상 위의 김연아를 더 기억하고 싶다. 광고에서는 그녀가 상품으로 전시될 뿐이지만 피겨 스케이팅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극점에서 실현한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통달하여 비범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경탄한다. 그들의 솜씨를 일컬어 신의 경지라고 칭송한다. 보통 사람의 기량과 비교하여 동뜨게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그리고 그 성취가 일회성의 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처럼 보이는 성과가 계속해서 실현되는 사람들. 보통 달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수행으로 탁월성을 증명해 보인다.
『집중과 영혼』은 이처럼 인간적인 존재를 넘어선 인간을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김연아와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도달한 그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 김영민은 그 알짬이 인간의 '집중'하는 능력에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런저런 일에 마음을 쏟는 가운데 한 곳에 의식을 모으는 경우가 있다. 학교에서 집중은 흔히 들리는 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집중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동물의 수준 너머에 있는 인간적인 태도를 주문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은 인류가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갖게 된 특이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특이한 까닭은 그것인 생존과는 무관한 의식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집중의 반대편에 '애착'이 있다. 욕망은 바지에 엉겨붙는 껌처럼 대상을 모르고도 그것에 달라붙는다. "인간의 갖은 욕망이 부리는 리비도적 애착은 마치 점성 좋은 껌같이 오직 그 장소, 그 시간, 그 관심만을 고집하며 비켜나지 않는다. 껌은 바지를 모르지만, 필경 파괴적으로 바지를 고집하는 것이다." (12쪽) 리비도는 자기를 분출할 대상을 성급하게 찾는다. 애착의 특성은 참지 못함, 즉흥성에 있다.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동물적 특성은 과거 동서양의 철학자에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손에 들고서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그리하여 신체로 인해 더럽혀진 영혼의 정화라고 주장했다. 달뜬 욕망은 인간의 균형감각을 해치고 동물적 상태로 타락시키기 때문에 야생마를 조련하듯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니체가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라고 했듯,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인내와 절제는 인간적인 행동이다. 먹이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고양이에게 "다음에 줄게!"라는 말은 허망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다음에 줄게!"가 효용을 가지며, 인간은 그 말에 담긴 약속을 믿고 이행할 줄 안다. "내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상하는 존재, 기대를 생산하는 존재”인 것이다."(30~31쪽)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의식'의 발달은 인간 존재의 혁신을 가져온 진화사의 한 결절점이 된다.
그런데 집중은 인간이 지닌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곳에 집중할 때에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표백되고 자기를 잊어버린 채 대상에 몰두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주일무적, 성성적적의 경지라고 일컫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망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중의 요체는 의식의 힘을 통해서 의식의 토대가 되는 '나'를 잊음에 있다. "비록 좁은 길이고 짧은 체험이긴 해도 최고의 기량 속에서 잠시나마 번득이는 빛은 대체로 에고를 극복했거나 망아(忘我)에 이른 것처럼 보이며, 그 과정은 집중과 구성적으로 관련된다." (249쪽) 이덕무는 팔뚝이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는 글쓰기 체험을 증언한다.
내 마음은 한 가지 경계에 깃들어 형상과 접촉하여 만약 하는 바가 있게 되면, 갑자기 눈동자가 돌아가고 팔뚝이 움직이며 손가락이 덩달아 붓을 잡는다. (…) 마음은 눈을 잊고, 눈은 팔뚝을 잊고, 팔뚝은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벼루는 붓을 잊고, 붓은 종이를 잊게 되니, 이러한 때에는 팔뚝과 손가락을 마음과 눈이라고 불러도 괜찮고 먹과 벼루를 붓과 종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고요히 마음을 거두고 맑게 눈을 안정시켜 (…) 잠깐 사이에 붓과 종이, 먹과 벼루, 마음과 눈, 팔뚝과 손가락은 서로를 도모하지 않고, 또 앞서 하던 일을 까맣게 잊게 된다(195~196쪽, 정민 2000 재인용)
육체를 벗어나는 노력이 의식이라면, 의식을 넘어서려는 노력에 집중이 있다. 자기가 지닌 애초의 그릇의 한계를 넓히려는 노력이 공부일진대, 공부의 중심에는 집중이 있게 마련이다. 김영민은 다양한 각도에서 자기(1)를 잊는 영도의 체험(0) 또는 나(1)와 너(2)가 맞부딪히고 어긋나고 분망해지는 세속을 벗어난 (귀)신의 경지(3)를 언급한다.
대개 달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완고한 에고를 잊어버리는 체험을 증언한다. 일본의 마사지사들은 손님의 몸을 마사지하는 상황에서 손님의 몸을 치료하는 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대신 마사지를 해준다고 느낀다. "진짜 달인은 자신이 손님을 고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손님을 둘러싸고 있는 큰 존재의 힘을 빌려, 그걸 손님 몸에 흘려넣어요. 우리 마사지사는 그 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304쪽, 이소마에 2016 재인용)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낌새나 기별과 같은, 오늘날 '미신'으로 간주되는 앎의 영역은 나의 깜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내 몸을 통해서 감지되는 타자를 예감케 한다.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신칸트학파의 교수는 일본에서 활쏘기를 배울 때, 길을 잃고 헤매는 심정으로 활을 쏘다가 어느 날 스승인 아와 겐조가 보는 앞에서 무심히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더니, 스승이 엎드려 절 하면서 "그가 쏘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나와 싸우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나를 잊었고, 그렇게 찾아온 '그'는 무심한 몸에 자연스레 들어선 것이다(310~311쪽 참조).
차분한 집중의 형식은 에고를 넘어서기 위해 에고를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을 임계점까지 밀어붙여야만 의식 아닌 의식의 지점에 도달하고 '그'를 불러들일 수 있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상념이 사라진 상태가 공(空)이지만, 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념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출세간의 목적이 출출세간에 있듯, 불립문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잊어야 한다. 그러니 집중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적인 행동과 그에 가미된 정성이다. 반복되는 행동을, 정성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행하게 될 때, 나를 잊으며 내 몸에 없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다. "과연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차분하고 견결하게 이루어지는 집중과 정성이야말로 달(達)과 성(聖)으로 가는 좁은 길이다."(360쪽)
집중에 의해 터득된 앎은 알고도 모르는 역설적 지경에서 성취된다. 자아를 망각하는 경지는 얼핏 광기나 치매와 겹쳐 보인다. 광기와 치매 둘 다 자아를 잊은 상태라는 점에서는 집중 행위와 동일하다. 천재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과 그에 동반하는 창조성은 집중과 광기의 형식적인 동형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집중은 형식이되, 내용을 잃은 형식이 된다. 내용은 영도에 이르고 형식만 남은 상태, 그곳에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새로운 창조성이 발생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바로 이 인(仁)하다는 말 속에 집중의 역설성 혹은 집중의 탈세계성이 새겨져 있다. '인하다'는 것은 생이불유(生而不有)하듯 부드럽게 옮겨가는 처신이며 이윽고 '오른손이 한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인데, 이는 응당 불가능한 행위다. 그것은 의식의 바다에서 올라온 집중이 바로 그 의식을 초월하는 지경의 불가능성을 잠시의 무지개처럼 내보이는 형식이다. (439쪽)
김영민이 일러주는 달인 또는 성인의 변증법은 결코 자기계발 담론이 아니다. 자기계발이 완고한 에고를 확증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실현시키는 세속적 삶의 적응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김영민이 강조하는 달인이나 성인이 되기 위한 절차탁마의 과정은 오히려 에고와 세속을 떠난 자리에서 지속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려는 방향성이며, '선비로 시작하여 성인으로 끝마친다'(순자)에서 확인되듯 삶을 조형해가는 의지이다.
나는 최근에 글씨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평소 글씨체가 악필이어서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에도 서류를 읽는 상대방이 글자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글씨체를 바꿔보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생각이 그치면 글자는 이내 예전 모양으로 회귀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글씨체를 바꿔주는 책, 『나도 손글씨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를 샀다. 책에서 제시하는 글씨체를 '본'으로 삼아서 그 본이 보여주는 '틀'에 따라 그대로 따라쓰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최근 3주 동안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글씨를 썼다. 글씨체를 눈여겨 보고, 글자에 따른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신경쓰면서. 첫 일 주일 동안은 천천히 쓰면 다른 글씨체가 나왔지만 빠르게 쓰자마자 바로 예전 글씨체로 되돌아왔다. 기존의 버릇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주가 지나자 신경 쓰지 않는 순간에도 '본'으로 삼은 글씨체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쓰더라도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가로획을 쓸 때 왼쪽으로 조금 더 뻗은 모양이 되고, 자음 이응이 더 원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 의식의 타자인 몸이 움직인 덕이다. 식별이 불가했던 악필은 천천히 쓰면 꽤 균형잡힌 글씨로 보일 만큼 변모했다. 여전히 삐뚤빼뚤한 부분이 있어서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계속한다면 더 좋은 버릇이 몸에 깃들 것이다. 늘 그 '꼴'이었던 내 글씨체는 '본'을 만나서 하나의 '틀'을 얻었다. 그 틀에 복종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예전 그 꼴 그대로였을 것이다. 자기 변화의 요체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틀에 대한 복종에 있으며, 그 과정에 담기는 인간의 집중과 정성에 달려 있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한 집중의 양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훨씬 방대한 영역에서 집중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차분함을 서술하는 데에 한 장을 할애하기도 하였고, 공동체적 삶 속에서의 집중과 공부에 관한 담론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출출세간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공동체론은 타인의 비평에 노출된 가운데 좋은 몸을 얻고, 적절하게 응하며, 현명한 복종과 지배를 실천하는 생활양식을 벼려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가 세속을 떠나서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의한 자는 탈속이 아닌 세속에서, 그렇지만 그 세속과 창조적으로 불화하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전에 이이가 성인이 되기로 한 이상 터럭만큼도 물러서서는 아니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듯.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일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제대로 이행한다면 메시아에 방불케 할 실존이리라. 김영민의 책을 읽고 나서 『중용』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성실함[誠]은 진실[誠]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진실(誠)이란 하늘의 길이고,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길입니다. 진실이란 힘쓰지 않아도 중에 들어맞고 숙고하지 않아도 원칙과 부합되므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도에 맞으니 성인에게 가능합니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선을 골라서 굳건하게 잡는 것입니다. (『중용』, 20장) |
|
예절은 속물의 도구다. 속물들은 예법을 윤리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절의 목적은 까다로운 상류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설령 이것이 예절의 목적이고 속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 역사적으로 예절은 사생활 개념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 사생활개념이 개인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6-)
널리 알려진 대로 종교(religion)의 라틴어 어원은 '다시 묶는다.(re-ligare)'이며 , 인간의 눈이 지닌 문명문화사적 의의를 새겨본다면 이는 무엇보다 눈(시선) 을 묶는다는 것이다. 실로 묶음(규율) 혹은 지계(持戒) 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가 드러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문(人紋)의 형식이다. 한 곳이 묶이면 다른 곳이 (더) 풀리는 게 인문의 이치이기 때문이며, 사람을 포함해서 무엇이든 유기적으로 일체를 이루는 존재는 이런 상보적 보상의 장치를 활용하도록 진화하고 적응하게 마련이다. (-112-)
전술했듯이 집중은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프로이트와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를 거친 현대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노라면 무적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차마 '기적'이라 불릴 만도 하다. 실없는 상념과 변덕들이 사방에서 콩 볶듯이 날뛰는 판국이니 비록 잠시라도 하나로 일관할 수 있는 게 그 자체로 중요한 능력이자 미덕이다. (-197-)
내가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용어 중 하나로 '내 것이 아닌 자신감'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감이라는 게 말 그대로 나 자신에 처한 감정이니 일견 형용모순일 듯하지만, 바로 이 모순의 자리에 틈을 얻어 예상치 못한 기별을 알리는 게 인간의 정신이라는 기묘한 매체다. 나 자신의 경우도 이 용어의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이 용어를 구상하거나 떠올리고 강화하게 만든 경험의 상당 부분은 대학 안팎에서 행한 강의/강연과 관련된다. (-261-)
내가 오규 소라이를 탁월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중국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적어도 일본의 지식계급은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중국 고전을 완전히 자기 교양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 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일고 있을 뿐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 선언은 마치 콜럽버스의 달걀 같은 거지요. (마루야마 /가토 2003.31)(-343-)
그러므로 집중하는 사람이 집주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의 집중이 얹힌 생활양식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의 집중이 이웃과 세상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등속의 문제가 다시 '문제' 가 된다. 이런 뜻에서 집중은 문제의 해결이라기 보다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발굴에 가깝다. 그러므로 집중은 정신의 영도라는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얻는 어떤 '본질' 로 이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여건과 매체의 조건에 얹혀 점진적으로 개량되는 극히 인간적인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선 집중이라는 행위는 , 베유가 '완전히 순수한 집중'을 요구했던 것처럼 그 강도(Intensity) 가 중요하다. 공중에 있다고 해도 추락은 이미 비상이 아니듯, 엄벙덤벙, 데면데면하다면 이미 그것은 집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411-)
세계 최고의 성매매 국가이면서도 기이하게 몸을 꼬고 사리는 한국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치마와 자전거를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일까? 별 이유 없이 거대한 포식자로 살아가고 있는 미국은 치마든 무엇이든 아예 자전거를 깔아뭉갤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중국인이라면 대륙적인 대범함에다 또 사회주의적 평등을 거쳤으니 어저고저쩌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 생각한 탓이었을까? (-502-)
끊어야 새 삶이 있다. 도려내야 새 살이 돋는다. 그리고 끊고 비운 자리에서야 비로소 영혼의 샘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론들이 ,제도들이, 타협이, 그리고 기도가 끊어내지 못한 자리에서 불천노의 집중은 우리 삶의 질을 일상의 낮은 자리에서부터 차분하고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집중의 모방이 , 불천노의 전염이 필요한 사회다. "모방은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을 전염시키며 거기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581-)
나는 깨어나자마자 꿈을 기록해두었다. 아직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교회 대학부실에서 무언가 남은 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교회 사무실 전화를 통해 어머니로부터 전화 연락이 닿았다."퍼뜩 집에 오거라....큰 난리가 았다. 난리가!"알다시피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격을 받아 죽은 날이다. 복기해보면 상술한 꿈을 꾼 것은 대체로 그가 죽은 후 불과 몇 시간 사이였던 듯하다. 당시의 내가 어느 정도는 종교신비주의에 젖어 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후 오랫동안 내 혼잣속으로는 박정희의 피살을 정치적 사건이자 일종의 '종교적 사건'으로 납득했다. 물론 상술한 꿈의 영향 때문이었다. (-636-)
부탁이라는 발화수단적 행위 속에 적시된 욕망의 대상은 ,바로 그 부탁이라는 수행을 통하면서 바뀐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대상은 심적 표상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욕망을 향한 이러저러한 수행을 거치면서 덧칠되는 것이다. "대상의 분제가 아니라 주체가 타인(들),특히 대타자들과 맺는 상호작용이 요점'이라고 했지만, 이 부탁의 수행도 그저 교환(echange)이라는 수평적 거래로 마감되지 않고 일종의 연대(alliance) 에 이르기 때문이다. (-699-)
공터는 원래 시간과 장소에 제한 없이 우연히 생기기 때문에 시내 어디에 어떤 공터가 있는지는 땅으로 사기 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미리 알수 없다. 그곳을 지나면서 비로소 그 땅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공터는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도시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한동안 풀이 자라던 공터에 땅이 다져지고 드디어 건축 공사가 시작되는가 싶으면 어느 새 그 옆집이 철거되고 , 어떤 때는 화재로 불탄 다른 공터가 생긴다. 그리고 한 차례 비가 오면 곧바로 잡초가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눈 깜작항 사이에 나비나 잠자리가 날아다니며 귀뚜라미가 뛰어다니는 들판이 된다. 바깥 울타리는 있으나 마나 지나는 사람들의 게다 발자국으로 좁은 길이 자유자재로 열려 ,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밤에는 남녀의 밀회 장소가 된다. 여름에 도처의 젊은이들이 어설프게 스모대회를 열 수 있는 것도 공터가 있어서다.(-784-)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강자와 약자 중에서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혐오하게 될까?피해자가 가해자를, 그리고 넓게 보자면 약자가 그 약자와 관련되는 강자를 혐오하는 게 일견 당연하게 여겨진다. 군대의 총기 사건이나 자살 테러가 전형적이다. 한국에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 총기 사건의 경우에도 계급적 강자가 계급적 약자를 향해 실탄을 쏘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남자와 여자를 병장과 이등병이나 사자와 가젤에 맞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이등병과 병장의 관계는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견주어 비교할 수 없이 단순하며 주로 권력의 기울기에 의해 좌우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남혐(男嫌)'이 아니고 '여혐'이 주제어가 되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강약의 이치만을 따지면 응당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자신들을 지배해온 남성을 혐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833-)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의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가. 십 수 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사태를 상기해보자.빈민가의 군중이 도심의 부유층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신의 이름으로 벌주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 떼 같았다. (-890-)
한편 철학과 인문학에서도 지식의 거리감 혹은 애매성은 이와 무사하게 작동한다. 이 경우에도 포르노와 신비주의가 있으며,메시아와 유토피아가 있다. 부주의와 태만, 어리석음과 둔감 탓에 재발하는 애매성은 의외로 잦다. 지식인들은 짐짓 '소통과 이해의 불가능성'을 나직하게 읊조리며 이 애매성을 형이상학화하려고 하지만, 정작 필요한 일은 꾸준한 청소와 정돈 정도의 노력이면 족하다. 하지만 지식의 경우에도 메시아적 소망이나 유토피아처럼 간단히 치워낼 수 없는 애매성이 나타난다. (-953-)
철학자이며, 숙명여대 교수 김영민의 철학 에세이자 철학비평서 『집중과 영혼』은 2017년에 쓰여졌으며,그가 쓴 저서 중에 1000페이지로서, 가장 두껍다. 즉 그가 생각의 사유를 『집중과 영혼』 에 집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학국어 언어를 해체하고 있었다. 인간이 추구해온 보편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바로 잡는다. 예절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그것이 왜 태동하였으며, 예절의 본질과 합목적성, 그리고 예절을 추구하게 되면 얻는 이익과 불이익을 말하고 있었다. 예절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인간의 계급사회를 검증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속물이 만든 사회적 도구가 예절이라고 말한 대목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는 집중에 대해서,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집중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을 완전함으로 연결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은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는 일침과 연결될 수 있고, 무결함, 완벽함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어떤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으, 달인이나,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추구하는 바,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보편적 가치에 휘줄리지 않고,누군가에게 유혹되지 않으며, 나만의 세계를 형성한 이들에게 갖춰질 수 있는 무형의 가치이며,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면서,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업적이나 흔적은 남는다.조선의 이순신, 피겨의 여왕 김연아와 같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집중과 영혼』이라는 단순함과 저자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김영민 식 철학 사전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단어에 대해서 그것이 신뢰받는 국어학자에 의해 쓰여진 뜻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때가 있다.이치에 대한 탐구가 텍스트에 기록된 상태에서, 그것이 만들어진 체계와 과정을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책에 적혀 있는 혐오란 단어만 보다라도 그러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혐오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계획된 행동이나 폭력을 가할 때, 강한 자에 대해 사회적 혐오감을 표출한다. 얼마전 뉴스에 나온 부산 돌려차기 남성 가해자의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회는 그 남자에 대해 사회적 혐오를 표출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남자에 대해 남혐이라고 즉각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사건으로 고oo 전 남편 살해 사건 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건은 다르다. 여혐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라는 단어에도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한다. 관대함이라는 단어도 어어적 불평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혐을 사회적으로 수면 위로 띄우지만, 확산되거나, 확대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계급에 대해서, 같은 가해자라 하더라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메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흔하게 쓴 단어의 모순과 의선에 대해서,본질적인 원인과 함께 사회적 메시지, 언어적 도구로서 이치까지 아우르고 있다. 어떤 단어가 어떤 상식이 제대로 반영되고, 정착하려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계급사회, 힘의 논리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책 『집중과 영혼』 을 읽어야 하는 목적이며,그가 생각하는 언어의 본질적인 해체라고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