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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저주와 한 소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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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얘기하자면, 이소벨 페어팩스라는 소녀의 성장기이고, 길게 얘기하자면 페어팩스 가(家)의 몰락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한 소녀에 집중하든 한 가문으로 넓혀 보든, 별로 차이가 나질 않는다. 소녀의 몸과 정신에는 저주와도 같은 페어팩스 가문의 300년에 걸친 역사가 그대로 담겨져 있으며, 페어팩스 가문의 음울한 과거는 또한 이소벨을 통해서 발산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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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얘기하자면, 이소벨 페어팩스라는 소녀의 성장기이고, 길게 얘기하자면 페어팩스 가()의 몰락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한 소녀에 집중하든 한 가문으로 넓혀 보든, 별로 차이가 나질 않는다. 소녀의 몸과 정신에는 저주와도 같은 페어팩스 가문의 300년에 걸친 역사가 그대로 담겨져 있으며, 페어팩스 가문의 음울한 과거는 또한 이소벨을 통해서 발산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서로 얽혀 가며 서술하는 방식은 케이트 앳킨슨의 전매특허 같은 방식이다. 첫 장편소설 《박물관의 뒤 풍경》도 그랬으며, (《인간 크로케》보다는 나중 작품이지만) 《살인의 역사》도 그랬으며,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는 더욱 그랬다. 그리고 《인간 크로케》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펼쳐내는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보다는 좀 소심하기는 하지만, 이소벨의 정신 세계에서 하나의 삶이 실패작처럼 여겨졌을 때 새로운 삶을 새로 시작하는 장면들을 여러 차례 연출한다(형식은 이소벨의 시간 여행이다). 케이트 앳킨슨이 그런 기법에 천착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기법을 통해서 한 사람이, 한 시대가 원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여러 차례 되짚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소설은 사실 음울하다. 《살인의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이 《인간 크로케》에서도 살인, 영아 유기, 가정 폭력, 근친 상간 등이 한 가문과 지역의 역사에 드리워져 있다. 마치 그런 것이 없었다면 현재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의 쾌활함도 매우 애처롭게 보인다. 아마도 그건 그런 쾌활함의 끝이 어떨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등장인물들이 던지는 유머 자체가 그렇게 밝은 것도 아니다. 그 숱한 반인륜적 범죄’(그러나 아무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가운데 유머를 밝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서늘하게 충격적인 장면은 이소벨의 엄마 엘리자의 과거사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거의 끝까지 밝히지 않다예쁘디예쁜 길이라는 아주 역설적 제목의 장에서 드러낸다. 귀족 가문의 공주로 태어났다 공원에서 유괴되어 자라났고, 결국은 매춘부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엘리자였다. 심지어 그녀의 생부와도 관계를 하게 되는이 비극적인 상황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그랬는지, 더욱 아이러니한 삶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귀족 가문의 공주로 태어난게 아니란 걸 밝히며(프랑스에서 사온 아기였다) 또 한번의 반전을 선사하며 전율에 떨게 한다.

 

이소벨은 자신이 존재하기까지의 음울하고도 충격적인 과거를 모두 알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삶의 긍정성이랄까? 작가는 이 더러운 역사를 뚫고서라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직접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살아온 주인공을 통해서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제안을 넌지시 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은 간단없이 돌아갔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485)

 

* 그래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 크로케라는 제목이다. 이게 어떤 게임인지도 모르겠고, 왜 이게 제목이 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YES마니아 : 로얄 n*****m 2020.01.27. 신고 공감 8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