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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4기-5
내가 고민해본 ‘시간’이란 개념적 접근은 시간을 3등분 한 ‘과거, 현재, 미래’ 정도 수준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미래를 미리 가보는 미래 모습을 상상해보긴 하지만 이것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상과학영화에 가끔 등장했던 타임머신의 존재는 결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란 개념을 추적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어떻게 보면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역을 침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의 짧은 생각은 과학적 논리와 멀고 주관적 상상력에 치우친 공상놀이에 불과했다. 한국인에겐 가장 친숙한 과학자 이름이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그가 찾아낸 상대성 이론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 책에서 ‘시간’이란 주제를 가지고 기승전결로 내용을 구성했다한다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승’에 해당한다.
이 책 집필의 목적이 ‘시간론’이라는 물리학의 추상적 개념을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론을 설명하는 그림과 도식이 많고, 분량도 200페이지 정도로 비교적 적다. 그렇다면 과연 쉽게 접근은 가능했을까? 먼저 독자인 나에 대한 객관적 독서 수준을 설명해야 다른 이에게도 적용할 수 있겠다. 나는 4년제 대학을 나왔고 5차 교육과정 세대로서 인문계열 출신이나 과학과 미적분까지도 배운 사람이다. 내 수준에서 과연 이 책은 어려웠을까 쉬웠을까? 저자 다케우치 가오루의 집필 목적이 달성될만한 독자였을까? 나의 대답은 ‘아니오’ 이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으로 쉽게 쓰여 졌다는 것은 체감할 수 있었다. 책의 구성을 먼저 살펴보면 전체 4장으로 1장과 2장은 수리 과학적 접근이라기보다 개념 설명과 역대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했는지에 대한 소개, 그리고 철학적 측면에서 시간을 다룬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나는 2장까지는 무난히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3장부터였다. 3장부터 본격적인 물리학으로 들어간다. 겨우 기억을 끄집어내어 운동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에 다가가 보았지만 그 이상은 넘어서기 힘들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겨우 다음 소주제로 넘어가면 더 큰 장벽이 기다리고 있어서 3장 중반부터 4장까지는 힘겹게 읽었다. ‘시간론’이라는 제목만 보았을 때 어디까지 다루어질 것이라 예상하는가? 아마 가장 광범위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작게는 소립자 수준에서 크게는 우주까지 범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청난 물리학적 지식을 요한다. 하지만 그나마 수박 겉핥기라 할지라도 절반은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저자가 쉽게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때마다 쉬운 비유를 제시해주어서 개념을 명확히 잡진 못해도 어림짐작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할수록 너무 미시적인 세계라서 또는 너무 거대한 세계라서 이게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딴 세계 이야기처럼 들린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이름의 순간일 뿐이다.(32p)". 그 ‘지금’은 공간이라는 3차원 세계에 시간이라는 4차원 세계가 보태어져 있다. 우리가 움직인다는 것은 반드시 시간의 변화가 따른다. 즉 시간은 공간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 내가 광속으로 움직이고 있으면 내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모두 소멸되어버리는 것(왜냐하면 빛은 일직선, 즉 편파가 없기에 공간도 납작하고 시간은 정지된다)이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 상대성 이론이다. 관측자마다 제각기 다른 여러 가지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정한 시간도 같은 부분을 어느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사람의 코를 옆에서 보느냐 정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지만 결국 바라보고 있는 초점은 ‘코’라는 것에 동일하다. ![]() 왼쪽 그림의 좌표 (x,y) = (4,3) 오른쪽 그림 좌표 (x',y') =( 5,0) --빨간 색 축 ∴ 빨간 점은 원래 그 자리에 있고 본질은 바뀐 것이 없는데 좌표축의 이동으로 좌표계 숫자만 바뀔 뿐이다. 즉, 달라진 것은 관측 방법이나 관측자의 '시점'일 뿐이다. 시간을 연구하다보면 결국 우주의 근원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다. 물질의 근원은 우주에서 시작되었고 우주의 원리를 파악해야 시공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머리는 많이 아팠지만 고등학교 이후 손놓았던 과학과 수학 공식을 13년 만에 접해보는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란 이 순간들이 모여 시간의 흐름의 일부분과 공간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고, 공간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고 이것들을 합쳐 대우주를 상상하는 과학자들의 천재적인 놀이에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보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었던 내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 준 문단 하나를 그대로 옮기며 이 글을 마무리 하련다.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할수록 이 문제가 단순히 시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공간과 소립자, 우주의 기본 속성까지 탐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의 근원을 생각하는 것이다.”131p ★편집 오류 발견 115p 1번째 줄 : 열량() -> 열량 132p 밑에서 5번째 : 물릭학 -> 물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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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시간론을 풀어나가려 하고 있다. 바로 유카와 박사를 비롯한 학생대원들과 고양이 에르빈으로 구성된 시간탐험대가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나 <이프 온리>처럼 시간이 반복되는 시공간에서 탈출을 위해 시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는 스토리텔링을 채택한 것이다. 스토리텔링에 꽤 재능이 있으신 저자가 고양이 이름을 왜 물리학자 에르빈의 이름에서 가져왔는지 이들의 마지막 탈출장면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시간론은 주로 물리학자들의 가설과 논증이 대부분이다. 물론 마야와 고대 이집트의 달력이야기들이 제시되긴 하지만 현대까지의 대표적 시간론을 제시하다 보니 주로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가설이 주를 이룬다. 미처 공부하지 못했던 우주와 시간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대한 경험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시간론이라고 해서 선형적으로 흐르는 1차원적(이어서 볼 수 없을 수도 있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공간과의 이야기,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차원과 그 뒤틀림의 가능성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비현실적으로 인지해왔던 영화 속의 시공간을 시간연구자가 되어 볼 기회를 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시간론이라는 나무에 가지를 뻗기 위해 여러 책을 뒤적여야 했지만 우리가 그저 판타지라고 생각하던 미디어 안의 시간, 특히 시간여행과 시공간의 이동에 대한 사유에 적용해 볼 기회가 된 것이 나에게는 가장 의미 있었다. 우리는 <백 투더 퓨처> 시리즈 등을 통해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흔하게 접해왔다. 그러나 그 시간여행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사유해보기란 장르영화의 즐거움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이 독서로 인해 자신이 어떤 시공간 이동을 가장 신빙성 있게 바라보는 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서 저자 다케우치 가오루가 들려주는 여러 시간학자들의 이야기 중 어떤 가설에 공감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타임머신>(2002)의 타임머신은 머신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고 시간만을 달리하는 여행을 하게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스타트랙>시리즈의 순간이동은 동시간대에서 공간만을 옮겨간다. 이보다 나아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이동하는 소재는 소설 원작인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시간여행자는 시간뿐 아니라 공간까지도 전혀 다른 위치로 이동한다. 이처럼 타임머신은 시간을 여행한다는 말에 공간의 이동까지를 사실은 포함시키지 않고 있었지만 이 책의 저자가 설명하듯, 시간과 공간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분명 다른 시공간으로의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론에서 생각은 더 나아가 공간의 불확정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시간과 묶여 있는 어떤 순간으로서의 시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리적 좌표 상의 공간과는 다른 의미의 공간일 수 있다. 영화 타임머신의 경우에서처럼 머신이 시간적 과거의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시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그 공간은 머신이 본래 시동을 걸었던 그 공간과는 다른 개념의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의 저자가 아인슈타인 이후의 시공간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시공간도의 좌표상에서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위치를 가진다는 생각이다. 내가 생각해 온 시간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보다는 바슐라르의 순간의 연속이라는 시간에 대한 정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필름에 대한 강한 인상 때문일지 모른다. 앞으로 이 책에서 제시한 시간의 최소단위에서 얼마나 더 작은 단위로 쪼갠다 할지라도 쪼갬이 연속으로 이어진 필름이미지로 모든 시공간을 인지하는 나에게는 시공간이라는 개념과 순간의 연속이라는 개념이 뿌리깊게 인식되어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아닌 분명한 시공간의 이동으로서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듯 했으나 곧바로 다시 다른 차원으로서의 이동은 시공간의 이동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게 된다. 영화 <로스트 인 스페이스>(1998)는 자기장과 흡사한 ‘막’을 통해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동일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막은 이 책의 시간탐험대가 타임머신을 빠져나오게 한 고양이 에르곤처럼 양자의 역할을 하고 시공간을 잇는 웜홀이다. 이 막을 지나면 등장인물들은 미래의 자신들과 마주한다. 과거로 가기 위해 웜홀을 만들어낸 미래의 자신들이다. 이 웜홀은 킵 쏜의 의견대로 뭔지 이그조틱한 물질로 웜홀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기억에 그 영화의 내러티브 상 자연스레 형성된 그 자기장과 같은 막의 물질성이 힌트가 되고 그 에너지로 인해 또 다른 웜홀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이 동일한 시공간으로 보였던 이유는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볼 수 있었다는 영화적 설정에 있다. 같은 시공간에서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막으로 된 다른 차원과의 조우는 꽤 낯선 풍경이다. 이는 이 책의 많은 시간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시공간이라는 순간의 좌표가 인간의 시력에 의지하는 동일 차원의 개념을 벗어나 소단위의 독립적 시공간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보는 듯 하다. 드라마 <프린지> 시리즈에서는 장치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다. 동일한 인물들이 다른 차원, 세계에서 같은 외모와 비슷한 캐릭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겹쳐지는데 이 세계가 과연 동일한 시공간의 그저 덧차원일지는 내러티브상으로는 확정지을 수 없다는 의문이 든다.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번에 시간론을 공부하면서 덧차원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는데 프린지의 두 개의 세계는 이 덧차원의 개념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공간적으로도 사실은 동 떨어진, 시간적으로도(공간의 차이가 있을 때 어느 한쪽의 시간개념을 적용한다면 분명 시간적 차이가 있을 것이므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장치를 가져다대면 지리적으로 동일한 공간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는 이 시공간의 동일성까지를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프린지에서도 웜홀과 같은 원리의 문을 통해 세계를 오가는데 여기에서 스타트랙의 순간이동과 같은 소립자 분해와 완성이 이루어진다. 사실 지금까지의 시간론에 대한 이 책의 이야기만으로는 소립자 분해와 완성의 가능성, 그러니까 시간이 엔트로피 증가의 한 방향이라고 전제한다면 시간이 홀로 증가하는 것이 아닌 시간의 누적을 경험하는 모든 생물체가 엔트로피의 증가를 경험하므로, 증가상태에서 감소의 시공간으로 이동했을 때의 인체적 엔트로피의 변동성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쉽게 접하는 이 모든 시공간 이동은 이 인간의 인체적 엔트로피의 유동성에서 의문시되는 불가능성을 봉합해버림으로써 리얼리티를 방해받지 않으려 한다. 아마 실제 타임머신의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이 엔트로피의 유동성이 가장 큰 숙제가 되지 않을까. 시간에 지배받는 인체의 엔트로피 증가는 노화 쯤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엔트로피 증가를 막기 위한 방법에 굉장한 관심들이 많지 않은가. 불로에 대한 질문에서 인체와 시공간의 괴리의 충돌에 대한 답으로 갈 수 있지는 않을까. 타임머신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의 실험에서는 부디 엔트로피 증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무생물로 실험하길 바란다. 이 또한 사고의 위험을 배제할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드라마 프린지의 경우에서처럼 다른 차원으로의 불특정 공간으로 옮겨지는 자동차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소립자 분해와 완성을 이용한 웜홀이라면 일부가 재생되다가 가속도의 미세한 변화와 같은 오류로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테니 말이다. 저자자 제시한 코끼리의 체감시간을 보며 든 생각인데 아마도 우리가 실제로 타임머신이나 순간이동의 성공사례를 보게 된다면 몸무게가 매우 많이 나가는 심장주기가 높은 어떤 새로운 생물체의 시공간 이동을 가장 먼저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차원이라는 말의 사용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차원이라는 단어는 상당부분 공간적 개념 위주이다. 위에서 말한 덧차원의 경우에도 시간적 개념을 물론 포함하는 시공간의 개념이기는 하지만 지리적인 공간적 개념의 뉘앙스가 강하다. 한 차원의 시간과 세 차원의 공간이라는 4차원 개념과 초끈이론의 11차원까지를 배우고 나니 우리가 쓰는 4차원이라는 용어의 다양성을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성을 느낀다. 시공간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둘의 불가분성과 속도에 의한 모든 시공간의 상대적 가능성을 염두해 두면 덧차원과 같은 개념에서는 시공간적 동일성이 전제된 차원이랄지, 다른 차원이란 시공간이 다른 세계랄지 말이다. 물론 이렇게 사용한다 하더라도 과거와 미래라는 용어의 시간적인 뉘앙스와 이 시간여행을 하는 동일한 공간이라는 인지에서는 벗어나기 힘들 것 같지만 말이다. 저자가 들려준 시간의 철학 챕터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시간론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실험적 과학보다는 철학적 사유의 결정들로 보인다. 이 책을 접해서 본 모든 시간론은 마구마구 제시되는 수학적 도식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사고와 닮아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은 무거워지더라도 더 많은 시간론을 담고 있어야 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다양한 시간에 대한 담론인 듯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간과 비슷한 개념의 개인적 시간에 대한 사유가 좀더 있었으면 좋았을 듯 하다. 어떤 달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물질에 시간이 담겨 특유의 시공간+개체가 되는 것이라는 시간의 다양성에 대한 제시 말이다. 책제목이 그냥 시간론이 아닌 ‘한권으로 충분한 시간론’이면서 우주의 생성과 구성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연령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풀이서이다보니 시간론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씌여졌음을 알 수 있다. 시간론 입문자들에게 시간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더 다양한 시간성에 대한 전제를 두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었다. 이 부분을 그나마 채워준 부분이 저자가 설명한 칸트의 시간론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마지막까지도 수학적인 시간론과 함께 최근의 이러한 시간론에 정 반대되는 철학적 사유, 특히 젠더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해석을 내놓은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덧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제시하는 의견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시간에 대한 사유가 대부분이지만 대표적인 이 시간론들에 머무르지 말고 각 자연환경과 민족의 정서 상 다른 시간적 체험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적 시계의 차이 등에 대한 설명 등에 대한 독서와 병행하기를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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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문과를 나오고 대학 전공도 사회과학쪽이라 그런지 이런 종류의 물리서적을 대할 기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나서는 정말 없었다. 그나마 작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유명하다는 고전,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어보려고 시도를 했다가 어려운 용어들에 몇 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하고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시도를 해봐야지 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이란 책 표지 설명에 예전에 즐겨보았던 마이클 제이 폭스의 'Back to the Future' 영화시리즈가 생각나기도 했고 영드 ' Doctor Who'가 떠오르기도 하여 뭔가 어렵지 않고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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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충분한 시간론 – 절대시간으로부터의 탈출
뉴턴의 시간 vs 아인슈타인의 시간 1977년 물리학자인 하펠Joseph Hafele과 천문학자인 키팅Richard Keating은 네 개의 원자시계를 제트 여객기에 실고 지구 둘레를 돌았다. 지상에는 동일한 시계가 놓여 있었다. ‘쌍둥이의 역설’을 실증한 이 실험의 결과는 결국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한 결과와 일치했다. 이로써 우주에는 절대적으로 참인 단 하나의 시간만 존재한다고 생각한 뉴턴의 절대적 시간론은 보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상대적 시간론에 자리를 내 주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간론은 종종 우리가 느끼는 심리학적 시간과 혼동되어 사용된다. 『한 권으로 충분한 시간론』의 저자 다케우치 가오루 역시 이런 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보인다. 사람마다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는 점에서 심리학적 시간은 ‘상대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 이후에는 물리학적 시간도 상대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p.52 물리학적 시간은 느낌과는 다르다. 같은 관성계에서 상대적일 수 있는 느낌의 시간은 물리학적으로는 동등하다. 상대성 이론의 상대적 시간과 심리학적 시간의 상대성은 범주가 다르다는 얘기다. 철학자 이정우에 따르면 시간론은 크게 ‘우주론적 시간’과 ‘의식 중심의 시간론’으로 나뉜다. 시간에 대한 이론은 크게 나누면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주론적 시간으로서, 시간이란 우리 인간의 주관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또 다른 시간론은 시간이란 기본적으로 우리의 주관, 특히 의식에 관련되는 무엇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 사건의 철학. p.384 즉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시간이란 의미에서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간은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우주론적 시간의 범주에서 둘은 양립 가능한 주장이 아니다. 다시 말해 뉴턴이 틀렸고 아인슈타인이 옳았다.
뉴턴의 시간 vs 라이프니츠의 시간 근대 과학의 아버지인 뉴턴은 왜 절대적 시간관을 고수했을까? 『프린키피아』 제2판 이후에 추가된 권말의 주석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뉴턴은 태양계 운동의 규칙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태양과 행성, 혜성으로 이루어진 웅장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태양계는 다름 아니라 전지전능한 존재의 심려와 보살핌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p.89 전지전능한 존재인 신에 의해 꼭 “절대적으로 참인 단 하나의 시간”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신이 이 우주의 시간에 합리적이고 물리학적인 상대적 본성을 부여하셨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존재의 심려와 보살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어서 천체의 운행을 가능케 한 신에 대해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은 영원하고 전지전능하다. 신은 영거에 영겁을 더해 지속하고 무한보다 더 무한한 곳까지 어디에도 존재한다.” “신은 시간 그 자체도, 공간 그 자체도 아니다. 하지만 지속하고 편재한다. 영겁으로 지속하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신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함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구성한다.” p.89 뉴턴은 그러니까 신의 전지전능함이 적어도 두 가지 존재 – 시간과 공간에 규정되어 있으며 어쩌면 인간들이 알현할 수 있는 신성의 가장 근본 바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양은 언제나 하루를 주기로 뜨고 지며 살아 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언젠가는 죽는다. 모든 것의 변화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모든 변화와 무관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공간은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에 신의 ‘무한적 존재감’을 느낄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무한적 존재감’을 달리 해석한 사람이 있다. 바로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다. 나를 무한히 분석하면 그리고 내가 만난 그 누군가도 무한히 분석하면 이 만남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한히 분석할 수 없죠. 그러니까 경험에 기대게 된다는 거에요. - 주름, 울림, 갈래. p.136 라이프니츠 역시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하에 이 세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계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분석이 필요한데 무한한 분석은 전지전능한 신의 영역이다. 똑같이 무한의 개념을 미적분으로 발전시킨 온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시간관에서도 생각이 달랐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이 말한 절대적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어딘가 신의 시간이 있다고 해도 인간은 신의 시간을 살지 않고 인간만의 시간을 산다. 그런데 우주론적인 시간 자체에도 크게 나누면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사물을 담는 어떤 그릇, 일종의 용기(容器) 같은 것이고, 그 안에 사물들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입장은 반대로 진짜 존재하는 것은 사물들이고 시간과 공간은 그 사물들이 운동할 때 인간이 그 운동을 파악하는(즉 그 운동을 일정한 관계를 통해서 서술하는) 방식이라는 입장이다. 17세기에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이 있었다. 클라크는 뉴턴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어, 실제로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뉴턴은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보았고, 라이프니츠는 시공간이란 사물들이 관계 맺는 질서일 뿐이라고 보았다. 공간이란 ‘공존의 질서’이고, 시간이란 ‘계기의 질서’라는 것이다. - 사건의 철학. p.385 인간은 절대적 공간이 아닌 공존의 질서인 공간에서, 절대적 시간이 아닌 계기의 질서인 시간을 살아간다. 공간과 시간은 사물들에 부대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계기의 질서란 무엇일까?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아인슈타인의 시간관과 달리 그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일까?
아인슈타인의 시간 vs 베르그송의 시간 오래 전 물리를 전공한 사람들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에 관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이용하는 타임머신이나 지구를 관통하는 터널을 활용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각종 물리학적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함께 간다’는 ‘정답’을 말하진 못했다. 이 화제는 ‘의미의 맥락 의존성’이라는 사회학적인 논의로 귀결되었지만, 의식 중심의 시간, 즉 내면적 시간론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시간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애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말에 무릎을 탁 치며 동의하긴 했지만, 그 ‘뻔한’ 정답에 감동까지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며 순식간에 가는 시간의 느낌을 공감을 할 수 있을지언정 과학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여하튼 ‘절대적’ 시간은 흐른 것이다. 이 의식 중심의 사변적인 시간을 구원한 것은 베르그송이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시간론은 마음 먹기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드는 그런 사변적 시간이 아니다. 베르그송의 시간론, 즉 ‘지속’의 시간론은 우주의 시간, 생명의 시간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에게서 의식은 생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베르그송의 사유는 인간의 주체성과 대상세계를 맞세우는 근대 철학의 구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구도에 기반한다). 때문에 의식이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유심론이 아니라 심(心)에 대한 탐구에서 점차 객관세계 전체의 탐구로 사유 범위를 확대해 나간 사유이다. 그리고 의식과 세계를 대립시키기보다는 연속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사유가 주관의 ‘투영’이나 주체철학적인 ‘구성’이나 유심론적인 의식의 ‘확장’인 것은 아니다. - 사건의 철학 p.385 생명에서 비롯된 순수지속은 의식을 떠나 물리학적 시공간에도 미치게 된다. 반면 순수지속, 즉 심리학적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기억할 수 없고 과거를 예측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우리 내면의 순수지속을 외부 공간에 ‘투영’한 것이 바로 물리학적 시간이라고 말한다. p.69 의식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생명이 약동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생명의 본성인 순수지속의 투영이 거꾸로 흐를 수 있는 물리학적 시간을 거꾸로 흐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은 서로의 시간론에 대해 세기의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에 대해서도 철학자와 물리학자의 현격한 시각차가 드러난다. 베르그송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주장하는 시간 개념을 분석하여 자신이 내세운 순수지속과의 정합성을 증명하려고 애썼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p.69 특히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이 만나 시간에 관한 논쟁을 벌였었는데, 이 논쟁이 우주론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 – 더 정확히는 생명의 시간 – 이 충돌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논쟁이 너무 초점이 달라서 알찬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 대표적인 논쟁이다. - 사건의 철학 p.385
우주론적인 시간, 심리학적인 시간, 그리고 열역학적인 시간 저자 다케우치 가오루는 제논과 베르그송, 칸트 등을 훑으며 다양한 시간론을 안내하려고 노력하지만 일단 시간론에 대한 통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안내는 통일된 체계 속에 있기보다 산만하고 초점이 분명치 않다. 대신 그가 공들여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현대 물리학의 시간론이다. 현대 물리학, 특히 우주론에서 중요한 물음은 시간이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냐는 것이다. 시간의 한 방향성에 답하기 위해 우주론적인 시간, 심리학적인 시간, 열역학적인 시간을 일치시키고, 그것의 근본이 열역학적 시간임을 논증한다. 우리는,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는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한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시간의 한 방향만 기억하는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p.137 호킹에 따르면 기억한다는 것은 또한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기억할 수밖에 없으므로 미래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주론적인 시간은 왜 엔트로피 증가 방향과 일치하는가? 파인만에 따르면 초기 우주의 엔트로피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란다. 초기 우주의 엔트로피는 왜 낮았는가? 호킹에 따르면 우주가 시작될 때는 실수 시간이 아니라 ‘허수 시간’이었다고 한다. 드디어 우주가 탄생했던 시점에서 엔트로피가 낮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호킹의 무경계 우주론에서 우주의 시작점은 허수 시간이고 ‘둥글다’. 그 우주의 모양은 편평한 구면에 가깝다. 완전하게 편평하면(고르면) 나중에 은하와 별이라는 구조물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울통불통하지만 그래도 꽤 편평하다. 달리 표현하면 무질서도가 낮다. p.146 그러나 우주의 탄생 시점에서 시간은 근본적인 의문에 봉착했다. 대체 허수의 시간이란 무엇인가? 익살이 넘치는 호킹은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 공학에서 진동을 다룰 때도 사실은 허수를 도입할 때가 많다. 우리는 무심코 우주의 시작에서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호킹에 따르면 우주의 시작에서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계산을 통해 우주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고 그것이 현재의 천문 관측 결과와 일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p.146 다케우치 가오루는 “시간은 우리가 우주를 관측할 때 사용하는 편리한 개념틀에 지나지 않는다”(p.156)고 결론짓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 성분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공간 성분이 될 수 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분명한 구분 같은 것이 없다. 우리는 앞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개념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 궁극적으로는 시간뿐만 아니고 공간이라는 개념틀마저도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p.156 공간마저 환상이란다. 이것은 최신 현대 물리학의 성과일까
스핀 네트워크 이론과 스토아의 시간 다케우치 가오루에 따르면 현대물리학에서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소립자가 아니라 스핀이라는 추상적인 특징이다. 스핀에 의해 사물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정성의 원리를 따르자면 결국 스핀과 사물은 이중성을 띤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루프 양자중력이론인 스핀 네트워크 이론은 이 스핀과 사물이 공간과 시간을 창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핀폼을 칼로 자르듯이 잘랐을 때 나타나는 절단면이 스핀 네트워크가 된다. 이러한 절단면의 연속이 시간으로 인식되고, 개개의 절단면에서 부차적으로 공간이 출현한다. 이와 같은 스핀 네트워크 중력이론이 옳은 것이라면 시간의 시작은 매우 이상한 것이 된다. 보조발트에 따르면, 우주 시간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0을 지나 음(-)의 시간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p.196 우주의 역사에 대한 물리학적 논의를 배제하면 스핀 네트워크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란 사물에 부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스토아 학파, 혹은 라이프니츠의 이론과 놀랍게 일치한다. 시간이란 우리가 종종 그것을 빠름과 느림의 측도라고 부르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동의 간격이다. 그것은 세계의 운동을 따르는 간격이다. - 사건의 철학 p.383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시간론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크뤼시포스의 첫 번째 시간론이다. 시간이 운동의 간격이란 의미는 시간이란 공간, 그리고 운동체와 연계가 될 때만 언급할 수 있는 무엇이란 의미이다. 즉 측정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시간은 규정된다. 두 번째 문장이 바로 “시간이란 물체적 운동의 부대효과이다”(사건의 철학 p.384)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간이라는 어떤 바탕이 있고 그 바탕 위에 사건이 수놓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도 없다. 시간은 사건의 부대물이다. - 사건의 철학. P.387 다시 하펠과 키팅의 여객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하펠과 키팅이 겪은 시간이 지상에서의 시간보다 느리게 흘렀음을 보았다. 그 느리게 흘러간 시간은 0.000000001초의 정밀도를 가진 원자시계에 의해 실증되었다. 그렇다면 시간은 시계가 방증하는 것일까? 대체 시계란 무엇일까 즉 코끼리도 쥐도 모두 심장이 네 번 뛸 때마다 한 번 호흡한다. 그뿐만 아니라 코끼리도 쥐도 일생 동안 약 2억 번 숨을 쉰다. 심장박동수는 그 네 배이므로 8억 번이 된다. p.72 심장이 한 번 뛰고 그 다음 뛰는 순간은 일종의 사건이다. 사건이면서 또한 운동이다. 사건이며 운동인 것의 간격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계 바늘이 0에 있는 순간의 사건과 1에 있는 사건의 간격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10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천체를 여행하고 돌아온 쌍둥이 형 못지않게 지구에 있던 동생이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은 있다. 냉동인간이 되든지 단전호흡을 하든지 여하간 심장박동수를 천천히 하게 되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동생보다 더 젊은 상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 시간으로부터의 탈출 비록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절대 시간론이 틀렸음을 보여주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뉴턴의 절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공간의 뒤틀림은 빛의 속도쯤 돼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계는 인공위성이 쏘아주는 표준 시간에 맞춰 있고 우리는 그 시계에 맞춰 삶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동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등교 시간에 지각을 하고 동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수업이 끝나며 동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나이를 먹는다. 한편, 뉴턴이 신의 견지에서 사고했던 절대 시간은 라이프니츠의 긍정적 시간론과 달리 매우 엄혹하고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시간은 우리를 보편적 범주에서 동일하게 속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동일성의 차원에서 우리를 질책한다. 예를 들어 우리와 동일한 절대 시간 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위인의 삶은 우리가 ‘남용’하는 시간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적 시간론의 견지에서 동일성의 윤리는 가혹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순간이며 사건이다. 시간이란 사물이 만들어 내는 사건의 부대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스토아적 시간론은 지금 이 순간,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타인의 견지에서가 아니다. 나의 견지에서, 내 삶의 견지에서, 내 윤리의 견지에서이다. 스토아의 윤리는 그렇게 주체와 함께 구축되었다. 『한 권으로 충분한 시간론』은 역시 『한 권으로 충분한 양자론』과 마찬가지로 한 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사물에 의해 시공간이 창출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엿보려면 스토아와 라이프니츠를 만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의 절대성 위에서 성립했던 근대 물리학이 현대 물리학에 이르러 어떻게 시공간의 결박을 전도시키는지 관람하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무엇보다 저자의 박식과 대중적 필체는 여전히 우리가 기다리는 새로운 필자의 재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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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한 권으로 충분하다면 세계는 너무 단조롭지 않을까? 당연히 시간에 대해 이 한 권으로 끝낼 수는 없다. 이 책은 어려운 시간에 대한 얘기를 매우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소양이 있는 사람도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다만 책의 후반부에서 최신의 물리학 성과를 소개하는데 좀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싶다. 왜냐면 최근의 물리학 이론들은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가설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정확히 모르니 다양한 설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많이 소개하려더보니 좀 장황하고 난해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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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절호의 기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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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내 주위의 사물을 보고 지각하면서 공간속에 있는 자신을 안다. 물론 시각장애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감각을 동원해서 공간속에 차지하는 자신을느낀다. 그런데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10년전의 나와 10년후의 나는 다르다. 그럼에도 시간은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인류가 던지는 가장 근원적 질문중 하나인 시간에 대해 질문해볼 수 있다면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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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일반적으로 시간이라고 인식하는 주요 개념의 대상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틀로 이루어진 어떤 형태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나누어 놓은 시간들이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라고 단정할 수는 있는 것일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타임머신을 타고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꿈꾼다. 현재까지 과학의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증명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과학적 상상력이 멈춘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시간이 지닌 모호함과 신비함에 다가서며 그 본질을 알고자 물리학이나 철학이라는 학문적 논리를 바탕으로, 시간을 보다 깊이 분석해보면서 좀 더 구체화 시키고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예컨대 이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절대시간이나 상대시간의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은 일정하게 정해진 똑같은 두고도 어떤 이는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 하는 반면에 어느 한쪽에서는 느리게 가고 있다는 상반된 경험을 하곤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차이가 사람마다 느끼는 심리학적인 요인에 있다고 보여 지긴 하지만, 우리가 시간이라는 실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관점의 시각으로 “시간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물음으로부터 이러한 책을 통해 두루 그 내용을 살펴본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호기심 그 자체를 넘어 그동안 시간이라는 본질에 의문을 품어왔던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어떤 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고 접근해갔으며 어떻게 정의해가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해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나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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