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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릴 때, 하루종일 밖에서 뛰어 놀다가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는 잠이 들었
다. 한참을 자고 있을 때, 형이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 소리에 잠이 깨었었다. 잠결에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면서 마음에 새겨진 그 음악 소리는 긴 시간동안 마음에 남았었
다. 그리고 결국은 한참의 시간을 넘어서 그 클래식 곡이 연주되어 있는 CD를 구입하
게 했다. 그 클래식 곡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우연히 본 영화에서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음악을 만나는 것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진짜 우연히 만난 영화 '더 콘서
트'는 그러한 즐거움을 전해준 영화였다.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가벼운 클래식 영
화가 보고 싶어 선택했던 '더 콘서트'는 하지만 가벼운듯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였다.
그리고 이 영화를 가득 채우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은 그 묘하게
아름다우면서 슬프고, 그리고 때로는 밝게도 어둡게도 느껴지는 그 선율만큼이나 영
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마치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 영화의 오합지졸인
가짜 '볼쇼이 오케스트라'처럼 말이다.
공산주의 시대에 정치에 의해서 핍박받은 거장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다음에는 자본
주의의 힘에 밀려서 여전히 볼쇼이의 청소부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지휘를
할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지휘를 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하루 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다시 한 번 더 무대에 오를 기회를 마련한다. 그것도 긴 시간
을 지켜봐 온 어느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연주했고, 그리고 끝까지 연주하지 못했던 그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다면, 영화는 그런 긴 시간의 핍박을 이겨내고, 그리고 모든 어
려움을 이겨내고 무대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곡을 끝내는 것으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감동적으로 끝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더 콘서트'는 의외로 영화의 대부분
의 시간을 '코미디'와 '가벼운 미스터리'로 풀어나간다. 공산주의가 끝난 러시아에 찾아
온 '자본주의'는 과거와 별로 다를 것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물론 살짝 모습을 바꾸고
아닌 척하면서 공산주의에서 얼굴만 바꾸어서 말이다. 단지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돈'
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모습들은 이 영
화를 웃으면서 보면서도 그 웃음의 마지막에 씁쓸한 마음을 남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습들이 영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 그 삶을 견디는 모습들이 너무나 진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출생의 미스터리'를 너무나 담담
하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바이올리니스트는 거장과 매니저의 딸이
란 너무나 쉬운 선택지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더 콘서트'는 그 '출생의 미스터리'를 모
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핍박 속에서도, 그리고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 어머니의 모습과 그 어머니를 따뜻하게 지켜보는 아버지
의 모습을 보여줌으로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기 위
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면을 통해서 '더 콘서트'는 거
장이 그 연주를 하기 위해서 한 모든 행동들을 이해하게 한다. 결국 자신이 아닌 그렇게
음악가로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죽어간 동료에 대한 마지막 진혼곡이 바
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시작한 연주를
딸이 마무리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지키는 그 위대한 모습을 '더
콘서트'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전해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은 더욱 아름답다. 그렇게
'더 콘서트'는 아름다운 음악과 분명한 메세지를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