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10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10.0
리뷰 총점 종이책
후기 구조주의와 객관적 선험의 철학
"후기 구조주의와 객관적 선험의 철학" 내용보기
사건의 철학은 소운 이정우 저작집 중 2권에 해당하며, 1부인 시뮬라크르의 시대, 2부인 삶, 죽음, 운명, 그리고 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552p의 책이다. 이정우 교수님의 저작은 현재까지 네권(사건의 철학, 접힘과 펼쳐짐, 개념-뿌리들, 세계철학사1)을 정독하였으며, 한권(천하나의 고원)을 읽고 있고 두권(탐독, 객관적 선험철학 시론)을 올해 읽을 계획이다.      이 책의 저자
"후기 구조주의와 객관적 선험의 철학" 내용보기

  사건의 철학은 소운 이정우 저작집 중 2권에 해당하며, 1부인 시뮬라크르의 시대, 2부인 삶, 죽음, 운명, 그리고 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552p의 책이다. 이정우 교수님의 저작은 현재까지 네권(사건의 철학, 접힘과 펼쳐짐, 개념-뿌리들, 세계철학사1)을 정독하였으며, 한권(천하나의 고원)을 읽고 있고 두권(탐독, 객관적 선험철학 시론)을 올해 읽을 계획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정우 교수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고 내게는 매우 고마운 분이다. 김상일 교수님과 함께, 나에게 메타적인 관점을 일깨워주신 분이기 떄문이다. 이정우 교수님이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분의 학문에서는 상업적인 뉘앙스가 없다는 것과, 자신이 소화해내지 못하면 쓰지 않는 철저한 프로정신 때문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교수님의 책들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고 스스로 정말 고민을 많이 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려 하신, 교과서같은 '개념을 잡아주는' 책들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 정도로 스스로에게 철저하며 한 페이지라도 허투루 쓰지 않는 분의 책을 만난적이 잘 없다. 이분의 책은 이런 면에서 정말 감동적이며, 나 자신 역시 학문적인 겉멋과 부화뇌동이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있으나,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이분의 학문 세계는 얼마나 멋이 있는지...

 

 이 책의 내용은 후기구조주의와 스토아철학, 그리고 선불교에 대한 내용이다. 1부인 시뮬라크르의 시대는 (프랑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후기 구조주의와 스토아 학파의 '사건'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구조주의가 합리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본문이다.

 

25p

구조주의는 여러 담론들, 즉 언어학, 정신분석학, 수학,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 등의 여러 학문들이 독자적으로 각각의 분야를 다루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또 용어를 빌려 감으로써 서서히 형성된 사조이다.

 

29p

구조주의는 이 현대 합리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그후 인식의 역사성이 강조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며(캉길렘, 쿤, 세르, 푸코 등등), 바로 이런 맥락에서 구조주의 인식론도 극복되기에 이른다.

 

31p

합리주의는 세계 자체가 법칙성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자유 낙하의 법칙은 세계 내에 존재했던 것이고, 과학자는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 32p 결국 구조주의는 실재론 합리주의에 맞닿아 있다.... 합리주의를 부활시킨 사람이 바슐라르이다.

 

33p

플라톤, 데카르트, 바슐라르를 위시한 합리주의자들의 맥이 이어져 왔고, 구조주의는 바로 이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연장선상에서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구조란 곧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33p 그 구조=이론을 통해 현상들을 이해하는 것이 곧 현상들을 "녹여 넣는" 것이다.

 

 합리주의와 구조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소개는 아래와 같다.

 

38p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출발점은 유사해도 종착점은 모두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다만 구조주의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떤 공통의 테마들이 분명 존재한다. 시간, 욕망, 권력, 카오스, 신체, ...... 등이 그런 개념들/테마들이다.

 

43p

라캉, 알튀세르 학파, 말년의 푸코, 그리고 들뢰즈 등은 모두 (데카르트에 근원을 두는) 현상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에게서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46p

후기구조주의자들도 구조주의가 발견한 '장'場 개념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제 그 장을 보다 역동적이고(우연, 시간, 불연속 등의 도입), 주체-개입적인 것('주체화' 문제의 재론)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다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물론이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사건'이라는 개념을 소피스트, 스토아 철학자들로부터 도입하여, 철학을 표층과 심층으로 나누어 사유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47p

사건들의 층차-사건이란 기본적으로 차이에서 발생한다. 오로지 생성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역설적으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차이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무수한 층차에서 성립한다.

 

60p

'시뮬라크르'라는 말을 현대식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미지', '사건'과 연결시킬 수 있다.

 

80p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플라톤에 대립시켜 자신들의 철학사적 바탕으로 삼은 것은 소피스트들과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이다. 푸코는 소피스트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를 현대화하려 했고, 또 세르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연철학을 현대적 형태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이 중 내가 집중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스토아철학이다. 나 자신 스토아철학에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뒤에서는 이 철학을 선불교와 연계시켜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93p

스토아학파에서는 물체가 원인이고 비-물체적인 것 즉 사건이 결과입니다... 97p 사건이라는 개념은 잠재적인 존재이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공간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사건'이라는 개념을 소피스트, 스토아 철학자들로부터 도입하여, 철학을 표층과 심층으로 나누어 사유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05p

고전 시대의 담론들은 우리 마음과 언어가 이 세상을 거울처럼 반영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사유를 전개했다... 표상/재현이란 세계(의 표면)와 기호체계와 관념체계가 서로 거울/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118p

의미란 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 사이의 '관계들'을 통해서 형성된다... 119p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것이 한 사물/요소의 실질적 성질들이 아니라 '위치', '자리'인 것은...

 

 존재와 사유의 불일치가 드러난 시대에,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위상적 '장' 개념을 통해서 사유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뮬라크르가 오히려 돋보이게 되는 모순이 생긴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이 과학에 종속된 것이 시뮬라크르의 만연이 아닌가 싶다.

 

131p

보드리야르는 구조주의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호들의 놀이를 사유했다. 보드리야르에게 현대는 '시뮬라시옹'의 시대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벗어던져 버리고, 기호는 지시대상의 실재를 전제하지 않게 되며, 기표는 기의와의 소쉬르적 관계에서 벗어난다.

 

 빈칸, 우발점의 개념은 복잡계를 통한 자연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도 중요한 요소라고 알고 있다. 생물의 군집현상 등에서 빈칸의 선점이 자기조직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54p

라캉의,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분석 - ...모든 구조는 이런 빈칸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후기구조주의의 한 특징은 구조주의를 '역동화'시킨 데 있다는 말을 했다. 이 역동화의 과정에 필수적인 한 요소가 바로 이 빈칸, 우발점의 개념이다.

 

158-159p

들뢰즈는 구조주의적인(사실상 후기구조주의적인) 사유를 일컬어 '선험적 위상학'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위상학'이라는 표현은 후기구조주의의 '장' 개념이 거리적이기보다 위상학적이기 때문이다.

 

 특이점 개념은 아직도 이것이 미분이나 해석학의 개념인지, 후기 구조주의 또는 복잡계의 개념인지 감이 잘 안온다. 나는 상전이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지만, 부화뇌동이 아닌지 걱정도 된다.

 

176p

특이점 개념은 외삽(extrapolation)의 개념을 가지고서도 정의할 수 있다. 외삽이란 어느 순간까지의 흐름에 미루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또는 나타나게 만들 수 없는 부분을 예측하는 기법이다.

 

184p

특이성은 형상과 형상 사이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운동성, 바로 그것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188p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특이성들의 전全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세계가 움직여가는 그 가능성의 뼈대는 파악한 셈이다. 우리의 경험을 가능케하는 이 논리적 장, 가능성의 장, 특이성들의 체계를 나는 '객관적 선험'이라 부른다.

 

195p

실존주의는 주체, 의지, 결단, 책임, 선택, 행위, 노력, 신체, 내면 등에 대한 통찰을 보여 준다. 이에 비해 구조주의는 '바깥의 사유'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행위가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근저에서 지배하는 구조/장을 드러냄으로써 실존주의의 소박함을 논박하려 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객관적 선험철학'이라는 용어가 교수님 철학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과 현대의 들뢰즈의 철학이 있고...

 

207p

내가 처음으로 낸 책은 푸코 연구서였고, 거기에서 '담론학'을 제시했었다. 그때 이미 객관적 선험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으며, 이번 학기 강의는 사실 이 담론학을 새롭게 존재론적으로 정초하려는 작업 이외의 것이 아니다.

 

208p

객관적 선험철학은 칸트 이래의 선험철학(현상학 등등) 보다는 오히려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과 천연성을 가진다...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사유의 보물 상자이다.

 

220p

후기구조주의 사유가 가진 하나의 매력은 문화와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층, 즉 자연에 뿌리 두고 있지만 그러나 자연으로 완전히 환원되지는 않는 그런 차원을 드러낸 점에 있다.

 

2부 삶, 죽음, 운명

 

272p

담론사적 맥락을 짚어 보면, 서구 사상의 기본 흐름은 사건의 사유가 아니라 사물의 사유였다고 할 수 있다. 명사와 형용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이지,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가 아니었다.

 

273p

...전통 존재론에 대립해서 니체라든가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존재보다 오히려 생성을 더 중시하는 사유를 펼쳤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은 과학사에서는 진화론, 열역학, 양자역학, 복잡계 이론 등의 전계와 상응한다.

 

275p

후기구조주의는 사건을 사유하되 그것을 구조주의의 성과 위에서 다룬다...말하자면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매개한 새로운 생성철학-사건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277p

그러므로 구조주의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사건을 어떤 일정한 장場 개념을 매개해 사유한다는 것이다.

 

285p

스토아철학은 (somata를 궁극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유물론에 속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원자론적 유물론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른다. 오히려 동북아의 기氣 일원론에 상당히 가깝다)

 

300p

이제 스토아철학, 후기구조주의의 논의들을 선불교와 연계시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346p

운명 개념은 스토아 사유의 중핵에 위치해 있는 개념이다.

 

 베르그송은 서양철학에서는 매우 약한, 시간 개념을 핵심으로 '생성의 철학'을 사유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엔 시간이란 인간의 안에 또는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서양철학은 시간에 대한 사유가 약하다는 느낌이다. 다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에 대해서는, 정말 존경하고 존경한다.

 

385p

베르그송적인 시간론은 현상학, 하이데거, 저 직접적으로는 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으로 내려오고, 아인슈타인적 시간론은 물리학자들, 그리고 라이헨바흐, 그륀바움 등을 통해서 내려온다. 어쨌든 문제는 시간을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보느냐, 아니면 인간의 의식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441-442p

니체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은 자아, 신, 세계의 안정적 동일성을 해체시키고 세계를 '카오스'의 개념 위에 놓으려 했다. 카오스로부터 사건들이 솟아오르고, 그 사건들의 계열화를 통해 비로소 질서가 수립되는 것이다...구조 아래에는 카오스가 흐르고 있다... 443p 영원회귀는 차생일 뿐이다. 그러나 차생에는 늘 반복이 동반된다. 물론 이 반복은 안정적인 반복이 아니라 늘 차이를 동반하는 반복이다.

 

458p

들뢰즈의 이데아는...영원부동의 실재가 아니라 차이생성의 구조이다.

 

505p

2. 비판적 긍정의 사유 - 禪과 하이데거를 넘어서

즉물적 긍정은 사물들을 (어떤 형태로든) 동일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의 실재성을 받아들인다. 이 즉물적 긍정이 부정될 때 현실의 실재성은 의문에 부쳐지며, 실재는 현실과 차이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 실재를 둘러싼 존재론적 투쟁이 시작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물적 긍정을 통한 동일성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고, '살아있음'에서 멀어지게 한다. 우리나라의 메타적인 사고가 힘들고 시뮬라크르에 매몰된,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수준낮은 대중매체가 떠받들어지는 이런 풍토는 아마 이 '차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h*****8 2014.01.1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사건의 철학 – 사건의 존재론과 운명
"사건의 철학 – 사건의 존재론과 운명" 내용보기
사건의 철학 – 사건의 존재론과 운명     사건은 어디에 있었는가  토요일이었다. 100여 명이 넘쳐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태권도장에서 행사를 열었고, 아이들은 태권도 시범과 훌라후프, 줄넘기 등 일련의 ‘공연’을 준비했다. 그리고 엄마들은 훌라후프를 아빠들은 뛰어 앞차기 격파 시범을 ‘강제’했다. 대부분이 유아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구성원인 행사는 그야말로
"사건의 철학 – 사건의 존재론과 운명" 내용보기

사건의 철학 사건의 존재론과 운명

 

 

사건은 어디에 있었는가 

토요일이었다. 100여 명이 넘쳐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태권도장에서 행사를 열었고, 아이들은 태권도 시범과 훌라후프, 줄넘기 등 일련의 공연을 준비했다. 그리고 엄마들은 훌라후프를 아빠들은 뛰어 앞차기 격파 시범을 강제했다. 대부분이 유아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구성원인 행사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품새는 격렬한 테크노 음악과 더불어 춤이 되었고 시범단의 격파 시범에 한 아이는 이마에 송판을 맞고 피를 흘린 채 퇴장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웬만한 건 무심히 그냥 넘겨야 겨우 치를 수 있는 도떼기 행사였다. 아빠들 차례가 되었을 때, 주저함 없이 나서야 했다. 뜀틀 위에서 관원 중 연장자들이 미트를 잡았고, 세 조로 나눠 일단 높이로 예선 통과자를 정하기로 했다. 물론 준비 운동도 없었고 엄격한 순서도 규정도 없었다. 세 번째 쯤 차는 데 착지했던 왼쪽 다리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여러분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그 사건 자체는 어디에 존재했던 것일까  컴퓨터와 웹페이지와 글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건 자체는 아니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건은 확인 버튼을 누른 순간 발생한 것이고 곧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9회말 끝내기 만루 홈런 한방으로 역전승을 거둔다. 그러면 그 역전이라는 사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p.71 

사건 자체가 어디에 존재해 있었냐는 물음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이렇게 사건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흔히 행복의 본질, 사랑의 본질, 자유의 본질 등을 묻곤 한다. 이런 물음이 반복되는 것은 우리가 겪는 행복과 사랑, 자유 등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믿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본질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를 구축했다. 물론 이데아의 세계는 가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공간이다. 이데아의 세계가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겪는 경험들이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그 본질을 추구해야 함을 웅변한다. 사건이 어디에 있었냐는 물음은 일단 이런 일상적인 본질에 대한 통념에 도전한다. 왜냐하면 사건은 행복이나 사랑, 자유와 달리 찰나적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순간 지나가는 찰나적인 이것이 이데아의 세계에 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 찰나적인 것을 허상 중에 허상으로 급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찰나적인 사건이야말로 중요한 게 아닐까? 이 찰나적인 순간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이전과 이후가 나뉘는 경우가 많다. 웹페이지를 확인한 순간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며, 만루 홈런을 때리는 순간 지고 있던 경기는 역전된다. 내 다리가 주저앉는 순간 역시 전에 없던 계기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 중요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은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사건의 철학은 들뢰즈를 호명하여 바로 이 시뮬라크르-사건의 중요함을 환기시키고 사건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아직 현실화되기 이전의 사건들이 부정형의 형태로 객관적 선험이라는 장에 존재한고 말한다. 

객관적 선험이란 경험 자체를 조직해 주는 논리적 구조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바로 이 객관적 선험이 조직해 주는 틀 내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경험의 논리적 구조가) 주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개관적 선험은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장이다. p.189 

구조주의의 산물인 객관적 선험이란 표현은 선험적인 시공간 형식을 바탕으로 주체가 세계를 이성적으로 구성한다는 칸트의 주체 철학에 대비되는 용어일 것이다. 현실화되지 않은 사건들은 웹페이지를 확인하다’, ‘홈런을 치다’, ‘인대가 끊어지다와 같이 논리적인 틀 안에 비인칭적으로 존재해 있었다. 순수 사건들은 우리들이 태어나기 전에, 또 그것들을 경험하기 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객관적 선험의 장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결국 세 층위가 존재한다. 물질/실체의 층위, 물질과 문화의 접면 즉 형이상학적 표면, 이 표면 위에서 각종 문화가 형성되고 변화되는 과정. 그래서 물질/실체의 층위를 다루는 자연철학, 사건의 면/장을 다루는 선험철학, 그리고 문화 일반의 가능조건을 다루는 문화철학/담론학이 가능하다. p.217 

객관적 선험의 장은 자연과 문화의 접면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표면이다.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은 사건이 객관적 선험의 장에서 논리적이고 비인칭적인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표면이라는 말은 사건이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오는 생성 과정에서의 찰나성을 의미한다. 대학 합격을 확인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웹페이지든 실제 종이로 된 합격증이든 그 물질 위에 놓인 흔적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본다는 것을 단순히 전자기파와 시세포의 상호작용으로만 본다면 모든 본다는 행위는 물리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웹페이지에 형태를 갖춘 흔적들은 합격이라는 기호를 구성한다. 그로 인해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공이 관중석을 넘어가지 않으면 홈런이 되지 않으며, 홈런으로 인해 역전도 되지 않는다. 물질 혹은 사건에서 비롯된 변화가 동시에 문화적 의미로 치솟는다. 물질과 문화의 접면에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무한한 순수 사건들이 존재한다. 그곳이 바로 객관적 선험의 장인 것이다.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객관적 선험의 장이 자연과 문화의 접면에 위치하면서 결국 사건이란 생성하는 동시에 두 가지 의미-인과를 가지게 된다. 

사건이란 항상 두 얼굴을 가진다고 했다. 물리적인 얼굴과 의미론적인 얼굴이 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의사는 그 물리적인 얼굴, 즉 이 사람이 어떤 물리적/ 생리적 인과를 통해서 살해당했는가를 본다. 반면 형사는 그 사건을 둘러싼 전후좌우 사건들의 배치를 생각한다. 사건의 원인’(물리적인 원인)-원인’(다른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인과 구조를 이중 인과라 부른다. p.148 

홈런을 치는 사건은 날아오는 공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 타자의 힘과 정교함이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러나 한편, 홈런이 역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1점차 승부, 투수의 실투, 혹은 투수 교체 시기의 패착 등이 준-원인이 된다. 다리의 인대가 끊어진 사건은 육중해진 하중, 오래전 태권도를 하며 늘어났던 인대, 운동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약해진 주변 근육들, 갑작스런 충격 등이 물리적 원인, 물리적인 얼굴이다. 반면 사랑하는 딸의 태권도 행사, 진행자의 호명에 몰려나가는 아빠들의 심리적 압박, 두 번 찰 즈음 찾아온 신호의 무시 등이 의미론적인 얼굴, -원인이다. 

이 사건은 내게 두 가지 의문을 던져준다. 첫째, 이 사건은 왜 내게 일어났는가? 비록 물리적 원인과 문화적 원인을 해석하였다고 해도 사건의 발생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웹페이지를 여는 순간 불합격이 뜰 가능성, 힘껏 휘둘렀을 때 삼진이 될 가능성, 그리고 착지할 때 엉덩이부터 떨어질 가능성, 이 모든 가능성 중에 하필 한 가지만 현실화된 것이다.

이 세계 자체가 수많은 잠재적 층위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쿠르노 이래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서는 우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재성의 현실화에는 어떤 아프리오리한 초월적 질서도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 세계는 수많은 공가능/불공가능한 계열들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고, 이 계열들의 수렴/발산 구조가 현실화 이전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계열들의 누층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 일정한 현실화가 이루어진다. p.430 

하필 한 가지만 현실화된 것을 라이프니츠는 신의 권능을 빌어 그것이 최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들뢰즈는 우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실화 이전에 합격/불합격의 가능성, 홈런/삼진의 가능성, 엉덩이로 착지/ 다리로 착지할 가능성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각각의 다른 사건들과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현실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니 굳이 외부에서 신을 불러 오지 않더라도 합격이 되고 역전이 되고 인대가 끊어지는 사건은 그리 될 만하니 그리 된 것이다. 결국 지나간 것은 운명이란 얘기이다. 

두 번째 의문은 이것이다. 왜 내게 발생한 이 사건은 더 각별한가? 이 고통은 왜 다른 사건과 달리 담담하지 않은가  

그런데 운명은 우리에게 울림, 떨림과 더불어 다가온다. 논리적 사건이 인칭적 사건으로 변환되는 그 경계선, 그 막에서의 울림, 떨림이 일어난다. 앞으로 이 울림, 떨림의 개념을 정교화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주 큰 운명, 견디기 힘든 운명 앞에서 서면 우리의 가장 인칭적인 측면이 떨린다. 이른바 살이 떨린다”, 바로 이렇게 우리의 살-떨림과 더불어 다가오는 사건들, 인간이 자기 운명에 맞닥뜨려 , 이것이 내 운명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고통스러운 것들이다. , 이별, 배신, 폭력…… 같은 것들 말이다. p.358 

각별함은 그것이 내 몸, 내 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은 반복된다. 반복되는 것이니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선험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몸, 내 살은 결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은 하나인 고유한 물질이다. , 울림의 정도는 객관적 선험의 장을 통해 치솟은 사건이 인칭적 사건에 가까울수록 크다. 

 

운명을 긍정하라 

그러나 이런 인칭적 사건의 울림을 떠나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다. 고도의 윤리적인 결단이 동반된 사건, 예컨대 아킬레우스를 맞아 뻔히 예정되어 있는 자신의 죽음과 트로이의 멸망을 향해 피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 들어간 헥토르의 결단은 인칭적 사건의 울림을 뛰어넘는다. 

 

나는 헥토르의 예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떠 올렸다.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운명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는 그렇게 결단을 통해 우리가 망각했던 저 고대적 운명의 거대한 울림을 남겼다. 그 운명의 울림으로 인해 그의 삶과 무관한 것 같은 나 역시 멘탈붕괴를 경험했던 것이다. 

헥토르든 노무현이든 과연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정우는 들뢰즈가 불러들인 스토아 철학과 라이프니츠는 물론 불교와 선까지 불러들이며 불가피한 운명과 맞서는 최대한의 긍정을 역설한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면서 현실에 맞서 나가되,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운명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운명이란 처음의 말이 아니라 마지막의 말인 것이다. 선인들이 말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은, ‘천명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접어놓는다 해도, 오늘날까지도 삶에 대한 핵심적인 조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p.372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에서 스토아 철학자의 삶을 복원하며 이것이 부단한 단련과 훈련을 통해 구축될 수 있는 주체적 삶임을 웅변한다. 물론 문제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연 어떤 순간, 그 결단이 나의 운명임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스토아적 훈련을 통해 결단을 내린들 과연 그 삶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스토아 현인들이 살았던 시절은 공동의 운명을 공유했던 시절이었다. 

이정우는 운명을 무한의 경지에 올려놓으며 어떤 순간도 인간의 오만이 닿을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얼핏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운명이 다시 튀어 나온다. 결국 인간의 오만, 즉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 착각이 그를 파멸의 운명으로 몰고 간다는 역설에 부딪힌다. 그래서 운명은 말하자면 훨씬 고도의 방식으로 인간을 지배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운명을 벗어나 인간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운명의 심판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p.371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일 운명 따위란 없으며 우연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삶에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으며 윤리적인 삶을 견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을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운명은 우주법칙으로서의 필연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결코 우주법칙으로서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운명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겨우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타자는 내일 자신이 홈런을 칠지 안타를 칠지 알 수 없다. 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하는 타자야말로 홈런을 칠지 안타를 칠지, 아니면 야구선수로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운명의 경계선 안에서 최대한으로 긍정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식을 깨고 차이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예컨대 건강과 병을 서로 모순으로 보고 건강한 것은 좋고 병은 나쁜 것으로 취급하는 상식을 깨자는 것이다. 

니체는 건강과 병을 모순으로 보고서 건강을 긍정하고 병을 부정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건강하게 살고 있을 경우 건강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병들었을 경우 고통스럽지만 그 병의 체험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병을 통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 차이를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차이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p.437 

 

신으로부터 내재화된 법칙으로 

사건의 철학은 이정우가 1998년과 1999년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1999년 두 권으로 펴낸 시뮬라크르의 시대, 죽음, 운명을 합본하여 12년 만에 펴낸 개정판이다. 나는 그 두 권을 2000년과 2001년 구입하여 읽었다. 그당시 이 책의 주요 문제의식이었던 사건이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12년이 지나 이 개정판의 숙독과 토의는 학교에서 작은 소그룹으로 시작된 현철(현대철학 읽기 모임)’의 첫 순번이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동서양 철학사와 과학사를 가로지르는 저자의 해박함에 경도되었던 기억 정도로 남아 있었다. 나이 사십이 되어 면밀하게 다시 읽을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 이 또한 내게 운명이리라. 

이 책은 사건의 존재론을 다룬 만큼 다분히 추상적이다. 본래 책 후반부에 대학 강단을 뛰쳐나와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한 저자의 결기 그대로 당대 정치현실에 대한 발언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철학 기술에서 보여준 치밀함과 정교한 분석은 보이지 않았다. 개정판에서는 이마저 솎아내면서 이 책은 사건의 존재론과 운명의 철학적 위상을 다룬 보다 보편적인 책이 되었다. 어쩌면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서 시작된 서구의 유수한 후기구조주의자들과 달리 철학자 이정우가 안고 있는 출발점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또한 삶, 죽음, 운명을 논하면서 자살에 관해 엉성한 논증으로 긍정의 뉘앙스를 남긴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정우는 들뢰즈의 배경이 된 스토아 철학자들의 사상과 라이프니츠를 분석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들과 변별되는 현대쳘학자로서의 들뢰즈의 차이를 언급한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라이프니츠의 외재화된 신이 들뢰즈에 와서 내재화된 법칙으로 바뀐다는 것이리라.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이 세계가 신에 의해서 완벽하게 디자인되었다면, 세계의 모든 것은 완전히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라이프니츠에서 모든 모나들은 그것이 겪을 사건들을 이미 그 안에 내장하고 있다. 이를 내속’inesse이라고 말한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는 다르다. 들뢰즈의 경우, 모든 가능세계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안으로 내재화된다. 그리고 물질적 차원보다 모나드의 차원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세계들이 물질적 차원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물질은 그 바깥의 어떤 탈물질적 원리에 입각해 운동하는 질료가 아니라 자체에 내재해 있는 법칙성에 따라 운동하는 실체이다. p.429 

물질에 내재해 있는 법칙성, 그로 인해 우리는 외재되어 있는 결정론적 구조를 비껴갈 수 있다. 요컨대 치밀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매트릭스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극한의 자유를 잠재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신에 의탁했던 최대한의 긍정이 무작정 긍정이 되지 않도록 제어해 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향해 눈을 찔렀다. 그마저 운명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헥토르와 마찬가지로 무기력한 운명에 저항한 결단의 순간이기도 하다. 

깁스한 다리는 불편하다. 또한 앞으로 예정된 수술과 그리고 그 이후의 재활, 함께 얽혀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통념상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시간론을 정리했고, 드디어사건의 철학의 독후감을 12년 만에 쓰고 있다. 사건의 철학은 이런 특이성으로서의 사건에 직면한 나 같은 물질에게 보편적 해설서로는 부족함이 없다.

m*******d 2013.08.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