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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비평가인 이수명 박사의 시론집
"시인이자 비평가인 이수명 박사의 시론집" 내용보기
‘횡단(橫斷)‘은 시인이자 비평가인 이수명 박사의 시론집이다. 저자는 발표 지면과 정황의 차이로 인해 수록 글들의 분량이나 어조가 다르고 문체의 차이가 있지만 시의 넓이를 이해하는 데 유효할 수 있다고 자신의 책을 설명한다. 황정아(黃靜雅) 비평가가 “정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책에 실린 글들을 쓰는 순간 개념비평이라는 범주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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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橫斷)‘은 시인이자 비평가인 이수명 박사의 시론집이다. 저자는 발표 지면과 정황의 차이로 인해 수록 글들의 분량이나 어조가 다르고 문체의 차이가 있지만 시의 넓이를 이해하는 데 유효할 수 있다고 자신의 책을 설명한다. 황정아(黃靜雅) 비평가가 “정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책에 실린 글들을 쓰는 순간 개념비평이라는 범주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작업을 소급된 방법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정의한 것(’개념비평의 인문학‘ 6 페이지)을 생각하게 된다.


소급했든 소급하지 않았든 저자가 직접 유효함을 주장하기에 우리로서는 수용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글로부터 저자도 인식하지 못하는 유의미한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몫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횡단, 횡선, 횡보, 선회, 횡렬 등으로 구성된 ’횡단‘은 저자의 첫 시론집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시론집이다.(2011 년 출간) 그 사이 저자는 ’마치‘ 외 네 편의 시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2014년)


저자는 환각(幻覺)이란 말과 공황(恐慌) 상태라는 말로 시를 묘사한다. “환각은 무리하게, 아름다움을 팽창시킨 것”이며 “시를 읽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열쇠로 여기(환각)에 들어”서며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공황 상태”라는 것이다. 환각과 공황 상태라는 말과 어울리는 말은 무엇일까? ’혼돈‘(24 페이지)과 ’내면의 황무지’(32 페이지)가 아닐까?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24 페이지) 시를 위해 내면에 거칠고, 황량하며, 무의미한 황무지가 펼쳐져야 한다.(32 페이지)


저자는 이미지와 씨름하는 경우와 말과 씨름하는 경우가 시 작업에 있다고 전제하며 그 씨름은 말 그대로 그것이 무지의 과정임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34 페이지) 저자는 상상을 말한다. 저자의 시론을 읽으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상상계는 이상화한 타자를 닮고자 하는 세계이며 상징계는 늘 차이(差異)와 괴리(乖離)를 느끼는 세계, 실재계는 욕망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허상임을 알고 매번 달성하지 못한 채 포기했다가, 무언가 잔여물이 남아 다시 신기루를 좇는 나그네처럼 욕망을 욕망하는 세계‘란 말이다.(이도흠 교수 지음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723 페이지 발췌, 정리)


(이 부분은 ’개념비평의 인문학‘을 통해 정신분석의 실재 개념을 리얼리즘에서의 현실 개념에 비추어 검토한 황정아 교수의 작업과 비교할 부분이다.) 저자는 운율(韻律)은 동의(同意? 同義?)와 다툼의 화음(和音)이라 정의하며 그것은 동의하지만 다투고, 다투지만 동의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욕망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허상임을 알고 매번 달성하지 못한 채 포기했다가, 무언가 잔여물이 남아 다시 신기루를 좇는 것을 연상한다.


동의와 다툼의 화음이란 말은 ’침묵을 잉태하는 말, 말을 잉태하는 침묵‘(36 페이지)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자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기반하는 모든 시를 현대시라 정의한다. 앞서 내면이란 말을 한 저자는 시는 내면으로 침잠(沈潛)해 들어가는 것이어야 하는,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42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소통은 소통으로 멀어짐으로 인해 한계를 일깨워 오히려 지향하는 무엇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시는 전위(前衛)이고 낯선 존재가 됨으로써 새 길을 만드는 장르라는 점이다.(여시아문如是我聞) 시가 낯선 미지의 언어인 것은 시를 쓰는 시인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인은 모르되 시는 알고 있는 것이 시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앎은 모름을 위한 것이다.(46 페이지) 저자는 시론은 시의 자장(磁場) 위에서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48 페이지)


하이데거의 시론을 거친 저자에 의하면 시는 언어의 불가능성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가르쳐준다. 그리고 유일한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징후(徵候)가 존재한다.(하이데거는 한 시인의 유일한 시는 말해질 수 없는 채로 머문다고 말했다.) 저자는 시를 쓸 때 특별히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58 페이지)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온 이 저자의 말은 충분히 길지 못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두 개의 비유’라는 글에서 나는 다시 상상계와 상징계가 어우러진 실재계를 이야기하고 싶다. 저자의 말인 즉 우리는 존재를 꿰뚫어보지만 진정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매장행위이다. 보기만 할 뿐 존재와 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우리에게 들어와 침묵한다. 헬렌 켈러가 자신의 하나의 미성숙(시각 장애)이 사물과 멀어지게 했다면 또 다른 미성숙(청각장애)은 사람과 멀어지게 했다는 말(내 식으로 정리한 말)이 문득 생각난다.


저자의 해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현존(現存)과 사이에서 요동(搖動: 저자가 쓴 말은 아니지만 내 식으로 정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상징(象徵)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은 상징이 기본적으로 사물을, 사물 뒤에 있다고 추정되는 관념이나 의미로 종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박(捕縛)되지 않는 언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이 미지 자체를 즐긴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비결정성과 불확정성을 즐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는 낯선 미지의 언어라는 말을 한 저자는 시는 동질감(同質感)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질감(異質感)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덧붙인다.(74 페이지) 저자는 차이를 함유한 반복을 의식했음인지 동의되는 대상에 플러스 알파적 요소를 보태지 않는 동의를 비판적으로 본다. 저자는 1부의 마지막을 보르헤스의 도서관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며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는 말을 더한다. 저자는 두 번째 시집에서 자신이 변했다면 서슴지 않고 쇼스타코비치를 (원인으로) 꼽는다고 말한다.(102 페이지)


앞에서 자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기반하는 모든 시를 현대시라 정의한 저자는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은 늙지 않는다고 말한다.(103 페이지) 그것들은 우리의 구태의연한 의식을 풍성하고 새롭게 탈바꿈시킨다. 저자는 쇼스타코비치에게서 현대성을 배웠다고 말한다. 요동이란 말을 했지만 저자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잠자고 있던 자신 안의 무수한 소리들을 들었고 그 소리들을 방해하거나 무관심하게 덮어버리거나 비하하거나 새로이 점령하는 또 다른 소리들을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104 페이지)


저자는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를 듣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는 말은 휘발성인 깨달음 즉 존재 뒤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시‘라는 말과 맥락이 같다. 미래파 시인들(편의상의 분류이지만)의 동일성보다 상이성과 차별화에 주목할 것을 주문하는 저자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인 소수자(나의 표현) 주체들이 미분화와 혼돈이라는 특성에 힘입어 질서를 공략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제로 작용한다고 설명한다.(11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질서(秩序)란 숨길 것을 숨기고 난 후의 묵계(黙契)이자 허위(虛僞)이다. 이 부분에서 백상현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백상현에 의하면 유령이란 이 세상에 없어야 하는 (비)존재가 이승에 출현하여 놀라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이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12 페이지) 물론 저자는 오히려 비주류의 창궐(猖獗)이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를 추인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의미의 고정(固定)이고 상투성(常套性)이고 도식화(圖式化)이고 수확체감(收穫遞減)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무너뜨려야 할 주체가 있고 한편엔 더 나은 주체가 있다는 가정은 근본적으로 문학에 낯선 발상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미래파는 너무 늦게 문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너무 빨리 주목을 받았다.(120 페이지) 저자는 미래파 시인들의 가족에 대한 과격성은 과연 실질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일까? 라 묻는다.(126 페이지)


한 중견 시인이 아버지를 과격하게 부정(否定)하고 공박(攻駁)하는 것을 보며 그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도식적 수용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바 있는 나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저자는 아버지의 훼손毁損이라는 말을 한다. 물론 이는 내가 지적한 시인에 대해서가 아닌 미래파 시인들에 대해서 발해진 언어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해 “관계의 생성 혹은 회복에 주목한” 시를 써 불교문예상을 수상한 장석원 시인이 훼손과 파괴의 언어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파괴 및 타락과 생성 및 회복의 언어가 공존한다는 점을 장석원 시인은 보여주는 것일까? 물론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은 긍정적이다. 저자는 장석원 시인의 다른 시를 역동적 세계상을 보여주므로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131 페이지) “이미 불 밝혀진 곳으로 이동한 뒤늦은 징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미래파는 암흑 쪽에서 암흑을 몰고 올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경외하는 것은 암흑 쪽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34 페이지)


이 부분에서 정체가 파악된 물질에 비해 압도적인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에 주목하는 천체물리학의 동향(動向)을 생각하는 것은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이자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파괴와 현대시 등을 좋아하는 저자의 지향점은 서정과 거리가 멀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시문학은 삶의 제반 조건과 이에 처한 인간의 내면적 상황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대립적 시각을 되풀이하여 견지해왔다.(162 페이지)


서정시의 긍정,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부정을 말할 수 있다. 저자는 부정의 창의성이 아닌 부정의 압도적 팽창(膨脹)을 아이러니하다고 설명한다. 저자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부정이든 긍정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증유의 사태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것’은 양자에 공히 해당한다. 이승훈 시인론에서 저자는 이승훈 시인을 경계를 가지지 않는 시인으로 분석한다.


미지와 관계된 논의(시는 낯선 미지의 언어, 미지 자체를 즐긴다는 저자)를 이야기하는 저자의 성향에 부응(符應)하는 예일 것이다. 라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승훈 시인은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다’, ‘난 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다른 누구일 뿐이다’ 등의 제목을 가진 시들을 쓴 바 있다.(이승훈 시인은 ‘라캉으로 시 읽기’ 등의 시론집을 쓴 비평가이기도 하다.)


저자에 의하면 이승훈 시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포착(捕捉)되는 즉시 주체의 지위를 잃고 대상으로 전락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승훈 시인은 라캉 뿐 아니라 불교의 공(空)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무자성(無自性)을 이야기한다. 공(空) = 무자성이다. 이렇듯 무자성과 함께 이승훈 시인에게는 대상에의 강박이 자리해 시를 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최승호 시인론에서 저자는 (최승호 시인이 지향하는) 부숨은 본질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최승호 시인의 시에는 공(空), 무(無) 등의 말들이 즐비하다. 중요한 것은 “존재들은 결국 흩날리는 모래가 되어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현대 물리학과 천문학적 지식에 의거해 그 공으로 돌아감이 다른 존재의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최승호 시인은 제로를 다른 공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제로는 공과 다르다. 이런 인식은 저자에 의해 수용 또는 동의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의 시 해설은 그런 지적에 의해 빛을 잃지 않을 만큼 정치(精緻)하다. 여기서의 정치하다는 말은 내가 그 해설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물론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라 해서 모두 정치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든 시와 거리가 먼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나는 최승호 시인의 공론(空論)보다 우주의 출발, 그리고 대칭성 붕괴에 더 호기심을 느끼고 그 논의가 더 치열하고 새롭다고 생각한다.(권혁웅 시인/ 비평가가 이수명 시인의 ‘마치’라는 시집을 현대 물리학으로 풀어낸 것이 화제라고 한다. 흥미를 끈다.) 그리고 나는 ‘제로 = 공(空)’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이해할 수 있는 시가 최승호 시인의 시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승훈 시인의 시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포착되는 즉시 대상으로 전락하는 시를 읽은 저자는 홍신선 시인의 시에서는 정신이나 기개와 같은 자아 중심적인 것들을 과신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음이 토로되고 있음을 읽는다.(226, 227 페이지) 저자는 문학은 일차적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잠행(潛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23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문학은 가치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김민정 시인의 시도 미래파 시인의 시처럼 가족에 대한 해체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아니 해체라는 말로는 부족할 과도한 자극과 원초적인 수사(修辭)의 성찬(盛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춘수 시인의 처용단장론에서 저자는 다시 언어에 대한 논의를 편다. “언어는 아무것도 모”르고 “존재의 세계 속으로 스며들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존재를 차단한다."는 말도 있었다. 이준규 시인의 시들을 논하며 저자는 시는 인식의 기존 유통 회로를 무차별적인 방사상의 구도로 환치시켜 놓은 것이라 말한다.(267 페이지)


저자는 이준규 시인의 시가 진정한 무지, 물질의 세계에 틈입(闖入)하려 한다고 말한다.(미지라는 말은 이렇듯 중요하다.) 이영주 시인의 시를 논한 자리에서 저자는 시를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인식의 무력함에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고 말한다.(275 페이지) 이 미지(未知)와 무력(無力) 등의 말은 저자가 시를 설명하는 주된 어휘인 만큼 일관된 체계를 보인다. 그러나 다소 자주 되풀이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영역을 넓히는 것과 미지 또는 무력에 이르는 것은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저자가 동의되는 대상에 플러스 알파적 요소를 보태지 않는 동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 주의하자.) 저자의 논의는 시인이자 비평가의 그것이기 때문에 난해한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관념적이면서 아니 그렇기에 두루 통용되는 언어가 아닌가 싶다. 장점이자 단점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시론을 읽는 듯 하기도 하다.

저자는 하이데거와 바슐라르 등의 철학자가 쓴 시론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렇기에 ‘횡단’은 사서 읽어야 할 책이다. 두고 두고 시간을 내어 개별 작품들에 두루 적용시켜 읽을 시론집이다. 5부 ‘횡렬’에 실린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론, 르네 마그리트론, 베르나르 브네론, 마르셀 뒤샹론 등은 시 뿐 아니라 문학, 철학, 그림 등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할 언어들이다. 그러나 읽기 위해 더 많은 시론, 예술론, 철학서 등을 읽고 음미해야 할 론(論)들이 아닐 수 없다.

m******1 2016.02.15.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