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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하면 '해에게서 소년에게','3.1독립 선언서','불함문화론'으로 근대화와 민족주의에 강렬한 빛을 남긴 시인이자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뒤에 보여준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아 그 빛보다 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남긴 명암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최남선은 일찍부터 새로운 지식과 정신을 반영하는 신문물의 선구자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최초의 신체시라 할 수 있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것이 10대였고, 20대 들어서는 잡지 '청년'을 창간해 서구문물과 근대적 지식을 소개하는 계몽운동가였다. 30대에는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민족운동가로, 또 역사연구가로 그 누구보다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보다 발전한 조선 문화를 발견하는 것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중국에 대항했던 고구려를 역사에 주목하는가 하면,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최남선은 서구근대 문명을 적극수용하며, 또 조선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글을 발표하며 조선의 지성을 주도해나갔다. 3.1운동으로 투옥되는가하면 글과 말로, 대중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28년 그가 조선사 편수회위원에 위촉된 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변절의 조짐을 보인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찍이 동경에 유학했던 이른바 동경 삼재(三才) 즉 홍명희, 이광수, 최남선이라는 걸출한 지성들 행보가 20년대 들면서 간극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명희는 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하면서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데 비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노선에서 이탈했다. 최남선도 자치주의자들과 가까이하며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30년대 들어서면서 최남선은 노골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며 변절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선융화론을 주장하는가하면, 화랑도를 조선 청년을 전쟁에 동원하는 논리로 활용하며 학병 권유에 나서는 등 친일의 논리로 방송과 글, 강연에 나섰다. 그가 변절함으로써 물질적으로나 지위면에서는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잃는 것도 많았다. 그에게 실망한 젊은이들은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고, 지식인으로서의 권위도 실추되고 만 것이다.
최남선의 변절은 그 어느시대보다 격변을 겪었던 근현대 지식인의 훼절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 무렵 신간회가 해체됐고,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대중활동을 하기에 불가능해졌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적인 지배방식이 완성된 셈인데, 30년대 들어서는 최남선 외에도 수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에 나서 일본의 전쟁을 옹호하고 일제의 논리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이렇게 대거 변절하게 된 데에는 일제 지배 체제가 강고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고, 일제의 지배가 영구히 지속되리라 판단했던 것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니,가관이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 교수, 언론인, 시인, 소설가 등등이 방송이나 신문에다 번지르르하게 전쟁에 지원하자, 국방비를 기부하자고 연설하고 글을 썼을 모습들이. 해방된 뒤 자신이 쏟아놓은 말과 글에 대해 이들은 얼마나 수치스럽고 참담했을까. 해방뒤 일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데 있어서 문인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들이 친일활동을 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됐기 때문이었으니, 최남선의 경우에도 일제를 옹호하며 내세웠던 말과 글을 해방 뒤에는 변명하고 바꾸면서 학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 부끄러움이라도 느끼기나 했으면 그래도 양반인 편이 아니었을까. 이광수는 끝까지 자기 변호에 급급했으니.
해방 뒤에도 최남선은 여전히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지니고 있었고, 그를 찾는 곳은 많았다. 교육계에서나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그의 글과 강연을 저지했다니, 그나마 민족적 정기가 남아 있었다고 할까. 1949년 2월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가 남긴 친일의 족적이 워낙 분명해서 기소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남선의 재판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는 보석으로 석방됐고, 반민특위의 와해로 재판 자체가 흐지부지되면서 죽는 날까지 여전히 역사학자로 기고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최남선은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이 어떻게 일그러지게 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말과 글을 일제를 옹호하는 논리로 동원해 보신했다. 그는 지식을 파는 것을 넘어서, 지식을 무기삼아 조선 청년들을 전쟁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했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보람있게 죽자' 같은 글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근현대 선구자적 지성인으로서의 명성에 스스로 먹칠하며 일제의 확실한 부역자가 된 것이었다. 그는 반민특위의 재판부에 반성의 뜻을 담아 '자열서'를 제출했지만 무죄를 주장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싶었다. 죽음을 앞두고서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까, 전쟁터에서 죽어간 청년들 얼굴을 떠올리며 참회했을 거라고. 이렇게 상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는 것은 단죄해야 할 죄상을 단죄하지 못했기에 그 후손들이 감수해야 하는 비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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