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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에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 중 섹스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란 자신을 본 적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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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교수라는 이름만 대도 그 야한 소설 쓴 사람? 하고 한마디 평을 들을 수 있다. 야한 소설로 교수직 박탈당하고, 감옥에도 다녀온 사람. 그런 사람의 소설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면 같은 부류로 치부될까봐 살짝 부끄러울 수도 있는 하나의 신드롬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이 책도 서평이벤트에 걸렸을때 꼭 읽고 쓰고 싶다고 했다. 당첨되어 무척 기뻣다. 뭔가 므흣한 얘기가 있으리라는 기대로 책을 펼쳤다.
그렇다. 나 야한 것에 관심있는 사람 맞다. 고등학생때 수업시간에 몰래 읽은 하이틴 로맨스만 수백권 될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다들 중학교때 졸업한다는 하이틴 로맨스를 고2때 눈떠서 한참 공부해야할 고교시절을 하이틴로맨스와 환상에 빠져 정신없이 보냈다.
야~함에 대한 기대감으로 받은 책. 그.런.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좀 불편함이 있었다. 전혀 공감대가 안생기는 것은 아닌데, 뭔가 읽는 나로 하여금 갸우뚱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그게 뭐였을까.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적취향(性的趣向)과 과거사에 대한 얘기를 읽다보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 또는 저자의 입장에서 겪은 불합리에 대한 항변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작품때문에 외설시비가 있고, 감옥에 다녀오고, 교수직에 박탈당하고, 동료교수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불합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고싶은 말을 한 것에 대해 사회가 그에게 내린 판정에 대해 변명하고, 항변하는 듯한 느낌의 에세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더러운(?) 성적취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는 내가 고개가 갸우뚱해졌는것 같다. 그렇다고 나의 성적취향은 깨끗하다거나, 그가 받은 사회적 처사가 공정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과거에는 말도 안되는 일에 대해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위에 대한 호불호가 그 기준을 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마광수교수의 경우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뿐인데, 그것이 한번 싫다는 판정을 받아 그 이미지를 깨기 힘들어진 것이 아닐까.
책을 쓴다는 일. 그리고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일은 쉽지 않음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 지금까지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하이틴로맨스를 같이 읽던 친구들이 아닌디~ 흑. 하이틴로맨스를 덜 읽었으면 나... 대학입시에 지금과 다른 결과를 얻었을까? 흠. 재수까지는 안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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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더럽다'라는 형용사적 표현일경우는 부정적인 의미가 많다. 하지만, 책 제목처럼 부사적인 표현으로 사용될 경우엔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다. 아주 징하게, 작정하고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고로 본인 역시 '더럽게~'라는 표현을 긍정 & 부정의 의미로 모두 종종 사용하곤 한다.
마광수.... 이 이름 석자만으로도 번뜩 떠오르는 작품이 몇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그 중에서도 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판금도서이다. 그리고 마교수는 이 책 출판이유로 감옥행을 당했고, 직장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받았으며, 해직의 위기로 10년 넘게 백수였던 적도 있다.
'즐거운 사라' 이 책은 내가 대학 신입생이 되던 해 92년도 발간되었다.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여고생이 그러하듯, 대학생이 되면 좀 더 당당해진다. 특히 화장이나 옷차림에서... 물론, 고교시절 소풍때가 되면 친구들끼리 몰래 엄마분을 발라보기도 하고, 립스틱을 발라보기도 하는 작은 탈선을 경험하곤 하지만....단지 스무살 여대생이라는 이유로 화장이 허용되고, 펌과 염색이 허용되며, 손톱을 원하는 만큼 기를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 물론, 나는 이 특혜의 수혜자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가해자였다.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는 일류대학 국문과 교수가 이렇게 외설스러운 책을 낼 수가~ 아마도 내가 지금 이 책을 읽었다면 그렇게 당혹스럽지는 않았을텐데... 철저한 남아선호사상에 젖은 엄마 밑에서 훈육당한 나는 아주 보수적이였다. 아니 보수적인척 했는지도....하지만 한꺼번에 주어진 자유와 권리에 나는 우리과에서 화장이 제일 짙은 여학생이였다. 아직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물론 헤어스타일도...와인빛 컬러의 염색과 펌....등 2, 3학년 선배들이 되려 4학년 선배인줄 알고...내게 인사를 할 정도였으니깐....
당시 나는 가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마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가 좋아하는 야하다의 의미를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부분과 여성들의 화장에 대한 생각말이다. 그가 말하는 '야하다'의 어원을 '野하다'로 보아 '야한 여자'를 겉과 속이 서도 다르지 않은 여자, 비교적 본능을 은폐하지 않는 솔직한 여자, 성격이 화통하고 너그러운 여자이다. 맞는 말 같다. 또한, 그가 말하는 페미니즘을 본문속에 '립스틱 페미니즘'이라고 말한다. 여자가 화장을 하는 이유는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가꿔지는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 건강한 나르시시즘 충족을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뭐 그렇다고 그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다. 92년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가 주장하는 성적표현 자유만이 꼭 문화적 선진국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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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는 야한여자가 좋다 , 몇년전 성의식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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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마광수 교수님의 글을 처음 접해본 나로서는 요즘 시대가 한창 교수님이 활약(?)하던 때와 많이 달라져서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퇴폐적이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이분의 에세이에는 겉치레나 허위의식이 없어서 오히려 더 순수하고 자유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의식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야한 싸움꾼’으로서의 모습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될 날이 과연 언제쯤 올런지...
이분이 주로 애용하는 ‘야하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야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솔직한 것, 천진난만한 아름다움, 동물처럼 순수함, 열려 있음, 개방성 등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유미적 평화주의가 확산되면 세상의 많은 부조리, 범죄 등이 상당 부분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겉과 속이 진정으로 야한 사람들이 득실대는 세상이라!
문학, 예술의 본질적인 역할을 욕망의 대리배설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부분 또한 인상적이었다. 위선에 찬 기성세대와 그들이 조성한 사회 속에서 세뇌된 이중성 때문에 병들어가고 있는 젊은 세대가 더 이상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본능을 억압하지 않고 인정하면서도 자유롭게 풀어주었을 때 진정한 자율이 실현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마광수 교수님의 글은 한국 사회의 왜곡된 윤리 의식을 정면으로 꼬집고 있어 유쾌하다. 박쥐가 배설할 때 모습처럼 모든 것을 까발리는 듯한 이분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경직되고 촌스러운 우리 사회에 이런 분들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 필요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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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난 후 서평을 쓸 때마다 내가 가장 생각을 많이 하고 중점을 두는 부분은 읽은 책을 통해서 내가 공감했던 부분과 나한테 오래 기억되는 부분에 대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사실 고민이 되었다. 뜻밖으로 별로 생각나는 부분이 많이 없어서였다. 왜 그럴까? ㅡ.ㅡ;; 어쩌면 그동안 내가 마광수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했던 것만으로 큰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알고 있던 그분의 책들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그리고 '즐거운 사라' 등 쉽게 자극받을 수 있고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던 것밖에 없어서 단지 성적인 표현이 과하다는 것만으로 가질 수 있는 편향된 시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어쩌면 지금의 내 나이에 더 권태로워질 수 있는 생활에 뭔가 활력소가 필요했기 때문인거 같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재미있는 부분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또 내가 놀라웠던 부분은 마광수 교수 그 분의 박식함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신 교수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것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문제를 성적인 요인으로 해석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논리는 그 분만이 풀어낼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물론, 다른 인문학자들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게 때문에 독보적인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내에서는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모든 내용이 성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책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다른 내용들도 더 분명히 포함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럽게 사랑하자' 라는 제목 때문에 너무 쉽게 책의 내용이나 그 평가들까지 단정지어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감도 들었다.
수필 형식으로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고 그 내용을 자기의 신념으로 채워가고 있는 그 분의 모습을 그려보면 학자로서의 꼿꼿함 같은 것을 연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외모에서 풍기는 모습으로만으로는 훨씬 더 꼿꼿하고 까칠할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분의 글에서 가장 저급(?)하게 치부하는 말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대해 언급한 글이 없었다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는걸 보면 인간 본연의 내면에는 누구나 성을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감정이 있기는 한가보다.
그러면서도 사실 책을 다 읽고 덮고난 후에 그다지 감흥이 많이 남지 않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억압된 성문화에 길들여져버린 고루한 대한민국의 사십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죄스럽지 않아야 되는데 괜히 언급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생각하게끔 익숙해져 있는 성 문화가 달라지고는 있다 하지만 마광수 교수는 이미 너무 앞서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배제할 수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느낌이 조금 달랐을까?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조금은 더 자극이 될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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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에서는 과감한 성행위 묘사로 외설 시비에 시달렸던 고전들이 있다.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1928)이나 헨리 밀러의 [남회귀선](1939)이 그러한 작품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보수적 검열의 희생양이 있다. 1992년 [즐거운 사라]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순진한 문인의 초상, 마광수를 기억하는가. 당시 문청인 내게도 단지 원앙호접파 비슷한 유의 낭만적 퇴폐주의 작가로 인식되던 그를 새롭게 재인식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 필화사건이었다. 저자의 성적 판타지도 마치 딴나라 이야기처럼 나와는 무관했다. 긴 손톱과 굽이 높은 하이힐에 관한 페티시즘적 애착은 솔직히 이해도 안되었다. 20여년 전에 이미 한국문화의 보수성과 촌티 그리고 꼰대성을 비판한 바 있지만 여전히 한국문화의 토양은 변동이 없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에세이집 [더럽게 사랑하자]는 육체주의를 선언하고 우리 사회의 문화적 촌티를 강하게 비판한다. 문화적 촌티의 맥락으로 오래토록 지속된 성리학과 기독교의 권위주의, 금욕주의와 도덕주의가 배양하고 산출한 문학작품에서의 표현의 자유 억압과 변화의 거부, 그리고 성의식의 이중성과 위선적 면모를 지적한다. 한국 문화의 촌티는 원시적 상상력과 형이하학적 진상을 무시하는 도덕적 경건주의, 현학적 엄숙주의에서 비롯된다.
"나는 육체주의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보아 그것을 실천한다. 우리나라 문화계는 도무지 자유로운 개성과 돌출적 변화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양반주의나 훈민주의의 문학관이 당연시되고 있고, 독창적 광기와 솔직한 노출은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고 있다. 더 민중적인 대중문화와 '하수도 문화'에 대한 턱없는 멸시와 탄압은 그런 수구적 봉건 윤리에 기인한 문화적 후진성에서 비롯된다."(243쪽)
마광수는 한국에서 '야한 문학'의 대표주자다. 마광수는 '야하다'를 '동물적 본능에 정직하다'로 정의한다. 그에게 '야함'이란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는 순수한 본능의 세계를 의미한다. 저자는 문학과 예술의 고갱이를 '하수도 문화'로 간주한다. 그가 선언한 '육체주의 문학'은 사랑과 성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성애관에서 비롯된다. 또한 세속적 세계관과 실용적 쾌락주의를 바탕으로 민중문학의 외설, 해학, 의도된 경박성과 같은 문학적 장치들을 이용한다. 마광수의 육체주의 문학은 세계급 성문학의 대가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란 구석이 많지만 그나마 한국적 에로스문학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마광수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영국의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1885-1930), 미국의 헨리 밀러(Henry Miller, 1891-1980), 일본의 무라카미 류(村上龍, 1952-)처럼 각 나라마다 성애문학의 대표주자들을 꼽아볼 수 있는데 한국은 마광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때 저자처럼 마녀사냥을 당했던 순진한 장정일도 포함시킬 수 있지만 현재 장정일은 성애문학과는 안전거리를 유지한 지 오래다. 마광수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1928)의 작가 로렌스에 대해 내린 평가는 그 자신에게도 해당한다.
"그가 서구사회의 위선적 금욕주의나 기독교적 정신우월주의 등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가했다는 점과, 성행위의 노골적인 묘사로 문학의 품위주의에 반격을 가했다는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의 작품들에서…서구의 기독교적 순결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여성의 성적 능동성을 과감한 성애묘사로 펼쳐 보였다."(165쪽)
로렌스도 마광수도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 로렌스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오르가슴 이론을 차용했다면, 마광수는 리비도와 욕동이론을 빌린 경우다. 가령 카타르시스를 성욕의 대리배설로 정의하는 것이 한 예다. 저자의 존재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섹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핥고 빤다." 그는 사랑과 성의 분리를 도덕적 위선으로 간주한다. 프리섹스를 지지하고 결혼제도와 일부일처제에 반대한다. '성 알레르기' 현상을 조장한 플라톤주의와 금욕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섹스를 즐기는 돼지가 낫다'는 논리로 비약한다. 육체적 사랑을 진실로, 육체적 쾌락을 선으로, 정신적 사랑을 거짓으로, 금욕주의를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또다른 극단적 오류가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 성심리학의 문제점은 모든 사회적 병리현상의 원인으로 성적 억압을 지목한다는 점이다. 마광수 역시 동일한 문제점을 이어받는다. 즉 현대의 모든 병리현상의 배후에 '성욕의 불충족'을 언급한다. 성이라는 단일원인이라 간편한 해석이지만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해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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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소 과한 성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책 자체가 성을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작가 마광수 교수가 대표적인 프리섹스 주의자이다 보니 불가피한 부분이니 노골적인 성표현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이 점 감안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이름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교수, 그래서 마광수 교수다. 이십대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삼십대 이후 사십대, 오십대에서는 마광수 교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런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은 알고 있지 않을까?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리 유명한 분인지 궁금할게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성에 관해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그리고 음지로 숨기려고만 했던 '성'과 '섹스', '남녀의 쾌락'등을 너무나 당당하게 들이댔던 교수님이셨더랬다. 그것도 1980년대에...
받게되는 문제의 작품들을 발표한 것은 1989년서부터다. 그전까지만 해도 <윤동주 연구>,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상징시학>등의 점잖은 문학평론 및 시집, 인문서적을 출간하다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일약 유명스타가 되버렸다.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라니. 점잖은 대학교수가, 그것도 국내 최고 권위있는 사립대학인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대놓고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라고 책을 펴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는가. 더군다나 책 내용은 한술 더 떠 그야말로 자유연애, 육체적 탐미, 프리섹스 예찬론이었다. 대번에 저런 교수에게 강의를 받을수 없다며 여대생들과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마광수 교수는 당당했다. 자신의 소신을 말한것뿐이라며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또 펴낸 책이 <가자, 장미여관으로>다. 그당시 여관이라 하면 여행자가 하룻밤 쉬어가고, 잠을 청하는 건전한 객사의 이미지 보다는 불륜남녀나 불건전한 미혼 커플들이 하룻밤 성욕을 푸는 장소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곳이었다. 그런데 당당하게 그런 곳엘 가잔다.
됐다. 이 소설의 음란성이 시비가 되어 1992년 검찰의 수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으며 1심에서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다. 아마도 내 기억에 문학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법원에서 실형을 받은 첫번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판결을 이유로 1993년에 재직중이던 연세대학교에서 직위해제 당한다.
아는 분들에게는 옛 기억을 되짚을수 있는 시간이 됐겠다. 나 역시 순전히 호기심에, 당시 세간에 야하다고 정평이 나있어서,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등을 읽었었던 기억이 난다. 과연,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의 이 책들이 출간된다면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까? 마광수 교수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육체주의, 쾌락주의, 관능주의, 자유연애의 주장은 소설속 허구의 여주인공을 통한 간접화법에 그치지 않고, 에세이를 통해 본인의 경험과 성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밝힘으로서 세간의 지탄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일하던 대학교수직도 잃고, 혈기넘치던 젊은 시절도 다 보내 환갑이 지난 마광수 교수가 현시대에 펴낸 새로운 에세이집 <더럽게 사랑하자>에서는 그의 성에 대한 철학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가 궁금했다. 아까 위에서 그 시절의 책들이 오늘날 출간되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생각된다고 했다. 한번 아랫 문구들을 보고 판단해 보시길. <더럽게 사랑하자>중에서 발췌해 본다.
하지만 마광수 교수가 쓴 소설이 음란물이라고 하여 구속되고 하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다. 어쩌면 이러한 표현과 자기고백이 '솔직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고, 음지에 있는 성담론을 양지로 끌어올려 같이 논의해보자~는 작가의 의중이 먹히기도 할것 같다. 나 역시 기억속에 마광수 교수는 야한 글을 쓰는 작가였지만, 이번에 <더럽게 사랑하자>를 읽다보니 군데군데 파격적인 문구가 있어서 그렇지 퇴폐적 인 '색마'는 아니라는걸 알게됐다. 책의 상당부분은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하고, 건전하게 성담론을 펴자는 주장을 담고있다.
합법적으로 유통시키고, 섹스관광으로 세계 곳곳에서 물의를 일으키며, 성에 엄청나게 관대 하다고 손가락질 하면서 정작 일본에서 만들어진 포르노는 우리나라에서 즉각 유포되고, 일본 저리가라는 섹스관광의 신흥국으로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 눈만 돌려보면 온 도시 곳곳이 윤락가에 매춘업이 성행하고 있다. 초등학생만 되도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에 노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 그러면서 혼전순결을 강요하고, 성을 입에 담는것만으로도 눈총을 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자유로운 섹스를 즐길 권리가 있고, 또 그렇게 사는게 옳은것인지, 욕망에 몸을 맡기지 않고, 절제하고 극기하면서 성에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금욕적인 삶을 사는게 옳은것인지. 내 몸은 전자를 응원하고 따라가고 싶지만, 내 머리는 후자쪽이 건전하고 바람직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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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 육체주의를 선언하다'라는 부제가 써있는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집을 보고 처음엔 출판사에서 표지에 신경을 안쓴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보니 저자가 그린 그림이란다. 또 그렇게 보니 그런대로 묘한 매력이 있는 그림같기도 하다. 그렇게 처음부터 편견이 살짝 널뛰기를 하는 어지러운 마음 가운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요량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더 활달하게 뛰노는 그의 글로 달래고자 한 장 한 장 읽어나간다.
40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꺼운 책이고 왠지 교수의 글이라 지루할 것도 같은 나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멀리 가지 않고서도 작가가 시작글을 대신한 서시만으로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내용은 약간 19금이라 제목만 언급하자면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라는 시인데 이상하다. 예전엔 제목만 보고도 눈살을 찌푸릴 법한 이 시가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표제의 '더럽게 사랑하자'라는 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미친듯이 사랑할 수 있어야 외칠 수 있는 구호일 것이다. 그는 어떠했을까? 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그의 젊은 시절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첫 사랑도 나온다. 짝사랑은 그가 대학원에 다닐때 반해버린 여성으로 좋아하는 이유가 의외다. 그녀의 반자연적인 인공미에 끌려서였다니 그 부분에서 혼자 한참 웃었다. 여하튼 그는 인공미인 그녀가 끌려 이미 애인이 있다는데도 애타게 사랑을 호소했으나 스토커 취급당하고 대사관 경찰들에게 끌려가 싹싹 빌게 되는 다소 슬픈 결말이었고 첫사랑도 알고보니 사랑하는 유부남 대신 자신을 꿩대신 닭으로 대했던 그닥 유쾌하지 않은 사연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는 더~럽게 사랑하라고 외칠 자격이 있다. 분명 동기야 어쨌든 분명 매순간을 첫사랑처럼 몰입하는 순정과 열정이 있었기에 그렇게도 당당히 더럽게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일테다. 더럽게 사랑해야 할 이유는 깨끗한 걸 너무 따지다 보면 건강한 원시적인 열정이 사그라져 버리기 쉽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처음에 나는 '더럽게'를 강조의 부사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저자는 정말 dirty의 더럽게를 외치고 있었나보다. 살짝 예상을 벗어났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어쨌거나 사랑은 더러워도 진정 몰입할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에 나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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