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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폭일로의 문제작, 절망에게 고독할 자유를 허하노니...
"자폭일로의 문제작, 절망에게 고독할 자유를 허하노니..." 내용보기
선서! 나는 누구(작가의 명성, 출판사, 세계문단, 블라디미르의 독자팬 등)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솔직 과감한 리뷰만을 쓸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바, 지금부터 난립하는 진실이 특정인의 심기를 건드릴 추후의 사태와 억측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기로 맹세하는 바임.   내게는 늦은 기상과 더불어 하는, 그다지 역사 깊지 않은 습관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내 키높이 장식장 위에
"자폭일로의 문제작, 절망에게 고독할 자유를 허하노니..." 내용보기

선서! 나는 누구(작가의 명성, 출판사, 세계문단, 블라디미르의 독자팬 등)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솔직 과감한 리뷰만을 쓸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바, 지금부터 난립하는 진실이 특정인의 심기를 건드릴 추후의 사태와 억측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기로 맹세하는 바임.

 

내게는 늦은 기상과 더불어 하는, 그다지 역사 깊지 않은 습관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내 키높이 장식장 위에 거룩한 양다리를 들어 올려, 하루의 오후에 막 진입할 즈음의 스트레칭 10회. 자칭 쉴 새 없이 쑤셔대는 육체에 곧바로 반응하는 뇌의 반사작용인데, 때때로 이것은 나에게 알 수 없는 쾌감과 만족감을 준다. 막연하게, 요골에서 대퇴부로 연결되는 욱신거림에서 느껴지는 그 고통을 나는 마치 하나의 고행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절망>을 터무니없이 황당해마지 않는 꼴통작이라 치부하지 않으려는 건 순전히 나의 의지다. 그것은, 모든 문장은 어떤 삶의 교훈이나 철학을 주려는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나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곱지 못하고 의미도 없는 일개 중언부언(놀라자빠질 만한 수작秀作을 기대했건만)만을 읽고 말았다. 혹 눈치 채셨는지... 나는 지금, <절망>역시 내게 하나의 고행이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다.

 

겸허한 창조자 되기가 이토록 힘든 것이거늘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9쪽-스토리의 첫 페이지다)

 

눈의 처마! 이거 괜찮은 표현이다. 격조 높은 내 소설에 썩 잘 어울린다.(37쪽)

 

문학과 관련하여 나는 모르는 게 없다.(55쪽)

 

대체로 나는 늘 뛰어난 유머를 구사해왔다. 상상의 재능은 이 유머와 관련 있다. 유머가 따르지 않는 상상은 비통하다.(70쪽)

 

과시록 같은 글은 극도의 거북함을 안겨준다. 이는 체질적으로 상당히 불편한 오그라듦을 주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자기과시, 오만의 바다를 항해하는 글. 가식이 산발적으로 두드러지는, 자신의 재주에만 의탁해 주제는 흐지부지 삼천포로 빠지고 독자로 하여금 좀 더 겸허해질 것을 다짐토록(유아틱하지만, 정말 이런 사람이 되면 안되겠구나 라든지 이런 글을 쓰면 안되겠구나, 와 같은) 만드는 난삽하기 그지없는 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보코프는 나름대로의 감상을 피력할 권리를 가진 독자만의 신성한 자유를 사사건건 조롱하며 스스로 욕 얻어먹기에 마땅한 문장을 남용하고 있다. 이에 서슴없이 꿈틀거리기를 주저하지 않은 나.(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는 법이므로)

 

예술을 빙자한 '무시'의 냉혹함

 

자, 나보코프여. 독자의 외침을 들을지어다.

‘나는 그대가 밥 먹듯 우롱해도 좋은 사람이 아니네. 세상에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하하) 대범하고 소신 있는 독자란 말이지. 그대의 명성, 출판사, 혹은 각종 이벤트에 굽실거려가면서 근질근질거리는 내 할 소리를 다독이고 감추고 혼자 중얼거리기나 하는 그런 비겁한 독자는 더더욱 아닐세.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대는 제대로 알아두시길. 나는 그대의 영원한 고객. 하여 나에겐 내가 이용한 제품에 대해 솔직하게 왈가왈부할 권리가 있다고. 이미 그대의 제품을 사용했던 자들의 호평은 참고사항일 뿐, 내 입단속은 오롯이 나만의 신성한 자유의지로부터. 어떤가? 그대도 당신제품에 대한 내 사용후기가 그닥 탐탁치 않지? 아니, 분명 이가 갈리도록 화가 날 걸세. 맘만 먹으면 그대는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도 남겠지. 거장을 제대로 알아 뫼시지 못한 죄, 강자의 권위에 솔직한 사견으로 깐죽거린 죄- 보석으로 풀려날 재산도 없으니, 십중팔구 난 감옥에서 썩어갈 갈 테지. 그러나 아직 통쾌해하기엔 일러. 현재 복역 중인 내 모든 의무와 역할에 해방되어 한동안은 그 참신한 휴식에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참! 이것도 고행의 한 종류이겠구먼. 어쨌든 그 일은 어떤 형식이로든 사회 부조리로 회자될 것임에 틀림없네. 이것이야말로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니고 뭔가. 결말은 어떨까. 그러므로 그녀는 위대한 나보코프 앞에서 감히 무서운 줄 모르고 달린 주둥이를 마구마구 나불거리던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작가란 모름지기 부조리에 대항하는, 그리하여 거대한 권력의 횡포에서 약자를 비호할 수 있는 도구로서 자신의 재주를 소모시켜야 한단 말이지. 작가가 괜히 작가인가? 필력이 좋으니 작가지. 도둑이 자신의 그 훌륭한 업적을 자랑하고 다녀 보게. 그 얼마나 우습고 쓸데없는 짓거리인가. 그러니 이참에 한 수 배우시게.(이미 알고 있더라도) 또, 청출어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끔은 그대보다 훨씬 작은 사람에게라도, 심지어는 젖먹이에게도 비굴하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하는 법. 성인들은 이를 몸소 실천하곤 하지. 동양고전에도 이런 캐릭터가 적지 않다는 건 당신도 익히 아는 바. 가르치려고만 들면서 타인 위에, 특히나 약자 위에 군림하려드는 것 자체가 부조리의 근간이야. 하기사 한 수란 것도 어떠한 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삶과 인간의 질을 달리하네만. 여하간 나또한 가슴깊이 새기는 언행철학이네만 잊을만하면 상기시키는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네그려. 누구나 알면서도 실천하기란 요원한, 그대 같은 과대 자기주의에 빠진 사람에겐 비상보급책만큼이나 시급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의, 누구의 지령인지 알아서 꼭 그치들만 뉴턴해가는 게 세상이치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네만.

 

- 동시에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내 능력은 내게 어떤 기쁨을 가져다주었다.(98쪽)

 

- 오히려 작가의 권위를 깍아내리려고 혹평을 해대고 결점을 집어내서 따끔히 쏘아대려고 안달이다. 그리고 애타게 찾던 조악한 실수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면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나 실수한 건 그들이지 작가가 아니다. 작가에게 허락된 놀라운 혜안이 그들에게는 없다. 그래서 작가가 경이를 감지한 곳에서 그들은 특별한 그 무엇도 보지 못한다.(139쪽)

 

풉!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했거늘. 생각해보게, 독자를 무슨 난공불락의 무식쟁이 취급하는데 그 소릴 들은 당사자의 기분이 어떨지. 문학의 거장이라는 그 잘난 명예로 그대가 안면몰수 주사를 부리는 동안(아! 맘 놓고 폭로해도 괜찮은 후광에 힘입은, 스토리텔러로서 그대의 그 비열한 얼개 능력? 독자를 약 올리는 능력이라 해야 맞다면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봐야 하겠네.) 나는 대단히 뿔이 났다고! 알아, 누구에게 하소연해봤댔자 들어줄리 만무하지. 그리하여 내 뿔이 지극히도 무력한 뿔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서글프더군. 하지만 자네, 고객을 이리 대우하면 언젠가는 큰 코 다친다는 걸 반드시 알게 될 날을 맞고야 말 것이네(그런 날<one day>조차 자네를 피해갔더군). 마침내 그대는 작가로서 나는 일개 독자로서 진솔 천박한 대화를 나준 셈이니, 우린 피차 쌤쌤인 것인지도 모르겠군. 단, 화장실 갔다 밑 안 닦고 나온 듯한 그 꺼림칙함이야 둘 다 같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우리에게 동질감을 줄 걸세.

 

당당한 폄하의 창조자에 불과한...

 

‘볼셰비키’라는 용어는 그녀의 립스틱 칠한 입술을 거치면 습관적이고 하찮은 증오의 뉘앙스를 띠었다.(28쪽)

 

아내는 교욱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관찰력이 부족하다- 그녀는 독서광이다. 하지만 쓰레기들만 닥치는 대로 읽는다.(32쪽)

 

아내의 스타킹은 신자마자 구멍 나기가 일쑤였다. 열나게 바쁜 그녀의 종아리에서 타버리는 듯했다.(34쪽)

 

하지만 멍청한 아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61쪽)

 

여인들...... 이 변덕스럽고 타락한 족속에 대해 말해 뭣하겠나...(96쪽-결정타)

 

저 문장들 찾느라 진땀 좀 뺐네. 반복적인 여성 폄하. 제발이지 열등감 내지는 자격지심이라고 치부하지 말기를. 현미경독단에 빠진 그대는 게르만의 부인, 리다를 여성전체를 깔아뭉개는 대표명사로 활용했지. 인간 개개인은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존재이거늘, 하물며 여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는 그대의 자만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하다못해 ‘대체로-’ 라든지 ‘일반적-’ 이라든지 하는 얼추 두루뭉술한 형용사라도 덧붙이지 그랬나. 그럼 발톱에 낀 때만큼이라도 아량을 베풀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그대는 딱 단정 지어 말하지 않았는가. ‘여자는 배신하는 존재다(페이지 못 찾겠다, 꾀꼴;;) ’ 그러므로 ‘여자란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다’. 좋은 말도 삼세번이라는데 좋지도 않은 말을 연거푸, 줄창, 내내... 요컨대 인간은 인간을 배신하는 존재다, 라는 말과는 또 차원이 다르잖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네만) 그건 문학적 은유이자 풍자에 정확히 일치한다는 건 자네도 너무도 잘 알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네. 장황한 쓴소리가 글쓴이에게 최악의 좌절감을 던지듯 일갈해버리는 한두문장보다 훨씬 고맙게 다가올 날이 있겠지.(부디...)

 

여하튼 수려한 번역의 반석 위에 선 원작자의 괄목할만한, 상기上記한 저 직설적 거만함의 폭주에 그야말로 나는 아연실색했다. 처음이다, 이런 적은. 그렇다면 논픽션의 작위적 서술의 위대함은 무엇인가! 예술적 허구가 삶의 진실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사실(139쪽)을 아는 사람이 왜? 예술에 차용되는 모든 기교는 大義를 전제한다. 예술이란 테마에 어울리지 않지만, 굳이 형식미를 갖추라 한다면 어느 한 분야에 탁월한 재주를 가진 자가 자신의 예술적 결과물이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대중에게 보여 졌을 땐 그 작품이 보편타당한, 참신하면서도 善(주제/메시지)에 얼마만큼 투철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이는 개인의 정신과 영혼, 재능이라는 삼박자에 순수와 열정이라는 노고 모두가 혼연일체가 된 승화적 결정체인 만큼 두 가지 목적을 궁극에 둬야 한다. 첫째는 스토리의 리얼리티(진정성). 둘째는 촌철살인적 주제의식이다.(도대체 나는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결론인즉슨, 이 작품은 그 두 가지 필수조건을 망각하다 못해 자신의 문학적 재주에 대한 과다한 자랑은 물론이거니와 독자와 여성 전체를 싸잡아 폄하한, 읽는 독자와 읽는 여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야기하는, 예술작품으로써의 겸허와 진중함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리하여 남는 거라곤 거의 황당무계한 분노밖에는 없는 그런 拙作이다.

 

사고의 발작, 그리고 우연이 일을 친 필연

 

솔직히 말해 나는 내 문학의 선율을 소중히 여기는 관계로 어조나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모조리 엉망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다.(176쪽)

 

내 기한 없는 부재를 이용해 내 걸 자기 거라, 자네의 정교한, 그래 인정하네, 정교하고 능숙한 상상의 결실이라 주장할 테지. 그러고는 날 홀대하겠지? - 자네가 내 걸 훔치면 아마 난 으쓱할 기분마저 들 거야. 도둑질이야말로 물건에 보내는 최고의 찬사란 말이지 - 나를 유쾌하게 할 도적질을 결심하는 즉시 자넨 자넬 위태롭게 하는 바로 이 행들은 없애버리겠지 - 게다가 자네 식대로 약간 손보겠지. 차 도둑이 훔친 차를 다른 색으로 칠하듯 말일세.(93쪽)

 

처음엔 <러시아 문학 강의>를 먼저 읽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독서 사행심은 <롤리타>를 먼저 구매하도록 재촉했고, 내친 김에 그의 후속 신간인 <절망>을 사들이게 했으며, 불행하게도 나는 <절망>을 가장 먼저 사생결단하듯 훑게 된 것이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자기 자랑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스토리는 뒷전인 채 중간 중간 끼어드는, 문학 스킬을 이미 오래전부터 섭렵했느니 자신의 글을 도용해 적당히 짜깁기해 마치 자기 것인 냥 으스대는 치들을 경멸하느니- 하는 식의 아집에 나는 점점 지쳐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 가나하는 심정으로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해 읽어나갔다. 이건 뭐 너무 무례할 정도로 직설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글이란 서술 뉘앙스하나에서부터 문장부호하나만으로 그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가 일시에 완료/고정 돼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때로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Reader(독자)는 자기화한 문장의 감상 전체를 희석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해서 독자가 결코 작가의 본뜻을 100%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바로 그 점을 오용해 독자를 무시해도 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작가에게 독자는 곧 영원한 고객. 최고의 만족도를 선사해야 될 의무가 있는, 창조주가 마치 고객 한사람의 만족도야 어떻든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권력행사를 하려든다면, (그의 권력수명이 얼마나 가려는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 자신도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한 것일까. 아주 하찮아 보이는 작은 불씨가 고객 전체의 무관심으로 이어져 창조물의 영원한 고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그의 몰락에 통쾌할 고객다수의 조소嘲笑란...

 

그리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손상시키는 긴 이야기들을 남몰래 지었다- 내 러시아어 작문은 늘 최하점을 받았다. 우리 고전의 주인공들의 행위를 내 나름대로 개작했기 때문이다.(55쪽)

 

내 것, 내 것을, 청소년 시절 내 실험들을, 무의미한 소리들에 대한 내 사랑을- (57쪽)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존재의 독재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황홀경도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내 처지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하지 못한다. 신의 노예라는 처지 말이다.(116쪽)

 

묻어가기 싫은, 딱 하나의 치기적 공통점

 

단어가 가진 본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의 단어연상놀음은 늘 우스꽝스럽게 지속됐다. 가끔씩 합성명사를 이해할 수 없는 음절로 분리해 전혀 다른 뜻의 문장을 만들고, (일상日常처럼) 단어를 한글(자/모음 분리사용)과 한자, 숫자를 조합(1詐ㅇ)사용해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는 나만의 신조어를 창조해 고집스럽게 그 단어를 글쓰기에 써먹기도 했다- 나 또한 신을 믿지 않는다. 신에 관한 이야기에는 세상을 잠시 떠돌다 사라진 수많은 인간 영혼들의 악취가 배어 있다(115쪽). 내 말이 그 말이여.... 위에서 열거한 <절망>에서 보여진 나보코프를 무참히 씹어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그의 기벽奇癖에 동일시하려는 나를 발견했음은 또 뭐라 변명해야 할까? 단지 그와 나의 공통적 버릇이라기엔 왠지 석연찮은 데가 있다. 마치 내가 펠릭스 같지 않은가. 닮음의 지닌 가치가 그 완전함에 비례한다(99쪽)는 나보코프의 간자間者(게르만)에게 농락당하다 죽임당한 비극적 분신. 물론 카메오(아르달리온)의 납득불가의 요구를 척척 들어주고 그의 실수나 뻔뻔함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게르만에게선 그에게 남아있을 한 가닥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문득... 레미제라블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한결 같았던 물음, ‘도대체 당신은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저(레미제라블)는 다만 당신들에게 없는 것이 내게 좀 더 있기 때문에 주는 것뿐입니다.’... 하필 그 대목에 난 왜 이 대사가 떠오르던지. 게르만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 대사가. 어찌하여 <절망>에서 다른 희망과 기적의 문장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 것인지,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분신/살해=헌신/봉사. 괴상망측한 연관이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이상야릇함까지... 이런 자의적이고 주기적 설정이 흥미롭다. 어리석은 스릴.

 

그리고 반전... 의심스럽고 의심스러우니 모든 게 虛僞

 

장비 곁에 쓰러져 죽은 노동자를 그의 완벽한 분신이 평온한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즉시 대체하는 세상. 그래서 나는 소비에트의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경험이 풍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도 아래 이 책이 담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의 기본적인 행보를 따라가 보는 것이 상당히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다른 민족에게도 내 책을 번역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내 책을 읽은 미국인들은 유혈과 폭력에 대한 갈증을 풀 것이다.(178쪽)

 

이젠 특정국 까기와 돌연한 타이틀 진지모드. 은둔형 외톨이과 ‘-쟁이’는 많다. 자기 안에 독하게 빠지는 그 일상성이란 그만큼이나 고독하다. 공감가능성의 희박함,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자주 외롭다. 그들은 그 자체를 즐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양한 칼라의 욕망과 利己로 그들의 고독에 정당함을 부여해준다. 누가 봐도 난언난행亂言難行이 뻔함에도 예술로 승화시켰다든가 이해불가의 사상결과물을 시대나 사회 탓으로 돌려 풍자와 해학, 은유로써 주제에 완벽히 천착한, 희귀하고도 독특한 사회파문학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 걸(혹은 그 반대로) 業으로 삼은 특정인(집단)을 뭐라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길든 짧든 내 시간의 일부를 바쳤을 때는, 딱히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무한한 설렘으로 깊고 넓은 여운을 기대하게 되어있다는 것. 뭘 바라고 읽는 행위라기보다는 그냥 그렇다는, 독자의 작지만 커다란 취향이라는 것이다. 그 취향을 요점도 없이 어지럽히고 얼토당토 않게 미화시키는 글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고로 해설은 내 관심 밖이었다. 여기까지가 <절망>을 쓴 나보코프 작가의 첫인상이다. 차기 독서작 <롤리타>에서는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기대해본다.



a*********9 2013.03.05. 신고 공감 5 댓글 5
리뷰 총점 종이책
허를 찌르는 도플갱어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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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의 작가가 풀어 놓는 허를 찌르는 스릴러 장르를 뭐라고 해야 좋을까?스릴러, 추리문학..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정도 밖에 모르는 나에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생소한 이름이었다.하지만 "롤리타"의 작가 라는 말을 듣고, 그 유명한 영화(롤리타를 책이 아닌 영화로 접했다)의 원작자!! 하고 무릎을 탁 쳤다.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그의 등에 총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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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의 작가가 풀어 놓는 허를 찌르는 스릴러

장르를 뭐라고 해야 좋을까?
스릴러, 추리문학..
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정도 밖에 모르는 나에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롤리타"의 작가 라는 말을 듣고, 그 유명한 영화(롤리타를 책이 아닌 영화로 접했다)의 원작자!!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그의 등에 총을 쏘았다.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기억한다. 허공에 걸려 있다가 투명한 주름을 펼치며 흩어지던 한 줄기 연기. 펠릭스가 쓰러지던 모습. 그는 곧장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먼저 삶과 관계되어 있는 움직임을 끝냈다. 묻는 듯했다. “이게 뭐죠?”그리고 답을 얻지 못한 채,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그래, 이 모든 것을 나는 기억한다. ---p.190
이 책은 어느 살인자의 고백록이다.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도플갱어를 발견하게 되고 치밀한 계획하에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에서 지우려고 한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데..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독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눈치를 채지 못한다.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로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이끌어 나간다.
러시아 소설의 깊이와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소설이다.

k*****m 2012.02.21. 신고 공감 4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자기기만과 절망의 실체
"자기기만과 절망의 실체" 내용보기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큰 고충은 문학적 표현이나 시점, 내용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아서 골머리를 앓은 적이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이 책은 적어도 내용이나 시점 면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앞서 읽은 모옌의 <열 세 걸음>에서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지...    <절망>은 부끄럽게도 명작이 많음에도 러시아 문학을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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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큰 고충은 문학적 표현이나 시점, 내용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아서 골머리를 앓은 적이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이 책은 적어도 내용이나 시점 면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앞서 읽은 모옌의 <열 세 걸음>에서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지...

 

 <절망>은 부끄럽게도 명작이 많음에도 러시아 문학을 처음 접해본 나로서는 러시아적 표현인 언어유희 같은 것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무슨 뜻이야, 이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적응하기 힘든 구석이 좀 있긴 했다.

 예를 들자면

'내 이마에는 다 그리지 못한 '생각' 같은 혈관이 부풀어오른다.' 와 같은 표현이나 러시아어를 사용한 말장난이라던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가들, 내전 등에 대한 견해라던지

푸시킨의 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구절이 종종 등장하곤 해서 이 책의 많은 주석들을 살펴봐야만 했던 것이 고작 25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책을 그토록 오래 읽은 데에 대한 나의 변명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책에는 그런 '배경지식'이 필요한 부분이 상당수 등장한다. 때문에 작가가 웃으라고 던져 놓은 말에도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주석을 읽은 다음, 무리에서 혼자 우스갯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옆사람에게 무슨 말인지 물어봐서 내용만 이해하고 웃지는 못해 무안한 사람과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이 책을 읽고싶다면, 러시아의 다른 문학 작품을 접한 다음이 되길 권합니다.

 

 아무튼,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조금 어려웠고 편집(이라고 해야 하나)에 대해 조금 테클을 걸어보자면 띠지의 한줄문구를 좀 수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사실 이 책을 고를 때에는 '도플갱어 미스터리'라는 말에 호기심이 이끌렸던 탓이 컸기 때문이다. 책속의 게르만의 분신 펠릭스는 게르만 자신에게만 닮은 사람처럼 보일 뿐 다른 어느 누구도 닮은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책의 화자인 게르만이 끊임없이 독자에게 자신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곤 한다. 그래서 책을 후반부로 넘길수록 독자가 스스로 게르만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고 분신이 분신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는데, 이런 구조가 상당히 흥미롭다.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직접 읽어보고 꿈과 상상 속의 그림과 현실의 기억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게르만의 자기 기만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s*******4 2012.11.25.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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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절망"이라는 타이틀인지를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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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왜 쓰는가? 만족을 얻기 위해서이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어떤 도덕적 교훈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수수께끼를 내고 멋지게 풀이하는 것이 그저 좋은 따름이다.” 이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럽을 거쳐 미국, 다시 유럽에 묻힌 독특한 이력의 작가입니다.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20세기 문제작(?) 중의 하나로 손꼽이는 <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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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왜 쓰는가? 만족을 얻기 위해서이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어떤 도덕적 교훈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수수께끼를 내고 멋지게 풀이하는 것이 그저 좋은 따름이다.” 이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럽을 거쳐 미국, 다시 유럽에 묻힌 독특한 이력의 작가입니다.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20세기 문제작(?) 중의 하나로 손꼽이는 <롤리타>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으로 조국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은 그래서 러시아적이지 않다는 글이라는 비난까지 받는 작가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러시아 문학을 읽기 시작했으니 어떤 것이 러시아적이지 않다는 것인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

 

 나보코프의 여섯 번째 소설인 <절망>은 게르만이라는 초콜릿 사업가의 고백입니다. 프라하 출장중의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이 닮은 이를 보고는 어려워진 사업의 잘못된 돌파구를 생각합니다. 이 펠릭스라는 부랑자를 자신으로 위장시켜 죽음으로 내몰고는 거액의 보험금을 노린 것입니다. 사건만 놓고 본다면 가끔씩 뉴스에 오르내리는 보험금 사기사건과 비슷하지만, 고백체라는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어서 게르만이 이야기 해주는 것만을 볼 수 있기에 사건보다는 게르만의 심리를 더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영리하다면 배움이 무슨 소용이냐면서 중요한 건 천성이고 이놈의 세상은 썩어빠졌다고 한탄하는 펠릭스에게 게르만은 사등칸에 무임승차한 사람과 일등칸에 무임승차한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대역을 하라고 꼬드깁니다. 하지만 글 구석구석 자신을 창조력이 뛰어난 예술가로 묘사하는 게르만은 자신이 계획한 범죄도 일종의 예술로서 여기고는 자신이 쓴 글을 읽다가 문든 사소한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쓴 고백문에 제목이 없음을 깨닫고는 “절망”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읽으면서 왜 제목이 절망일까라는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살인조차 자시의 예술품으로 여기는 모습이 전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의 피스를 떠올리게 하였지만,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게르만이 어설프게든 제대로든 자주 인용한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의 문호들의 글과 러시아어의 언어유희 때문이었는데, 단테의 <신곡>을 원서로 읽으려고 단시간에 이탈리아어를 마스터 했다는 오펜하이머가 아닌 이상 러시아의 언어유희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눈에 띄는 부분으로는 6장과 7장의 도입부인데,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존재의 독재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황홀경도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내 처지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하지 못한다. 신의 노예라는 처지 말이다. (p. 115)”라는 6장 "문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p. 132)"로 시작하는 7장은 사건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게르만이라는 사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일 뿐만 아니라 게르만의 입을 빌려 나보코프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것 같았습니다. 특히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진지하고 전지전능한 어떤 불멸의 존재가 인체모형을 가지고 는 짓 따위의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쏟는다는 사실을 수긍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 추측건데 신의 이 모든 과업은 거대한 속임수이다. (p. 114)”라는 구절은 나보코프가 살았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나보코프의 소설 <절망>은 많은 분량의 소설은 아니지만 읽기에 그리 수월치는 않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작가의 글에 익숙하지 않고 처음 접하는 나보코프의 글이라는 점에서 저에게만 그럴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은 글임에도 무언가 자꾸 끌어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목(절망)만 보고 느낀 점과는 다소 다르게 진행되어 가는 글이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y********a 2012.11.2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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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단어,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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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분명 난 자고 있었는데 내가 공중에 붕 떠올라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날 보다니. 거울이 아닌 그냥 요 시퍼런 내 두 눈으로. 벌떡 잠에서 깨어 일어나 생각해보니 이게 남들이 말하는 '유체이탈'이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괴이한 경험이었다. 이 느낌이 내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을 읽은 후의 그것이다. 게르만이 자신과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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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분명 난 자고 있었는데 내가 공중에 붕 떠올라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날 보다니. 거울이 아닌 그냥 요 시퍼런 내 두 눈으로. 벌떡 잠에서 깨어 일어나 생각해보니 이게 남들이 말하는 '유체이탈'이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괴이한 경험이었다.

이 느낌이 내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을 읽은 후의 그것이다. 게르만이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자부하는 펠릭스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펠릭스의 등에 총구를 겨누었을 때 그리고 펠릭스의 시체를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게르만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을 때의 게르만의 기분. 내가 찰나 나를 보았을 때의 그것과 동일한 느낌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게르만은 펠릭스를 보자마자 괴로움에 가까운 탄성을 지른다. 이렇게 나랑 닮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좌왕, 안절부절 못하며 펠릭스의 존재를 인정했다가 부정하는 면모를 순차적으로 보이더니 스스로 자만할 정도의 '사기극'을 계획한다. 펠릭스를 끌어들이는 일종의 연극.
노숙을 하다시피 하며 삶을 사는 펠릭스에게 게르만은 돈 거래를 미끼로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끌어들인다. 가만 보면 게르만은 밀고 당기기의 달인인 것 같다. 펠릭스, 니가 필요해 라고 말하면서 너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돈 거래로 조르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선 꺼져버려, 멍청이야 하는 식으로 밀어내는. 펠릭스가 게르만에게 연락을 하게끔 만들어버리는 밀당의 고수, 21세기 연애의 달인. 게르만에게 빠져버린 펠릭스는 그러나 그의 총구에 등을 내준다. 탕!

자신과 닮은 펠릭스의 시체를 자신으로 착각할 거라는 오만과 자만을 가지고 게르만은 부인과 행복하게 살 희망찬 꿈을 그리지만 그것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펠릭스와 게르만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무서운 이야기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분명 다들 이렇게 생각할거야, 라고 자신만만하게 여겼던 것들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게.

프랑스로 가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게르만이 독일 신문 기사를 접한 후 완벽하게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한 사기극은 진짜 '사기극'이 되었다. 남을 속이고 자신까지 속인 최고의 '사기극'.
희망이 아주 잠깐의 꿈으로 변하고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버리는 게르만의 이야기. '절망'
나는 누군가를 속이려 한 적은 없었던가. 진정.

s*****5 2011.06.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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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가장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스릴러_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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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외국 작가 중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고 해서 바로 구매해보았다. 도플갱어 스릴러라니, 어쩐지 롤리타의 흥미진진한 내용과 오버랩될 것 같은 분위기에 얼른 책을 펼쳐들었다. 자기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책의 주인공은 탐욕으로부터 생각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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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외국 작가 중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고 해서 바로 구매해보았다. 도플갱어 스릴러라니, 어쩐지 롤리타의 흥미진진한 내용과 오버랩될 것 같은 분위기에 얼른 책을 펼쳐들었다.

자기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책의 주인공은 탐욕으로부터 생각을 시작하고, 예술의 완성을 이루고자 일을 시행한다.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와, 이 책의 주인공 게르만의 무시못할 공통점이다. 책 속에서 게르만과 떠돌이는 도플갱어이지만, 크게 보아 험버트와 게르만 또한 도플갱어이다. 두 사람 다 자기만의 예술을 완성하고자 하는 가장 커다란 욕망을 바탕으로 자신의 도플갱어를 없애려고 하며 시인처럼 말놀이를 즐긴다. 자신이 기준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아주 위험한 놀음을 거행하는 것이다.


또한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두 책에서 저자로서의 자신과 저자로서의 주인공을 각각 내세우는데, 이는 매우 모호해서 어쩔 땐 뒤에 이어질 내용에 대해 코멘트를 달기도 하고, 어쩔 땐 주변 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솔직하게 밝히는 등 트릭을 사용한다. 이는 또한 도플갱어가 주제인 이 책의 내용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머리좋은 소설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렇게 책을 다 읽고서도 깨닫게 되는 여러 트릭들을 통해 독자들을 당황스러운 흥미의 세계로 인도한다. 자칭 예술가 게르만은 여러 문학과 시들을 인용하며 자신을 예술가라 칭하지만, 관객(독자)가 보기에 게르만은 속물적이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일 뿐이다. 관객의 시선까지도 의식하여 집어넣는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절망>이야말로 두 번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다. 확신한다.

p*********y 2011.06.0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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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막힌 반전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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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참여하게 만드는 책이 가끔 있다. 추리소설처럼 어디 한번 맞춰보라고 대놓고 언질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나보코프처럼 은근히 약을 올리는 작가도 있다. 이는 더 지능적이며 함께 스토리를 끌고 나가게 하는 요량일 것이다. 어쨌든 간에 독자로써는 흥미 있고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기에 기분 좋은 마음으로 끌려간다.   줄거리는 이렇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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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참여하게 만드는 책이 가끔 있다. 추리소설처럼 어디 한번 맞춰보라고 대놓고 언질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나보코프처럼 은근히 약을 올리는 작가도 있다. 이는 더 지능적이며 함께 스토리를 끌고 나가게 하는 요량일 것이다. 어쨌든 간에 독자로써는 흥미 있고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기에 기분 좋은 마음으로 끌려간다.  

줄거리는 이렇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는 놀라운 마음에 주소를 받아 놓고 다음에 보자는 언질과 함께 헤어진다. 그리곤 엉뚱한 상상을 하는데 놀랍게도 그 닮은 이를 이용해 자신과 똑같이 보이게 만든다음.... 

스포일러 때문에 여기까지 얘기하는데 시도 자체도 놀라운데 마지막 결과도 참 놀라웠다.ㅎㅎㅎ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사르트르까지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던 숨겨진 비밀(?)을 한번 찾아보시길...ㅎㅎㅎ 

k******o 2011.06.0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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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vs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주제 사라마구 vs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용보기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소설 중에 주제 사라마구의 것이 있다. 주인공은 비디오를 보다가 우연히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은 당황했고, 황당해했고, 어이없어한다.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주인공은 남자를 찾아나선다. 주제 사라마구의 그렇게 시작하고 그것에서 폭발적인 힘이 터져나온다. 집요하게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은 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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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소설 중에 주제 사라마구의 것이 있다. 주인공은 비디오를 보다가 우연히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은 당황했고, 황당해했고, 어이없어한다.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주인공은 남자를 찾아나선다. 주제 사라마구의 그렇게 시작하고 그것에서 폭발적인 힘이 터져나온다. 집요하게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은 좀 다르다. 주인공은 우연히 지나던 광장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 즉 '도플갱어'를 발견한다. 주인공도 황당해하고 당황해하지만.. 주인공은 범죄에 도플갱어를 이용하기로 한다. 도플갱어를 이용해 거액의 돈을 챙길 수 있는, 완벽한 범죄를 떠올린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범죄를,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칭한다. 그럴 법 했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하고 그것에서 우아한 풍경이 그려진다. 조금은 도발적으로 말이다. 

 

'절망'을 읽으면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이 떠올랐다. 비교해보니, 재밌었고, 뭔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것도 더 좋았다는 말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소설은 각자, 이대로 좋군요. 어쨌든, 소설의 '힘'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그 대결에 동참을.

b****n 2011.06.0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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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나와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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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나왔습니다. 국내 초역이고 롤리타의 전작이죠/문학동네의 띠지에는 스릴러, 서스펜스, 라고 달아놓았지만 읽고나면 어디가 서스펜스? 스릴러?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꼭 틀린 건 아니지만 이 소설의 장르를 정하기엔 지나치게 단순화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이 소설은 소설이에요.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한 소설. 문학동네는 이 책의 러시아어 판본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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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나왔습니다. 국내 초역이고 롤리타의 전작이죠/문학동네의 띠지에는 스릴러, 서스펜스, 라고 달아놓았지만 읽고나면 어디가 서스펜스? 스릴러?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꼭 틀린 건 아니지만 이 소설의 장르를 정하기엔 지나치게 단순화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이 소설은 소설이에요.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한 소설. 문학동네는 이 책의 러시아어 판본을 사용했습니다. 영어판 서문만 실었구요. 영어판과 러시아 판의 내용이 다른데 여기에 실린 건 러시아어 판이라 영어판이 궁금했습니다. 



도플갱어를 다룬 소설은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도 도플갱어라는 소설에서 도플갱어를 다루었죠, 도플갱어 자체를 소재로한 소설은 무수할 겁니다. 또 죄와 벌을 패러디하거나 변주하거나 오마쥬한 소설도 적지 않아요. 또 가짜 화자, 믿음직스럽지 못한 화자를 내세운 수가 적지 않죠.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에코의 바우돌리노. 나보코프의 절망은 이 세 특성을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도플갱어 소설이면서, 죄와 벌에대한 오마쥬면서, 신빙성없는 화자를 내세운 소설이이에요. 


게르만이라는 망명사업가는 우연히 펠릭스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죠. 도플갱어. 펠릭스를 보는 순간 범죄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 둥지를 틉니다. 게르만은 그를 죽이고 자신이 죽었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죠. 그리고 그 계획은 완벽해 보입니다. 도플갱어가 존재한다면요. 하지만 아무리 닮아도 게르만은 펠릭스가 아니었죠. 어쨌든 간에 자신과 펠릭스가 닮았다고 생각한 게르만은 완전범죄를 꿈꿉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완전범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도플갱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주제사라마구의 도플갱어가 완벽하게 식별불가능한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절망은 게르만의 눈에만 식별 불가능한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겠네요. 게르만은 미치광이니까요. 미치광이의 요건 중 하나는 인식의 혼란에 있지 않겠어요? 게르만의 절망은 범죄 실패에 따른 절망보다 누구도 나와 같지 않음을, 나는 유일한 존재이며, 특히나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오게 됩니다. 하긴, 그게 진짜 절망이죠.  

d*******t 2012.03.1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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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절망] 절망한 자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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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거울단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은 유아기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성장의 중요단계라고.  물론 이는 ‘거울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떠했을까?’란 질문을 던지면 참 무안해지는 가설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의 중요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다. 가끔 거울을 보고 ‘저 안에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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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거울단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은 유아기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성장의 중요단계라고.  물론 이는 ‘거울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떠했을까?’란 질문을 던지면 참 무안해지는 가설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의 중요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다. 가끔 거울을 보고 ‘저 안에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란 질문을 하는 철학바보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한데 때때로 거울 보고서 그 속에 갇혀 버리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리스 로마신화의 등장인물 나르시스다. 물속에 비친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결국엔 수선화가 되어버린 남자다. 이 남자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 후 우리는 이와 같은 이를 가리켜 나르시스트라고 불렀다.  


다시 라캉으로 돌아가자.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인식’한다고 하였다. 즉, 이는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 생각하는 순간이자. 스스로 단독자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나는 나를 알기 시작했다’라는 신호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질문이 나올 차례다. 우리는 정말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인식’은 정확한가? 만약에 ‘인식’이 우리에게 거짓 굴레를 덧붙인다면?  


블라디미르 나보코브의 <절망>(문학동네)은 바로 나르시스처럼 자아의 굴레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다. 게르만이란 이름의 이 남자는 자신을 재능 있는 작가라고 하였다. 탁월하고 우아한 표현력을 갖추었고 언제나 격조 높은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고 그는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다른 이가 그의 창작물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온전한 소설 또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그의 말을 믿는다고 믿는다. 우리가 믿는다고 믿는 그 자신을 믿는다. 그렇게 그의 믿음은 곧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이 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과 마주쳤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그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왼손으로 그의 오른손과 악수’하는 것 처럼 불가능한 행위가 가능할 만큼 그 남자 펠릭스는 게르만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만남 뒤 게르만은 일자리를 구해달라는 펠릭스의 요청을 받아들인 후 훗날 연락하겠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지나고 얼마 뒤 게르만은 몽상 끝에 기막힌 계획을 떠올린다. 그것은 기상천외한 범죄 계획이었다. 


이런 그의 ‘창조적 착상’이 후 우리는 그의 범죄행각과 그 결과가 드러나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참 험난하다. 이야기는 마치 술 취한 이가 갈지자로 걷듯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절망>은 정말 읽어내기 쉽지 않다. 범죄서사임에도 촘촘히 엮인 플롯은 찾기 힘들다. 이야기는 철저히 게르만의 생각을 통해 드러나지만 그의 말처럼 ‘뒤죽박죽, 얼룩덜룩’해진체로 전개된다. 이런 까닭에 게르만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그가 드리운 불신의 줄기를 붙잡고 이야기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지독한 나르시시즘은 이 불신의 골을 더욱 더 깊게 파내려 간다.    


이러한 이야기 형식은 게르만의 의식을 적극 반영한다. 그는 그의 삶이 망가지고 꼬였다고 생각한다. 노란 표지판에 집착하는 만큼 그의 삶을 이끌어줄 이정표가 그의 눈앞에 서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이정표도, 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는 거울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다. 그의 범죄는 자신의 거울인 펠릭스를 통해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있다. 이는 모두 지독한 나르시스트이자 믿을 수 없는 인물 게르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의 자아가 어찌하여 엉망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게르만의 선언과 고백 뿐 그것의 맥락을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인식’의 문제로 돌아가야만 한다. 


게르만이 거울을 인식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지만 그가 인식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리고 잘못된 인식이 그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지독한 자기애가 그의 인식을 망가뜨린 것이다. 스스로 바라는 삶과 지금 살고 있는 삶의 괴리가 자기애와 자기 부정 사이를 무한반복하면서 결국 그의 자아는 엉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 마지막 그의 처지를 절망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절망은 소설의 처음부터 와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절망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절망한 자의 절망이라는 동어반복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할 테다.  


나보코브의 소설 <절망>은 인간의 연약한 자아 인식에 대한 알레고리다. ‘아, 인간의 시력이란 얼마나 나쁘고 불완전하지’란 게르만의 외침은 이 인식의 어려움을 애써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잘 모르는 상태다.  인식은 그저 시도될 뿐 완전해지지 못한다. 



s********1 2013.08.19. 신고 공감 1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