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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논쟁을 벗어난 제3의 길, 문학의 정치 자크 랑시에르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에 직접 뛰어들진 않는다. 참여문학을 강조한 사르트르와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 다만 '문학의 정치'라는 개념으로 글쓰기 자체의 정치성을 강조하고 있다.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투쟁을 몸소 실천하는 참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저술을 통해 사회구조, 정치적 운동들, 또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표상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작가가 정치적 참여를 해야 하느냐' 또는 '예술의 순수성에 전념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이 순수성 자체도 사실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문학의 정치는 특정한 집단적 실천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9쪽)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면,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은 '테러와 수사학'의 논쟁이자, '순교로서의 문학과 직업으로서의 문학'의 논쟁이다. 문학의 본질이 전적으로 사회참여적이어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참여문학론은 순수문학 진영과 탐미주의자들로부터 예술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삼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엠마 보바리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엠마 보바리의 죽음에 대해 랑시에르는 '처형'이란 표현을 쓴다. '왜 엠마 보바리가 자살을 했을까'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왜 엠마 보바리는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대체한 것이다. 답부터 말한다면 엠마는 '민주주의적 격류'를 타고 가족과 사회의 부르주아적 질서를 위협한 적이기 때문이다. 엠마의 민주주의적 기질은 일상의 미학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엠마에게 예술은 모든 실존의 형태들에 침투해야 하는 어떤 삶의 양식이었다. 엠마 보바리에 대한 해석에서 저자가 예술과 삶의 융합에 대한 아방가르드 이론에 찬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르트르는 플로베르를 산문적 언어의 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항하는 보수적인 귀족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랑시에르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플로베르가 '문학적 민주주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사회적 조건들의 현실적인 혹은 가상적인 평준화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규정된 질서와의 단절, 즉 상징적 단절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시대의 문학은 특정한 주제나 독자를 상실한 채, 모든 위계질서의 폐기와 전복을 의미하는 '문체의 절대성'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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