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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삶속의 죽음 그리고 죽음속에 삶 [알리스][모던클래식 046]
"삶속의 죽음 그리고 죽음속에 삶 [알리스][모던클래식 046]" 내용보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현생과의 이별은 어쩌면 공식화된 룰과는 사뭇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적인 개념의 장단의 유무를 떠나 항상 품에 안고 있는 죽음은 마치 최고 의사결정자의 시각에서는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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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현생과의 이별은 어쩌면 공식화된 룰과는 사뭇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적인 개념의 장단의 유무를 떠나 항상 품에 안고 있는 죽음은 마치 최고 의사결정자의 시각에서는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거대한 리스크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투자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비한 아니 결정요인자체로 상정하지 않고 싶은 요인이라고 하면 너무 비약적일까?

 

   인간은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는 혹자의 말처럼 우리는 매시간 죽음이라는 최종 종착점을 향해 브레이크없는 기차처럼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간에 있어 죽음이라는 명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가?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삶의 연장선이라는 거대한 메타포적인 관념으로 인지되었고 이에 기반하여 종교와 신이라는 불세출의 발명품이 탄생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을 다른 출구로 돌려놓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과 공포는 인간인한 진행중에 있다. 특히 그 죽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잣대에 놓이게 되면 그 어떠한 철학적 의미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 독일문학계의 주목받는 여류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라는 작품은 죽음을 소소하면서 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알리스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죽음과 죽음이 가져다 주는 감정의 기복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상당히 유니크한 작품이다.

 

   옛 연인, 나이를 초월한 지인, 지금 현재의 연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받게 되는 일련의 감정상태를 별개의 이야기 처럼 다루면서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죽음과 그 뒷이야기라는 형식의 구조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 어둠, 공포, 피의 향연, 부정, 두려움등으로 대변되는 통상적인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끌어 가는 내러티브의 큰 맥락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태양계의 행성을 이루고 있는 9개의 별중에 어느날 부터인가 명왕성이라는 별이 행성의 지위를 상실했듯이 죽음도 어쩌면 이런 명왕성의 상실처럼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화학적인 종결보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는 상실감으로 인한 혼돈이 더 크게 느껴질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실감과 그 후유증은 자신이 태어나기전 얼굴한번 보지 못한 말테 삼촌의 죽음에 대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시크한 접근에서 더 명확하게 보여진다. 죽음을 직접 목격했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를 떠나서(죽음의 시점이 현재이거나 과거이거나를 떠나서) 나와 관련있는 일련의 죽음들은 상실과 더불어 아픔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러한 극히 평범한 과정의 되풀이가 어쩌면 삶이지는 아닐까라는 무거운 철학적 의문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흥미본위의 호기심를 주안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큰 낭패감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에는 스펙타클한 속도감이나 내러티브의 대반전, 모티브인 죽음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적 표현등 뭔가 숨겨진 장치적인 요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 까지도 이런 일말의 기대감을 저버릴만큼 상당히 건조한 문장의 연속으로 남는다. 다섯남자의 죽음과 이를 대면하게되는 주인공의 입장차는 왠지 모를 엇박자의 연속처럼 보여 당혹감을 주기고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엇박자 내지는 불협화음이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근원적인 접근방식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작가의 의도된 장치적 연출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역자는 이러한 표현 기법들이 작가만의 매력포인트라 논평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있고 치명적인 리스크지만 왠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죽음(상실)에 대한 장대하고 거대한 사고의 담론을 일상적인 삶의 한복판으로 녹아낸 작가의 담론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을 보게 된다면 다소 무미건조하게 만 다가오는 문장들이 새삼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면서 잔잔한 수면을 흔드는 파장으로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게 될 것이다.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막연했던 상념들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l******e 2011.06.13.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알리스 서평]죽음의 기억 속에서 삶을 생각할 수 있는가
"[알리스 서평]죽음의 기억 속에서 삶을 생각할 수 있는가" 내용보기
죽음이라는 문제... 알리스는 라이몬트에게 물었다. 나보다 먼저 죽고 싶어,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죽고 싶어? 당신이 죽은 뒤에. 라이몬트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는 대답에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되묻는 걸 보면. 알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알리스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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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문제


... 알리스는 라이몬트에게 물었다. 나보다 먼저 죽고 싶어,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죽고 싶어? 당신이 죽은 뒤에. 라이몬트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는 대답에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되묻는 걸 보면. 알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알리스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  p87


죽음이란 우리 삶에 있어 하나의 문제와 같다. 손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이유로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에 결부되어 철학적 고찰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한 위대한 우리 시대의 독일 철학자가 말했던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우리의 필멸성에 대한 그 이름은 자연 앞에 혹은 도래할 '신들' 앞에 설 우리의 필멸성을 나타낸다. 그렇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불편하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에 대한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기에. 특히 자신의 삶 속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자가 있을 때, 곧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일정 이상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너무나 더디게만 읽히는 책이었다. 가벼운 무게와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몇일이 걸려서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미건조한 그림이 전달하는 붓 터치 하나하나가 내가 곧 대면해야만 할 삶의 무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여담이나 넑두리는 여기서 접고 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책 자체의 줄거리나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알리스'라는 인물이 실려 있는 그림과 그 그림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이념들'에 대해서...


살아 있는 자의 그림, 죽어 가는/죽은 자들을 배경으로 하는... 


다소 건조한 문체로 시작되는 이 죽은 자들/산 자의 이야기는 다섯 남자(그리고 한 여자)의 죽음을 담고 있다.*,**  그 다섯 남자들이란 '이미 죽을 것을 알고 빨리 죽는 편이 그를 위해서도 좋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죽어가기만 할 뿐, 죽지 않았던, 그리고 마침내 죽어버린 한 때 사랑했던 남의 남자(미햐)',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마치 아저씨와 같은 사람(콘라트)', '친구의 남자(리하르트)', '오래 전에 자살한 동성애자 삼촌(말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자(라이몬트)'다. 소설은 이들의 죽음 혹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일종의 알리스의 의식/시간의 흐름을 통해 다소 무미건조한 문체로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그 무미건조한 문체와 세세한 배경들에 대한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어떤 억누르고 있는 듯한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어져 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러한 방식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언제가 과거이고 언제가 현재인지, 혹은 진정한 시간의 진행을 알리게 될 미래인지가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겹쳐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모호함. 


역자의 말을 빌자면 이 소설은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그림에서는 이상하게도 인물들의 상이 뚜렷하지 않다. 오직 뚜렷하게 그려지는 것은 인물이 아닌 배경이다.  


....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은 남자와 알리스의 관계 또는 게이 연인들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생에서 그처럼 큰 의미를 가졌던 사람의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의 삶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하고 또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다. 마치 한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고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한 가운데 서 있는 주인공은 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인다. 인물이 아닌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독특한 사진인 셈이다.  - p166


그러나 과연 인물의 상이 흐려지는 사진이 배경에 초점을 맞춘 사진 뿐일까. 우리는 가끔 이상하게 찍힌 사진들을 보기도 한다. 인물의 상이 어그러지고 마치 누군가가 옆에 서있는 듯 겹쳐진 사진. 바로 소위 우리가 심령사진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진이다. 이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령'이라는 것이다. 죽었으되 충분히 죽지 못한 자의 모습으로 이승을 떠돌고 있는 유령. 알리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는 그 유령들의 모습들(/기억들)은 분명 이 소설 전체에 일종의 섬뜩한 느낌(unheimlichkeit/uncanny)을 주기도 한다.*** 분명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기억들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죽은 자들의 유령을 소환해 내고 있다(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서 등장하는 라이몬트의 모습). 그리고 소설 말미에 뜬금 없이 등장하는 '목사'라는 이름의 '무당'이야말로 바로 이 유령들에 대한(/을 위한) 푸닥거리에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모호하게 드러나는 죽은/죽어가는/죽을(심지어 삼촌인 말테와의 관계에서 마저도)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소설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알리스는 누구인가. 즉,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관계 가운데 있는 인간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인간, 그리고 장소와 시간의 문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장소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 장소란 어떤 관계를 통해 정해진다. 어떤 장소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때 비로소 그 인간은 실존하는 것이다. 알리스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관계들의 집합, 그 장소 역시 이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정하는 장소 내에서 타자에 대한 알리스의 관계는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그 자체다. 이러한 관계는 있었던 것이나 있지는 않은 일종의 비실존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그녀는 빛도 그늘도 아닌 경계의 영역에 거하게 된다.


역자의 변에 따르면, 이 소설이 묘사해내고 있는 사진의 초점은 흐릿하지만 


.... 그러나 결코 무의미한 사진이 아니다. 사진 속 선명한 배경은 "이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곳."이라고 남은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 p166


선명한 배경에 비해 모호한 알리스 주위 인물들의 윤곽. 그리고 그 보다 더 모호하고 비어있는 알리스라는 인물. 그러나 그 질적인 규정이 혹은 말할 수 있는 술어가 결여된 알리스는 여전히 그 그림 속에 혹은 장소 가운데 일차적으로는 모호한 주변의 인물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그림의 선명한 배경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비록 역자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이 그림의 바깥에 있으며, 우리가 사는 곳은 '선명한' 색상의 실재라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 '사진'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이러한 선명한 색상의 실재(삶)가 모호한, 그리고 죽음과 관계된 것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소설의) 외부에 있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겹쳐짐 속에서 살고 있음에 대한 깨닳음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과연 이 삶과 죽음의 겹침의 공간 속에서 시간은 흐르는가? 이 작품이 제시하는 알리스의 삶, 죽은 이들과의 관계는 마치 멈추어 있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음으로 인한 비탄은 없으나, 너무나 차분하고, 무미 건조한 그림 내에서 시간은 장소 속에 정체되어 마치 장소와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 있는 사건의 일어남도 없이 멈추어 버린 듯 보이는 기억을 통한 시간의 정체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죽음의 기억 가운데 정체된 장소, 시간이 장소로서 정체되어 버린 곳에서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삶. 어떠한 생명력도 없이 장소와 동일시 되어버린, 기억 속에 굳게 자리잡고, 정체되어 버린 삶.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하필 죽은 자들은 모두 남자들이었을까? 책을 덮고 나서 먼저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왜... 정확한 답은 알 수가 없다. 그저 추측 하자면 알리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었던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죽은 네 여자들에 대한 애도를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두 소설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의 60년대 말의 전공투 시대에 대한 기억의 시효만료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알리스>는 왠지 여전히 죽은 이들을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농후하다. 그래서 <알리스>의 죽은 자들은 유령 혹은 죽었으되 충분히 죽지 못하고 소설 속에서 때때로 나타나며 언제나 이미 알리스의 존재에 기억으로 내재(/선재)한다.


**오직 하나 뿐인 죽은 여자 알리스의 할머니 '알리스'의 죽음은 그리 중요치 않게 다루어진다. 그녀의 죽음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삼촌' 말테의 어머니이며, 그런 이유로 프리드리히에 의해 언급된다는 정도? 프리드리히와의 대화에서 정작 알리스 자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였던 삼촌 말테의 자살이었다.)


***섬뜩하다(unheimlichkeit/uncanny)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낯선 것에 대한 느낌이다. 너무나 낯설고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만 할 것은 그 낯섬의 대상이 너무나 친숙한 것일 때 바로 진정한 섬뜩한 느낌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그리스어로는 시간에 대한 용어가 둘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자연적인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공간의 연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중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 내에서 시간은 그저 같은 장소의 가능적 확장만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르다. 이 시간은 일어남, 사건과 관련된다.



j******n 2011.06.24.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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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죽음으로 가는 다리는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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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죽음을 겪는 당사자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도. 이 때문에 ‘호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어느 상갓집에 가든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게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삶을 시작해 버린다. 말 그대로 ‘해 버린다’. 자의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의 삶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렇게 삶을 시작해 버린다. 반면 삶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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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죽음을 겪는 당사자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도. 이 때문에 ‘호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어느 상갓집에 가든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게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삶을 시작해 버린다. 말 그대로 ‘해 버린다’. 자의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의 삶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렇게 삶을 시작해 버린다. 반면 삶과 달리 죽음은 선택 가능하다. 물론 그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삶과 달리 자기결정권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죽음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한들, 다수의 사람들은 원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자연의 섭리에 의해 그렇게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개똥철학부터 신파까지 갖가지 버전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무궁무진하다. 죽음이 극의 주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삶과 정 반대에 있으면서도 삶과 가장 비슷하기도 한 죽음. 삶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함께 이야기 돼야 할 이 아이러니에 대해 민음사 모던클래식의 마흔 여섯 번째 책 <알리스>는 낯설 만큼 담담하게 풀어낸다.

 

<알리스>의 다섯 이야기를 묶는 열쇳말은 ‘죽음’이다. 주인공 알리스는 죽음을 경험한다. 자신을 스쳐간 다섯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미햐’ 편에서 알리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축약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미햐는 알리스의 전 애인이다)

 

“미햐는 츠바이브뤼켄(독일 자를란트 주의 소도시. ‘두 다리’라는 뜻)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알리스에겐 무척 시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뭔가 맞지 않았다. 죽는 사람에게 건너갈 다리가 있다면 그건 하나뿐이어야 할 테니 말이다.”

 

알리스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바로 단지 하나뿐인 다리다. 죽음은 단지 죽음으로 가는 길 하나만 있을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삶을 지탱하는 동안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가깝게는 당장 오늘 뭘 먹고, 뭘 입을 지부터 멀게는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갈지에 대해까지 항상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모든 삶의 카테고리 안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먹는 것’이라는 카테고리에는 한식, 양식, 일식 등등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단지 ‘죽음’ 하나뿐이다. 죽음의 하위에는 선택조항이 없어서 단지 우리는 죽을 뿐,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이런 죽음의 성격에 대해 알리스는 죽는 사람에게 건너갈 다리는 하나뿐이어야 한다고 표현한다. 죽음은 곧 선택의 끝을 말한다.

 

식물인간이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미햐의 병실에 알리스는 찾아간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미햐를 바라보는 알리스는“한때 있었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는 무엇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낀다.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 앞에 선,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버린 옛 애인 앞에 선 알리스는 과거 상대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이 형체도, 힘도 잃었다고 느낀다.

 

<알리스>의 네 번째 죽음의 대상인 ‘말테’편은 소재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개연성이 부족한 듯하다. 말테는 알리스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자살한 동성애자 삼촌이다. 알리스는 말테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프리드리히에게 연락하고 만나게 된다. 알리스는 이미 백발노인이 돼 버린 죽은 삼촌의 애인을 왜 찾아간 걸까. 프리드리히와 만나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를 찾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해봤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알리스 자신조차, 작가조차 알리스가 왜 프리드리히를 찾아야만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게다가 말테가 자살을 하게 된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가족 때문이었는지, 프리드리히와의 문제였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허공에 머문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기에 마주친 적도, 공유할 추억조차 없는 삼촌의 흔적을 찾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는 매력적인 소재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말테의 자살 이유는 차치하고 알리스가 프리드리히를 찾아야 했을 이유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섯 개의 이야기 중 마음에 들었던 것은 ‘미햐’와 ‘라이몬트’였고, 나머지 세 개는 좀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았다. 사실 이야기 전체가 단조롭다. 누군가의 죽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중심 소재 자체의 무게감 때문인지,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꾸려 나간다.

 

“루마니아 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조금씩 찬찬히 마시면서 다리를 꼰 채 아주 차분하게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면서 그는 잠깐 가볍게 알리스의 손을 쓰다듬었다.”

“신문을 읽으면서 라이몬트는 두 번 미소를 지었다. 신문을 덮고 일어서서 뼈가 우두둑 소리가 날 때까지 기지개를 켰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자 목뼈 꺾이는 소리가 났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위와 같이 작가가 독자의 눈앞에 뿌려주는 장면들이다. 이는 즉, 묘사가 뛰어나단 얘기다. 특히 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세세하여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근육을 마음껏 쓰도록 도와준다.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면서, 가장 큰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스토리 자체에 큰 힘이 없어서 자칫 한순간 집중력을 잃으면 작가가 공들인 묘사들은 생기를 잃은 채 독자의 머릿속에서 떠나 버리기 쉽다. 본인은 장점과 단점의 순간을 넘나들며 이 책을 끝냈다.

n*****2 2011.06.2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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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삶도 삶의 일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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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삶도 삶의 일부처럼.    며칠동안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땀방울이 흐르는 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식 샤워를 하고, 찬 물을 들이켜도 계속 되는 더위와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비가 오려고 그렇게 더웠을까, 어제부터 비가 내렸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빗줄기는 시원스럽게 쏟아졌고, 주변의 소음도 함께 묻어져 내려왔다. 어느 여름날의 풍경,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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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삶도 삶의 일부처럼.

 

 며칠동안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땀방울이 흐르는 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식 샤워를 하고, 찬 물을 들이켜도 계속 되는 더위와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비가 오려고 그렇게 더웠을까, 어제부터 비가 내렸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빗줄기는 시원스럽게 쏟아졌고, 주변의 소음도 함께 묻어져 내려왔다. 어느 여름날의 풍경, 반복되는 일상들. 그럼에도 뜨거운 햇살아래 차가운 비가 단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며 반가워하는 것처럼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는 '죽음' 이라는 무거운 이별을 늘, 있었던 일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할 때면 으레 흘러내리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아스러져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텐데도 그녀는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늘 있는 일 처럼. 체념을 하는 것인지, 그녀만의 이별 방식으로 남자들을 떠나보내는 것인지, 떠나보낸 이의 어제와 같은 오늘의 일상을 흔들림없이 흘려 보낸다. 감정의 과잉없이 자연스럽게 안녕을 고하는 알리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곡선을 유지하며 막을 내린다. 건조하면서도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내뱉는다.

 

넓은 교차로를 바라보면서 알리스는 잠시 세상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모든 것이 해체되어 다르게 조합되고, 새로운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알아볼 수 없는 글씨. 머릿속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흘려 쓴 필체의 문구들이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알리스는 왼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느낌은 사라졌다. - p.96

 

인연을 맺었던 다섯 남자를 떠나 보내는 길. 다섯 번의 이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하고 전조를 알리며 찾아오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나 예고편을 던져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나 이별은 언제나 서럽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보내는 것 조차도 마음도 몸도 피폐해 지거늘 그녀의 여정은 차분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조로 그들을 보내고 그녀는 또 그녀의 삶을 살아간다. 산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부서지듯 크게 울어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눈물을 감추어도 결국은 사는 사람은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저자는 <알리스>를 통해 인간이라면 겪어야 할 이별에 대해 상황적으로 서술하면서도, 또 인간이기에 꿋꿋하게 살아가는 강인함을 그려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몸속에 숨겨진 장기가 떨어져 내려가는 것처럼 상실감이 휘몰아 쳐도, 그들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다.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의 대사처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제' 하는 대사처럼 알리스는 안녕이라는 인사없이 삶을 다한 사람들을 떠나 보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처럼 그녀는 묵묵히 '특별할 것도 없이' 죽음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인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선을 나누지 않고 담담히 그려나가는 것이 자못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시종일관 감정이 흘러내리지 않는 담담함이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스크린을 쳐다보다 음소거를 해놓고 아무런 소리 없이 인물의 움직임을 쫓아 가는 것처럼 살며시 바람에 나붓기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과 같은 느낌으로 작품을 읽었다.

l****9 2011.06.2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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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 『알리스』, 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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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고생 많았어요. 만나고 헤어진다는 건, 참 무의미하고 아름다운 일이죠. 죽음을 비롯한 여러 헤어짐들 속에서 미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그들을 추억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책을 덮고 나서는 조금 울어도 괜찮아요. 대신 우리 웃으면서 잠들어요. 이 세상 모든 알리스들에게.             나는 자칭 ‘희망적 회의주의자’이다. 산다는 것은 지독히도 무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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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고생 많았어요. 만나고 헤어진다는 건, 참 무의미하고 아름다운 일이죠. 죽음을 비롯한 여러 헤어짐들 속에서 미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그들을 추억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책을 덮고 나서는 조금 울어도 괜찮아요. 대신 우리 웃으면서 잠들어요.

이 세상 모든 알리스들에게.

 

 

 

 

 

  나는 자칭 ‘희망적 회의주의자’이다. 산다는 것은 지독히도 무의미한 것들의 연속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게 또 삶이다. 그렇기에 나는 희망적인 회의주의자이다.

  『알리스』는 ‘미햐’를 지나 ‘콘라트’를 지나 ‘리하르트’를 지나 ‘말테’를 지나 ‘라이몬트’로 건너간다. 다섯의 인명(人名)들은 알리스가 삶의 저편으로 보낸 이들이다. 이 다섯의 이름이 책의 소제목이고, 내용은 이들을 보내는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병원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미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지켜보는 일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감정의 지속은 그 감정에 익숙해져 상황을 방심하기 마련이다. 알리스는 미햐가 곧 죽을 거라고 예상하는 불안이라는 감정마저도 익숙해져버렸다.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그 순간 바로 그때, 미햐는 죽었다.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너무 갑자기 미햐는 가버렸다.

콘라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수영을 함께하자던 콘라트는 그게 마지막 대화라는 기척도 없이 눈을 감았다.

  리하르트의 죽음은 차분했다. 마르가레테가 리하르트의 병상을 지켰는데 리하르트가 죽으면 알리스에게 전화를 걸어주기로 약속했다. 알리스는 전화를 옆에 두고 차분히 책을 읽었다.

  말테는 알리스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삼촌이다. 말테가 죽어 절망에 빠진 가족들을 알리스가 태어남으로해서 다시 가족들에게 빛을 준 것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말테의 게이 애인, 프리드리히를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 말테의 죽음과 마주한다.

  마지막으로 라이몬트,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믿을 수 없어하는 모습과 체념을 오가는 알리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알리스는 길거리를 오가면서 모든 사람이 라이몬트로 보이는 환상을 겪는다. 이 대목에서는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알리스의 슬픔이 묻어났다. 알리스는 그렇게 슬픔을 거쳐 죽음을 차분하게 받아드린다.

 

“미쳐버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를 생각하는 것. 조심스럽게. 언제나 새롭게. 맨 처음부터.”

151쪽

 

  미치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 컨트롤이 있어왔나를 생각한다. 나는 알리스를 읽으면서 내가 떠나보냈던 사람들(죽음은 아니지만)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솔직히 아직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이라는 곳으로 떠나보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제 곧 여러 번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죽음이라는 단어가 두렵다. 중학교 시절 갔었던 친구의 할머니 장례식장이 생각난다. 대학교 2학년, 동기의 어머니 장례식장이 생각난다. 작년, 고등학교 동창의 자살 소식을 듣고 찾아갔던 장례식장이 생각난다.

  알리스만큼 소중한 사람을 보낸 건 아니지만 자꾸만 죽음이라는 실체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두렵고 무서운 순간이었다. 책 속에서 알리스는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담담했고 한편으로는 격정적이었다. 차분했지만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알리스는 그렇게 대립되는 감정을 거치며 책의 말미에 가서는 죽음을 차분하게 받아드리는 담담하게 받아드리는 모습이다. 나의 모습은 어떨까, 이제 어른이 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이별을 받아드리며 겪어 나갈 내 감정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어지럽다.

  결국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울분과 격정을 지나 죽음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체념을 통해 그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드릴 것이다. 시간이라는 약이 모두를 치료해주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온 인간이 겪는 감정 변화의 과정이다. 그런 우리네 모습을 아름답고 정직하게 풀어낸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별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던 나에게, 라이몬트의 재킷 주머니에서 꺼낸 빵 조각을 버리지 못하고 시간만 가기를 바라고 있던 알리스에게, 이제 빵 조각을 버려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a*************4 2011.06.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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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이용숙 옮김-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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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에 없어, 알리스. 알리스는 자기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의 아이인 것처럼. 알리스, 라이몬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미쳐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를 생각하는 것. 조심스럽게. 언제나 새롭게. 맨 처음부터. (151P)     누군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상상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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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세상에 없어, 알리스. 알리스는 자기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의 아이인 것처럼. 알리스, 라이몬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미쳐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를 생각하는 것. 조심스럽게. 언제나 새롭게. 맨 처음부터. (151P)

 

  누군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상상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 나는 어른이 되면 내가 누군가를 떠나는 것도, 다른 사람이 나를 떠나가는 것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언젠가는 그 모든 순간에서 자유로워질 날이 오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이별이 덤덤해지는 순간이 올 수가 없는 건, 떠나가는 사람을 좋아했던 순간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알리스는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떠나가는 이도 아프고 슬펐지만, 그를 바라보는 이들도 아프고 괴로워했다. 나는 알리스가 한 사람을 떠나 보낼 때 마다 내게서 떠난 사람들, 어쩌면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순군순간에 대해서 고백하는 소설 속 문체는 유독 감성적으로 느껴졌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기에 앞서 알리스는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어떤 것들은 그저 그 현상 그대로 어느 한 순간이며, 우리가 부여한 의미는 사라지고 퇴색되어간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순수하게 반짝이는 현재. 우리들은 이별 앞에서도 현재를 떠올린다.

  알리스는 미햐를 떠나보내면서 그에게 살아있을 때 해주지 못한 키스를 한다. 함께 살 때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해주지 못했던 키스를 죽음 앞에서 나눈다. 우리에게 이별이란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곁에 있을 때보다도 더 진실하고,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이별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알리스의 이별을 통해서 나는 나의 이별을 떠올리고, 다시 한 번 받아들였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떠나간다면, 나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까. 밀도 있는 공허감. 순식간에 내 안에는 공허감이 가득 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쩌면 또 한 번 납득하기 어려울 테고 울음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해하는 순간과 절망하는 순간은 늘 간격을 가지고 찾아와 나를 괴롭힐 것 같다.

  알리스는 앞으로 나아간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찾아오는 이별을 견딘 다기보단 건너오는 것 같다. 우리는 그 순간들을 견뎌냈다고 표현하지만 실은 견디지 못했다. 아픔에 익사시켜서 조금 더 그 아픔을 덜 느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괜찮다고 느낄 때쯤 물 밖으로 나오면 온 몸이 흐물흐물한 것처럼 다시 아픔에 시달릴 것이다. 따가운 햇살과 같이.

  상실에 대한 이 긴 여정이 그래도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지독한 아픔을 건너왔지만 그대로 그 아픔의 힘으로 다시 한 번 살아갈 힘을 얻는다. 왜 그럴까. 인간이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상실을 발견할 때마다 느껴진다. 우리의 삶이 고통 속에서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살아갈 가치를 얻는다.

 

  그리고 나는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조리 기억해야지, 이 모든 순간들을. 내 첫 강아지 별이가 죽었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별이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줬지만 실은 나는 별이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막연하게 느껴졌었다.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리 막막하게 느껴지나보다. 때때로 떠올린다. 겁에 질린 듯 내 무릎에 누워 숨을 몰아쉬던 까만 강아지의 모습. 그것이 정말 너였니? 라고 물어볼 때가 있다. 어쩌면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떠날 때가 오면 이런 기억들로 나 역시 행복해하며 떠날 수도 있겠다. 미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기억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모든 것을 처음과 같이 말이다.

  알리스가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본 것처럼 속으로 나도 내 이름을 불러 볼 때가 많다. 그래서, 모든 걸 기억해야만 해. 그 잔인한 순간들까지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내 자신을 여전히 지탱해줄거야.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행복이라고 기억할 수 있길 오래, 오래 바랐다.

 

덧1. 감성적인 작품이다. 감성적인 새벽에 읽기 좋은 작품.  

 
YES마니아 : 로얄 d*********3 2011.06.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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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 애도의 끝에 대한 불가능함, 그리고 연장선인 삶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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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죽음의 연대기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 애도의 끝에 대한 불가능함, 그리고 연장선인 삶을 향해   나는 마녀야   알리스의 소중한 사람들은 알리스가 미묘한 예감을 느낀 순간 떠나가 버린다. 그녀의 전 연인이었던 미햐, 친구 콘라트와 리하르트, 연인인 라이몬트. 알리스가 집어드는 물건마다 그들의 죽음을 예정하는 것 같고,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라이몬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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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죽음의 연대기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 애도의 끝에 대한 불가능함, 그리고 연장선인 삶을 향해

 



나는 마녀야

 

알리스의 소중한 사람들은 알리스가 미묘한 예감을 느낀 순간 떠나가 버린다. 그녀의 전 연인이었던 미햐, 친구 콘라트와 리하르트, 연인인 라이몬트. 알리스가 집어드는 물건마다 그들의 죽음을 예정하는 것 같고,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라이몬트의 문신마저 불길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민담에 나오는 마녀처럼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마법을 걸 수가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희망을 갖지만, 동시에 역설적인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 빗자루 위에 올라탄 마녀처럼 알리스는 정처없이 죽음의 바람이 몰아치는 거리 한 가운데를 걸어가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미햐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고, 콘라트와 인사를 하고 리하르트의 아내인 마르가레테에게 담배를 사다주는 정도. 그나마 그들에게는 알리스보다 더 큰 상실감을 느낄 누군가가 있었다. 미햐의 아들을 낳은 마야, 콘라트의 아내 로테, 리하르트의 연인 마르가레테.

과거 중세시대에 마녀는 '다르다'로 일컬어졌다. 불길하고 음울한, 살아있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람들과 다르고, 경계 밖에 물러서 있지만 인간 형태를 띄고 있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이 불안한 위치. 알리스는 무게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그녀는 어떤 위치에도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마야에게 알리스는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미햐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알리스는 마야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늘 불안했다. 그녀는 과거에는 미햐의 연인이었으나 지금 미햐가 의식을 잃은 이상 현재 그녀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그저 미햐의 트렁크를 잠시나마 가질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할 뿐이다. 콘라트와 함께 수영을 하고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어야 하지만 콘라트는 아프고, 그와 안나, 루마니아 남자를 이어줄 연결점은 알리스 한 명 뿐이다. 알리스만이 그 두 쪽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그들을 잇지 못한다.

알리스는 미햐에게 무슨 염려를 끼치지는 않을까, 마치 자신이 역병같은 존재라도 되는 양 불안해 한다. 하지만 미햐는 죽지 않는다. 그녀가 와서 키스를 했을 때, 마치 그게 신호탄이라도 되듯이 몇 시간 후 죽음을 맞이한다. 콘라트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알리스다. 리하르트가 좋아하는 꽃이 작약이라는 것을 맞춘 것도 그녀다. 이 죽음들은 다른 소설들 속에서 나타나는 죽음처럼 쿵쾅거리지도 않고 장렬하지도 않다. 풍경처럼 너무 잔잔하게, 마치 원래 그랬어야 한다는 듯이 다가온다. 누구도 알리스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리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녀 때문에 일어난 일처럼 여겨지고, 그녀 앞에 놓여진 모든 것이 죽음의 전조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그녀는 라이몬트의 말에 대답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온 알리스는 라이몬트에게 물었다. 나보다 먼저 죽고 싶어,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죽고 싶어? 당신이 죽은 뒤에. 라이몬트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는 대답에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되묻는 걸 보면. 알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알리스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87

 

그의 바램과 달리, 라이몬트는 '꼴찌가 첫째가 되고 만다'. 알리스에게는 가장 멀게만 느껴지던, 절대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연인 라이몬트가 죽은 것이다. '꼴찌'이길 바랬던 라이몬트는 첫째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모르는 새에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이탈리아의 머리 메뚜기처럼. 알리스가 원치 않아도 죽음은 다가온다. 알리스는 입 안에서 벌레를 뱉어낸다. 웨이터는 그녀에게 '날이 덥기 때문에 벌레가 많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 벌레가 머리 메뚜기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걸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콘라트 뿐이다. 그녀가 죽음을 건드리면 건드릴 수록 죽음은 더더욱 알 수 없는, 불가한 것이 되어버린다. 어떻게든 정의를 내리려 할 수록 그녀는 그 앞에서 좌절하고 미쳐버릴 수밖에 없다. 머리 메뚜기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죽음을 건드릴 것이다. 그녀는 무사하게 다른 세상으로 '귀환'하기 위해서, 머리 메뚜기를 삼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 라이몬트의 죽음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머리 메뚜기가 높이, 튀어오르게 된다.

 

 

눈부시게 빛나는 레몬나무

 

빛 아래에서 모든 것은 명징해 보인다. 형체도, 풍경 사이의 구분도, 사람들도. 허나 알리스는 안나에게 묻는다. 매미와 여치의 차이점이 뭘까? 색깔, 소리, 크기로 분간해 볼 수도 있고, 여치 소리가 나는 상자는 베트남 시장에서 샀기 때문에 베트남 산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차이점에 따른 매미와 여치의 정체성을, 알리스는 납득하지 못한다. 안나와 루마니아 남자는 콘라트를 보지 못했다. 콘라트와 그들을 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알리스 뿐이다. 병원의 수녀도 미햐에 대해 묻는다. 미햐는 어떤 사람이었죠? 알리스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당혹감을 느낀다. 과연 한 인간의 삶이, 한 마디 말로 완결될 수 있는가? 라이몬트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소설 속 소설의 몇 구절처럼, '사라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애도를 '자신의 상징 구조 안에서 상징화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울증은 그 반대로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그 사람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다. 알리스는 프로이트식으로 보자면 우울증에 가깝다. 수녀는 미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지만, 그녀는 그 전의 미햐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녀와 미햐 사이의 공백기. 그녀는 그 공백기를 읽어내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미햐는 '마법사'였다는 것. 그녀처럼 불길함을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타인에게 마법을 보여주고 그 마법 패를 다 읽게 해주는 사람이었다는 것. 미햐가 살아 있었을 때라면 그녀는 미햐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입을 다문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그녀는 죽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시체를 보는 것도 거부한다. 미햐의 시체를 보겠냐고 물었을 때, 알리스는 생각해 봐야 겠다고 말했다가 이어 '볼 수 없다'라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시체를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았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언제 인정하게 되는가? 고인의 마지막 얼굴은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던져 그 딱딱한 입매를 실타래처럼 풀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지만, 그렇게 해봤자 그 사람이 되살아날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체를 보는 순간, 그 명확한 물적 증거 앞에서. 우리는 죽음에 항복하게 된다. 마르가레테는 리하르트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그의 죽음을 기다린다. 알리스는 3주 뒤에 과연 리하르트가 죽을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마르가레테는 리하르트가 했던 말 그대로를 믿는다.

 

마르가레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모든 게 다 준비됐어. 모든 문제를 정리했어. 연주자들, 묘지의 오케스트라, 묏자리까지. 장례식 날도 정했어. 3주 후야.

리하르트가 그때까지 죽지 않으면요. 알리스가 물었다.

, 그때까지는 마치게 될 거야. 마르가레테가 대답했따.

 

92

 

마르가레테가 가장 결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점점 말없이 떠나가고 있는 리하르트 곁에서 잠들 것이다. 리하르트가 3년 뒤면 다 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알리스가 태어났을 때 이미 없었던 말테 삼촌의 연인 프리드리히를 굳이 찾아간 것도,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다. 그녀는 프리드리히처럼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자의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예상치 못한 무언가에 의해서. 운명의 날카로운 타격으로. 그녀와 프리드리히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곤 죽은 자들이 남기고 간 물건 뿐이다. 프리드리히에게는 그것이 말테의 편지였고 알리스에게는 라이몬트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총알. 알리스는 말테 삼촌의 죽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상상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는 알리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그 또한 완전하게 애도를 끝내지 못했다. 말테 이후로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못했고, 말테의 조카라는 아이가 말테를 닮았기를 기대하고 상상했다. 프리드리히는 말테의 편지를 알리스에게 건네주면서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의 애도는 금고 속의 편지처럼 계속 고정 상태로 남아 있다. 끝나지 않는다. 알리스는 프리드리히에게 편지를 다시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안다. 프리드리히는 많이 늙었고, 알리스와 다시 만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애도는 끝이 없다는 것을. 프리드리히는 그녀보다 더 많은 세월을 거쳐 왔지만, 그래도 애도를 끝내지 못했다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든 애도를 끝내려고 한다. 라이몬트의 물건을 정리할 사람은 마야도 아니고 마르가레테, 로테도 아니고 그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이몬트의 물건들을 처분하려고 하지만,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아몬드 크루아상을 발견한 순간 그 결심을 무너뜨리게 된다. '차분하게', 언젠가는 정리해서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녀는 라이몬트를 본다. 그게 어디든 간에.

 

모두가 라이몬트였다. 걷거나, 서 있거나, 한 손으로 목 뒤를 잡거나, 머리 위를 문지르거나, 어깨를 늘어뜨리거나, 하품을 하거나, 재킷을 입거나 벗거나 모두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세상에 없어, 알리스. 알리스는 자기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의 아이인 것처럼. 알리스, 라이몬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미쳐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를 생각하는 것. 조심스럽게. 언제나 새롭게, 맨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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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그녀는 차마 '라이몬트가 죽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몬트는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머리 메뚜기가 들어온 것마냥 무작정 눈 앞의 현실을 거부할 수도 없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처음부터 되짚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해한 일이다. 프리드리히 또한 처음부터 되짚었을 것이나, 그는 아직도 애도를 끝내지 못했다. 소설의 문장 사이사이마다 미묘한 공백, '사이'에서 가벼우면서도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사이에서 미묘한 '애도의 불가능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 끝없음에, 알리스는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모습을 본다.

 

 

물 속으로 뛰어들기

 

애도가 끝이 없다는 것은 절망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재를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오롯히 혼자로 남게 된다. 알리스는 이 소설 속에서 혼자다. 그녀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기를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 절망, 절망. 슬픔의 수채화를 그리다가 그 위에 갑작스레 물을 끼얹으면서 모든 풍경들을 무너뜨리는 것. 그 뿐이다. 자기파괴 충동에 시달리는 것. 이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다. 그녀는 로테 앞에서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와 안나, 로테와 루마니아 남자가 새를 구분한답시고 잠깐 멈춰 있었던 순간에 콘라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죄책감들. 그녀는 라이몬트의 문신에 대해 알고 있지만 동시에 모른척 한다. 라이몬트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그 뜻이 이뤄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몬트는 죽었다. 그녀와 가장 가깝고, 그녀를 위해 술집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

생이라는 거대한 호수 안에서도 타인의 죽음의 동심원과 성의 동심원은 천천히 퍼져나가지만, 우리 삶의 동심원은 그 근처를 스쳐지나갈 뿐, 완전히 경험할 수는 없다. 타인의 죽음이고 사랑이기에, 우리는 '이건 어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녀는 루마니아 남자와 밤을 같이 하지만 그에게 차마 '같이 하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루마니아 남자의 미묘한 암시, 이제는 두 개의 행성이 생겼다는 말을 웃으면서 들을 뿐이다. 그녀는 라이몬트를 계속 '보기 때문에', 그와의 인연이 이제는 사라졌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생은 차갑다. 한없이 차갑다. 인정하기 힘든 것을 인정하라 하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콘라트의 말대로 그녀는 '죽지 않고' '물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다. 진통을 없애주는 모르핀을 한 상자 가득 가지고 다니는 간호사의 말마따나 어떻게든 '죽음'은 올 것이다. 동심원들이 서로 독립된 것처럼 퍼지다가도 주변의 동심원과 맞부딪치고, 수면 속으로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 사랑.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웅뚱그려질 것이다. ''이란 것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원이나 삼각형, 사각형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거대한 숭고로. 결국 우리는 진통제 한 알을 삼켰다고 상상하면서, 내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타인이 이제는 낯선 죽음으로 물러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결국 콘라트의 말대로 그녀는 '물이 차가운 걸 알면서도'그 안으로, 생 속으로 다시 뛰어들게 될 것이다. 햄릿의 오필리어처럼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게 얼마나 차가운지,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알리스는 콘라트가 자신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가 호수에 대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호수 물은 언제나 얼음처럼 차갑지. 그걸 견디고 물로 들어가야 해. 그래도 너는 물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리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넌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콘라트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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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4 2011.06.2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여러가지 죽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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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 {margin: 0.0px 0.0px 0.0px 0.0px; line-height: 18.0px; font: 12.0px Tahoma; color: #333233} p.p2 {margin: 0.0px 0.0px 0.0px 0.0px; line-height: 18.0px; font: 12.0px Tahoma; color: #333233; min-height: 14.0px} span.s1 {letter-spacing: 0.0px}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알리스>는 알리스라는 여자와 그녀와 인연이 있는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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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읽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알리스>는 알리스라는 여자와 그녀와 인연이 있는 다섯남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바로 그 다섯 남자의 이름이 붙은 다섯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관해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글을 많이 읽어봤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책에서 언급되는 사람마다 죽어가거나, 죽음을 맞이하다니. 기분이 묘했다. 


두번째 읽었을 때,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상하지 않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한가?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라면 죽음 혹은 죽은 사람에 관한, 또는 죽은 사람과 남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만 구성된 소설이라고 해서 이상할 이유가 없다. 덕분에 조금 쓸쓸하지만 보다 관조적인 느낌으로 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담담하다. 죽음으로 인해 절규하거나 통곡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일까. 삶에서의 ‘단절’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엘리스는 슬픔을 자제한다는 느낌도 크게 들지 않을 정도로 잠잠하고 자연스럽다. 엘리스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남편인 라이몬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보다 또렷하게 드러난다. 

모두가 라이몬트였다. 걷거나, 서 있거나, 한 손으로 목 뒤를 잡거나, 머리 위를 문지르거나, 어깨를 늘어뜨리거나, 하품을 하거나, 재킷을 입거나 벗거나 모두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세상에 없어, 알리스. 알리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의 아인 것처럼. 알리스, 라이몬트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미쳐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를 생각하는 것. 조심스럽게. 언제나 새롭게. 맨 처음부터.
<라이몬트> P.151

죽음으로 인해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떠나간 사람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이몬트의 죽음 앞에 ‘모두가 라이몬트’였다며 그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알리스가 조금 더 슬픔을 표현했어도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리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알리스에게 통곡할 시간을 잠깐 주고 싶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떠나가는 사람을 향해 한 번쯤 미친 사람처럼 울어도 괜찮다고, 나는 믿는다.

i********3 2011.07.0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알리스]오열보다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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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오열하는 것보다 눈물 한방울이 더 슬퍼보일 때가 있다. 누가봐도 오열과 흐느낌이 자연스러울 순간에 다문입술과 눈물 한 줄기는 더 많은 슬픔을 담고 있다. 슬픔을 참아내는 슬픔이 덧대어졌기 때문이다. 민음사 모던클래식의 46번째 소설 [알리스]는 그렇게 눈물 방울 같은 소설이다.   죽음보다 매력적인 소재가 있을까. 손을 쓸 수 없는 영원한 이별, 우연처럼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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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오열하는 것보다 눈물 한방울이 더 슬퍼보일 때가 있다.

누가봐도 오열과 흐느낌이 자연스러울 순간에 다문입술과 눈물 한 줄기는 더 많은 슬픔을 담고 있다.

슬픔을 참아내는 슬픔이 덧대어졌기 때문이다.

민음사 모던클래식의 46번째 소설 [알리스]는 그렇게 눈물 방울 같은 소설이다.

 

죽음보다 매력적인 소재가 있을까. 손을 쓸 수 없는 영원한 이별, 우연처럼 마주칠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단절, 아무 변명도 들어주지 않는 무정함.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 속에서 죽음이 이야기의 종착점인 대신, 알리스는 시작부터 죽음을 드러내놓는다.

 

하지만 미햐는 죽지 않았다. 월요일 밤에도, 화요일 밤에도 죽지 않았다.-알리스

 

독자는 처음부터 미햐, 콘라트, 리하르트, 말테, 라이몬트의 죽음을 알게 된다. 본의 아니게 이야기 속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다섯 사람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던지는 사소한 농담과 우연한 동작마저도 죽음과 연결짓게 된다. 죽음에 대한 선지식은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어쩐지 아련하고 씁쓸하게 만들며 왠지 그들이 살아가기보다는 죽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의 배경과 사연보다는 살아남아 그들의 죽음을 겪는 알리스에 초점이 있다.

 

알리스는 그들의 죽음을 의심하고, 허무해하고, 곧 아무일없음에 당황해한다. 그들의 죽음은 마치 어제도 만난 친구를 오늘 길에서 또 만나인사하듯 스쳐간다. 자다가, 수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잠을 자다가, 죽음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것이다.

 

살아남은자는 추억과 함께 살아간다.

알리스가 이 모든 죽음에 통곡하고 오열했다면, 나는 가증스러운 알미스를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추억한다. 추억하다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야도, 로테도, 마르가레테도, 프리드리히도, 결국 남은자는 살아간다. 다만, 추억과 함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떠난 자를 위한 것일까, 혼자 남겨진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알리스도 라이몬트의 죽음에는 가장 크게 흔들린다.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집안 곳곳 그의 추억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물론, 울기도 한다. 남겨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가장 이별을 실감하게 되는 그 순간. 

 

헤르만은 담담하게 살아남은자들의 모습을 그린다. 추억으로 빈자리를 메우는 그들의 모습은 오열보다 눈물 한방울에 가깝다. 슬픔에 대해 갖은 미사여구와 통곡으로 표현하기보다 추억으로 이겨내는 그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이 책은 알리스, 혹은 이러한 이별을 겪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치유받기를 기도해주는 것 같다.

 

a*****i 2011.06.2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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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낯설지만 결코 친밀할 수도 없는...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그 ‘죽음의 때’이다. 하루에도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TV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무미건조한 톤으로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듣고 혹은 가끔 주변 사람들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는다. 때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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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낯설지만 결코 친밀할 수도 없는...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그 죽음의 때이다. 하루에도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TV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무미건조한 톤으로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듣고 혹은 가끔 주변 사람들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는다. 때론 그 죽음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때론 가볍고도 갑작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 죽음 앞에 진지해지기가 어렵다. 나의 죽음이란 언제나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생각해보면 우린 절대 그 죽음에 대해 익숙할 수도 없고 또 부인할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해져본 적이 없는듯하다.

 

소설 알리스는 큰 굴곡이나 극적인 장치 없이 그저 흘러가는 줄거리 속에 주인공 알리스를 둘러싼 주변 이들의 죽음 사건으로 이루어져있다. 마치 진짜 우리의 인생처럼... 사실 우리의 삶이란 드라마나 영화처럼 사실 그렇게 극적이지 않으니까. 별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삶에서 어느 순간 끼어드는 죽음의 그림자. 이 소설은 바로 그 점을 사실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알리스 그녀의 인생에서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었던 이들이 하나 둘씩 그녀를 떠나갈 때마다 그녀는 소리 내어 한 번 크게 우는 모습도 없이 살아남은 자로 여전히 세상에 남겨진 자로 떠나간 이의 흔적들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소설 속 죽음의 장면 속 계속 비집고 들어오는 유행가소리들, 변함없이 각자의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했던 한 사람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세상은 그 시간 위를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이따금 그들의 의식 속을 파고드는 떠난 이에 대한 기억과 흔적을 보듬고 또 그렇게 살아있는 자의 생활을 살아간다.

 

결국, 이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계속 혼자 걸으려고 했는데, 아직 똑바로 걷지 못하고 삐뚤빼뚤 걸었다.’(p.14)

 

미햐는 죽어가고 있고 미햐가 세상에 남긴 또 다른 생명, 그의 아기는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무대는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면서 수녀는 방에서 나갔다. 저렇게 환자 얼굴이 마르면 오래가지 않거든요.’(p.18)

 

그리고 움직이는 숫자들을 심사숙고하듯 환자 기록표에 적어놓고는 도망치듯 병실을 나가버렸다. 간호사는 자기가 체온을 재는 동안 미햐가 숨을 거둘까봐 겁을먹은 것 같았다.’ (p.27)

 

누군가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단정 짓고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고 또 누군가에는 무서울 만큼 낯선 것이다.

 

알리스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맞닿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촌의 죽음 이후 알리스가 태어났으니까.

 

소설 속 그녀의 마지막 연인 라이몬트 죽음이외에 알리스는 나머지 넷의 죽음을 전부 소식을 통해 듣거나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그런 방식 그대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알리스를 통해 연인 라이몬트의 죽음을 전해듣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 그 의미,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그 심정... 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기엔 참 복잡하다. 작가 유디트 헤르만은 우리가 느끼는 그 죽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막장 드라마속 백혈병, 위암 같은 그런 죽음의 그런 극화된 모습도 아닌..그냥 있는 그대로.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a******a 2011.06.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