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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번째 작품인 순조편이 드디어 나왔다. 정조편이 발매된 지 6개월 후이지만, 그 시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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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체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개혁 군주’로 평가되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몇몇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로 인해 암울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11살의 나이로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서 선왕인 정조보다 어렸던 영조의 후비인 정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그 친정인 노론의 핵심 가문 안동 김씨의 정권 장악력이 더욱 공고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남인들이 많이 가담하였던 천주교교들을 ‘사악한 학술(邪學)’이라는 미명으로 탄압하여, 이른바 ‘신유박해(1801)’를 시작으로 대규모의 순교자가 이어지게 되었다. 주지하듯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인 정약용이 이에 연루되어, 처형을 겨우 면한 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순조가 15살이 되던 해인 1804년부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거두어지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지만, 안동 김씨가 장악한 정권의 핵심부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권력자들의 횡포가 지속되고 이에 민중들의 삶이 더욱 고단해지면서, 평안도 정주에서 흥기한 농민군이 홍경래의 주도 아래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홍경래의 난’으로 칭해지는 이 사건은 19세기 내내 발생한 ‘농민봉기’의 명분과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세기 초반부터 계속 이어진 민중봉기의 의미를 평가하여 당시를 '농민봉기(민란)의 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병약한 순조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이 효명세자(익종)가 잠시 대리청정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한때 개혁을 추구했던 세자의 죽음 이후 다시 권력은 세도정권의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실시되면서, 이전부터 조선의 해안에 출현했던 ‘이양선’으로 인해 서양 세[력의 침탈이 시작되는 조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당시 정순왕후의 후원 아래 권력을 장악하였던 이들은 안동 김씨 가문으로, 특히 한양의 경복궁 서쪽 자하동에 거주하면서 위세를 누렸던 이들을 따로 ‘장동 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당대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19세기의 상황을 일컬어 ‘세도정치’라고 한다. 순조의 치세를 다룬 이번 시리즈의 제목을 ‘가문이 당파를 삼키다’로 명명한 것도 당시의 ‘세도정치’의 위세가 그만큼 막강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더욱이 이전까지 기록에 충실했던 실록의 내용이 순조 집권 후반에 이르면 내용이 부실해지고 있는데, 이 역시 당시 권력을 장악한 이들에 의해 남겨진 유산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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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다. 이번 달에는 19세기 조선의 역사와 관련한 책을 읽는 중인데, 어찌나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는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서 뭣부터 읽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개국이래 지난 3백년이상 쌓인 적폐들이 여기서 펑 저기서 펑 하고 터져서 그야말로 바람 잘날 없는 날들이 펼쳐졌고,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나라에 망조가 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기였다.
조선의 19세기는 11세 순조의 즉위와 함께 실질적인 막이 올랐다. 정조의 급작스러운 승하, 어린 왕, 그뒤로 이어진 상황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었다. 순조 뒤에도 헌종이 여덟살에 왕이 됐고, 철종은 강화도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고종도 방계로 이어졌으니, 보위가 불안정하게 계승되는 동안 왕권은 추락하고, 당파도 위세가 감소해 왕보다도 일개 가문이 더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비정상적인 권력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세도정치다. 순조는 불행한 아버지였다.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들인 효명세자를 비롯해서 생떼같은 자식 넷을 잃은 뒤에는 충분히 의욕상실에 빠질만 했다.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심리였을 것이다.
반면 어린 순조를 대신해 4년동안 수렴청정했던 정순왕후의 정치력과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16세에 영조의 계비로 입궁한 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치인이였다. 요즘으로 치면 오랫동안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정치 9단의 내공을 다진 경우라고 할까. 드라마를 통해 친정 가문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배후에서사도세자를 해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지만 수렴청정하다 의외로 깔끔하게 물러섰다. 더욱이 공노비 해방을 약속한 정조의 명을 어기지 않고 시행한, 무려 66000명의 노비안을 소각해, 그들을 족쇄에서 풀어준 결단도 멋졌다.
다만 천주교 신자를 처벌했던 신유박해 그 피리린내나는 방식은 정순왕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마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천주교가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신분제를 흔들어, 체제를 뒤흔드는 위험요소라고 생각했을 터인데, 이시기의 조선은 이미 신분제에 변화가 두드러졌다.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서학을 믿는 백성을 처벌하는 것으로 변화를 차단하려는 미봉책밖에 구사하지 못한 조선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민란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흔하게 하는 말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말이 있는데, 순조편에서 요즘 우리 정국을 떠올리는 대목이 나왔다. 바로 민란이 발생하게 만든 사대부들 전횡에 대한 처벌과 사면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백성들은 탐관오리에게 고혈을 빨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암행어사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일 정도로 부정부패는 고질병이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에게 솜방방이 처벌이 내려졌고, 설혹 유배나 벼슬에서 쫓겨난다해도 왕실 경사를 빌미로 숱하게 사면이 이루어졌고, 과거경력이 다시 관직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관리들의 기강이 서기는 커녕 부정부패가 고착화되는 데 한 몫을 거들었다.
문제는 이런 관행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성현종 리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사면 자체가 삼권 분립이나, 법치주의, 평등에 위배되는 성격이 강하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이 실시하는 특별사면은 재벌이나 비리를 저지른 측근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주는 원칙없는 조치가 돼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처벌에서 면제되고 정치적 권리를 회복한 사람들의 행보는 어떤가. 반성하고 죽은 듯이 살면 또 모르겠지만 다시 선거에 나와 금뱃지를 달거나 공직에 앉는 것을 보면, 현대판 면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법은 딱 만명 앞에서만 평등하다는 소리가 단지 우스개가 아닌 우리 현실이고, 전근대성에서 벗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민낯이다.
19세기 들어서 드러난 여러 문제는 결국 곪을대로 곪아터진 조선내부의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문제를 환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해야하는 환자임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불치단계로 병이 악화되고 만다. 어쩌면 수술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싶었던 마지막 시기가 순조시대였지만, 그저 부질없는 일이었다. 홍경래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백성들은 더 이상 순한 양이 아니었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백성들은 권력자들을 향해 노여움을 분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활화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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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권의 주요인물들
왼쪽 : 정순대비, 심환지, 장시경, 김관주, 순조, 이병모, 이인, 황사영, 홍낙임, 혜경궁 홍씨, 주문모, 정약용 오른쪽 : 홍경래, 조득영, 김재찬, 홍총각과 이제초, 이여절
17권은 순조실록이다. 순조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은 ‘홍경래의 란’과 조선의 망국을 부르기 시작한 무능한 임금이라는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순조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었다. 나의 부실한 지식을 보충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펼쳤던 책에서 받은 인상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순조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순조에 대한 이미지는 ‘무능’과 ‘무개성’이었다. 심지어 철종처럼 세도가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종이나 인종처럼 요절을 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순조는 34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재위 기간이 결코 짧지 않았고, 즉위 초에는 강단 있는 모습을 통해 신하들을 압도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역사를 망라해서 다른 제왕과 비교해도 평균 정도의 왕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이 선명하지 못했고, 부정적으로 비쳐졌던 원인이 무엇일까? 수렴첨정을 했던 정순대비의 존재가 너무 컸고,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민중이 분노할 정도로 악정을 펼친 것으로 인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받은 임금(헌종과 철종)들이 그와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조선의 위대한 왕 중에 한 명이었던 정조가 부친이다 보니 선왕과 비교하여 그가 더욱 작게 느껴진 면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철종과 같이 무지했던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인 문정왕후로 인해 기를 펴지 못했던 명종처럼 정순대비가 긴 기간 수렴첨정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문종이나 인종처럼 재위기간이 짧아서 뜻을 펼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정종이나 단종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종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홍경래의 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정도의 난은 다른 왕조 때도 있었다. 세조는 이징옥·이시애 등의 반란이 이어졌지만 위축되지 않았고, 영조는 이인좌의 난이 있었지만 왕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순조는 왜 그 정도의 정치밖에는 하지 못했던 것일까? 둘째, 정순대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였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순대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정조의 사후에 개혁을 뒤엎고 국정을 좌지우지 한 악의 축과 같은 캐릭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문정왕후처럼 긴 기간을 수렴첨정을 했던 것도 아니고, 정조의 정책을 뒤엎기만 한 것이 아니라 뜻을 계승한 면도 이었다. 수렴첨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더 이상 정사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정조의 급사 이후의 혼란을 무난하게 수습한 뒤 권력을 순조에게 계승시킨 충실한 후계자였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순대비의 모습을 실록의 기록과 제반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재조명하고 있었다. 비교 자체가 무리일지 모르지만 윤보선·최규하 대통령을 떠올려 보았다. 4월 혁명 이후의 과도기에서 대통령직에 있던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소장의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므로 인해 그의 18년 독재시대를 열었으며, 10.26사태 이후의 과도기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소장의 하극상을 예방하지 못함으로 인해 유신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카리스마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정조의 정권을 그 아들인 순조에게 무난히 인계한 정순대비의 정치는 훌륭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윤보선·최규하 대통령보다는 뛰어났다. 셋째, 이여절을 보면서 역사가 되풀이됨을 다시 느꼈다. 정조 19년에 창원군수로 있던 이여절은 가혹한 형정으로 25명이나 장살을 했고, 피살자의 가족을 협박해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려 했다. 그의 악정에 대해 사형까지 거론하기도 했으나 유배형으로 그친 뒤에 곧이어 복직되었다. 순조 1년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있자 황씨 성을 가진 무고한 천주교도를 고문을 통해 황사영이라고 자백하게 한 후 범인을 잡았다며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서 정순대비가 대노하면서 그를 평생 절도에 충군시키라고 하였으나 역시 다시 복직이 되었다. 그는 순조 22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는 등 권세를 유지했다. 부정과 비리 혐의자에 대한 이런 솜방망이 조처와 그들이 기득권을 잃지 않은 한심한 세태가 어찌 조선시대에만 있었겠는가? ‘우리가 남이가?’란 말로 온 국민을 경악시키던 권력자가 아직도 이 땅의 권력자로서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고, 사학비리의 표본으로 지탄받고 축출되었던 족벌사학이 다시 복귀해서 예전 이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것이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거를 모르는 이들은 다시 잘못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짐작하면서 경계를 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독서일 것이다. 18권은 헌종과 철종의 실록이다. 서서히 국운이 쇠퇴하면서 망국의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한말의 비극을 다시 보는 마음이 힘겨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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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의 주요인물들
왼쪽 : 정순대비, 심환지, 장시경, 김관주, 순조, 이병모, 이인, 황사영, 홍낙임, 혜경궁 홍씨, 주문모, 정약용 오른쪽 : 홍경래, 조득영, 김재찬, 홍총각과 이제초, 이여절 17권은 순조실록이다. 순조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은 ‘홍경래의 란’과 조선의 망국을 부르기 시작한 무능한 임금이라는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순조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었다. 나의 부실한 지식을 보충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펼쳤던 책에서 받은 인상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순조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순조에 대한 이미지는 ‘무능’과 ‘무개성’이었다. 심지어 철종처럼 세도가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종이나 인종처럼 요절을 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순조는 34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재위 기간이 결코 짧지 않았고, 즉위 초에는 강단 있는 모습을 통해 신하들을 압도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역사를 망라해서 다른 제왕과 비교해도 평균 정도의 왕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이 선명하지 못했고, 부정적으로 비쳐졌던 원인이 무엇일까? 수렴첨정을 했던 정순대비의 존재가 너무 컸고,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민중이 분노할 정도로 악정을 펼친 것으로 인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받은 임금(헌종과 철종)들이 그와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조선의 위대한 왕 중에 한 명이었던 정조가 부친이다 보니 선왕과 비교하여 그가 더욱 작게 느껴진 면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철종과 같이 무지했던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인 문정왕후로 인해 기를 펴지 못했던 명종처럼 정순대비가 긴 기간 수렴첨정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문종이나 인종처럼 재위기간이 짧아서 뜻을 펼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정종이나 단종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종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홍경래의 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정도의 난은 다른 왕조 때도 있었다. 세조는 이징옥·이시애 등의 반란이 이어졌지만 위축되지 않았고, 영조는 이인좌의 난이 있었지만 왕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순조는 왜 그 정도의 정치밖에는 하지 못했던 것일까? 둘째, 정순대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였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순대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정조의 사후에 개혁을 뒤엎고 국정을 좌지우지 한 악의 축과 같은 캐릭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문정왕후처럼 긴 기간을 수렴첨정을 했던 것도 아니고, 정조의 정책을 뒤엎기만 한 것이 아니라 뜻을 계승한 면도 이었다. 수렴첨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더 이상 정사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정조의 급사 이후의 혼란을 무난하게 수습한 뒤 권력을 순조에게 계승시킨 충실한 후계자였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순대비의 모습을 실록의 기록과 제반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재조명하고 있었다. 비교 자체가 무리일지 모르지만 윤보선·최규하 대통령을 떠올려 보았다. 4월 혁명 이후의 과도기에서 대통령직에 있던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소장의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므로 인해 그의 18년 독재시대를 열었으며, 10.26사태 이후의 과도기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소장의 하극상을 예방하지 못함으로 인해 유신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카리스마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정조의 정권을 그 아들인 순조에게 무난히 인계한 정순대비의 정치는 훌륭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윤보선·최규하 대통령보다는 뛰어났다. 셋째, 이여절을 보면서 역사가 되풀이됨을 다시 느꼈다. 정조 19년에 창원군수로 있던 이여절은 가혹한 형정으로 25명이나 장살을 했고, 피살자의 가족을 협박해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려 했다. 그의 악정에 대해 사형까지 거론하기도 했으나 유배형으로 그친 뒤에 곧이어 복직되었다. 순조 1년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있자 황씨 성을 가진 무고한 천주교도를 고문을 통해 황사영이라고 자백하게 한 후 범인을 잡았다며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서 정순대비가 대노하면서 그를 평생 절도에 충군시키라고 하였으나 역시 다시 복직이 되었다. 그는 순조 22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는 등 권세를 유지했다. 부정과 비리 혐의자에 대한 이런 솜방망이 조처와 그들이 기득권을 잃지 않은 한심한 세태가 어찌 조선시대에만 있었겠는가? ‘우리가 남이가?’란 말로 온 국민을 경악시키던 권력자가 아직도 이 땅의 권력자로서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고, 사학비리의 표본으로 지탄받고 축출되었던 족벌사학이 다시 복귀해서 예전 이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것이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거를 모르는 이들은 다시 잘못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짐작하면서 경계를 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독서일 것이다. 18권은 헌종과 철종의 실록이다. 서서히 국운이 쇠퇴하면서 망국의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한말의 비극을 다시 보는 마음이 힘겨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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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가까이 책을 멀리했다. 중간중간 쉬는 틈에 교양서 읽다가 쓰려지는 줄 알았다. 아직도 다 읽지 못하고 저만큼 밀쳐 두고,, 또한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니 그게 그거지만 내가 봄을 매우 심하게 탔나? 여전히 진행 중인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지내던 참에 드디어 순조편이 나왔다는 문자가 왔다. 이 책을 보고 다시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조편만큼 기다린 건 아니다. 정조편은 매일 출판사 홈페이지 가서 언제 출간되나 기웃거렸는데 순조편은 알게 모르게 발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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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항상 정순왕후는 사악하게 그려진다. 한국인이 사랑한 조선왕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였고 천주교 박해를 심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2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뒤로 물러난 것을 보면 도 그렇게 심한 과욕을 부리는 여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단지 명분이 달랐을 뿐... 요즘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만화에서도 그런 평가가 보인다.
똑똑한 아버지에 비해 너무 유순해 보이기만 하는 순조가 안타깝다. 그렇게 조선은 서서히 무너지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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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는 잘 모르는 임금이다. 사극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무엇을 하신 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인지 존재감이 미미하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이 1800 년부터 1834년의 약 34년간이었다. 초기의 정순왕후의 섭정 기간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부분 친정을 한 짧지 않는 치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실록에는 기록이 별로 남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긴 기간이지만 초기 일부분과 그의 장인인 김조순 그리고 홍경래의 난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참 존재감 없는 임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