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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맛보기>
며칠전 읽던 책 몰입도도 떨어지고 서평도 안 써지길래 리모콘을 눌렀다. 케이블TV에서 겨울연가 1~4회 연속방송을...최지우와 배용준의 몰입된 연기는 늘 남이섬에서 그렇게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돌아갈 수는 없어도 회상할 수는 있는 교복입었던 시절말이다. 남이섬은 그렇게 내게 각인된 곳으로 다녀온 적은 없지만 이리 책으로 만나는 시간이 될 줄이야.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너무 먼 아픈 상처가 있는 곳으로 한국 전쟁의 참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작가는 말해준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이북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가슴에만 묻은채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함구해야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그건 전쟁의 상흔이었다. 중편 <남이섬과 지뢰밭 > 단편 <꾀꼬리 편지, 춘심이 발동하야, 드라마 게임>으로 엮어진 이 책은 등단한 지 49년째를 맞이한 통산 열 번째 소설집이란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작가님은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신다는데 옳소!. 위화, 천명관, 성석제 님이 떠오르는데 이 세 분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비슷하다거나 닮은 맥락을 느끼는 이야기꾼이라면 전상국 님은 이들과는 다른 이야기꾼이라 할 수 있겠다. 삶의 연륜에서 지긋이 묻어나오는 정제된 진솔이 있다. 자연스레 물흐르듯 나오는 깊이가 있다. 젊은 사람의 팔딱팔딱 뛰는 박진감 넘치는 스릴은 없으나 은근이 멋스러운 운치가 있다. 익숙한 듯 낯선 느낌들이 거슬리지 않는다. 자연이 함께하는 숲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영화를 한 편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꾀꼬리 편지』는 참으로 긴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음미하듯 읽었다. '은빛 상상력' 이라 표현되었는데 노년의 사랑을 말함이라. 어려서의 엄마를 기다리던 마음이 자리하는 어린 소녀는 수많은 남자를 거쳤다. 수많은 남자에게 몸과 맘을 열었다. 정신과 육체가 합일하는 그런 사람(남자) 한 명 만나고 싶어서였는데, 몸이 뜨거우면 맘이 식고, 맘이 가면 몸이 싸늘해기를 반복하니 그 자신이 못견디게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잠재워준 사람이 있었으니 한 가정을 파탄냈다기보다는 사실혼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남이 볼때 별문제 없던 사람을 홀려서 왔다고 할 수 있으나 그건 그 남자도 안주만 했던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장성하고 안정된 터전을 버리고 홀홀단신 늙은 나이에 산중으로 둘이 들어갔지 싶다. 집이 아닌 숲 속에서도 언제든 둘이 하나되는 시간들. 그건 너무나 행복한 열락인 것을...그런 그가 어느날 병이 들면서 마음은 있되 육에서 열기가 떠나고...친구나 마찬가지인 조카가 오고...마음으로부터 은애하는 사람이 되고...그걸 감지하는 사람(남편)...그걸 아는 한사람(조카)...그럼에도 오매불망 어쩌지 못하는 또 한 사람. 병들어 자연으로 돌아가 수목장을 선택하고...또 다시 기다림 속에 사는 세월들...예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깎듯한 시간들이지만 서로의 마음속엔 늘 타오르는 열기를 잠재울 순 없었다. 혐오스럽다거나 추하지 않은 맑은 사랑. 정신이 교감하는 사랑이되 눈빛으로도 읽히는 경지의 사랑이다. 다 늙은 사람들이 망측하게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순결한 사랑이다. 은빛 상상력이다. 은빛 물결이 살랑이는 그 마음으로 조카마저 수목장으로 뿌려진다. 한 줌 재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 뜨건 몸에 손을 대본다. 몸과 맘이 뜨건 상태로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앞전의 사랑이 결코 불경했던건 아닌데 뒷사랑이 더 무게가 실린다. 그건 육을 겸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이 세상에서 자연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운 사람들의 인간이 인간에게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끼는 사랑이었나 보다. 그걸 먼저 알았던 남편인지라 아내의 외로움을 알아보고, 조카에게 질투를 하지 않았음이라. 그 큰 사랑안에서 아내는 조카를 마음에 품었음이라. 『춘심이 발동하야 』를 읽고는 참으로 깊은 맛에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처음 들어보는 속담이나 비유가 그리도 맛깔나고 적절한지. 무릎을 탁 치느라 멍들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 말들일지라도 전혀 낯설다거나 생경하지 않았다. 어찌나 구수하고 정겨운지...아마도 강원도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들인지, 우리네 고유의 속담인지는 무슥해서 알 수가 없지만 아주 흥미로웠다. 내용은 친구가 쓴 글로 안병신(이름만 그렇지 멀쩡하게 생겨서 하는 짓이 모자라지 싶다)이 성춘양(성춘향은 절개를 지키는 여인네의 으뜸이거늘, 무늬만 비슷한 여인)에게서 이혼을 당하고 그후 짐작만 하는 끝맺음. 그 과정에서의 여러 속담이나 비유된 말들이 어찌나 적절하고 기막힌지 그저 놀라울뿐이다. 전혀 거슬리지 않는 글들로 마치 오래전부터 사용한 것 같은 친근함이 든다. 아내가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사람이 일상에서도 있을 것 같다는...수완좋기가 모든 사람에게 거짓을 진실로 다 믿게끔 원형제작을 해놓다니...그 글에 놀아나는 시간들이 사기를 맞은건 분명하나 조목조목 따져봐도 미세한 꼬투리조차 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앞에서 울고 싶어진다. 감쪽같은 사기극에 다 놀아나도 따질 근거가 없다. 그렇게 사람을 철저히 믿게 만드는 재주 아닌 재주는 귀신이나 할 수 있을랑가. 『남이섬과 지뢰밭』은 가슴 싸아한 아픔으로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불평불만이 극에 달했던 사람들이 표출하고자했던 마음을 담아 환영했던 사람들과의 합류. 거기서 야기된 비극이며, 그렇게 남겨지고 기다리고 ...야수가 되어 동족을 처단하는 잔혹성과 야만성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 지뢰처럼 마음밭에 남아 있는 현실이 답답했다. '마음의 감기'라 치부하기엔 그 세월이 너무나 길다. 점차 한국전쟁의 상흔은 세대가 바뀔수록 옅어지는데 남북의 분단이 가져온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이념의 격차는 점차 커지고...북한이 점차 고립되고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것에 적잖이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이 된다. 남과 북의 언어에서조차 남의 다리 긁는 현상이 계속되는데...그럼에도 점점 그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 희망적이 되기도 한다. 통일되어 전세계에 한민족으로 우수성을 알리며 살아야지 싶다. 5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나이 많은 주인공들이다. 그 어울림이 되는 친구들이나 조연들도 대개는 나이가 지긋하다. 그렇기에 경박하거나 경솔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고 진중하고 진지하다. 나무가 등장한다. 숲에서의 나무들이 어우러지는 풍경하며 자연과의 교류가 있다. 서늘한 피톤치드가 나오는 것 같은 맑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글을 따라가보면 마치 숲 속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도 다가온다. 용 씨가 등장한다. 흔한 성은 아닌데 장애자로 그려진다. 우직한 사람으로 자신의 할 일은 묵묵히 하되 어떤 범주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말도 못하는 사람이 표현하는 반응이 흥미로운건 노래를 할때와 다른 상황에서의 어투가 같은듯 다름이다. 백치아다다를 연상했다. 그런 사람을 매 등장시킨건 어떤 경험안에서의 중요한 사람! 허튼 어림짐작일수도...지루하지 않고 가만가만 속삭이는 듯한 은근한 사랑 얘기가 좋았다. 숲 속을 거니는 듯한 그 기분 아직도 생각난다. 사기를 당하고도 읍소할 수 없다는 사실, 그 글력에 놀아나는 시간도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분단의 상처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은 가슴에 오래도록 머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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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http://blog.yes24.com/document/2275816>을 읽고서이니까 오랜만에 만나는 전상국선생님의 소설집입니다. 소설집에는 중편 ‘남이섬’과 ‘지뢰밭’ 그리고 단편 ‘꾀꼬리편지’, ‘춘심이 발동하여’와 ‘드라마게임’을 담았습니다. 다섯편 가운데 ‘남이섬’, ‘지뢰밭’ 그리고 ‘드라마게임’은 6.25동란의 지워지지 상처를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비극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었는지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는 작가의 응어리가 느껴집니다. 전쟁이 끝난 지 반백년이 가까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있으니 전쟁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지 않으신 것도 있고, 아무래도 기억에 남기기 싫어 억지로 잊으려하시는 것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의 기억에 아픔을 각인시켜 다시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소망하고 계신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이섬>의 주제는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 김덕만씨와 이상호씨 만이 기억하는 여자 ‘나미’의 흔적을 뒤쫓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전쟁 당시의 남이섬 분위기를 알았더라면 몇 년 전 가을에 남이섬을 찾았을 적에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작은 시골마을 안에서도 이념이 다른(이념이 서로 달랐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사람들이 대립하여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김덕만씨와 이상호씨로 대립되는 두 세력을 남한강의 동쪽과 서북쪽으로 나누고 그 강안에 떠있는 섬은 두 세력이 얽히는 묘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억하는 여자 나미는 어느 한편의 손만 들어준 것은 아닌 셈이니 두 세력의 대립자체가 과연 이념의 대립이었는지 회의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꾀꼬리편지>에 마음이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길이의 여유때문인지 중장편에서는 대체적으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느슨하게 풀려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단편은 짧은 길이만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압축해내지 못하면 다 읽고나서도 미진한 무엇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꾀꼬리편지>는 잘 엮여진 이야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헌과 우목 그리고 화자(話者) 사이에서 엮이는 묘한 감정을 실타래가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수목의 물오름과 같은 속수무책의 관능으로 온몸이 뜨겁던 나이에 초헌을 만난 화자가 복사골에 정착하게 되면서 뜨겁던 몸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초헌과 우목으로부터 자연을 배우게 되면서라는 것을 은연중에 전하면서, 우리 또한 자연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수목장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초헌을 만나 농익은 육신의 갈증을 몰아의 황홀경으로 이끌어갔던 화자로서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만사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은 초헌의 변화에 마음의 길을 잃고 말지만, 우목을 만나면서 그 갈증을 자연을 찾아 풀어내게 되지만 두 사람의 현실적인 거리는 결코 가까워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화자(話者)처럼 저 역시 “상수리나무 잎 하나를 새끼손가락 두 마디쯤의 크기로 정교하게 접어놓은(26쪽)” 꾀꼬리편지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꾀꼬리가 편지를 접다니 참 신기하구나 싶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지 작가는 꾀꼬리편지는 거위벌레 암컷이 낳은 알을 잘 건사하기 위해서 만드는 안식처라는 설명에 그 안식처를 만드는 모습까지도 빼놓지 않는 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꾀꼬리는 다만 이를 세상에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하는 셈이라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우목의 유골을 생전에 소망하던 복사골 백합나무에 뿌리면서 화자(話者)가 얻는 깨달음은... “드디어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늙음과 죽음이 모두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다는 절간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관통하여 하나되기, 그 없음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화실이 시위를 벗어나 과녁에 맞는 순간까지가 인생일 터. 화덕을 거쳐 기계공이로 빻은 뼛가루가 이렇게 산 사람의 손가락을 통해 술술 빠져나가 바람으로 물로 사라지는 이 투명한 비움.(37쪽)”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은 관조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란 생각이 들어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연에 스며드는 삶이 주는 묵직함을 언젠가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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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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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책의 홍수에서 말머리만 읽어보려 한 것인데 첫장을 넘긴 이후로 손에서 떼어내지 못한 책이다.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감성이 돋보이는 문체들 때문이었다. 여성작가인줄 알고 책을 다시 살펴보니 여성작가가 아니다. 그런데 이 절제된 감정들이 주는 매력과 더할나위 없는 감미로운 표현으로 자꾸 빨려드는 이야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그리움을 " 몸과 영혼이 온통 기다림이란 낱줄과 씨줄로 직조되었다는 생각" 이라 표현하는데 그냥 그립다는 표현보다 더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장편소설인줄 알았는데 [남이섬] 은 다섯편의 중단편으로 엮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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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숲속은 고요한데 그곳 복사골에는 거목이 서로 생이별을 하며 늙음을 소진하여 초헌과 우목이 상여를 타고 한 줌 재로 저승의 死이별을 맞이한다. 용씨가 수화로 그들의 시름을 달래준다. 따뜻한 말 벗, 술 친구, 모질게 질긴 인생을 살아왔던 두 님의 발자취 뒷켠에서 산속의 고요를 가르며 새 한 마리가 이렇게 노래 부른다. 영원한 것은 없어, 초헌도 갔고 이제 우목도 없다. 그 형상의 바뀜,신체의 죽음과 함께 그 마음도 따라 죽고 마는 것이라는데 저 새소리는 왜 이리도 가슴을 치나. 혹독한 전쟁의 상처로 몸과 마음 모두 고통으로 얼룩져야 했던 고모, 1세대 우리 어머니들이 다. 척박한 사랑의 힘을 보여주었듯이 세상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힘을 실어준다. 그 힘이 돋보인다. 불행중 다행인가, 행불행의 교차적 인물인가. 부모의 불화와 이복형제들의 알력으로 복잡한 사슬로 인생이 점철 될 수 밖에 없었던 허선구의 누나(허정임0가 토해내는 삶에대한 억척스러운 우울증은 스스로 미워하고 학대의 역순환고리를 선순환고리로 자기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마음감기 보듬기는 고모의 죽은 영정 사진속 질곡의 삶을 압도하지만 담쟁이처럼 차디찬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타 올라가는 끈질긴 생명력처럼 질겼던 그 억척스러움이 늙어 몸이 씨들해지자 교통사고를 과장해 육신을 스스로 거두어 내는 인고의 삶에서 역사적 실존의 상처를 아물게하는데 강력한 트라우마의 종결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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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단편집이라고 생각지 못했을까. 이 책은 총 5개의 중·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꼬리를 무는 듯이 이어지는 소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꾀꼬리 편지. 남이섬. 춘심이 발동하야. 지뢰밭. 드라마 게임. 호기심이 가는 제목만 여저물어 이어붙어도 한 편의 재미난 소설이 뚝딱 만들어질 것 같다. 남이섬에서 - 꾀꼬리 편지를 받아 - 춘심이 발동한 사내들이 - 그려낸 드라마 게임. 그 전조는 지뢰밭에 있었다. 한 작가의 소설이기에 은연 중에 풍기는 정서가 하나로 있었고, 각각의 소설은 저마다의 소재로 혹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색깔을 달리했다. 이 책에 대한 해설을 해 놓은 우찬제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은빛 상상력이 노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작품의 매혹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 장을 읽으면서 장편으로 이어질 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호흡이 길고, 한 인물에게 쌓인 사연의 깊이가 그윽했다. 무심코 넘어가기에는 발을 들일 깊이가 너무 깊어 조심스러웠다. 한참 읽고 나서야 초헌, 우목, 용씨(꾀꼬리 편지 中) 사이에 얽힌 관계가 이방인에게 낯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온전히 보존되고 싶은 마을 특유의 정취가 있었다. 그 정취는 쓸쓸한 사람들이 한둘 떠나가면서 쓸쓸하게 풀렸다. 분명 이야기는 끝이 났는데, ’현실’로 깨어난 내 시간은 단편이 아니었다. 참 오랜 시간 그네 마을의 이방인으로 살았던 것 같았다. 이야기 진화의 발원은 대체로 그리움이다. (43쪽) 나미에 대한 그리움을 앓고 있던 두 사내의 이야기가 ’남이섬’이다. 남의 섬이니 남이 장군의 섬에서 들리는 애먼 귀신 이야기로 굳어진 ’나미’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남이섬을 빙글빙글 떠돌았다. 그 끝에 다시 ’나미’라는 마지막 조각으로 완성되는 그 느낌이란. 과거의 나미와 현대의 나미가 오버랩되면서 소설은 끝났다. 사연을 가진 나미의 이야기는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을 남기 듯이 사라졌다. 몽환적이지만 즐겁지 않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 몽환이 소설의 시작과 끝으로 이어졌다. 초헌, 우목, 용씨 그리고 나미와 나미를 떠올리던 두 사내까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중편 ’남이섬’에서 보았던 한 구절에서 다섯 이야기가 모두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남이섬』의 발원. ’춘심이 발동하야’를 읽는 마음은 한결 간편했다. 남이선과 달리 짧은 단편이기도 했지만, 안병신이라는 사내의 발자취만 쫓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어디에 갔을까, 를 쫓는 친구들의 수소문담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그의 전처였던 성춘양은 이전의 나미처럼, 혹은 이전이전의 여시처럼 농간이 대단했다.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에도 한 명의 뚜렷한 여성은 소설의 중요한 흐름이 된다. ’드라마 게임’에서는 고모로 이어진다. 하지만 고모는 이전의 인물들처럼 희희낙락 웃다가 금세 떠나버릴 것 같은 가벼운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가족 모두의 큰 어머니마냥 모든 일에 관여하고 직접 나서 일을 보란 듯이 처리한다. 자신의 몸이 좋지 않는 것을 알고 스스로 교통 사고를 위장하여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나’는 부모같은 고모의 부고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는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형, 먼 나라에서 시집 온 형의 아내, 평생 땅굴을 파던 아버지와 거슬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갖은 사연의 중심이다. 그네의 죽음으로 엉킨 실타래가 풀린다. 마음의 상처가 있던 가족들이 다시 손을 맞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꾀꼬리가 아닌 거위벌레의 작품이었다. 거위벌레 성충이 낳은 알이 우화되기까지의 집이며 먹이였다. 애벌레에서 성충이 된 뒤 불과 20여 일 사는 동안 거위벌레 암컷은 짝짓기를 한 뒤에는 곧장 산란할 나뭇잎 하나를 선택홰 오랜 시간 재단을 한다. 잎 하나를 이리저리 깔출없이 재고 난 뒤에는 잎의 위쪽 부분을 가로로 3분의 1쯤에서 삭삭 절단, 다시 잎의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엽맥 깨물기. 마지막으로 잎 끝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알을 한 개 낳은 뒤 잎을 착착 말아 올려 만든 요람이다. 그렇게 거위벌레가 말아 놓은 잎이 간댕거리고 있으면 호기심 많은 꾀꼬리가 그것을 부리로 쪼아 땅에 떨어뜨리렸다 …… 꾀꼬리 편지. (26쪽) 얼마나 울렁거렸을까. 장윈의 ’길 위의 시대’를 읽고 우리 소설에서 이 같은 몽환적인 소설을 꿈꿨다. 큰 원을 그리면서 돌다가 정착하는 그 지점의 소설을 주워올린 전상국의 소설은 이전 『우상의 눈물』 단편집을 읽고 느낀 그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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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국 강섬에서 자살한 여인의 실체 또한 헤아리기 어렵다.잠시나마 그 여인에게 이끌렸던카페 후배는, 그녀가바로 선배님이 찾는 그 여인이라고 말 한 적이 있는데, 어쨌든 나미라는 코드에 부합하는 여성임에 틀림 없다.김덕만과 이상호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미의 실재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요컨대 [남이섬]은 역사적 상처를 견디며 치유하는 하나의 환각적 방식과, 치유되지 못한 실존적 상처가 과도하게 덧났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비극적 단면을, 겹쳐서 보여 주는 소설이다. 김덕만과 이상호 모두 나미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으로 살다가 갔다. 강섬 여인 또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득한 그리움을 주체 하지 못한 채 육신을 거두었다. 남이섬 강물 따라 그녀 또한 나미가 되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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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편지, 남이섬, 춘심이 발동하야, 지뢰밭, 드라마게임. 이렇게 5개의 작품이 엮어져 만들어진 책 남이섬은, 전상국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내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시키는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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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터넷에서 작게 뜬 『남이섬』표지를 봤을 땐 소설가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기억하는 전상국과 책의 표지가 연결되지 않은 까닭이다. 책의 읽고 보니 표지는 단편「남이섬」의 한 장면이었다. 내가 처음 책의 표지를 봤을 땐 분홍색만 눈에 들어왔는데 책을 읽고 나니 테이블에 커피 세 잔이 놓여 있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여자가 보였다. 얼굴은 잘렸고 짙은 파란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가락 사이로 담배가 끼워 있었다. 수컷 원앙처럼 초헌도 우목도 다 떠났다. 아니 그 별리를 어찌 수컷 원앙에 비할 것인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떠남은 허파가 허옇게 타는 그 아득한 기다림을 거두는 대신 이제 무엇을 남겨 놓을 것인가. 밖으로 향한 기다림의 불빛이 꺼지면서 내 속은 더 막막하게 밝아오는 지도.(11쪽,「꾀꼬리 편지」) ‘꾀꼬리 편지’는 거위벌레 암컷의 산란, 생의 절정을 의미한다. 삼촌 조카 사이이자 친구 사이였던 우목과 초헌, 초헌당 안주인 ‘나’는 복사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의 절정’을 보냈으나 초헌과 우목은 떠나고 이젠 ‘나’만 남았다. 우목, 저 사람 많이 슬프네요. 우뚝 치솟은 자목련이다. 백합나무 고목이 말을 받는다. 초헌, 남을 슬퍼하는 사람의 슬픔까지 슬퍼하니 이제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나신 겁니까.(39쪽, 「꾀꼬리 편지」) 초헌의 산을 관리해주던 용 씨는 초헌이 떠나고 우목마저 떠나자 분봉 유인을 하며 괴성을 질렀다. 슬픔이 가시진 않겠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몫은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리라. 「남이섬」은 한때 지방지 기자였던 ‘나’가 강섬개발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하는 현재와 1950년 7월 반공 산악대가 인공 치하에 있던 남이섬을 습격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쟁은 어제의 이웃을 오늘의 적으로 만들고 자식을 전쟁 속으로 보내야 한다. 김덕만과 이상호의 기억 속에 나미란 여자는 존재하지만 드러난 그녀의 실체는 없다. 1950년대의 남이섬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피처요,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땀이 밴 남이섬의 농사터를 다시 찾아 나룻배를 띄운 이상호 씨나 상점의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잠깐씩 섬에 들리는 김덕만 씨도, 끝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나미에게도 그 섬은 세계와 단절이며 자기 찾기의 유일한 공간이었을 터. 갇힘으로써 열리는 욕구 분출의 해방구. 그 속의 벌거벗은 몸으로 행위예술을 하는 그네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아티스트.(79쪽, 「남이섬」)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개발이란 명목으로 자연은 훼손된다. 「남이섬」은 잊고 있던 전쟁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켰고 우리가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요. 위험 표지 선 안에 있는 지뢰도 무섭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위험 표지도 없는 곳에 묻혀 있는 지뢰지요. 여기 앉아 있는, 내 안에도 지뢰가 여러 개 묻혀 있다는 거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166쪽, 「지뢰밭」) 「지뢰밭」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용재두는 원한을 가진 사람이 지른 화재로 아이를 잃었지만 끝까지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다. ‘나’의 형은 육이오 때 실종 됐지만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그러나 어느 쪽에 가담했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리는 존재다. 악명 높았던 용재두였지만 그는 사람을 살려 주었다. 전쟁은 현실의 기억이 사라진 노인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남겨진 자들은 마음의 지뢰밭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닮을 수밖에. 자네가 내 인생까지 살고 있잖아.” 그 말끝에 고모가 한 마디 더 보탰다. “조카 와이프, 그 애도 어딘지 우리와 닮았잖아. 자기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결혼을 택했다고 버젓이 말했다며? 또 한 생을 세상에 내놓는 게 싫어 애도 안 낳겠다고. 그러니 어쩌겠어. 그런 사람 선택한 사람이 끌어안고 갈밖에. 수월한 삶이 어디 있나. 들여다보면 다 그렇고 그래.”(241쪽, 「드라마 게임」 「드라마게임」은 평생을 가리는 일 없이 열심히 살았던, ‘나’의 형 재목에게 이앙갈브라고 불렸던 고모 정임의 죽음과 땅굴 파기에 집착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총소사로 죽은 부모를 둔 아버지에게 땅굴은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죽음이 누나의 웃음 탓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겪은, 혹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었다. 「꾀꼬리 편지」의 두 남자 초헌과 우목은 삶과 이름은 연결되었는데 「춘심이 발동하야」도 인물의 이름과 삶이 연결된다. 한때 부부였으나 성춘양에게 이혼당한 안병신의 이야기가그와 같은 초등학교에 재직했던 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안병신은 성춘양이 바람났다고 생각했고 성춘양은 안병신이 의처증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에서 이름과 삶이 연결되는 인물 중에 신경식이 있는데 그는 성춘양이 안병신을 강제로 입원시킨 신경정신과 병원의 원장이다. 성춘양에게 이혼당한 안병신은 혼인빙자사기꾼으로 전락하더니 사라졌다. 「꾀꼬리 편지」의 표현을 빌리면 ‘생의 절정’을 함께 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남이섬』에 실린 다섯 단편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떠오른 단어는 그리움과 기다림이었다. 생이 다해 떠났기에 슬프지만 보내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았으나 유해조차 찾지 못한 경우도 있고, 떠났으나 생사를 알 수 없어 남겨진 이들에게 슬픔이 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떠난 이를 따라 가고 누군가는 남겨진 자들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지쳐서 기억을 지우고 싶어진다. 소설은 기다림이 지치면 함께 했던 그날의 기억으로 살아가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다보면 생이 조금은 유쾌해질지 모른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