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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에선 맛보기로 20페이지 가량을 보여준다. 20페이지를 보고 난 후에 책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책이 오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다른일을 할 수가 없었다. 최정호. 딱부리라고 불리는 이 아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덮고는 또 한번 망연자실하게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딱부리라고 불리는 정호는 열네살이다. 곧 죽어도 열여섯이라고 우겨데는 이 녀석이, 엄마와 함께 꽃섬으로 들어온다. 꽃이 만발할 것 같은 이 아름다운 이름의 꽃섬은 분뇨와 시궁창 냄새와 상한 음식물과 간장을 끓이고 졸이는 모든 냄새가 합쳐진 곳이고, 차갑고 끈끈한 촉수를 내리는 파리떼들이 대담하게도 사람과 함께 공생하는 곳이다. 그곳은 쓰레기 하차장이다. 정말 이곳에서 사람이 살 수있을까? 산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삶을 살아간다.
못 살 데가 어디 있겠냐. 돈 없으면 어디나 못 살 데가 되는거지. 여기서야 파리만 좀 참으면 돈이 생기지 않냐? 이제부터 날씨 추워지면 파리 모기도 들어가고 지낼 만하단다. - p.121
딱부리가 아수라백작이라고 칭하는 작업반장 아저씨와 화상으로 머리에 땜통이 있는 영길이는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된다. 원래 그곳은 그런 곳이다. 일면식이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는곳. 그렇게 의지하면서 그들은 살아간다. 냄새나고, 사람살 수 없을것 같은 그곳에서 돈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을 얻기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그들은 일을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딱부리와 땜통은 아이들만의 또 다른 공간을 갖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과 빼빼 엄마라 불리는 신들린 버드나무 할머니. 모두다 잊혀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젠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엔 김서방네 가족이 있었다.
메밀묵을 좋아하고, 삼대가 함께 사는 김서방네. 강이 흐르고 건너편 들판 머리에 병풍 같은 산들이 빙 둘러져 있는 곳, 마을 어귀에 큰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서 꽃씨 농사를 짓는 김서방네가 있었다. 그들이 사라져간다. 회색안개로 그들의 마을이 줄어들고, 그들이 숨을 쉴 수 없게 되어갔다. 그들을 볼 수 있는 땜통과 딱부리를 통해 김 서방네가 항상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볼 수가 없다. 작가의 말처럼 전기가 들어오고 부터 도깨비라 불리는 김서방네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물질이 넘쳐나고 넘쳐나서 주체를 못하고 있다. 집에서 회사에서 버려지는 음식과 소비용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난해의 음식물 쓰레기 양이 500만톤이란다. 가름조차 할 수 없는 양이다. 꽃섬은 지금은 있지 않는 곳이지만, 예전 드라마에선 난지도를 배경으로 만든 이야기들이 종종 있어왔다. 잊혀져 버린 이야기들과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 외출을 위해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아도, 외부사람들은 코를 쥐어싸게 만들던 곳에 살던 사람들. 온갖 폐기물과 함께 공존하던 그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결국 문명에 의해 버려진 것들이 인간을 덮어버리니 말이다. 문명의 이기와 함께, 김서방네라는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함께 공존하는 그곳. 꽃섬. 여전히 그곳을 지키는 딱부리는 이제 얼마나 컸을까? 아직도 김서방네를 만나고 있을까?
딱부리는 이제 알고 있었다.... 주정꾼이 토해낸 오물과 쓰레기장과 버려진 물건들과 먼지와 연기와 썩은 냄새와 모든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사람 모두가 지어냈다는 것을. 하지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짙푸른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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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만들어내는 자리는 무겁다. 휘황찬란한 광채와 세련됨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그들의 변주는 문명의 변덕스러움을 기막히게 드러내며 우울함을 자아낸다. 인간을 위한 그 자리에 한 부류의 인간은 희생양이 되지만 그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듯 취급된다. 그러므로 문명의 냉혹한 본질을 아는 사람은 적다. 본질을 안다손 치더라도 문명의 혜택을 맛보았다면, 수혜자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입을 다물게 된다. 이제 극소수만이 남는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난다 해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들은 불청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작가의 글은 이제 전같지 않다. 목에 핏대도 서지 않았으며 서슬 푸른 소리도 있지 않다. 세월의 갖은 풍상을 견뎌낸 오래된 나무 같이, 황석영은 주목하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모를 조심스러움으로 다가오고 있을 뿐이다. 시간의 채찍과 아픔의 시간을 견딘 자의 낮춘 소리에 지나가던 행인마저도 귀를 귀울일 태세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할아버지의 전래 동화다.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예전의 서울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새롭게 복원된다. 저잣거리의 뛰어난 무사였건만 한창 나이에 이방인으로 세계를 떠돌아야만 했던 할아버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많은 장소 중 쓰레기섬을 택했을까? 쓰레기섬에서 건져갈 만한 것이 그의 표현대로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낮익은 세상'은 그 쓰레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16살처럼 보이는 14살짜리 소년 딱부리다. 딱부리의 아버지는 삼청대에 끌려가 돌아올 기약도 없고 홀로 남게된 젊은 엄마는 생계를 위해 난지도행을 선택한다. 아버지의 친구인 아수라가 구역 책임자로 있는 곳에 딱부리와 엄마는 정착하게 되고,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곳에서 모자는 삶을 꾸려간다. 자연스레 아수라는 엄마와 같이 살게 되고 그의 아들 땜통은 딱부리의 동생이 된다.
이 책에서 '쓰레기'는 '낯익은'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중심 제재다. '쓰레기'는 근대 도시의 욕망과 산업화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며,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뒤안길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재다. '쓰레기'는 쓰레기 같은 세상과 그에 빌붙어 사는 인간들을 조명하는 망원경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져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갖가지 형태의 삶의 모습은 감추고 싶을 뿐이다. 도시의 위정자들에게 그들은 실제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며 감춰도 명분이 서는 그런 대상에 불과하다.
자기 남편도 기다리지 못해 다른 남자의 동거녀가 되었던 딱부리의 엄마가 교도소에 들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동거남의 자식을 괄시하지 않은 데서 희망의 싹을 보았다. 게다가 웬간한 어른보다도 영악한 딱부리가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금붙이를 만물상 할아버지에게 주는 모습을 보고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특히 딱부리가 땜통을 가슴으로 품어주는 이야기를 보면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낮고 질퍽한 삶의 자리에서 희망을 보는 것은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
![]() ![]() <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하늘색이어선지 파란계열임에도 차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글씨가 정자체가 아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하늘색이 주는 느낌이 하늘아래에 낯익은 세상이 있다는 의미와 하늘아래 세상은 낯익은 세상이다 라는 느낌도 들었다. 다 읽고나서 보니 세 가지 관점에서의 낯익은 세상이란 결말에 도달했다. 딱부리가 꽃섬이라 불리는 쓰레기장 속으로 들어가서 예전살던 동네로 잠시의 일탈을 해보니 낯익은 세상이란 의미와 일탈한 낯익은 세상에서 바라보니 꽃섬이 어느덧 낯익은 세상이 된거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따라서 꽃섬에 살지만서두 이곳이나 그곳이나 낯익은 세상이란 말은 정들고 마음붙이기 나름이라는...또한 자전적 소설이다보니 작가의 어린시절이 고스란이 표현된 꽃섬이 낯익은 세상이기도...그런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책은> 구루미 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셨다. <저자는>
황석영 이름은 알고 있어도 책을 읽은 기억이 없던 어느날, 바리데기가 그리도 들썩였다. 신간소개였던 모양이다. 이름난 작가인줄은 알았기에 신간으로 구입하여 읽으며 뭥미? 별로 그다지 내겐 와닿는 게 없네, 괜히 신간 샀네 정도. 그러다 강남몽 리뷰대회도 있고 선물로 받았다. 처음만남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설레임으로 접했는데 강남신화를 보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건달조폭이 꼭 등장하는 삼류식으로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바리데기 보다는 났네. 세 번째로 만남에선 앞의 두 번을 다 만회하는 책이었다. '꽃섬'으로 표현되는 그 이름을 가만히 되뇌다 보면 참 이쁜 이름이구나 싶다. 꽃이 만발한 섬을 떠올리기가 쉽지만 이미 거대한 쓰레기장의 다른 이름인 것을 알고서 대하니, 악취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황이 연상적으로 보여져도 그것보다는 그곳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아주 중요한 생각. 그네들에게 온갖 쓰레기는 꽃일 수 있다는 사실. 얼마나 이쁜 꽃이냐가 얼마나 돈이 되는 유용한 쓰레기냐인 생활이다보니 그건 꽃이다 라고 생각되어졌다. 너무 낭만적으로 내가 보는것이 아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고 했던가. 어차피 쓰레기장인 것을 알고 왔든 모르고 왔든 최하층민임을 거부할 수는 없는 삶이라면 그안에서 죽기살기로 열심히 살아야하는 것을...그 사람들이 낯설은 세상 사람들로 인식되어져도 자신들 안에서는 낯설은 세상 사람들이 하듯이 비교적 그렇게 하고 산다는 것.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식품이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움을 꽃섬안에서도 영위한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가 성립한다는... 고아원 출신인 부모를 둔 딱부리.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옮겨 온 꽃섬에서 어머니는 어느새 땜통아버지와 내외하는 사이가 되는데, 호적상으론 기록이 없어도 땜통은 이복동생이 되는거다. 땜통이 꽃섬에선 딱부리보다는 인생선배로 눈치코치를 따를 수가 없는데 어린아이지만 참으로 신중하고 속이 깊다. 딱부리가 이런 땜통에게 은근히 맘을 주면서 그나마 꽃섬에서의 나날들은 흘러간다. 땜통으로 인해 비밀아지트도 방문하고 또다른 가족들과의 은밀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소년은 꽃섬에서만 이루어지는 생활이 아닌 묘한 일탈을 느끼면서 사뭇 땜통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정신이 왔다갔다하는 누나네 집엔 병들은 강아지와 개들...이 보살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며 원한건 아녀도 은연중 자신도 보람있는 일을 하고난 후의 뿌듯함 비슷한 감정을 알게 된다. 남을 위해 봉사한다던가, 마음나눔 같은건 해보지 않은 삶이었으므로 어린 땜통이 그리 기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니 땜통을 아껴주는 딱부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친형같은 마음이며 땜통 역시 친부보다 더 따르고 의지한다. 딱부리와 땜통이라는 별명이 처음 접했을땐 거슬렸다. 뒷골목에서 좋지 않은 친구들이(원했건 안원했건) 부르며 불리우는 값싼 느낌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전소설이어선지 꽃섬의 일상을 소상히 절절하게 그려내는데 어느덧 이 별명들이 그리도 친숙하고 정겹게 느껴지는거다. 작가가 이제는 느긋한 여유로 관조하는 시선과 지나간 힘들고 아펐던 시절(실은 그렇다고 안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건 사치요 목구멍이 포도청인 시절이었을테니 그저 먹고살기 급급...)을 남 이야기하듯 덤덤히, 담담히 기술하고 술회하는데 억지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급하고 거센게 아닌 완만하고 자연스런 물줄기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꽃섬 이미지와 비슷한 환경도 가까이하지 않은 나인데 꽃섬 이야기 즉 그네들 이야기를 접하며 꽃섬이나 꽃섬밖 사람들이나 사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네 싶으니 정들고 습관되면 낯익은 세상이란 머무는 곳이 아니겠나 싶다. 하늘아래 어느 동네든 몸담고 마음담아서 정들면 그곳이 곧 낯익은 세상일테요, 그 테두리 밖에서 다시 생활이 된다면 예전 동네가 낯익은 세상이더라는...그렇게 낯익은 세상을 작가는 그려냄과 동시에 떠올렸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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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저마다 상대적인 것들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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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고 난 후에 문득 '교과서에 실리면 참~좋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과거를 보면서, 현재를 보살피고, 미래를 향한 눈을 둘 수 있는 이야기. 문인 황석영의 이번 이야기가 그랬다. 처음엔 황석영 작가의 아무렇지 않게 뱉는 욕(?)과 막말(?)이 '황석영이구나!'싶었다. 아름다운 문학이 그냥 내뱉는 말로 고상한 미학이 친근하면서도 넓은 세상의 미학으로 다가왔으니까(살면서, 그렇게 욕을 대놓고 들어보지 않은 경우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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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씻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코밑은 항상 반들반들했고 소매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게 되는, 그런 아이였다. 어느 날 머릿니를 옮아왔다고 새엄마한테 등짝을 맞으며 이러다 두피가 벗겨지진 않을까 싶을 만큼 모진 참빗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튿날 옆에 앉은 아이를 의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애를 노골적으로 미워했다. 무시하기 시작했다. 소소한 충돌은 후에 큰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 우리는 선생님 앞에 서야 했다. 그애 편을 드는 선생님이 못마땅해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그애를 무시한 것처럼 선생님이 날 무시하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워졌다. 옹졸한 내 속을 그대로 들킨 것 같아 마냥 창피했다. 바닥이 날 삼켜주었으면 바라며 훌쩍거릴 때 눈치 없이 내 몸은 훌쩍, 크고 있었다. 창피함을 안다는 것은 내면의 성숙함을 의미한다. 미처 몰랐던 세상의 움직임에 눈뜰 때,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순간이 온다. 황석영 장편소설 <낯익은 세상>의 딱부리처럼 말이다. 딱부리는 부유층의 선행이 실은‘착한 인형 놀이’에 지나지 않음을 짐작했으나 이에 응하는 자신이 전혀 부끄럽진 않았다. 친절한 미소 속에 감춰진 경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저 손에 들려진 물품이 이 손에 전해지면 되는 거니까. 개척교회에서 위문품을 받으려고 줄 서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지도록 만든 것은 또래의 한 소녀. 교복 입은 소녀의 광채는 열네 살 딱부리를 충분히 누추하게 만들었다. 소녀에 대한 낯선 감정이 스스로를 멸시하며 요동치게 만들었다. 소년은 지금까지 구축한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어른이 되어봤자 별로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딱부리는 눈치채고 있었다. (P. 196) 이 작품은 먼저 성장소설로 다가온다. ‘꽃섬’이라 불리는 곳으로 엄마와 함께 이사한 딱부리는 최정호라는 자기의 이름이 낯선 지 오래다. 공식적으로 제 이름을 들을 수 있는 학교생활과는 진작 멀어졌고, 꽃섬 아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양부모와 사는 아이도, 부모의 한결같은 애정의 눈길을 받으며 지내는 아이도 드물었다. 어린 나이에 나름대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게 하는 곳으로 이사한 것이다. 아빠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는데 헛헛함을 메우기 위해서인지, 의지할 어깨를 찾으려는지, 이도 아니면 일종의 암묵적인 거래인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준 아수라 백작과 동침하는 엄마. 그래도 아수라 백작이 겁탈했으리라 믿고 싶어 식칼을 들고 방문을 열었으나 엄마의 눈빛은 그게 아님을 명백하게 알려주어 당황하는 아들. 식칼을 떨어뜨리며 세상의 묘한 이치를 알아가는 시간. 그렇게 아수라 백작의 아들 땜통까지 한식구가 된다. 땜통의 무구한 세계에 매혹되어 형제애 이상의 감정을 교류하며 소년은 자란다. 쌓인 쓰레기만큼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에서 순수한 마음의 거울로 신비로운 세계를 들여다보며 세상의 부조리를 알아간다. 땜통의 어이없는 죽음은 마지막 선물이 되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쓰레기더미에서도 소년의 성장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다림질한 교복을 입은 소녀는 절대 품을 수 없는 고통이 있었으므로.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P. 207) 전통사회 가치관과의 단절로 읽혀지기도 한다. 숨 가쁘게 자본주의에 물들다 보니 나라마다, 지역마다 자연스레 형성된 고유의 가치와 문화를 잃어버렸다. 전통과 역사를 운운하며 흉내내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소비가 미덕인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방출하는 쓰레기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나 새로운 욕망에 밀려 쓰레기 처지가 되어버린, 아직은 꿈틀거리는 욕망이 모이는 곳, 꽃섬. 거대한 욕망의 무덤에서 삶의 터전을 발견한 사람들은 수많은 욕망의 찌꺼기로 연명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쓸 만한 쓰레기와 쓸모없는 쓰레기를 구분하며 삶의 고단함과 동시에 삶의 대한 애착을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욕망이 품고 있는 온갖 냄새를 기꺼이 껴안는다. 이는 타인의 살아온 냄새이기도 하다. 다만 묵히고 묵혀 지독한 냄새가 날 뿐이다. 냄새에 익숙해진 그들은 버려진 욕망에서 자기의 욕망을 꿰어 맞추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면서 꽃섬 사람들도 잊어간다. 한때 이 땅과 연결되었던 이들을. 그들의 삶의 가치를. 시간을 달리하여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김서방네와 소통하는 땜통과 빼빼엄마는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이어주는 매개자로 등장한다. 사소한 물건에도 깃들어 있는 혼을 위로할 줄 아는 인물이다. 허나 낡아빠진 야구모자를 애지중지 아꼈던 땜통은 물질(슈퍼마리오 게임기)에 길들여지다 결국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고 버려진 개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때때로 신기를 드러내던 빼빼엄마는 꽃섬의 비극을 예견했는지 정신을 놓는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습성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세상의 흐름에서 언제부터인가 청명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개새끼! (P. 188) 작가는 친절하게도 정신 바짝 드는 삼 음절의 경고를 남겼다. 눈에 보이는 차림새나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은밀히 숨겨둔 저울에 달아 상대방을 평가하는 고약한 버릇이 때때로 드러냈던 독자라면 섬뜩했을 터다. 개척교회에서 라면상자를 나누어주던 소녀의 엄마처럼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겠다는 듯 시종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사이사이 측은함을 강조하는 미간의 주름도 놓치지 않고 연출할 수 있는 자라면 눈 속에 몇 개의 눈금자쯤은 숨길 줄 알겠지. 백화점이라는 욕망의 전시장에서 근무하다보니 누구보다 빠를 시일에 눈금자와 저울을 마련한 젊은 점원에게 던지는 욕설이 아니다. 들꽃이 자라고 산뢰가 우는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김영랑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부분)” 흐르는, 타인의 내면에 흐르는 강을 먼저 바라볼 줄 아는, 낯선 세상이 되어버린 낯익은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하는 현대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구석에 숨어든 어둠을 밀어내며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을 가르면 아낙네들은 각양각색의 쓰레기통을 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눈을 요란하게 비비며, 통 밑바닥에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끈질긴 찌꺼기처럼 치맛자락을 잡는 아이도 더러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엄마는 매섭게 눈을 흘기다가 이윽고 아이의 엉덩짝에 불도장을 찍으면 동트는 기운을 막 흡입한 아이는 우렁차게 울어재꼈다. 종소리의 리듬과 울음소리의 멜로디가 하모니를 이루면 잠에서 허우적대던 아낙이 벌떡 뛰어나왔다. 판자를 높게 덧대어 가급적 많은 쓰레기를 적재할 수 있도록 제작한 진녹색 리어카가 점이 되어갈 때면 꼭 한두 사람은 한숨을 푹푹 쉬며 무게를 조금도 줄이지 못한 쓰레기통을 도로 들고 대문을 열기도 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릴라치면 아직도 분주한 새벽의 광경이 떠오른다. 아침잠이 없었던 예닐곱 살의 기억은 무슨 쓰레기 처리 비용이 한 달에 천 원이나 하냐고 따지던 목소리까지 데려온다. 저 많은 쓰레기를 어디로 다 가져가는 걸까. 대체 세상의 어느 끝에다 차곡차곡 쌓아두는 걸까. 그곳에도 사람이 살까. 만약 산다면 그들의 생활은 얼마나 끔찍할까. 이런 생각을 했다면 거짓말이고, 다만 쓰레기 아저씨 앞에 가기가 싫었다. 똥 푸는 아저씨와 더불어 내 또래 아이들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코를 움켜잡게 하는 존재였다. 간혹 철없는 어른들은 공부를 못하면 저런 사람이 된다고 했고 난 똘똘한 아이의 특유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창피함은 여전히 싱싱하다. 책이 과거에서 건져준 창피함은 오늘의 나를 성숙케 한다. 한층 자란 나의 내면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어느 한 구석에 아름다움만큼의 추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추함이 스며들어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고. 어쩌면 추함과 아름다움은 이음동의어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과거의 가치와 현재의 가치는 공존해야 한다고 한 소년의 눈을 빌려 이 책은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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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낯익은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은 지극히 평범했다.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우리 집은 지독히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잘 살지도 않았다. 지독히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우리 넷을 키우는데 자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부족(금전적으로)했고, 내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미치도록 화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고, 가부장적인 아빠가 있었지만 나이 드시면서 약해지는 모습에 모두가 효도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우리 집. 이게 나에게 낯익은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어떻게 대처할지..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 그 원천이 되는 힘은 내가 가진 낯익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니까.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이름이 있지만 딱부리라 불리는 소년. 그는 ‘꽃 섬’이라는 빈곤하고 더럽고 삭막한 쓰레기 더미에서 산다. 물론 처음부터 쓰레기 동네에서 산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있을 때엔 비록 산동네였지만 도시에 속해 있던 곳에서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라지고 난 후 딱부리는 이곳, 이 세계로 들어왔고, 이곳에서 성장해 나간다. 아빠의 친구이자, 엄마의 보육원 오빠 아수라가 쓰레기 더미 꽃 섬으로 이들을 불렀고, 딱부리와 엄마는 쓰레기를 줍고 정리하며 살아간다. 엄마는 아수라와 자연스럽게 부부가 되고, 아수라의 아들 땜통은 딱부리의 동생이 된다.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도 계급은 존재하고 한다. 일부 돈을 내고 들어온 사람들은 다른 이보다 조금 더 풍족하지만 외부에서 봤을 때 이들은 쓰레기 냄새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낯익은 세상은 쓰레기 일까? 사람이 사는 곳, 사람이 사는 동네. 쓰레기 더미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냄새나고 더러운 곳. 쓰레기가 넘쳐나는 곳.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했지만, 사람이 살았었구나. 그것도 가장 돈이 되는 쓰레기를 줍기 위해. 그 쓰레기를 줍는 것에도 1진, 2진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책에서 말하는 ‘꽃 섬’이라는 곳이 예전의 난지도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대충 시대적 배경은 1980년 언저리이고. 지금보다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쓰레기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곳의 쓰레기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곳에 들어오는 음식마저도 재활용하고. 하지만 아무도 그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인간에게 생존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모든 소비의 종착역인 쓰레기장이지만 이곳에선 또 다른 시작이 이뤄지는 곳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도시에서 버려진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도시로 갈 날을 바란다. 열심히 일하면서. 유복하지 않았고, 풍요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왔구나 싶다.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단단한 테두리 안에서. 어떤 부모도 내 아이에게 가난과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때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누군가에게는 낯익은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곳이 된다. 그러나 영원히 낯익은 세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오늘. 그 오늘을 감사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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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소년 '딱부리'의 시선을 통해, 조용하고도 슬픈 동화로의 초대 『낯익은 세상』이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버려진 문명과 정령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꽃섬(난지도의 옛 이름)’, 파리떼들과 함께 소독되는 세상, 거대한 쓰레기 산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들을 채집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소란한 문명의 이기로부터 폐기된 잡다한 물건들이 산을 이루는 쓰레기 매립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 그려진다.
아버지의 행방불명으로 인해 엄마와 함께 꽃섬으로 흘러들어온 딱부리는, 그곳에서 정착한 홀아비 반장 아수라와 그의 아들 땜통과 가족이 되고, 동생 땜통을 통해 꽃섬의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생계를 위해 쓰레기더미 속을 파헤쳐 가며 살아가지만, 오히려 쓰레기의 붕괴가 죽음을 앞당기게 하는 척박한 노동의 현장 꽃섬, 이 삭막하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자유가 있고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춤과 노래가 있고, 가장 빈곤한 가운데 가장 풍족한 것, 샤머니즘을 표방하는 파란 불빛(김 서방네)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 상처와 치유를 맛본다. 꽃섬 사람들은 불행의 짐을 짊어지고 끔찍하게 살아간다. 후다닥 뚝딱 만들어지는 날림 판잣집에서,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삶이 반복되다가, 부패한 쓰레기산이 폭파하는 대참사를 겪는다. 순식간에 생계의 위협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담보로 살아가는 고단한 인생들이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원치 않는 보상을 받고 추방당한 김 서방네는, 푸른 불빛이 되어 꽃섬을 떠나지 못한 채 늘 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도깨비를 끝없이 살해하는 과정이다. 한 때는 꽃으로 가득했고 철새들이 쉬어가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섬이었으며, 쓰레기를 매립하기 전만 해도 땅콩과 수수를 재배하던 땅이었다. 비록 땅이 낮아 홍수철에는 집이 물에 잠기기도 했지만, 시민들이 찾는 산책로였으며, 조선시대 [택리지]에는 풍수조건이 좋은 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랬던 곳이 악취가 풍기고 오물이 넘쳐나는 쓰레기 산에서 지금의 하늘 공원으로 발전된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의 욕망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푸른 불빛은 거대 도시에서 소외된 욕망의 희생양이다. 꽃섬은, 소비의 욕망이 지탱하고 동물적인 생존이 지배하는 비루한 현실을 상징한다. 예전에는 낙원이었으나 쓰레기 천지가 되어버린 아픈 속살을 드러내는 비참한 막장의 한가운데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희망의 빛은 피어오른다.
못 살 데가 어디 있겠냐. 돈 없으면 어디나 못 살 데가 되는 거지. 여기서야 파리만 좀 참으면 돈이 생기지 않냐? -P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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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소설은 아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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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적엔 정말 등에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 매달고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시던 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역 어느 한 곳은 커다란 쓰레기장으로 쓰레기를 주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또한 빈병이나 폐휴지를 가져오라는, 그런 숙제아닌 숙제도 있어 한참 애를 먹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혀져 가고 먼 기억속이라 내 아이들에게 말을 해 주면 '정말' 하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쓰레기' 가 나오게 되고 쓰레기는 음식물이건 그외 분리수거용 쓰레기건 문제가 자주 거론되곤 한다.한때는 자기가 사는 지역에 쓰레기매립장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마찰도 커 이슈가 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쓰레기가 그냥 쓰레기가 아닌 돈이고 자원이 되는 세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