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뢰인을 죽게 해선 안된다. 그건 탐정에게 치욕이야. (286p) 이 감성 넘치는 제목은 죽음을 맞이한 한물 간 가수의 노래 제목이었다. 그냥 인간에게 버림 받는 것도 서러운데 천사에게서 버림을 받다니 그것도 '밤'이라는 시간적 공간은 더욱 처량하게 만들어 버린다. 누가 천사이며 그 천사는 누구를 버렸는가. 기리노 나쓰오를 다시 보게 만든 작품, 미로 시리즈.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그린 [물의 잠 재의 꿈]을 먼저 읽었다. 그로 인해서 미로시리즈를 알았고 어두움의 극치라는 가장 마지막 이야기 [다크]를 읽었다. 이 새로운 주인공에 관심이 생겼다. 첫번째 작품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 이은 두번째 이야기인 이 작품은 마지막 작품과 비교해서 의외로 밝은 느낌을 준다. 주인공의 미로의 특성상 절대 밝지마는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로의 캐릭터 자체가 미친듯이 극으로 치달리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시리즈는 연결되면서 주인공의 변화를 읽는 재미 또한 준다. 시리즈를 차례대로 읽어야하는 이유다. Av 여배우 리나. 그녀를 찾아야 하는 것이 미로의 일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일일 것 같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누구를 죽여야 한다거나 하는 의뢰가 아닌 이상은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는가. 그녀가 찍은 작품은 단 한 작품이다. 울트라 레이프. 그 영상 속에서 그녀는 의도 치 않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을 찍힌듯이 보인다는 것이 주요 요지이고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인 의뢰자 와타나베는 그녀를 찾아서 직접 신고를 함으로써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강간죄가 친고죄인만큼 직접 피해자가 신고를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그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것인가. 본문에서도 언급되듯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말해버린다면 더이상 진전은 없다.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서 그러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전에 계약된 것보다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일 아닌가. 어디까지라고 합의한 사항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인데 때로는 감독의 의도대로 또는 상업적으로더 팔릴 것을 예상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좇는다면 그것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사항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그녀, 리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로는 의뢰를 승낙하고 그녀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전작에서 옆집에 살던 필리핀 친구들은 사라졌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도움을 주던 도모씨와의 관계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다른 작품에서 나왔던 캐릭터를 찾아보는 것도 역시 시리즈를 읽는 재미다. 주인공은 같으나 사건은 달라지고 시간적 배경이 달라짐에 따라서 주위의 사람들도 바뀌고 장소도 바뀐다. 비교하는 재미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시리즈다.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다. 늘 혼자서 일을 하면서 적절하게 도움을 구하던 프로인 아버지에 비해서 아직 미로의 탐정으로써의 역할은 조금 부족한 면이 보인다.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런 면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중간쯤에 아버지가 투입된다. 적절한 상황에서 미로에게 손을 빌려주고 흔적없이 사라진다. 이 아버지의 캐릭터가 멋졌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탄생하게 되지 않았을까. 작가는 이미 무라노 젠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에로배우 시장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때는 빨간딱지를 붙여서 미성년자들은 보지 못하게 했던 비디오를 빌려주는 곳도 많았었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쉽게 그러한 문화를 접하게 된 이후로 이 시장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누군가는 찍어야만 올릴 수 있지 않은가. 즉 아직도 이 시장은 활성화되어 있다는 소리다. 한국에서는 조금 음성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일본에서는 조금은 더 드러내고 활동을 한다. 성에 대해서 한국보다는 더 개방적인 일본이다. 그런만큼 그런 시장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도 더 많은 편이다. 영화시장이 가장 활성화되어있는 미국에서는 노출신이 있을 경우 어느부분까지 얼마나 노출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을 미리 합의하고 합의서를 꼼꼼히 작성해서 딱 그만큼만 찍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어떨까. 그들도 물론 합의사항이 존재하겠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능으라고 장담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니던가. 늘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잔혹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잖아. (161p) 본문에서도 나오 는바 현실은 허구보다도 훨씬 더 잔혹할 뿐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하다. 허구는 그저 만들어 낸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버릴 수 있지만 현실은 우리가 직면해야만 하고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어둡기만 했던 미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미로 이야기가 다크로 끝이 아니길 바라본다.
|
|
기리노 나쓰오의 책은 처음이다. 아마 올해처럼 새로운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해도 드물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가득 채워야 하는 숙제가 있듯이 나는 거침없이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처음 접하는 작가의 책을 읽게 된다. 읽어도 읽어도 채워지지 않아 허기가 진 듯한 느낌이다. 추리소설을 본지가 꽤 되었다. 일본소설이나 영미소설이나 유럽소설등 각자 나라마다 추리물이 다 다르지만 각각의 맛이 있다. |
|
인터넷을 통해 불법 다운로드가 비교적 손쉽게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컴퓨터나 인터넷과 비교적 친숙한 관계를 이십여년 넘게 유지해온 내가, 일본 AV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건 완전 거짓말이다. 제아무리 젊잖은 이미지로 살아가는 이들이라도, 이러한 환경에서 AV 영상에 관심을 갖지 않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난 그리 천성이 젊잖지도 또 그런 척하고 살아가는 것도 잘 안되는 인간이다. 아니라고 해 봐야 믿을 수 없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두루 갖춘 셈이다. 그러니 차라리 솔직하게 '쪼금 봤다..'고 고백하는게 이미지 관리 상 더 플러스(+)다. '쪼금'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부연설명을 사양하겠다. '공부 쫌 한다..'는 의미의 쪼금인지, '정말 쪼금만 주세요..'의 쪼금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시길. 어짜피 쪼금이라는 말 자체가 자의적인 기준이니까.
쪼금의 기준이 어찌되었든 일본 AV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비디오에 출연하는 여배우들이 정말 자발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노골적인 장면을 넘어 다소 변태적인 장면까지 종종 연출되곤 해, 보는 이를 (물론 충분히 예상하고 기대한 상태에서 보는 것이겠지만) 민망하게까지 만드는 그런 비디오를, 아무리 금전적으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진다 한들, 좋아서 찍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통장이나 손안에 목돈이 손쉽게 주어지는 건 잠깐이겠지만, 평생을 AV 출연자로서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할텐데 말이다. 보편적 정서에선 소신을 갖기 어려운 일인진댄, 정말 이 작품에서 관계자가 언급한대로 자신의 벗은 몸을 보고 흥분하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성취감을 느껴서인지 마음의 상처가 만들어낸 단순한 돌출행동인지 모르겠지만 보면서도 그런 연상에 불편한 마음이 한편으로 들었더랬다.
이 작품은 실종된 AV 모델을 둘러싼 미스테리 추리물이다. '하드보일드' 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아마도 소재 때문이지 싶다. 일본사회의 어두운 음지를 소재로 선택, 노골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한편으로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도 종종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데, 그것이 하드보일드 장르로 이 작품이 편재(偏在)된 이유이리라. 사건의 성격과 배경이 다소 불미스러운데도 불구, 무라노 미로라는 젊은 여성 탐정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사건을 파헤치게 만든 설정과 간간히 보이는 그녀의 어리숙함에선 묘한 선정성마저 느껴진다. 작가에 의해 의도된 전달인 듯.
이야기를 구성지게 이끌어가는 능력은 괜찮지만, 추리소설의 기본적 경쟁력인 기발함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미궁 속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미스터리물로 살짝 기우는 작품이다. 단서를 추적해가는 방법이 우연이나 등장인물의 비상한 머리회전에 기인하지 않아 더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리 취향이 맞는 작품은 아니었다. 난 아무래도 다소 비현실적이긴 해도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의 기발함에 더 흥미를 느끼는 쪽인가 보다. 읽으며 격정에 휘말리거나 뒷 페이지가 궁금해 작정한 것보다 오래 책을 붙들게 되는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시리즈가 여럿 있는 모양이던데, 다른 시리즈를 굳이 찾아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물론, 이건 철저히 내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지만.
다소 자극적인 소재를 채용해 불편함을 조장한데다 주인공 무라노 미로의 감정적 갈등 부분 등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는 않았으나, 빈약하기 않은 설정과 짜임새 있는 전개 면에서는 나름 좋은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불미스러움과 과오를 부정하고 감추기 위해 서로를 속이고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시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공연한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이들의 마음은 분명 불편할 것이다. 마치 과거 AV 모델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정숙한 이력을 지닌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여인이 문득 자신의 과거를 알아볼 누군가를 만나게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비슷한 것을 느끼지는 않을지.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내색할 수 없는 불안함과 불편함이 그런 그들의 과오에 대한 충분한 댓가가 될 수 있는걸까.. (별 생각을 다해 본다) |
|
뭐를 좋아하냐고 물을때 선뜻 대답하기 곤란해지곤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일본 여류 장르소설가에 대해서 묻는다면 아무 갈등없이 단번에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늘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둘은 바로 '화차'의 미야베 미유키와 '무라노 미로'시리즈의 기리노 나쓰오이다. 다들 '사회파'로 묶일 수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그렇게 비슷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미야베 미유키는 풍경화가에 가깝고 기리노 나쓰오는 초상화가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그렇게 같이 범죄를 그리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그 범죄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데 중점을 둔다면 그에 반해 기리노 나쓰오는 그 범죄를 일으키거나 추적하는 사람 하나만을 오롯이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둔다. 읽고나면 가슴에 왠지 모를 톱밥을 씹고 있는 듯한 씁쓸함이 나는 것도 같지만 미야베 미유키에선 그것이 머리로 이해함에서 온다면 기리노 나쓰오에게선 마치 활자가 그대로 주먹이 되어 가슴을 내리친 듯 멍든 가슴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떨림 가운데서 온다. 그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우리의 시선을 희생자 보다는 범죄자에게 맞추기 때문이며 반면 기리노 나쓰오는 범죄자 보다는 희생자에게 더 시선이 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유키에게선 잡기 위한 추적이 되지만 나쓰오에게선 찾기 위한 탐문이 되는 것이다. 추적이나 탐문이나 그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는 동일하다. 언제나 쫓는자 혹은 찾고자 하는 자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추적하는 자는 쫓기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고, 탐문하는 자는 찾고자 하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한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미유키의 추적에서 타자의 입장에 섰을 때 정작 보게 되는 것은 범죄자가 아니라 그 범죄자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사회의 모습이다. 반면 나쓰오의 탐문에서 그 찾고자 하는 자의 입장에 섰을 때 정작 보게되는 것은 오로지 그 개인 뿐이다. 그 개인이 당했던 생생한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당해야 했던 그의 처지 뿐이다. 그런데 나쓰오는 언제나 그 처지가 그리 특별하지 않게 그린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얼마든지 때에 따라서는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그가 특별히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니고 나빠서도 착해서도 아니며 가진게 많다거나 적어서도 아니요 사회적 서열에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어서도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언젠가는 죽을 그리고 누구에게도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 분명한 고독한 그런 보통의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에게서 범죄는 사회적 모순이 들끓는 용암이 가장 얇은 지층을 찾아 뚫고 나오듯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지만 기리노 나쓰오에게 있어서 범죄란 그저 그런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채우며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발악이 된다. 단순한 욕망의 충족만은 아닌 어떡하든 이 삶이란 것에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절박함의 표현이 된다. 그래서 아주 괴물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아임 소리 마마' 조차 그 주인공이 살려고 발악하고 발악하다 끝내 물에 빠져 익사할 때는 왠지 처연함마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나 그 밝고 어둠엔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아예 어둡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에게 있어선 그 어둠을 창 밖에 두고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기리노 나쓰오에게 있어서는 그 어둠 속에 완전히 함몰되어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어둠에선 우리가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어둠에선 쉽싸리 빠져나올 수 없다. 이 둘의 우열은 사실 나누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어둠의 매력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선 기리노 나쓰오에게 손을 더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둘은 작품에 담는 것도 작품을 통해 바라보는 것도 다르므로 결국은 해와달 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작가들이다. 대낮엔 태양의 하프소리를 듣고 심야엔 달빛의 피리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소슬한 바람이 대나무 잎새를 서걱거릴 때, 개다리 소반 위 호롱불 흔들리는 불빛처럼, 그렇게 지워질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지워지는 가느다란 피리소리를, 팔배게를 하고 누워, 호롱불 그림자가 천장에 그려내는 비틀거리는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들에서 그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을 들라고 한다면 -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면 그래도 - 이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꼽고 싶다. 개인적으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마지막인 '다크'를 아주 충격가운데 읽었고 - 이것이 정말 작가가 되기 전에 그냥 평범한 주부로만 살았던 여자의 작품이란 말인가? 하고 정말 놀라기도 했고 이런 어둠을 품고 어떻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 새삼 일본 여자가 제일 두렵다는 이토 준지의 말이 가슴에 팍 와 닿기도 했다 - 그것이 만들어내는 블랙홀과도 같은 어둠에 매혹된 탓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나중에 그녀의 다른 소설 '아웃'이나 '아임 소리 마마' '잔혹기' '암보스문도스' '그로데스크'를 다 읽어 보니 역시나 무라노 미로 시리즈야 말로 기리노 나쓰오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내가 기리노 나쓰오에 대해서 읽고 혹시나 그녀를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야말로 그 시작은 무조건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난 마지막 '다크' 부터 읽었고 그 때는 앞의 시리즈가 번역이 안된 탓에 어쩌다 보니 아직 1권도 읽지 못한 지경에 이렇게 2권부터 읽게 되었지만 당신은 운좋게도 이미 1권이 번역되어 있으니 순서대로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거기다 '다크'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을 주인공으로 한 외전 '물의 잠 재의 꿈'까지 덩달아 나와주었으니 이건 팬으로서 하는 말이지만, '무라노 미로를 벗하라!'는 신의 계시나 다름없다. 내용에 대한 언급 없이 오로지 이렇게 추천의 말만으로 리뷰를 끝내는 경우는 전혀 없는 나인데 이것만은 예외로 해야겠다. 입은 근질근질하지만 무라노 미로 만큼 그저 읽고 어둠에 푹 잠겨, 느껴야 할만한 소설은 없는 것 같으니 억지로 입에 자물쇠를 채울 수 밖에.(하지만 이래놓고 못 참게되면 언제 여기로 다시 돌아와 마구 입을 놀리게 될 지 모르겠다. 어쩌면 '물의 잠 재의 꿈'에서 같이 얘기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장 그르니에 '섬'의 서문에서 알베르 까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여기에 인용하고 싶다 "나는 정말 부러워한다. 이 책을 이제 처음으로 펼쳐서 읽게 될 당신을!" 나 역시 알베르 까뮈와 똑같은 심정이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1권 부터 차례대로 읽게될 당신을 너무도 부러워한다. |
|
여탐정‘무라노 미로’를 탄생시킨 전작(前作)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 이어 ‘미로’시리즈가 동시에 2권이나 출간되어 작가‘기리노 나쓰오’ 특유의 욕망의 끈적거림에 내재된 어둠과 죽음의 음울하고 관능적이며 그로테스크한 세계에 매혹된 우리들을 다시금 사로잡는다. 이 작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무라노를 접하게 되는 우리말로 소개된 두 번째가 된다. 에너지 넘치고, 이성적이며, 추진력과 같은 탐정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해버리고 여성적 감수성을 버리지 않은 탐정의 인간미는 더욱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혐오스러운 AV(성인비디오) 촬영장면으로 작가는 그냥 냅다 충격부터 안기고 시작한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강간의 제물이 된 화면 속 여자의 실종, 유린당한 여성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하는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실종된 여성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이는 성인 영상물의 제작에 얽힌 역겨운 세상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어 오직 추구하는 가치로서 재화의 축적에 골몰하고, 또한 한계가 없어 보이는 듯한 극한의 자극 세계를 좇는 감각이 마비된 현대인들의 어두운 공조를 까발린다.
여기에 성숙한 여성으로서의‘미로’의 본능적인 육체적 갈망은 도덕성조차 문제시하지 않는 AV업체 사장, 용의자일 수 있는 악인과의 관계까지 나아감으로써 모호하기조차 한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드러낸다. 이는 취약한 인간의 정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탐정에 대한 현실적 친근함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적 배경의 감칠맛 나는 양념에만 빠질 수 없는 것은 이 작품이 시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 사회적 문제의식의 민감함이다.
청소년들의 무분별한 성의식, 이로 인해 야기되는 미혼모와 버려지는 아이들, 그리고 입양과 파양,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려졌다는 불신과 불안, 소외감 속에 성장한 아이들이 사회에 보내는 반감과 증오는 사회적 불행을 확대한다. 더구나 이들의 심리를 악용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탐욕은 오늘을 더욱 어두운 공간으로 추락시킨다. 또한 사회적 신분과 같은 과시성에 몰입하고 있는 소위 명예자본을 중시하는 상류사회의 기만성과 추악함이 야기하는 부도덕성은 그 범죄적 악질성에 있어서 더욱 극악한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그 은폐는 매우 교활하다. 자본과 부도덕성이 결합하여 뿜어내는 그 독성을 사회가 더 이상 모른 척 하는 것은 궁극에는 모든 우리 자신들의 몫, 고통으로 근접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인간들의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어둠의 세계를 파헤치기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로인한 엽기적이고 음침하며 음란하기조차 한 소재들이 치밀한 복선, 논리적 정교함을 통해 우아하기까지 한 분위기로 전환되는 탓에 그 기이한 마력에서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게 한다. 특히나 매혹적인 것은 추리소설로서의 특징적 장치인 소설 내내 몰입케 했던‘암시’가 엄청난 전복을 당한다는 것이다. 일면 무력하고 지나치게 평범한 여성으로 비치기 조차한 탐정‘무라노 미로’에 은근히 짜증이 일어날 정도가 되면, 여지없이 가공할 충격적 반전이 터지고, 그래서 미궁을 헤맬라치면 눈이 활짝 뜨이는 긴장감으로 내 몰린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이 기막히게 자연스러워 그 개연성에 수긍할 수밖에 없게 하는 재주는 이젠 가히 그녀답다 라는 말 이외에는 할 표현이 없게 한다. 게이바, 호스트바, 포르노그래피..., 어두운 욕망이 암약하는 오늘의 세계, 그것이 딛고 있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세계의 심각성이 발작적 슬픔처럼 다가오는 작품이다. 세 번째 작품 『물의 잠 재의 꿈』으로 급하게 달려간다.
|
|
지난번에 노나미 아사의 경찰물을 읽으면서 박력이 부족해서 아쉬워..하다가 또 한 개념작가의 작품에서 갑자기 마초스러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떠올라 양성적인 (androgyneous) 작품을 읽었으면 했다. 그게 바로 기리노 나쓰오. 그녀의 작품을 읽고서 작가 이름을 가려놓으면 도저히 여성이라고 믿기지 않을 박력과 상상하기 어려운 거친 현실, 그리고 마주 대하기 어려운 욕망의 표현이 보인다. 그렇지만, 등장인물에 대한 배려에 있어 비록 야쿠자나 살인자라도 사물처럼 취급하지 않는 면이 있어 존경스러웠다. ![]()
|
|
“기리노 나쓰오”의 유명 시리즈라는 하드보일드 여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본편이 아닌 외전(外傳) <물의 잠 재의 꿈>부터 만났다. 미로의 의붓아버지인 “무라노 젠조”, 일명 “무라젠”의 젊은 시절을 그린 이 작품은 명탐정의 과장된 추리 솜씨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아닌 탐문 수사를 통해 하나하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상당히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기존 일본 추리소설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재미와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던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외전이 이 정도 재미를 보여준다면 본편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당연히 들었다. 다행히 미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 첫 번째 작품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비채/2010년 8월)> - 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원제 天使に見捨てられた夜 / 비채 / 2011년 5월)>을 외전에 이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서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니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쿄 신주쿠 2초메(丁目)에서 사립 탐정으로 활약하고 있는 “무라노 미로”에게 ‘성인비디오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활동가 “와타나베 후사에”가 의뢰를 해온다. 바로 "울트라 레이프 이제 나도 자기 부정”이라는 제목의 성인비디오(Adult Video; AV)에서 다수의 남자들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찍은 “잇시키 리나”라는 여배우를 만나 인권 침해 사실을 조사하고 싶으니 찾아달라는 의뢰이다. “못 찾는다 거절해” 라는 말이 머릿 속에서 소용돌이치지만 아버지(무라노 젠조)의 오랜 동료인 “다와다” 변호사의 소개인지라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계약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미로의 예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AV 제작사에 조사를 나갔다가 강간당할 뻔한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나고, “죽고 싶냐”라는 전화와 함께 자신의 집 앞에 죽은 동물의 사체가 놓여져 있는 협박을 당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미로는 급기야 따로 살고 있던 아버지 “무라노 젠조”에게 도움을 청하고, 옆 집에 살고 있는 게이 청년 “도모”의 협조를 받아 조사를 계속 진행하지만 리나의 소재는 갈수록 오리무중이고 계약했던 2주의 기간도 훌쩍 넘어가 버린다. 새로운 후원자가 나서면서 계약은 연장되는데 리나를 만나러 간 와타나베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사건은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새로운 후원자와 다시 계약하게 된 미로는 리나가 가지고 있던 “빗방울 화석”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벌이면서 드디어 리나를 찾는 실마리를 발견하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리나를 찾아가는데, 거기서 전혀 의외의 진상과 마주치게 된다.
보통 여자 탐정하면 미스코리아 뺨치는 매혹적인 외모에 남자 서 너 명은 손쉽게 때려 눕히고 여성 특유의 세심함과 날카로움으로 트릭의 허점과 사건의 진상을 단숨에 간파해내는 그런 모습 - 예를 들자면 홍콩영화 “예스마담”이나 “007” 시리즈의 “본드걸” - 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주인공 “무라노 미로”는 거친 남자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사건 조사에서도 여러 난관에 부딪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여인이다. 또한 냉소적이긴 하지만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버지 “무라젠”과는 달리 감정 기복도 심한데, 자신을 강간하려는 상황을 연출했던 제작사 사장과 위험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이웃집 게이 청년 “도모”에게 이성적인 사랑이 싹트지만 그럴 수 없기에 상처받기도 하며,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다는 것에 심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결국 병원에서 만나게 된 리나에게 자신도 돈에 쪼들리면서도 사례금으로 받은 100만 엔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주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조마조마하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작위(作爲)적이지 않은 생생한 “사실감”을 느끼게 한다. 이 책도 별다른 트릭이나 반전이 등장하지 않아 전작처럼 심심하다고 느낄 독자들도 있겠지만, 1인칭 시점의 미로가 탐문 수사를 통해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 하나 끌어 모아 결국 사건의 얼개를 완성해내는 과정이 마치 미로와 동행하면서 함께 지켜보고 조사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입마저 느낄 수 있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강력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 “미로” 외에도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데 역시 미로의 아버지 “무라노 젠조”를 먼저 꼽을 수 있겠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에 조연(助演)으로 등장한다고 하니 언제쯤 나오나 싶어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로의 요청을 받아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무라젠의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다시 만나니 반가움마저 들었다. 미로의 곁에서 사건의 마무리를 함께 하면 좋았을 것을 몇몇 조사에 참여하고 몇 가지 조언을 남기고는 다시 돌아가 버리는데 역시나 이 책은 “미로 시리즈”이지 “무라젠 시리즈”가 아니었음을 확인케 하는, 그래서 별도의 “무라젠 시리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그런 아쉬움이 느껴졌다. 두 번째 인물은 바로 미로의 옆 집에 살고 있는 게이 청년 “도모”를 꼽을 수 있겠다. 미로와는 남녀간의 “이성애(異性愛)”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숭고한 사랑이라는 “이웃애”를 나누는 이 청년, 외로워하는 미로를 보듬어 줄 만도 한데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미로 입장에서는 조금은 야속한 그런 남자라고 할 수 도 있겠다. 그래도 비록 육체적인 사랑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녀를 감싸 앉는, 성별을 떠나 동료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미로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미로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미로 시리즈에 도모가 등장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미로와 도모, 콤비로 활약해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을 그런 관계다. 물론 그의 성적 소수성은 개인적으로는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한 인상적인 장면을 꼽아보자면 우선 AV 제작사에서 미로가 강간당할 뻔한 장면이 떠오른다. 급박한 상황 임에도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상황을 당차게 알리는, 미로가 그저 연약한 여자가 아닌 “강단(剛斷)”있는 여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자신을 위험한 상황 - 물론 실제로 그러려는 것은 아니고 미로를 겁주려고 연출한 상황이지만 - 에 빠뜨리는 제작사 사장과 여러 차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친다면 가슴이 철렁하고 끔찍한 느낌만 들 텐 데 그와 그렇게 쉽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니, 요새 “나쁜 남자”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니 미로가 그에게서 위험하지만 끌릴 수 밖에 없는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여기려 해도, 또는 리나를 찾기 위한 결정적인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 즉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 이해가 되지 않은 그런 장면이었다. 역시 남자인 내가 모르는, 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을까? 두 번째 장면은 죽은 “와타나베”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이었다. 리나가 자신을 찾는다는 미로에게 한 일종의 “장난전화”인 셈인데 공포에 떨었던 미로처럼 나도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리나을 만나기 위해 간 병원 복도에서 만난 마지막 "반전"도 인상적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소개는 생략하기로 한다^^
두서없이 책 내용을 소개하다 보니 역시 장황한 감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얘기 다 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책 참 “재미있다”.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능력” 탐정이 등장하고, 수학 공식처럼 틀에 박힌 스토리와 억지스러운 반전에 식상한 분들이라면 오히려 “무라노 미로” 식의 현실적인 모습과 활약에 신선함을 느낄 것이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는 앞서 얘기한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시리즈의 완결편이라는 <다크>, 이 책, 이렇게 3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는데 그녀의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되어 주길 기대해보며, 작가가 “무라젠” 시리즈도 집필해 주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
|
'기리노 나쓰오'가 준비한 또 하나의 '도시락'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온갖 정성이 담긴 '도시락'에 비유한, '일본 하드보일러의 전설' 기리노 나쓰오의 또 다른 미스터리와 만난다. 지난 여름 '얼굴에 흩날리는 비'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녀와의 첫만남 이후 벌써 일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손에 들게된 두 권의 책. '무라노 미로'라는 여자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시리즈 중 '물의 잠, 재의 꿈'이란, 시리즈 외전으로 말해도 좋을 한 작품과 지금 손에 든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란 작품이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은, 잇시키 리나라는 이 여자를 찾는 일입니다.'
사설 탐정인 아버지 '무라노 젠조'의 피를 물려받은 무라노 미로의 두번째 임무는 사라진 AV 여배우를 찾는 일이다. '성인 비디오의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일하는 와타나베의 요청에 의해 사라진 그녀를 찾는 일을 맡게 된 미로,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녀는 탐정이란 이름이 약간은 어색하기만하다. 명색이 탐정이란 인물이 아직 변변한 차량 한대 없고, 아직까지도 미행과 잠복근무는 서툴러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탐정' 이란 존재가 가진 카리스마 보다는 초보 탐정의 느낄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소회(所懷)와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는 모습들이 조금은 야생적이랄까?
'언어의 야수' 라고도 불리는 기리노 나쓰오! 노오란 표지로 장식된 책을 열자마자 미로가 찾아야하는 여배우의 인터뷰장면과 연기인지 어떤지 모를, 그녀를 겁탈 강간하는 남자들로 뒤죽박죽된 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성인비디오와 연결된 프로덕션, 기획사, 여배우 잇시키 리나와 연기했던 배우들을 중심으로 사건에 한발짝 다가서는 미로. 하지만 그녀가 리나의 행방을 찾아 한발짝 다가갈 때마다, 그녀를 위협하는 세력들의 매서운 위협이 미로에게 한발짝씩 다가오고 있었다.
김본좌(金本座)를 아는가? 소위 말하는 야동지존? 김본좌가 예전에 잡혔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얼마전에는 그 말고도 300여명이 넘는 김본좌들이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는데... 예전 거침없이 하이킥이란 시트콤에서 한창 인기를 끌었던 야동 순재!라는 말처럼 이제 우리 주변에서 야동이란 말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수많은 성인비디오물들이 어느새 대한민국을 욕망의 도시로 전락시키고 만것이다.
'나도 요즘에야 깨달았는데, 성인비디오란 한마디로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거야' - P. 27 - '이런 비디오를 보는 사람들은 여자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가학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는, 같은 남자처지에서 수컷으로서의 남성이 거칠게 날뛰는 모습에 공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 P. 39 -
그렇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야동이 우리 사회 곳곳까지 파고든 이유는 무엇일까? 미로 아버지의 친구인 아오타와 동성애자인 도모베는 성인비디오의 같은 내용을 보고도 위와 같이 서로 다른 자신들의 느낌을 이야기한다. 남의 불행을 즐기거나, 욕망의 충족을 위해 거칠고 난폭한 행위에 대리만족 한다는 그들의 말속에서 서로 어감은 다르지만 뭔지모를 유사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을 벗어난 대리만족! 억압된 성(性), 가부장적이고 유교적 관념이 아직도 우세한 우리 사회의 그늘, 아마도 이런 것이 그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성문화와 욕망으로 얼룩진 사회를 만들어낸 이유가 아닐까?
'무라노 미로' 아직은 서툴고 부족함을 가진 탐정이기에 그녀에게 더욱 더 애착과 사랑이 느껴진다. 탐정소설속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경우 하나같이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직감을 가지고 전혀 예상 못한 사건들을 보란듯이 해결하는 능력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탐정이란 이름을 갖게된 그녀에게는 아직 많은 부분들이 부족해보인다. 하지만 조금더 인간적인, 탐정이란 이름의 옷에 조금씩 하나씩 맞추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조금더 따스한 시선으로 그녀의 발걸음을 주시하게 되는지도 모를일이다.
비채의 블랙 & 화이트 시리즈중 29번째 작품이기도 한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기존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표지가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품이다. 노란 바탕위에 빨간 외투를 입고 내달리는 듯한 소녀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표지가 조금은 감성적인 느낌을 전해주었다면 이 작품은 반복적이며 보다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잇시키 리나의 발걸음을 뒤쫓는 초보 탐정 무라노 미로, 표지속 그녀의 모습은 과연 누구의 모습일까?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누구에게나 그런 밤은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런 밤에 결국 눈물을 흘리는 건 여자야. 그러니까 말리지 마.' - P. 411 -
사건에 사건으로 이어져 쉴새없이 이야기를 몰고가는 스타일이 아닌 하나의 사건을 통해 조금은 차분하게 미로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이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에 다다를때까지 그다지 커다란 기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평범하게 읽고 지나쳤던 소재와 내용들이 마지막 즈음에 다다르면서 전혀 예상 못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때 독자들은 역시 기리노 나쓰오!라는 이름을 되뇌이게 만든다.
추악한 사회가 가진 수많은 어둠의 그림자와 폭력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간혹 읽는 이에게 두려움마져 내비치게 만들기도 한다. AV 시장의 불법적이고 야만적으로 행해지는 방식과 폭력, 야쿠자, 동성애, 청소년과 성,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그려지면서 시종일관 조금은 무거운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두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격인 '물의 잠, 재의 꿈'을 곧바로 만나보려 한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완결편 '다크'는 그 이후에 만나볼 계획이다.
어두움과 무거움, 인간과 사회의 추악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실적 묘사와 반전의 묘미가 낯설지않은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욕망이 아닌 따스함과 진실, 희망으로 달려가는 그녀들의 모습이 있어 토악질을 참아내며 그녀의 작품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일본 하드보일드의 전설이 창조해낸 무라노 미로라는 캐릭터와의 계속될 만남에 설레임이 이어진다. 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줄 그녀의 도시락이 맛있다! |
|
모든 일은 지나간 뒤에야 알 수 있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라 남겨진 추억만이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힌다. -p.30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잇는 '여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연달아 두 권이 출간되었다. <잔학기>, <그로테스크>, <아웃> 등으로 유명한 기리노 나쓰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녀를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가장 처음 만났다. 아버지 무라노 젠조와는 달리 탐정으로서 살아갈 생각이 없는 그녀였지만, 르포 라이터였던 친구의 실종사건에 휘말려들게 되며 본격적으로 탐정 생활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무라노 미로라는 그 이름은 아버지의 옛 동료였던 변호사 다와다로부터 주로 일거리를 받아왔던 모양이다.
마지막에 도미나가의 젊은 시절 사진이 나오며 그가 대히트시켰던 블루스가 흘러나왔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라는 곡이다. (중략)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와타나베와 나는 무언가를 캐낸 것이다. 아마도 공포라는 이름의 금광을. -p.77
그러던 어느 날, 미로는 한 AV 여배우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잇시키 리나라는 여배우를 찾아달라고 하는 미로의 의뢰인은 와타나베라는 '성인비디오의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로, 대다수의 AV 여배우들이 성적으로 비윤리적인 대우를 당하는 것을 고발하려는 여성이다. 언론을 통해서 자신의 운동을 알리려는 낌새가 있어 찜찜하지만, 미로는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그녀가 출연한 비디오를 추적하며 소속 프로덕션과 영화 제작사를 탐문해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로는 잇시키 리나를 둘러싼 환경과 과거에 다가가게 되는데...
신주쿠의 네온사인이 겨울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가야 할 곳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다. 욕망을 훤히 드러낸 남녀가 있는 거리로 걸음을 내딛는다. -p.242~243
이제서야 두 번째로 만난 기리노 나쓰오지만, 그녀의 글은 읽을 때 마다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기리노 나쓰오가 그려내는 세상의 모습은 밝고 아름답기는 커녕 한없이 쓸쓸하고, 무겁고, 어둡다. 폭력적인 레이프가 펼쳐지는 AV 속 연기와 그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형편없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비디오를 시청하는 사람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남자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거나 스스로를 자해하는 모습을 비디오에 담는 여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감독. 이런 '어둠'에 붙잡힌 이들은 폭력을 가하기도, 폭력에 시달리고 유린당하기도 한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들이다. 비록 1994년 작품이라 한들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폭력일 수도 있다. 그 어둠과 폭력을 기리노 나쓰오는 한 AV여배우의 실종과 그녀의 흔적을 찾아나선 미로로 그려냄으로써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의 제목처럼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무거운 시선을 보여줬다.
늘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잔혹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잖아. 이런 내용을 소설로 쓰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들 할걸? 현실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일인데. 안 그래? -p.161
그렇기에 분명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취향에 따라 호오가 확연히 나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없이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매일을 살아가고 있던 잇시키 리나의 절박함과, 그녀를 찾기 위해 어두운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 무라노 미로의 긴박함에 이끌려 작품 속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도심 속, 천사마저 외면하는 어두운 이면을 지켜보는 여탐정의 감성적인 시선이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마찬가지로 '무라노 미로'라는 여탐정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매력인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무언가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잇시키 리나도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믿었던 무언가에 배신당하고, 자신을 지켜주리라 생각한 거대한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그런 기분. -p.289~290?
노란 표지가 참 대조적이다. 기리노 나쓰오가 그려내고 있는 책 속의 세상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책을 처음 보고서는 노란색 바탕에 하늘을 향해 달려가는 한 여자아이의 뒷모습, 그리고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라는 우울한 제목 사이의 아이러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색깔의 대비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 노랑과 검정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책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확 하고 눈에 들어오는 까만 표지, 그리고 뒷표지에 외롭게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은 아마 화려함을 좇아 도시에 이르게 된 이들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놓여있는 어둠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화산 폭발로 다량의 화산재가 한꺼번에 발생했을 때, 때마침 극적으로 쏟아진 굵은 빗줄기는 화산재를 흡수해 화석을 만들기도 한다. 한때 내렸던 빗방울조차 대단한 우연으로 3백만 년 후까지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런 '빗방울 화석'을 내내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천사에게 버림받은 것만 같은 어떤 이에게 천사는 다시 미소 지을까? 기리노 나쓰오는 그 희망을 인공의 불빛으로 녹여낼 뿐이다. |
|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잇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제 2탄! AV 여배우 리나의 돌연한 실종!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과 야망!
탐정 무라노 미로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잇시키 리나라는 AV여배우를 찾아달라는 의뢰는 받는다. 의뢰인인 성인비디오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와타나베의 말로는 잇시키 리나가 출연한 성인 비디오가 인권유린에 위배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조사하던 중 돌연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무라노 미로는 기한인 2주동안 리나를 찾고 느긋하게 연말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리나의 행방을 쫓을수록 예상치 못한 잔혹한 진실과 맞닥뜨린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매력적인 여탐정 무라노 미로가 돌아왔다! 아주 상큼한 노란빛의 표지에 빨간색이 어우러져 밝은 이야기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뒷표지는 역시 기리노 나쓰오의 책 답게 검은 색표지다. 보이는 모습은 밝고, 그 뒷면은 어두운 게 눈썰미 있으신 독자라면 혹 사회파 미스터리가 아닐까 짐작할 수도 있겠다 싶다.
작가 특유의 어둡고 약간은 충격스러운 분위기가 역시 첫 장부터 잘 드러나 있다. 잇시키 리나의 성인 비디오 촬영장면 부터 시작해서 그 비디오가 어째서 인권유린에 위배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 역시 첫장부터 쎄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근데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이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하시라. 아무튼 이 사라져버린 여배우 리나의 행방을 찾는것이 중요한 문제. 이미 은퇴한 아버지의 도움도 받고 이리저리 수소문한 결과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드러난 충격적인 진실을 만나게 된다.
400p 분량에 성인비디오, 야쿠자,동성애,미혼모, 청소년문제 등 사회 깊숙히 파고들어버린 어두운 이면을 다 담아놓은 책도 드물것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런 민감하고 어려운 주제들을 한데 모아 재활용시킨 듯 이렇게 훌륭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내 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뭉뚱그려 한 듯 안 한듯 발만 담근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그려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직설적임이 싫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동안 쭉 기리노 나쓰오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아마 나와 똑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한가지 주목했던 건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미로를 도와주는 옆집의 도모씨가 바로 동성애자인데, 미로마저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매력적인 남자이다. 전 부터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였지만 왠지 이 책에서 그린 동성애에 대한 생각은 좀 흐뭇해지는 뭔가가 있다고 할까. 결혼 생활 도중 자신이 동성애 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도모씨도 그렇지만, 그의 동성애를 존중해주고 서로 '이웃애'를 다져가는 미로와의 관계가 너무 보기 좋았다. 마치 이 장면들은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속에서 묘하게 밝은 노란색을 띄던 장면들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아웃'을 읽었을 때도 말했던 것 같지만 이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밝은 분위기의 이야기로 덮어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또한 그렇다. 근데 왠지 이번엔 좀 그 여운을 즐기고 싶은 기분이다. 어두웠지만 묘하게 밝은 부분도 있었고, 좀 쉬었다 읽고 싶을 만큼 대담하고 직설적인 부분 또한 많았지만, 나는 모르고 있지만 이미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었기에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그들의 불행에 내가 잊고 있던 평범함이라는 행복을 새삼 느껴볼 수도 있었고,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불행을 나눌 수도 있었다. 이 작가의 책을 읽으면 정말이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저 밑바닥까지 끌고내려가 보여주는 어두운 면들 때문이겠지만 정신없이 끌려내려가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수면위로 올라와 정신없어 하는 모습이랄까.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다. 역시 기리노 나쓰오다! 이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