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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하면 어린 시절 집 앞에서 만들었던 눈사람이 생각난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집집마다 연탄을 부셔서 뿌리곤 했는데 눈이 오는 날엔 그 연탄이 부서지기 전, 연탄을 중심으로 눈을 굴린다. 내 키만큼 눈을 굴리면 공처럼 큰 원이 되는데 그게 바로 눈사람의 아랫부분이 된다. 작은 키로 동생과 그걸 굴리고 있으면 내가 굴러가는지 눈이 굴러가는지 모르게 된다. 그렇게 굴린 두 개의 눈덩이중 하나를 올리면 눈사람이 되는데 그걸 꼭 집 앞 대문 앞에 만들어 놔서 엄마를 놀라게 하곤 했다. 다양한 형태로 얼굴을 만들고 즐거워했던 그때. 그때는 눈이 온다는 것 자체를 신비하고 아름답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눈이 싫다. 저 눈에 혹 누가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은 게 틀림없다. 그런 ‘눈’을 가지고 7명의 여류 작가가 소설집을 만들었다. 지난번 테마는 ‘비’였는데 이번 테마는 ‘눈’이다. 눈과 비. 사실 둘 다 너무 싫지만 그걸 소재로 하는 건 묘한 분위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서유미의 「스노우맨」은 많은 눈이 내려 출근하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다. 빌라의 현관문이 열리지 않자 출근하기를 포기했는데 회사에선 남자에게 말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출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출근하기로 결심한 남자는 눈을 치우며 출근 전쟁을 벌이지만 그 속에서 같은 직장 동료의 시신과 만나게 되는데... 구경미의 「첩첩」은 ‘눈’을 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에 떨어져 살던 아들과 딸이 모여 들고 그곳에서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조해진의 「하카타轉多 역에는 눈이 내리고」는 어린 시절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한 엄마의 부음을 받고 규슈에 간 여자가 옛사랑 H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엄마와 유부남 H를 떠올리며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 해 나간다. 김이은의 「첫눈과 소원과 백일몽 사이에 숨겨진 잔인한 변증법」는 구두 매장에서 일하는 여자가 우연히 여배우 미르의 다이어리를 줍게 되면서 그곳에 적혀 있는 양진의 주소를 찾아가며 시작된다. 그곳에서 미르의 애인과 밥을 먹고 일상의 행복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데.. 김현영의 「눈의 물」은 안나와 나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다시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펼쳐 나간다. 박주영의 「소설 小說 小雪」은 비행기에서 만난 두 사람이 소설가를 죽일 가상의 계획을 세우는데 그게 나중에 진짜 현실이 되는 것을 이야기 한다. 김유진의 「눈 위의 발자국」은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눈길에 발자국을 내는 것이 떨리면서 두렵듯 사회 초년생의 하루도 그렇지 않을까? 단편들이라 제대로 이해했는지 생각이 많았다. 눈을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다만 ‘눈’ 하면 서정적이고 아름답고, 포근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실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소름끼친다. 7편의 단편 중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스노우맨’이었다. ‘갑’과 ‘을’이라는 관계가 이런 환경 속에서 제 빛을 발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할까? 눈이 많이 내려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회사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하루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렇지 않다. 회사에 오지 않은 남자를 능력 없고 융통성 없는 것으로 간주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남자는 회사로 향한다. 회사로 가는 도중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남자와 유능했던 대리만 빼면 모두 출근했다고.. 하지만 회사로 가는 길에 남자는 유능했던 대리의 죽음을 본다. 눈과 함께 박제가 되어 버린 듯한 그 사람의 몸을. 회사라는 거대 권력. 마음대로 쉬지 못하고 일만하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렇게 일을 하고 난 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는지... 포근하고 따스할 것 같은 눈의 이면은 때론 잔인하고 무섭다. 고요함 속에 함께 하는 진중한 무거움이란. ‘사랑해 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따스하고 행복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내릴 때의 눈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내리고 난 후 지저분한 눈의 대비처럼 우리네 인생 역시 그런 모습을 닮아 있어 허허롭다. 누구에게나 따스한 눈이라면 참 좋을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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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도 분명, 지리한 장마가 올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지, 얼마나 더울지, 얼마나 많은 밤을 열대야와 싸워야 할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여름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받아들이기 편할지 모르겠다. 한 번쯤 새하얀 눈이 가득한 여름을 상상한다면 더위가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눈이 내리는 듯하다. 주목받는 젊은 여성 작가 7인이 (구경미, 김유진, 김이은, 김현영, 박주영, 서유미, 조해진) 눈을 테마로 쓴 소설집 『사랑해, 눈』을 읽는 것도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고 즐겁게 지내는 방법은 아닐까.
새해 첫 출근길, 폭설로 인해 사회로부터 고립될까 두려운 한 남자의 심리를 잘 표현한 담은 서유미의 <스노우맨>과 병색이 짙은 아버지가 눈이 보고 싶다며 자식들을 대동해 눈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구경미의 <첩첩>은 평범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다. 눈 때문에 여행을 떠나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든 이들에게 눈은 소중한 의미로 남을 것이다. 반면 눈 덮인 세상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눈은 거대한 세상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뚫고 나가야 할 삶 말이다.
‘팔을 움직이면서 흘린 땀 때문에 셔츠가, 허리까지 쌓인 눈 때문에 구두와 바지, 속옷이 다 젖었다. 남자의 삽은 점점 느려졌고 눈이 쌓인 길은 끝이 없어 보였다. 삽을 쥐었던 손바닥엔 어느새 물집이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파고 온 길이 삐뚤빼뚤 꼬리처럼 이어져 있었다. 앞아 아니라 옆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지저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삽으로 퍼낸 눈 뭉치들이 원래의 자리로 굴러떨어졌다.’ p.25 - 스노우 맨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 30년 만에 유골 상자로 만나는 엄마와 눈처럼 녹아 없어질 걸 알면서 시작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조해진의 <하카타轉多 역에는 눈이 내리고>은 쌓였다 하더라도 금세 녹아 사라지는 눈을 떠올렸다. 소복하게 쌓인 아름다움이 금세 걱정으로 변하는 눈처럼 아픈 딸을 혼자 키우는 직장 선배를 향해 시작된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은 눈이 녹기 전까지 짧았다. 엄마의 인생과 딸의 사랑은 나약하고 슬픈 눈 같았다.
제목에 담긴 것들을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김이은의 <첫눈과 소원과 백일몽 사이에 숨겨진 잔인한 변증법>과 박주영의 <소설 小說 小雪>은 신선한 재미가 가득했다. 첫눈에 담긴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김현영의 <눈의 물>은 몽환적이며, 무료하듯 반복되는 일상을 섬세하고 잔잔하게 묘사한 김유진의 <눈 위의 발자국>은 한 폭의 부드러운 풍경화을 보는 듯하다.
눈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높은 곳에서 찬 공기를 만나 식어서 엉기어 땅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인 비와 다르게 대기 중의 수중기가 찬 기운을 만난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다. 얼어야만 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에게 사계절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비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많은 이가 첫 눈을 기다리지만 첫 비를 기다리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눈이라는 테마는 같았지만 각 단편들은 작가의 개성을 보여주듯 다양했다. 일곱가지 눈 이야기는 모두 흥미로웠다.
어떤 소설은 마치 동화 『눈의 여왕』에 초대된 느낌이었고, 어떤 소설은 이게 눈인가 싶을 정도로 진눈깨비 같았고, 어떤 소설은 눈이 내려 쌓여가는 과정을 담은 듯 느껴졌다. 눈이 가진 아름다움, 눈이 가진 폭력성, 눈이 가진 여러 성질과 느낌들을 잘 살려낸 소설들이다.
‘올해의 첫눈이 오늘, 내렸으니까. 몇 년째 애인인지 이제는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오늘 너의 그녀는 오늘 너의 사랑. 그러니 첫눈은 당연히 그녀의 것이지. 그녀와 너의 것이지. 7년 전의 그 봄날. 봄이었는데, 화사한 봄날이어야 마땅한데, 때아닌 폭설이 쏟아졌어. 지금까지도 거기 갇혀 잇는 내게 첫눈이란, 그래, 네 말대로야. 물에 물 타기, 눈 위에 눈. 그래봤자 눈. 겨우, 고작, 눈.’ p.182 - 눈의 물
누군가는 벌써부터 첫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봉숭아 물을 곱게 들인 손톱을 깍지 못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눈이 오기를 간절하게 소망할 것이다. 결국은 ‘물에 물 타기, 눈 위에 눈. 그래봤자 눈. 겨우, 고작, 눈’ 인데 말이다. 나 역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 한 여름에 내리는 사랑스런 눈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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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나왔던 테마소설 "비"를 읽고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엎어지지 않고 "눈"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일찌감치 나와 준 테마소설 "눈". "비"에서 강박적으로 우울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눈"에서만큼은 펄펄 날아오르는 상상력을 기대했다. 혹은, 펑펑 내리는 눈송이를 입을 크게 벌리고 혓바닥으로 받아 먹을때같은 시원함도. 그런데...역시나 "눈"은 달랐다. 도시에서 내리는 눈은 그 결정체가 온갖 오염물질로 속이 꽌찬 느낌마저 들었고, 받아먹었다간 당장에 기준치에 초과하는 방사성 물질마저 검출 될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냐고? "눈"은 순수하지도 청량하지도 않았다. 매연 가득한 희뿌연 회색빛 하늘에 내리는 도시의 눈을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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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에서 이전에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를 재미있게 읽은 바 있는데, 그 책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