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리스 레싱은 <런던 스케치>를 통해서 각계각층의 런던 사람들의 삶을 모자이크화 하는 방식으로 불협화음 같은 래퍼토리를 한편의 내러티브로 통일화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퍼즐의 조각들이지만 마치 성당의 그림처럼 각 퍼즐간의 일련의 규칙성이 내제하는 것 처럼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불협화음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바로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을 통해서 현대대인들의 삶과 일상 그리고 그 족적들을 엿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토머스와 토니부부를 중심으로 토머스 형제 그리고 부모의 일상적인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뿐 각각 구성원에 관한 이야기가 액자구조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딱히 그런 스트럭쳐라고 지칭하기도 힘든 한마디로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토머스-토니부부 2)하워드-클로디어부부 3)레오-수지 부부 4)토니의 시부모 5)올가-스페판커플 이렇게 5가지 큰틀속에서 각각의 래파토리가 전개되고 시간의 흐름속에 일련의 순서와 무관하게 각각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이 전개된다. 하지만 액자소설의 전형적인 구조처럼 각각의 내러티브와 더불어 전체적인 하모니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니크하게 다가온다. 물론 중심에는 남편과 아내의 역활을 바꿔서 생활하는 토머스-토니부부가 놓여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 부부의 내러티브가 중심으로 부각되지도 않는다. 마치 음악회 시작전에 화음이나 역활분담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맡은 음율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의 악단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게 전해진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대로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관악기는 관악기대로 자기 본연의 音만 확인하겠다는 듯이 청객의 귀는 뒷전으로 사정없이 불어대는 음악회 시작전의 그런 분위기이다. 처음 음악회를 접하면서 그래도 내심 한번쯤은 상호간의 화음을 조율해보는 리허설 비슷한 것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지게 한다.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토머스-토니부부의 역활분담에서 기인한 첫 스타트가 왠지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고 다른 화음들(하워드-클로디어부부등)의 등장으로 뭔가 내러티브의 반전 내지는 작은 충격이나마 존재할 것 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면서 책장을 따라 눈길을 진행시키 보지만 이들 악기(등장인물들)들은 정말 자기만의 음만을 보여줄뿐 더이상의 발전된 화음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럴 의사 역시 없어 보일 뿐이다.(이는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엿보인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 처럼 말이다) 토머스와 클라라 엄마 헬런의 부분도 그렇고 토머스의 피아노 선생 동성커플의 경우도 그렇고 뭔가 다른 전개감을 기대하지만 작가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시종 일관한다. 마치 그 부분의 내러티브는 독자들이 알아서 적당하게 맞는 화음으로 조율해 보라는 듯이... (일면 상당히 무책임한 뉘양스를 남기면서...) 전체적으로 뭔가 더 있을것 만 같은 아니 꼭 있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작가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심지어 음악회가 끝나고 러브콜을 받는 지휘자의 작은 즐거움마저 가져가 버린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문외한인 나 같은 경우 상당히 곤욕스러운 읽을거리를 접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딱히 명확한(최소한의 기준으로 보아도)내러티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각의 악기들이 발현하는 음의 특색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뭐 여기까지도 대충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스트럭쳐나 내러티브 확정성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회 시작전의 불협화음의 시간속에 어쩔수 모르는 불안감의 연속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명확한 정리가 되질 않고 계속 가물거릴 뿐이다. 마치 큰 숲을 통과해서 나왔지만 정작 그 숲에 대한 생각보다 소나무 가지가 걸친 피걸러위의 햇살의 묘사나 마당으로 넘어오는 벚나무 가지를 통한 내면의 심리적 묘사를 하는 부분등의 상당히 시크한 일련의 문장과 단어들이 뇌리에 더 깊게 각인 되어버리고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둘로싼 전체에 대한 특징적인 기억의 끄나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마치 작가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끌어가는 변주곡에 자연스럽게 넘어간 느낌처럼 말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이란 특정한 유명 정치인, 유명 연예인들의 삶이 하나의 표본이 되고 또 그렇게 인지되도록 매스미디어는 은근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마치 나 자신의 삶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보여지는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고 또 그럴려고 열심히 노력아닌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것이 진정한 나의 삶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도 없고 찾을 필요성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아니 정확하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토머스-토니부부를 비롯하여 등장하는 커플들의 삶, 부부나 커플의 공통적인 삶, 그리고 각각 개인들의 삶은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주목받지 않는 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있지만 이러한 불협화음같은 삶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변주곡을 형성하듯이 우리네 인생 역시 별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뭐 특별할 것도 없고 튀는 음정이나 박자가 다소 있더라도 결국 거대한 관현악곡에 묻혀서 표시나지 않게 흘러가는 음악회처럼 보여진다. 음악회가 끝나고 난 뒤 뜨거운 감흥보다는 오히려 허전함이 더 크게 남는 현실을 반영한 듯 하여 자뭇 씁슬한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
|
모든 과정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오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레이첼 커스크의 <브래도쇼 가족 변주곡>은 그 엇박자의 과정을 가족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토마스와 토니 외에도 브래드쇼 가족의 일상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쉽사리 가까워지기 힘든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보여준 이탈이 내겐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완전한 화음이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딘가 불규칙적인 신호, 나는 가족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책 속에선 브래드쇼 가족의 일상을 천천히 그린다. 그 중에 더러는 공감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손녀가 타산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아이에게 바랐던 순수성을 이젠 채우지 못해서 기분이 상하는 것을 보는 것이나,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지극히 내 취향에 맞지 않아 읽는데 어려움도 많았다. 가족의 일상을 꼼꼼히 파헤치는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엔 커다란 서사는 없다. 사실 큰 사건이나,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차분하게 일상을 파헤치고, 그 속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것을 통해 가족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랜 내 고민의 근원인 ‘가족’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내 감정에 대해서 공감해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게 가족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완전한 타인보다도 때때론 더 타인에 근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절망이었다. 나는 나와 똑같은 감정을 브래드쇼 가족을 통해서 확인했다. 이들은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행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엔 이해를 통한 오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한다.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이 서로를 향한 채 말없이 겨누고 있다. 그것을 그냥 오롯이 편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가족을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직 그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는 브래드쇼 가족을 보면서 내가 진정 원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PS. 읽기 힘들었다.
|
|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가족이라는 ‘화목’ 연극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의 번복되는 멜로디, 그리고 드러나는 실재- 끊임없이 상승하는 카논 바흐는 황제를 위해 같은 멜로디로 번복되는, 끊임없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카논을 만들었다. 어떤 성부가 더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봤자 이 멜로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브래드쇼 가족은 하나의 곡을 이루고 있다. 토머스가 말한 대로 그의 형인 하워드가 장조라면 레오는 단조. 그리고 토머스는 부엌에 머무르면서 집안을 살펴보는, 무게중심을 잡는 통주저음(낮은 음으로 곡 전체의 균형을 잡음)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연 이 멜로디는 진짜인가? 직장인인 토머스와 주부였던 토니가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을 때도 멜로디는 둘의 위치가 바뀐 것 뿐,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듯이 흘러간다. 이들은 바뀐 후나 전이나 조화로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멜로디를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토머스는 계속 '진짜'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진짜'처럼 보이는 것들을 질투한다. 예술은 무엇이고, 진짜 행복이란 건 무엇인가? 예술은 그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는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이그네이셔스와 벤자민의 '추억'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이해의 간극으로 그가 인식하는 현실과 실재 간의 차이를 느낀다. 그는 이그네이셔스와 벤자민은 '진짜 예술가'이고 자신은 '예술가'가 아닌, 진보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보이고, 진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다다이즘과 팝아트, 온갖 초현실주의 미술들이 현실을 앞질러 미래를 뛰어간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고장이 났거나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의 사용설명서를 모두 찾아내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 그것이 진보라면 진보는 너무 쓸쓸한 것이다. 예술은 그 때문에 진보와 멀리 떨어져 있다. 예술은 고장이 났거나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할 물건들을 내보인다. 이 물건들은 곧 '진보'라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주는, 실재다. 토머스는 '예술은 자신을 스쳐지나갈 뿐'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예술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다. 그러면서 그에게 '진보'가 사실은 쳇바퀴 안에서 계속 뛰어가는 것임을, 같은 멜로디 안에서 번복될 뿐인 생을 상기시켜 준다. 카논은 멜로디를 번복하며 끊임없이 상승한다. 소설에서 카논은 '일반적인 역할 분담'을 논하면서, 전업 남편과 전업 아내를 주장하면서 상승한다. 이에는 긴장감마저 감돈다. 그들은 스스로의 역할 분담에 충실하게 임하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행복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일 뿐이다. 만약 이 소설이 행복하게 끝났다면, 이 소설은 흔한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허나 레이철 커크스는 행복에서 멈추지 않았다.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 금지된 것에 우리는 다가가고 싶어하지만, 다가가는 순간 해를 입게 된다. 금지된 것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한에서 존재할 뿐이다. 실재로 금지라고 붙은 상자를 열어봤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우리가 기대한 것 이하의 물건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욕망을 품었던 자는 절망하게 된다. 토머스는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예술의 실재는 너무 잔인했고, 토니는 공적인 일에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욕망은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찬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만족하는 척' 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뤘기 때문에, 차차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뜨거운 음식을 먹다가 찬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잠깐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자리를 바꾸고 온전한 구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자리의 어두운 면까지도 포옹할 줄 알아야 한다. 토니는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면서 그가 부디, 그녀가 출장을 가서 이 낯선 호텔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이해해주길 바라지만 토머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의 불가능성, 이 어두운 면을, 토니는 인지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남편은 그녀가 겪은 곤경 중 어느 부분에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절대로 그에게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이야기를 하자면 이름이 없는 무엇,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것이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라는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어떤 것에 관한 욕망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자체가 남편의 반응이 필요한데, 토머스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 어쩌면 남편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86 결국 그들은 최대한 힘을 짜내서, 이 연극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연극은 막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대에 나가 있는 이상, 배우들은 서로의 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서로가 쓴 가면을 보면서 그들의 감정을 얼추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파열선이 생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인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Crack-up)'에서 '그가 40대의 만찬 때 마주 하리라고 생각했던 요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현실에서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뒤를 돌아보아도, 둥그런 원처럼 원만해 보였던 자신의 일상은 어느새 파열되어 있었고 어디서부터 그 파열이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머스와 토니, 하워드와 클로디어, 레오와 수지, 스완 부부와 브래드쇼 부부는 애써 그 파열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토머스와 토니는 더더욱, 그들이 위치를 바꾼 만큼 생은 훨씬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 되어야만 하고, 이 '진보'는 좋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토머스는 깨닫는다. '진보'는 좋은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들이 품은 환상과 실재가 얼마나 다른지.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딸 알렉사가 아팠을 때 그들은 그 간극을 역력하게 본다. 하지만 그 파열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들은 처음으로 온전하게 되돌아갈 수 없다. 알렉사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가 다시 들리게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이는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하워드와 클로디어 부부의 경우에도 그들은 조화로워 보이고, 점점 성장해 가는 아이들과 귀여운 애완견 스키틀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갈등을 안에 품고 있다. 그들의 미래라고 볼 수 있는 브래드쇼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클로디어는 '하워드'의 활동공간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 깨닫는다.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보면서. 하워드는 자신의 폐에 생긴 게 암이 아니라 그냥 푹 쉬면 낫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삶의 굴레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키틀의 죽음으로, 그들의 멜로디에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이 불협화음은 지나간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진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결국 클로디어와 하워드는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알면서도, 이 연극을 계속 해나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앞'으로 굴러나가기 위해서.
아이즈 와이드 셧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그들은 연극을 계속 해나간다. 올가는 '살아가는 척'을 하는 토니와 토머스의 방을 보면서 역겨움을 느낀다. 누가 자고 일어났다는 것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어지럽혀진 방 안. 하지만 토머스의 '사적인 속옷'만은 깨끗하게 접혀 있다. 이는 '깨끗한 방 안'을 역으로 뒤집은, '더러운 방'으로 그들이 '바쁘게 살고 있다'는 무대를 보여준다. 하지만 토니와 토머스, 그리고 브래드 쇼 가족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 토니에게 작업을 거는 카슨마저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역할을 규정짓지 못한다면 연극 배우는 배우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토니의 어머니는 토니를 앤토니어라고 부르며, 그녀의 위치가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전업 아내'로, 토머스는 '전업 남편'으로. 레이철 커크스는 '현실'을 그리면서, 그 현실 내에서도 엄격하게 나뉘어지는 연극 속 역할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역할명'과 '연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연극에서는 정해진 상황과 정해진 대사가 있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연극 전체가 깨져버리고 만다. 실제로 알렉사가 하워드의 집에서 다쳤을 때, 토니는 그저 검은 옷을 입었을 뿐인데 마치 모든 죄를 사해줄 것 같은 '신부'의 역할을 맡고 하워드와 클로디어는 그 신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해 바치는 고해자가 된다. 이는 그들의 화해를 뜻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이 모든 죄를 저질렀다는 것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인에게 죄를 회개해 달라고 말하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가려 놓는 것이다. 토니는 이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그런 덫에 빠져 있다. 그녀도 토머스에게 이상적인 역할을 씌워 놓았다. 클레어를 잊지 못하고, 절대적이고 위대한 사랑을 하던.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 허나 그는 클레어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토니는 당혹스러워 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토머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토머스는 묻는다. '그러면 진짜 답이 뭐였을까'라고. 어떤 답도 진짜 답이 될 수는 없다. 수지와 레오는 집안의 눈치를 보며, 브래드쇼 부부가 '소고기'를 준비해 두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채식주의자라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그리고 딸 매들렌이 '수지'가 속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그녀가 담배까지 피웠다는 것을 말하자 재빨리 드러난 진실을 감추고자 한다. '교육을 잘 받아서' 입을 잘 다무는 알렉사를 '착하고 얌전한 아이'라고 말하면서. 매들렌과 알렉사, 아이들은 감추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하려고 한다. 그럴수록 어른들, 이 연극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불쾌함을 느낀다. 스완 부부 또한 알렉사가 이 연극에서 '제때'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낀다. 클로디어 또한 자신의 예술을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제대로 된 예술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하워드'의 탓으로 돌린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중에 커크스는 노골적으로 극본 형식을 사용해 클로디어와 하워드의 분쟁을 연극 대사로 보여준다. 이 대사들은 엇갈리고 부딪친다. 나중에 클로디어는 하워드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고, 하워드는 클로디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토니와 토머스는 그들의 딸인 '알렉사'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한다. 어느 쪽으로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자기가 잡은 쪽을 잡아당긴다. 솔로몬의 공정한 판결은 이 곳에서 어떤 효력도 이루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 알렉사가 병원으로 실려간 순간에서야 '아이'에 대한 생각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클로디어는 로티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티가 벗어 놓고 나간 '코트'를 로티처럼 여긴다. 코트는 그나마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녀가 직접 먼지를 털어 주는 등 보살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티는 스스럼없이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난다. 이상한 치마를 입고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 클로디어는 그녀의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학생들의 팔과 다리와 웃음이 모두 하나로 뒤범벅이 된 것만 같다. 모두 가방을 들고, 팔찌와 귀걸이를 하고,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까지 하나로 뒤섞여 누구 머리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그중 한 명이 그녀의 시선을 끈다. 클로디어는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로티를 알아본다. 187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외도를 고백한다. 남편은 이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벽해 보였던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빈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는 남편에게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자'고, 섹스하러 가자고 말한다. 완벽한 생활을 위해서 이들은 진짜 속내를 덮어버렸다. 레오는 새로운 코트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춘다. 그는 '지난 해에 입었던 코트'를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코트로 새롭게 그 자신을 위장한다. 그는 연극조로 말하는 여자와 남자를 경멸하지만, 그 또한 한 명의 훌륭한 연극 배우일 뿐이다. 토머스는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는다. 그는 아내가 전화를 꺼놓은 동안 그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또한 한 때나마 그런 유혹에 넘어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관심있게 바라보는 시선을 등지고, 다른 곳을 쳐다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가족의 시작과 끝은 유사하나,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다. 원래 있던 진실을 취소시키는 순간, 그들은 깨닫게 된다. 가족이라는 원 안에 어떤 파열선이 생겨났는지를. 그리고 그 파열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은 가족 소설들처럼 화합이란 불가능하고, 그저 재빨리 다른 장막으로 가리는 수밖에는 없다. 냉정하게, 곡이 끝나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맞춰 허겁지겁 박수를 칠 수밖에 없듯이. 가끔 저녁에, 둘은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고, 그때마다 토머스는 그 눈에 죄책감이 가득한 것을 본다. 그런 표정은 우연한 것이었다. 그저 어쩌다 눈이 마주치고, 놀라고, 순간 무언가가 들통난다. 둘 사이의 새로운 어떤 단절, 마치 맨 처음 눈이 마주친 낯선 사람들처럼, 그건 경험에서 오는 죄의식, 오직 낯선 사람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각자 무엇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지는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298 |
|
‘예술이란 뭘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진행될수록, 우리 인생과 환치되어 ‘우리 삶은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어떤 것이 꾸민 것인지 말하기는 쉽지만, 진짜가 뭔지 말하는 건 어렵다’는 작가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마주한 현실 역시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과 살아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가족을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만큼 편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쉽게 가족을 배제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브래드쇼 가족은 각각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토머스, 토니 부부가 그렇다. 그들은 서로 역할을 바꾸어 보면서 각자가 바라던 자아를 성취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위태롭고 권태롭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는 정해져 있고, 그 자리가 영원하다는 느낌. 음악 같다고, 토머스는 생각한다. 뭐든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신 이외의 것은 될 수 없는 음악. 손을 아내의 무릎에 내려놓는다. 남은 길을 달리는 동안 그는 더 이상 말이 없다. p55 늘 그렇다. 가족들이 다 모인 이런 곳에선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가,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정말 자신의 감정은 전혀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p77 대화가 끝이 나기도 전에 멈춰 버리는 것 같다. 똑같은 카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해결된 것 없는 상태에서 엄마와 아빠는 돌아선다, 마주치지 않는 두 사람처럼. p229 특별한 사건 없이 진행되는 브래드쇼 가족의 이야기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우리 현실과 사실적으로 닮아있기 때문에 가끔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브래드쇼 가족이 현실에 놓인 시점과 각각의 상황을 읽는 시점사이의 간극 덕분에 더욱 입체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동감할 수 있다. 또한 음악과 인생, 삶의 비유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
|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지만 왠지 낯선 타인처럼 느껴지며 그들의 일상이 나에게는 낯선 감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속의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친숙하거나 친밀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보다 가족들과 한걸음 떨어져 남을 바라보듯 가족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모습에서 왠지 가족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나에게는 낯설며 즐겁지 않게 다가왔다.
가끔 뉴스나 기타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남편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듣고 본적이 있다. 우리네 고정관념은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에서 가족들을 잘 보듬으며 감싸는 역활을 맡아왔는데 어느새 이런 관계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의 토머스는 자신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딸과 집안 일을 맡기로 한다. 아내 토니는 남편 토머스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던 학과장이란 직책에 관심을 갖고 되고 승진하게 된다. 토머스 부부의 일상의 모습은 일반 가정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편 대신 아내가 직장에 출근할 뿐이다. 토머스의 선택에 브래드쇼 가족들은 환영하는 사람이 없다. 친딸 토니의 승진으로 토머스가 회사를 그만두웠는데도 장모님은 탐탁치 않게 여긴다.
토머스의 형 하워드는 자신을 희생하는 아내 클로디어로 인해 집안이 원만하게 돌아간다. 하워드는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는 예기치 않는 투자와 사업추진을 항상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형의 모습이 토머스는 오히려 불편하게 느끼고 있다. 클로디어는 자신이 포기했던 미술에 대한 꿈으로 인해 항상 만족하지 못한 충족감에 허기지고 힘들어하지만 이런 그녀의 마음을 남편은 교묘히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솜씨를 발휘한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토니에게 다가오는 유혹의 손길.. 낯선 남자의 손길은 그녀를 흥분시키며 오히려 남편에 대한 반항심을 일으킨다. 토머스의 전 연인에 대한 질문을 하는 토니.. 그녀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잡아줄 남편의 따뜻하고 든든한 말과 손길이 필요하지만 토머스는 이런 아내의 마음을 이해도 눈치도 채지 못한다.
토머스가 피아노를 배우며 연주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관심을 가졌던 딸아이의 친구엄마에게 느끼는 친밀한 감정도 아이를 학교를 보내고 교문 앞에서 반아이 엄마들과 나누는 인사의 말정도지만 그는 아내와 경쟁하듯 사람들과의 친밀한 감정에 관심을 가진다.
딸아이의 병을 알아채지 못하는 토머스로 인해 결국 한쪽 청력을 잃게 되는 딸로 인해 토니와 토마스는 자신들이 맡아왔던 역활을 그만두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남편과 딸이 나누는 친밀한 유대감에 불편을 느끼던 토니나 아버지의 독단적인 완고함에 자신을 묻어버린 어미니의 모습속에서 토머스는 상처입은 여자들에 대한 친밀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이 있다. 자신의 기준에서 정형화된 모습들로 인해 가끔은 더 상처받고 더 괴로워하기도 한다. 같이 자라는 형제나, 자매 사이에서도 나름의 안보이는 경쟁과 함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브래드쇼 가족이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낯설고 즐겁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 모습이 주는 진실성을 보게 된다. 간혹 우리도 일탈을 꿈꾼다. 허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도 결국은 가족이란 든든한 울타리가 허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가족들의 진솔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가족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이 보여주는 체념과 현실부정,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이 오히려 더 행복해 보인다.
|
|
가족은 인간이 만든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다. 본래 말 그대로 맨몸으로 태어나는 인간에게 가족은 최고의 보험이다. 동물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새끼를 버리기도 하며, 어미를 잡아먹기도 하는 등, 자라난 뒤에는 완전한 객체로 살아가는데 반해, 가족은 가족의 가족으로 이어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조건 없는 애정, 신뢰, 용서를 무한정 제공한다. 하지만, '가족'의 필요조건은 역시 조건없는 충성과 희생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가족 구성원은 서로에게 애정, 신뢰, 용서와 더불어 충성과 희생까지 바란다.
레이첼 커스크의 문체는 아주 직설적이다 못해 자극적이다. 마치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실에서 으스스한 몰골로 자리한 신체해부도처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따뜻한 이미지를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제목에서부터 거창하게 브래드쇼 가를 말하듯 이 이야기에는 브래드쇼의 3대가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소통은 기대에 대해 부응하는가, 배반하는가 가족제도는 냉정한 사회속에서 조금의 온기라도 느끼게 해주는 최고의 보험이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충성과 희생에의 강요는 가족 구성원들을 피곤하게 하기도 한다. 그들은 각기 저마다의 피곤과 부담을 안고 있으며, 그것은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야기의 큰 줄기를 담당하는 토머스와 토니는 서로의 말과 행동에 대해 배반을 일삼는다. 상대방의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지만 기대에 부응시켜주지 않는다. 곧, 배반이다. 유리벽면에서 그대로 튕겨나오는 그들의 말들은 쌓이고 쌓여 이제는 더 두터운 벽을 만들고 있다. 토머스와 토니는 급기야 자신들의 역할을 바꾸고 서로의 자아실현을 위해 매진한다. 토머스는 그동안 사회생활에 치여 잊혀진 예술과 육아에, 토니는 사회로서의 명예와 인정에.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는 서로의 자아실현이 아닌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브래드쇼 가족들의 변주곡 커스크는 이러한 토머스와 토니의 역할변경, 다른 브래드쇼가족들의 일탈을 음악에 비유하여 변주곡으로 표현하였다. 변주곡은 변주의 기본이 되는 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다가 결국에는 보통 원래의 주제로 마무리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어느새 유물과 같이 오래된 제도 '가족'. 요즘 가족해체와 위기에 대한 다양한 이슈들이 쏟아지고 불안이 더해지는데, 서로의 기대를 배반하고 무조건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애증을 갖기도하는 브래드쇼가족의 모습을 혹 콩가루라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명절만 되면 가족다툼이 불거지기 일쑤고 이혼률이 늘어가는 마당에 조금 시끄럽더라도 살부딪치며 살아가는 브래드쇼 가족은 그래도 하나의 변주곡은 될 수 있다. 어쨌거나 한 묶음의 음악으로 연결될 수는 있다.
결국 토머스와 토니는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대체 문제는 뭘까. 이 오랜 제도의 문제는 무조건적인 애정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희생하거나 포기하거나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결국 소통의 부족이다. 토머스와 토니가 서로 벽을 만들어가는 사이 알렉사는 토머스와 토니의 기대에 부응하기위해 선의의 거짓말도 개의치 않는다. 가족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절대적인 가치로 믿고 가족들의 일방적인 희생과 사랑을 당연시하면 부담과 피곤은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원제(The Bradshaw Variations) 보다 번역된 제목이 훨씬 더 근사하다. 문학적인 느낌과 더불어 이 소설의 주제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제목을 표기 했다면 '브래드쇼 변주들'쯤 되었을까. 제목이 근사해 한참 책을 어루만지다가 작가의 이름을 읊조려보니 웬지 그녀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프로필을 읽고나서야 그녀가 쓴 작품중 여섯번째 로 쓴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민음사, 2008) 를 접했던 기억이 난다. 가로 판형으로 된 표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책장에 표지를 앞으로 보이게 꽂아 두었다.
아이의 책 속 에선 모든 것이 설명되고 있음을 그는 발견한다. 사랑, 생존, 투쟁과 즐거움, 행복과 슬픔, 믿음, 삶 자체의 모양새와 궤적이 모두 설명된다. 절대 설명되지 않는 하나는 현실이다. - p.17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의 삶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다. 필터로 거르지 않는 날 것을 쓰다보니 그녀의 책을 읽다보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다른 세계로의 접목이 아닌 환상을 꿈꾸지 않는 지금의 나, 앞으로 살아갈 나의 모습. 혹은 엄마의 삶이, 할머니의 삶,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도 같을 것이라는 것도. 아이였을 때 느끼지 못한 것도 세상의 나이를 한 살씩 더하다보니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삶의 궤적들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마음이 쓸쓸했던 어느날, 집 계단에 걸터앉아 보았던 아파트의 수많은 불빛들을 보며 그들의 삶에 동경을 품은 적이 있었다. '저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몹시도 부러운 눈으로 한참을 환하게 켜진 아파트의 불빛을 내려보다가 많은 상념을 내려놓고 방안에 들어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구성원 중 한 사람일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시린 모습으로 불빛을 바라봤는지.
처음부터, 토머스는 생각한다, 하워드는 장조였고, 레오는 단조였다. 비록 그들의 삶은 그들 자신의 것이지만, 토머스가 보기에, 그 삶은 늘 화음 안에서 그것이 해야 할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건 아마, 형과 동생에게 비친 사진의 삶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 p.41~42
전작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에서는 여자들의 삶을 조명했다면 이번엔 구체적으로 브래드쇼의 가족들을 실험대에 올려 놓았다. 성역할을 바꿔 생활 하는 것. 아내의 삶을 사는 남자, 남편의 삶을 사는 여자. 살림과 아이를 맡아보는 토머스와 남자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토니의 생활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풀려간다. 차츰 톱니바퀴는 서서히 움직임을 보이더니 점차 어그러진다. 레이철 커스크는 토머스와 토니의 가족 뿐 아니라 토머스의 형 하워드와 클로디어 부부의 삶, 동생 레오와 수지 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그 밖의 집안 구성원들에 대해 심층적이면서도 다각도로 그들의 삶을 파헤친다. 작가는 평범했던 두 사람에게만 포커스를 두지 않고 부와 명예,나이에 관계없이 가족의 구성원의 위치와 고민을 함께 다루고 있다.
토머스와 토니는 자신의 화음 속에서 변주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의 일탈에 지나지 않았다. 자리를 바꾸면 우린 행복해질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들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쓸쓸한 결론만을 얻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 쉬워 보일지라도, 그 일을 내가 하면 결코 녹녹치 않음을 온몸으로 느꼈던 두 사람. 쓸쓸한 결론을 남기며 역할 바꾸기에는 실패 했지만 살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다만, 그들이 도출한 결론이 작품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하기에 분명 역할을 바꿔 아내와 남편의 삶을 선택한 부부 중에서도 잘 해내고 있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문학 작품에서 인물을 통해 고민하고, 위태로운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상황적인 한계 또한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레이철 커스크의 작품은 일정한 시선과 온기를 품지 않는 단호함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며 바라보게 되었다. |
|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아닌 그동안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새로운 삶을 결정하는 토니와 토머스. 작가는 이들의 삶을 ‘변주곡’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원하던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 가족은 행복하지만은 않다. 각자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만 삐걱거리며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들. 이들의 모습에 특별한 기승전결이 없음에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불안함과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위태한 관계가 금방이라도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책의 말미에는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불협화음이 하나의 화음이 되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작가는 그런 기대감마저 모두 무너뜨린다. 단순히 감기인 줄 알고만 있었던 딸, 알렉사가 고열로 청각을 잃게 되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삶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p.258)
(p.276)
자신안의 여성과 남성의 통합을 원했지만 여성적인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존재에 빠진 채 지내고 있음을, 통합의 열정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토니. 그리고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토머스. 결국 그들의 변주곡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선율을 만들어내며 결국 끝이 났다. 어쩌면 이런 이들의 모습은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현실 그 자체인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고 토머스 가족처럼 도전하기도 하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안정된 울타리를 찾아 되돌아오고야 만다. 우리 삶에서 발견하고야 마는 현실적인 이야기에 씁쓸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던 책. 마지막으로 새로운 멜로디와 리듬을 입히지만 원래의 주제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변주곡처럼,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온 브래드쇼 가족의 음악이 과연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던져보게 된다. |
|
가족에 대한 어떤 희극성,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섦이 눈 앞에 가득 펼쳐진다. 친숙하지 않은 가족사 이면의 진실은 불편하지만 나긋한 직설로 가면 아래 펼쳐진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는 그것도 기억한다. 어머니의 비밀을 알아처린 것 같은 느낌. 그가 불쑥 끼어들어 그 비밀을 엿듣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집이라는 것이 속임수였고, 억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고, 자신이 아프면서 어머니의 잘못이 드러나 버린 것만 같았다. 클로디어가 나간 후 그는 수프를 먹으며, 아래층 식탁에서 혼자 수프를 먹고 있을 아내의 모습을 상상한다. p.96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사는 우리들은 가장 결속된 친밀을 공유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정교한 위선을 공유한다. 우리 내부의 자아가, 혹은 우리 자신이 이미 눈치채고 있을 수많은 가식들. 우리는 가면을 쓴 채 맹목적으로 상대방을 향한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는게 아닐까. 자리를 바꾸면 까발려질 가식들은 죄책감이라는 침묵 속에 묻은 채.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레이첼 커크스의 가족에 대한, 가족 이면의 이야기에 대한 불협화음이 가득한 변주곡이다. 그녀가 그려내는 가족은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어떤 타고난 불행이나 슬픔을 품고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네의 가족,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을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족 관계를 그려낸다. 그 관계들 속엔 어떤 미묘한 작용이 존재한다. 형제들에 대한 모호한 감상들, 형수에 대해 느끼는 낯선 친숙함, 사위의 아름다움을 보고 범속적 욕구를 느끼는 장모, 딸과 남편의 애틋함을 질투하는 아내. 모든 작용들은 우리가 언젠가 짧게 혹은 길게 느꼈을 단상들이다. 그녀는 브래드쇼 가족이라는 하나의 구성체를 통해 그 미묘함을 아찔하게 묘사해낸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띄지도, 부드러운 전율이나 즐거운 웃음은 선사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서 가만히 하나의 가족을 묘사하며 조근히 우리의 일상을 풀어낼 뿐이다. 나는 126페이지의 13번 파트가 가장 인상 깊었다. 남편의 전 연인을 회상하는 아내 토니의 모습과, 그러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 토머스의 이야기. 작가는 짧은 맥락을 통해 관념 너머의 현실에 강력한 변화구를 던지고 있었다. 그녀가 세워 놓은 인물들은 하나의 배역으로서 그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역설을 명료히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분명,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일상에서 느꼈을 법한 미묘한 질투와 아집의 실존을 확인했다. 그보다 조금 복잡하다. 클레어는 그녀 머릿속의 어떤 장소, 지나가다 건드리는, 가끔은 일부러 들르기도 하고, 가끔은 우연히 가서 부딪히는 그런 장소였다. 마치 그녀가 시간의 자물쇠를 풀고 과거가 쏟아져 나오게 하는 열쇠 같은 어떤 노래라도 되는 것처럼. p.122
그녀는 또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랑과 상실, 절망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현실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미묘함을 동반하고 있어서, 그 미묘함이 폐부를 건드릴 때 마다 찌릿하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기실 소설은 불편한 딱딱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은 서로를 질투하고, 서로에 대해 애증을 드러내길 서슴치 않으며, 서로에 대해 품었던 환상을 허상이라 단정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서술은 불편한 진실이다. 어떤 은유 없는 없는 직설은 침묵과 배신 위에 굳건할 뿐이다. 이 책은 결코 아름답거나 즐겁지 않다. 다만, 델리스파이스가 언젠가 불렀듯 이 모든 이야기는 슬프지만 진실일 뿐이다.
|
|
브래드쇼 가의 둘째 아들 토머스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대신 아내인 토니가 대학에서 학과장을 하며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지고 있다. 알렉사라는 딸 아이 하나가 있는데 토머스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면서 알렉사에 대한 돌봄은 토머스의 몫이 돼 버렸다. 그리고 토머스와 토니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토머스는 집이 하나의 음악이라면 아래층 주방은 정적이고 확고한 구조로 멜로디를 잡아 주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을 집안 어느 곳보다 좋아한다. 그러나 토니는 주방에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층에 있는 걸 좋아한다. 이와 같은 집 안의 구획된 공간에 대한 둘 간의 호불호는 이 부부의 사이를 가늠케 한다. 토머스는 알렉사와의 관계가 쉽지 않다. 딸아이의 말 한마디에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다’라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곤 생각한다. “딸아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오해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은 이해를 위한 필수 요소라 생각하려 노력한다. 이 대목은 현실의 보통 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리고,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마지막에 곁에 남을 이름, 그것은 가족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많이 지치고 힘들 때 가족이 있기에 다시 힘을 내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이 ‘가족’이라는 말은 폭력적으로 다가 온다. 그 폭력은 하나의 착각에서 기인한다. 바로 내 가족이기에 당연히 내가 모든 걸 알아야 하고, 또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착각 말이다. 그 착각은 가족 구성원을 힘들게 할뿐더러 오히려 통합의 요인이 아니라 분해의 요인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사람은 본인의 마음도 때때로 잘 알지 못하는 존재다. 하물며 육체적으로 분리 돼 있는 타인을, 설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해를 최우선 목표로 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다. 바로 토머스가 말한 대로 먼저 오해의 과정을 잘 겪어 내는 일이다. 가족 구성원 중 그 누가 됐든 상대와 부딪게 되는 순간들을 이해를 위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믿음, 그것이 가족을 화목하게 지켜나가는 길이 아닐까. 아슬아슬하던 토머스 브래드쇼 가족은 위기를 맞는다. 토니의 불안한 행보는 결국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로 이어지고, 하필 그 날 알렉사가 뇌수막염으로 입원하게 된다. 혼자 아픈 아이를 감당해야 했던 토머스가 힘들었던 만큼 아이가 그 지경이 되어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본인은 다른 남자와 외도를 했다는 생각에 토니 또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토머스도, 토니도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전원을 켰을 때 알려오던 부재중 전화 메시지 만큼도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이 부부는 이미 사랑의 끝, 사랑의 죽음에 가 닿아 있다. 브래드쇼 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토머스와 토니 가족으로 중심으로 그의 형 하워드네 식구, 동생, 그리고 부모님 이야기로 순회한다. 한 챕터의 호흡이 짧은데다가 각 챕터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여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런 형식이 다이나믹하게 익힐 수 있는 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독자에게 확연히 잡히고 나서야, 매번 바뀌어도 이야기에서 바로 해당 주인공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됐을 때다. 그런데 나의 호흡이 책을 따라가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중반까지 어지럼증을 느꼈고, 오래 책을 붙들고 있을 만큼의 몰입이 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의 작가 레이철 커스크의 심연은 이 책에 대한, 그리고 독자 개인에 대한 가족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평소에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허투루 바라보지 않고 깊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글을 통해 느껴진다. “고장이 났건,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의 사용 설명서를 모두 찾아낸다. 그런 걸 진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일, 어떤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일.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더 이상 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그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그가 잠시 생각해 보고 대답한다. “무슨?” ‘죽음’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낭비해 버린 시간. 썩은 신념이 내뿜는 악취. 이런 작가의 문장들과 그만의 생각들이 주는 매력이 꽤 좋아서 책의 전체적인 무드를 잡아주는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한 가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28번째에 왜 갑자기 희곡 형식을 빌려 와 썼냐하는 것이다. 토머스의 형네 가족인 하워드와 클로디어의 대화가 이렇게 갑자기 뜬금없는 형식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는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 채 기이한 시선만 남기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