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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버린 시간을 무엇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게 시간이다. 또한 과거의 선택 또한 되돌릴 수 없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어땠더라면,,,, 이라는 수많은 가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선택이 늘 좋지는 않다. 후회하는 인간이므로 그러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그 순간이 아니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마지막을 보내는 순간, 혹은 사랑하는 여인이 고백의 눈짓을 하고 그에게 어떠한 선택을 바라는 순간. 그 순간을 놓쳐버린 한 남자. 자신이 꼭 필요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랑하는 여인을 놓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선택으로 한 여자를 잃었고 오랜 시간 쓸쓸하게 지내야 했다.
그런 순간에 여자가 편지를 보냈다. 남편을 떠나 다른 곳에 묵고 있으며, 다시 달링턴 홀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제 스티븐스는 희망을 가졌다. 켄턴 양과 다시 일할 수 있다는. 함께 일하며 자신의 사랑을 되찾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마 켄턴 양이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는 여행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으리라.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달링턴 경의 저택 달링턴 홀에서 주인을 위해 몇십 년간 집사로 일해 온 스티븐스가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씨의 권유로 여행을 떠나며 소설은 시작된다. 집사라는 자부심과 품위를 위해 자신의 일에 매진했던 그는 아버지의 죽음도, 사랑하는 여인도 떠나보냈다. 인생의 황혼기에 선 그가 과거의 시간을, 격동의 역사를 바라보는 마음들을 담담하게 담아낸 글이다.
3층의 자신의 방에서 정원의 아버지를 내려다 보았던 순간, 일이 끝난후 함께 코코아를 마시며 이 이야기를 나눴던 고작 몇 분의 시간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순간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서야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고백하는 시간이다. 자신의 저택의 집사로서 품위를 지키고 싶어했고, 누군가처럼 '위대한 집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다. 위대한 집사라는 명망도 한낱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문학의 힘을 느꼈다. 내가 읽어본 그의 소설은 모호함 속에 드러나는 과거의 기억들의 공존이었다. 물론 이 작품 또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지만, 일본 태생의 작가라고 보기 어려운, 다분히 영국적인 소설이었다고 판단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이후의 버젼 쯤으로도 느껴졌다. 또한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특별히 고백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의 전이를 느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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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집사의 방에 앉아 로맨스 소설을 보던 스티븐스에게 무슨 책을 읽느냐며 가까이 다가가는 켄턴 양과 그 상황을 떨리면서도 당황해하는 스티븐스의 묘한 분위기. 누구나 느낄만한 감정이었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 거리만큼 다가갈 뿐이었다. 그 흔한 키스신 하나 조차 없었던. 그러나 보는 혹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떨리는 순간을 선사했던 장면이었다.
소설에서는 스티븐스와 켄턴 양이 나누는 이야기라곤 그저 켄턴 양이 청혼을 받았다며 그에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묻는 장면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영화는 아무래도 더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른 이의 청혼을 받았다던 그녀가 자신의 방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던 장면,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업무적인 이야기를 건네고 돌아섰던 그 장면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 영화를 알고는 있었지만, 동명의 영화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스티븐스 역이었던 안소니 홉킨스, 켄턴 양 역이었던 엠마 톰슨과 달링턴 경의 대자인 젊은 카디날 역을 했던 휴 그렌트가 출연했기 때문일까. 소설을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영화, 아름다운 소설. 인생의 황혼기에 뒤돌아보는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그려보게 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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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 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과연 누가 될까에 관심이 쏠렸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가즈오 이시구로가 수상한 것에 놀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 번도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작가인데다 부커상 수상, 노벨상 수상, 제목에서 느껴지는 여운까지 이 책을 선택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감성적인 향수였다. 남아 있는 나날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았을 때 어떤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달링턴 가(家)에서 ‘위대한 집사’로 35년을 살아온 스티븐스는 새 주인 패러데이로부터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니 여행을 해 보는 게 어떠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는다. 뜻밖의 호의에도 별다른 확답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7년 만에 받은 켄턴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오랜 세월 이 저택의 담장 안에서 영국의 진면목을 보는 특권을 누려왔지만, 바깥세상의 구경은 아무래도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다. 일만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어쩔 줄 모른다. 수십 년을 몸담고 있던 달링턴 가(家)의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보는 일은 불안하고도 낯설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분리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고급 양복 차림에, 어르신의 포드를 제공받고, ‘달링턴 홀’이라는 주소를 기입할 때는 우쭐함을 즐기기도 한다. 처음의 불안감은 서서히 걷히면서 자연의 풍광에 동요된다. 영국의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만족을 주는, ‘위대함’이라는 단어로 요약하며 감탄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미국인이면서 영국을 대단히 사랑했다던 헨리 제임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 인생은 거대한 옛 영국 정원이고, 시간은 끝없는 영국의 오후라고 행복하게 믿고 있다.’는 말.
아, 이제 영국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풍경에 대한 ‘위대함’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 업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부상하거나 눈 밖에 나기도 하는 직업인의 비애도 볼 수 있다.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기준인 ‘일류급’ 집사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는 ‘품위’를 집사의 필수 요건으로 규정지으며 나름대로 직업의 소명의식을 설파하기도 한다. 복종하면서도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저들의 노력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렇게 최고의 경지를 드러낸 영국의 풍경의 ‘위대함’과 ‘위대한 집사’를 견주어 설명하는 자부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집사로서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집사라는 직업인의 세계를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감탄할 지경이다. 독자들이 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절도 있는 당당한 모습은 대충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에만 목숨을 거는 상황이다. 안전한 밧줄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어떤 날은 좀 느슨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해야 한다. 저명한 저택에 소속되어 일하며 특권을 누리는 것을 평생의 명예로 여긴다. 이렇게 지나치게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는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법이다.
솔즈베리를 시작으로 웨이머스까지 6일간의 여행길의 여정이 들어 있다. 오롯이 오감으로 풍광을 느끼는 여행은 아니다. 과거의 추억을 회고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모처럼 새 주인 미국 신사가 베풀어준 여행인데, 일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즐기는 여행이 아닌 자신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여행이라니. 좀 서글프다.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아, 이건 우리 시대의 미생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었다. 일에 파묻히고,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서 오늘의 행복을 자꾸만 뒤로 미룬다. 오늘 조금만 참으면 내일은 좀 더 행복할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 그리고 자기 본연의 기쁨보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신경 쓴다. 충성을 넘어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이 된다. 평생을 집사로 살아오면서 모범적으로 일을 수행해왔다. 한 치의 어긋남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택이 나는 은 식기를 칭찬하면 그것에 무한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스티븐스에 대한 켄턴양을 향한 마음이 이 책 소개에서는 안타까운 사랑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내가 읽어 본 바로는 그런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굳이 그에 맞는 상황은 켄턴양 쪽이라고 할까. 오히려 스티븐스는 그녀의 마음에 대해 눈치가 없었거나, 모른 척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사무적이고 늘 일이 우선순위였다. 집사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과 태도, 거기에 품위까지 연출해야 했으니. 분위기와 그녀의 태도(마음)를 읽어내는 것은 서툴렀다고 할 수밖에. 손님을 핑계대고 급히 서둘러 나가면서 켄턴양에게 매번 등을 보여야 했으니까. 그녀의 못 다한 이야기와 끊이지 않는 한숨은 눈치도 못 챈 것이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있던 격동기의 영국과 세계정세를 보여준다. 달링턴 홀은 숱한 정치가들이 모여드는 회담의 장이었다. 또한 대영제국은 미국의 현실주의에 밀려 저물어가는 상황이었다. 여행길에서 듣는 달링턴 경의 평가는 스티븐스의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젊은 카디널 경으로부터 뜻밖의 질책을 들으며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어르신은 정말 고귀하신 양반이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수렁에 빠져 계시오. 그분은 지금 조종당하고 있어요. 나치들이 그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소, 스티븐스? 바로 이게 적어도 지난 3~4년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일의 실상이란 걸 알고 있느냐 그 말이오.”(P276)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제가 볼 때 나리는 지극히 훌륭하고 숭고한 작업을 하고 계실 뿐입니다. 어쨌거나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저는 나리의 훌륭한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P279)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했다. 맹목적인 충성이 기계적으로 몸에 밴 스티븐스는 자신의 본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신사 중의 신사라고 믿으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주인에 대해 그런 말을 하다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입으로는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의 ‘도덕적 진가’에 있다고 말했으면서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눈과 귀는 아예 닫아버린 것이다. 불편하니까.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단지 명령에 복종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두 명의 하녀를 해고시키라는 주인의 명령도 아무런 감정 없이 처리한다.
자신의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스티븐스도 회한은 있었다. 하염없는 세월을 일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노구가 된 스티븐스는 이제 자신을 돌아다본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P298)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P299)
"이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P299~300)
켄턴양을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던 일말의 희망도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그나마 그녀는 스티븐스보다는 현실적인 안목이 있어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마저 포기하고 오직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에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고 자부하는데 이것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을 위한 삶이고, 그 충성심으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함인가. 맹목적인 믿음은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어리석음만을 남긴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는 열등생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임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광채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지만, 옳고 그름을 가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주인에게 양도된 스티븐스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새 주인의 농담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쩔쩔 매던 그는 이제 좀 더 융통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많은 날은 갔지만, 조금 남아 있는 날도 소중하다. 마음을 달뜨게 하는 여행은 아니다. 지난날을 회고하는 그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아갈 길을 수정도 하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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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란 본디 주역(主役)을 빛나게 하는 조역(助役)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조연 배우와는 달리 단순히 지시에 성실히 따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집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자신이 속한 가문의 여러 고용인들을 조화롭게 지휘하는 역할과 주인을 보좌하는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집사는 주인이 시키는 일에 묵묵히 따르기만 하는 하인이나 심부름꾼이 아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나날>에 등장하는 스티븐스는 달링턴 가(家)에서 ‘위대한 집사’로 35년을 살았다는 자부심만 가득 찬 집사에 불과했다. 분명 그는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헌신적이고 성실하게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처럼 단지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기만 했다. 그 결과 그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1)”라고 묘사한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이런 상황을 벗어날 기회는 있었다. 총무로 같이 일했던 켄턴 양이 지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들었던 날이었다. “ “지금 저 방에는 영국 총리와 외무장관, 독일 대사가 모여 앉아 있어요. 이 자리를 만들고자 어르신께서 백방으로 뛴 결과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두신 거요. 그리고 어르신은 당신께서 지금 훌륭하고 명예로운 일을 하는 중이라고 믿고 계시오. 그분께서 오늘 밤 왜 저 거물급 신사들을 불러들였는지 아세요? 지금 이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스티븐스?” “잘 모릅니다, 도련님.” “잘 모른다고? 이봐요, 스티븐스. 관심도 없소 궁금하지도 않소? 이 어리숙한 양반아. 지금 이 집에서 막중대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 호기심도 못 느껴요?” “저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위치가 못 됩니다. 도련님” “하지만 어르신이 걱정도 되지 않소? 당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분이라고 방금 전에 그랬잖소. 그분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니오? 최소한 일말의 호기심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영국 총리와 독일 대사가 당신 상전의 주선으로 저렇듯 심야에 밀회를 벌이고 있는데 궁금증도 생기지 않는단 말이오?”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제 직분에 어긋나는 겁니다, 도련님.” “직분에 어긋난다고? 아, 당신은 그걸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래요? 정말 그게 충성인 것 같소? 당신의 주인에게든 이 나라의 국왕에게든?”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 건지 저로선 헤아리기 어렵군요.” 카니덜 씨는 다시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안할 것도 없어요, 스티븐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솔직히 나도 모르니까. 하지만 적어도 관심을 가지는 게 옳아요.”
“내 말 새겨들어요, 스티븐스. 어르신은 지금 농락당하고 계시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카디널 씨는 계속 바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어르신은 정말 고귀하신 양반이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수렁에 빠져 계시오. 그분은 지금 조종당하고 있어요. 나치들이 그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소, 스티븐스? 바로 이게 적어도 지난 3~4년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일의 실상이란 걸 알고 있느냐 그 말이오.” [pp. 274~276]” 만약 이 때라도 스티븐스가 정신을 차리고 주인인 달링턴 경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충언을 했더라면, 훗날 집사라는 직분에 최선을 다한 자신의 직업관을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지난 시절을 정당화하려는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리사욕에 빠져 부패한 부하는 위험하다. 하지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부하는 더 위험하다. 그들은 자신의 상관이 잘못된 길을 걸을 때조차도 만류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을 더 빨리 걸을 수 있도록 성실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소위 ‘충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나라를 망치는 ‘간신’과 같다.
그렇기에 스티븐스가
불쌍하다. ‘위대한 집사’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근면하고 성실한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에 머물렀으니.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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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자주 바꾼 친구가 있다. 그는 사장을 도저히 ‘존경’할 수가 없어 그만두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존경할 수 있는 사장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친구처럼 사장을 끊임없이 비판적인 태도로 대하다가 결국 그만두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비판은 배제하고 ‘이지적으로’ 부여된 충성심으로 자신의 한 몸을 다 바치는 사람도 있다.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가 그렇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이나 켄턴 양에 대한 사랑보다 충성심, 더 나아가 직업적 의무를 앞세운다. 달링턴 경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무랄 데 없이 일해 온 두 하녀를 내보내겠다고 할 때도 순순히 동의한다. 이에 켄턴 양이 자신도 떠나겠다고 하자,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한다.
“켄턴 양,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당신이 놀라울 따름이오. 우리의 직업적 의무는 우리 자신들의 자만심이나 감정이 아닌 우리 주인의 뜻에 맞추는 것이라는 것을 당신도 뻔히 알지 않소?” (p. 183)
오히려 독자는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스티븐스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화자(話者) 스티븐스는 청자(聽者)의 이해가 당연하다는 식이다. 오죽하면 그가 즐겨 쓰는 말이 “여러분도 이해하겠지만”(p. 184)이다. 그가 가장 이해를 바라는 바는 집사의 의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를 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그런 큰 문제들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차원이게 마련이어서 우리 분야에서 진정 이름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기 영역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 문명 사회의 운명을 실제로 좌지우지하는 저 위대한 신사들에게 가장 훌륭하게 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p. 249)
만약 훌륭하게 봉사했던 위대한 신사가 알고 보니 전혀 위대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티븐스는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p. 252), 라고 말한다. 안타까운 것은 스티븐스의 삶과 업적 역시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을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의 밑에서 일하지 않았다고 부정한다. “그 순간 내가 갑자기 쓸데없는 변덕에 사로잡혔던 건지도 모른다.”(p. 155), 라고 말하지만, 스티븐스는 쓸데없는 변덕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 뒤늦게 달링턴 경은 유대인 하녀들을 해고한 것을 후회한다. 그래서 스티븐스에게 어떻게든 그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스티븐스는 그 뜻을 켄턴 양에게 전하며, 그제야 그 일이 엄청난 판단 착오였다고 토로한다. 그러자 켄턴 양은 혼란스러워하면서 “말해 보세요, 스티븐스 씨. 당신은 왜, 왜,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죠?”(p. 189), 라고 묻는다. 그때 스티븐스는 시치미를 부인하며 이렇게 답한다. “그 해고에 반대하는 건 당연한 거요.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리라 생각했겠지요.”(p. 189) 이 소설의 묘미는 스티븐스 입으로 말하지 않는 자명한 일을 찾아내는 데 있다. 그래서 스티븐스의 말보다 상대의 반응에 주목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왜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사는 것일까? ‘위대한 집사’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품위는 무엇일까?
“몇 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겠지만……, 결국 사람이 공중 앞에서 옷을 벗지 않는 것으로 귀착된다고 봅니다.” “죄송하지만 뭐 말씀인가요?” “품위 말입니다, 박사님.” (p. 260)
공중 앞에서 옷을 벗지 않는 것, 즉 시치미가 그가 생각하는 품위인 것이다. 물론 스티븐스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다행히 스티븐스가 남아 있는 나날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 같지 않다. 달링턴 홀의 새 주인 패러데이 어르신은 집사의 의무로 농담을 기대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스티븐스는 아직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농담을 잘하려면 공중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더는 지나간 나날, 뒤만 돌아보지 않을 듯하다. 그러고 보면 참 재밌는 소설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스티븐스의 남아 있는 나날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의 남아 있는 나날 역시 그렇다. 참으로 매력적인 소설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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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그렇구나' 하고 느꼈을 때는 대개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면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일,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다. 뭔가 지나가고 있는 그 순간에는 다 알지 못 하는 일들이, 반드시 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나타난다. 절대 공짜로는 알려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젊음을 잘 모르고 흘러가 버린 시간에, 노년이 되어 되돌아보고 나니 다가오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노을 지는 저녁 풍경을 바라보듯, 집사라는 자부심으로 온 인생을 채운 스티븐스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그러했다.
집사의 본분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처럼 살아온 스티븐스다. '달링턴 가'에서 35년을 그렇게 지내오던 중 주인이 바뀌면서 뜻밖에 주어진 시간. 새 주인으로부터 여행을 제안받고 떠나온 길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스티븐스는 새 주인의 휴가 제안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달링턴 가에서 스스로 갇힌 듯이 살아온 그의 평생인데, 갑자기 밖으로 밀려난 느낌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발걸음을 뗀 여행마저 달링턴 가의 이로움을 위한 목적이라니, 이 남자의 인생 어떻게 흘러왔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다. 새 주인이 시키지도 않은 짓, 오래전에 달링턴 가를 떠난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게 그가 택한 여행의 목적이 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켄턴 양을 만나는 일도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혹시나 켄턴 양과 뒤늦은 해후를 하며 황혼의 사랑이라도 만들려는 것일까 기대했건만, 그는 오로지 달링턴 가의 부족한 일꾼 섭외가 목적이었던 거다. 이 여정이 그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감히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스티븐스는 나의 예상 밖을 벗어난 인물이 되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일주일 동안의 여정에서 그의 시간은 두 가지로 채워진다.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이거나,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며 떠올리는 자기 일(집사)의 뿌듯함과 만족감을 곱씹어보거나. 특히 그가 35년의 집사 일을 떠올릴 때면 아주 위대한 업적을 세운 듯한 표정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한 위대한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그의 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가는 길 곳곳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하고, 영국의 위대함에 만족스러워하며, 자기가 서 있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인다. 그저 위대함으로...
그의 회고록 같은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그에게 집사계의 공로상이라도 주어야 할 판이다. 그의 젊은 날은 오직 달링턴 가에 머문 흔적밖에 없다. 그마저도 철저한 을로 살아가는 모습만 강조된다. 주인의 심기를 받드는 일이 최우선이며, 그곳에서 열리는 모든 일의 완벽한 마무리까지 그가 주관해야 할 일이었다. 일하는 사람의 관리부터, 저택에서 일어는 모든 일은 완벽해야 했다. 특히 주인이 영국 사회에서 처한 위치나 처세까지 감당해야 했다. 거슬리지 않는 조언도 해야 했으며,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품위까지 챙겨야 했다. 당시 영국의 시대적 배경까지 생각하면, 그의 말 한마디나 행동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함부로 언급할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어느 위치에서 누군가의 시선으로 저택의 사람들을 대해야 했던 걸까. 반유대주의에 앞장서야 했는지, 아니면 그에 반대하여 켄턴 양의 화에 동참해야 했는지... 여기서 또 한 번 그의 집사 자리가 그의 말처럼 우아하고 위대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파고든다. 그는 여전히 달링턴 가의 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앞날을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집사의 자리가 평생 그러한 것이라는 걸 몸에 새기고 살아온 습관이거나. 어쨌거나, 그가 임무를 완수하는 모든 시간의 행동과 선택을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는 게 그의 집사 업무의 위대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답이 된다.
소설의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달링턴 가의 총무 켄턴 양은 오히려 당찬 현실적인 여성이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부조리를 상사(?)인 스티븐스에게 언급할 줄 알았고, 잘못된 일에 화를 낼 줄 아는, 우리가 아는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녀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티븐스 같은 남자를 판단하느라 달링턴 가에 머물며 보낸 시간이다. 내가 보기에 켄턴 양은 자기가 떠나야 할 때를 미룬 것만 같다. 눈치 없는,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스티븐스 때문에 말이다. 완벽한 집사의 모습으로 채운 그의 삶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켄턴 양이 한 번씩 그를 찌를 때마다 그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곤 했다. 감정의 흥분을 드러내고, 우아함을 내던지고 화를 내는, 자기의 자리를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쳐주길 바랐던 거다. 그래서 살살 긁는 듯한 켄턴 양의 시비(?)가 너무 긴장됐다. 스릴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그는 자기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일직선으로 그어놓고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 선을 그대로 밟고 살아갈 것처럼 벗어나지 않았다. 켄턴 양이 조금의 시간이라도 그를 기다렸던 게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그는 올곧았다. 그런 그에게 개인 시간이 주어질 리 없다. 아니다. 아마 그는 그가 누려야 할 개인적인 시간조차 생각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켄턴 양이 보내는 신호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세상 누구보다 눈치 없는 남자로 기록된 거겠지.
그의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며 듣는 것도 아련했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우리를 붙잡는 건 그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문득문득 던지는 한마디들이었다. "내 말을 믿어 보시오, 선생. 올라가 보지 않으면 후회하게 도리 거요. 그리고 또 누가 알겠소, 몇 년 더 세월이 지나고 나면 너무 늦었을지도." 노인은 약간 천박하게 껄껄거렸다. "할 수 있을 때 올라가 보는 게 좋아요." (35페이지) 어쩌면 그의 여정은 지금 어느 길을 올라가 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올라가 본 아래의 풍경에서 자기가 놓치고 살아온 것들을 찾아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켄턴 양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삶이 아닌 주인의 삶에 맞춰 흘러간 그의 시간일지도 모르지. 그게 무엇인지 찾는 것 역시나 스티븐스 자신의 의무이자 역할로 남아 있다. 그게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듯, 인생의 황혼 녘에 찾는다는 게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하는 여정이다.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소설이다. 동시에 한 남자의 인생에서 우선하며 살아온 시간을 타인이 판단할 수도 없다. 그가 놓치고 살아온 것, 그 자신이 아닌 저택에 속박된 것처럼 지내온 시간이 후회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가 가고자 했던 '위대한 집사'로 향하는 길을, 그는 충분히 밟아왔을 테니까. 다만, '그에게 지금 남은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졌을 때 나올 대답이 무엇인지는 궁금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종속 관계가 주는 서글픔, 임무에 충실 하느라 바로 위층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한 안타까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린 여자를 끝까지 붙잡지 못 하는 일들이 그의 내일도 채울 것만 같은 불안함은 뭔지... 일주일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달링턴 가로 돌아왔을 때의 그의 모습이 어떨지,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그의 35년을 '다시보기'하는 느낌이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놓치고 후회하는 것들이지만 다시 선택하는 게 변함없을 거라는 불안함. 그가 보냈던 일주일의 시간은 뭔지 참 모순적이지만, 그런 그의 선택을 공감한다는 게 아이러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다고 확인이라도 받는 것처럼 말이다.
읽는 내내 '이상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이미 다 알게 되었으니 스티븐스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면서도, 그가 택한 마지막을 인정했다. 그럴 때마다, 다 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다른 생각들이 충돌했다. 그럴 때마다 슬퍼졌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스티븐스가 선택한 결말은 절망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상 같아서다. 그런데도 그의 선택과 다짐 앞에서 또 한 번의 내일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을 겹쳐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우리이므로, 내일의 어느 순간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후회하더라도, 현실의 선택에 순응하며 살아왔노라고 말하는 게 우리여서.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294페이지)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300~301페이지)
며칠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은 "인생 뭐 있겠어요?"라는 말을 여러 번 하면서 지금의 힘든 시간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잠깐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 그래 인생 뭐 있을까 싶은 마음에 눈길을 돌리며 다른 선택에 시선을 두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처럼 인생 뭐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가도, 인생 뭐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기대를 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지금껏 그래왔듯, 어쩔 수 없이 후회와 기대의 양가감정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 순간들 안에 또 수많은 선택과 갈등, 후회가 자리하겠지만, 어쩌겠나.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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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나날"은 사실 오역이다.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원제는 The Remains of the Day인데, 번역이 남아있는 나날이 되려면 The Remaining Days 라고 되어야 한다. 그럼 결국 실제 원제의 뜻은 무엇일까? "남아있는 나날"이 아닌 "나날의 흔적"이라고 보는게 맞다.
"나날의 흔적"으로 제목을 생각해보면 책의 모든 줄거리가 이해가 된다.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직업의 외길을 평생 살아온 사람으로서, 본인이 모셨던 주인이 세계 평화를위해 헌신하던 사람이 아닌 나치즘을 옹호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과거의 향수를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지나쳐버린 사랑임을 깨달았을 때. 주인공은 이미 황혼기를 맞고 있었다.
마지막 황혼기를 맞으면서 스티븐스의 미래가 "남아있는 나날"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제목이 이해가 되지만 원저자의 제목의도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를 통해 입증된 실력있는 작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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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인공은 자신이 젊은 시절, 한 메이드와 티격태격 하면서도 조금씩 정이 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집사라는 자신의 직분에 너무 충실하려고 한 나머지 메이드가 자신에 대해 애정을 표시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 메이드는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나가버리게 되고 주인공이 나이가 들고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바뀐 후 그 메이드로부터 받아든 편지를 통해 다시 사랑을 엮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여행을 떠난다. 결국 만나기는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미래를 바라보고 살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실망하지만... 그도 다시 자기가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 과거는 떨쳐내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
2. 주인공 집사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사람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주인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치에 부역하게 되는 운명이다. 1인칭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로써는 주인이 과연 의도치않게 나치의 편이 된 꼴이 된건지는 객관적으로 알 방법이 없다. 그런 와중에 메이드 한 명이 들어와서 약간의 썸을 타지만, 집사는 오로지 주인에 대한 충성이 자신의 직분이라고 다짐하면서 일한다. 집사는 그런 자신을 집사중의 최고에 들어간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나치에 부역하는 주인을 모신 자신이 정말 옳은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거나 번뇌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모시는 주인을 바라봄에 있어서 충성만 하면 되는 것이지 세간의 주인에 대한 비난과 조롱 대상인 나치 문제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 자신의 이런 견해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혼해서 나간 메이드를 수십년만에 다시 찾아가지만 듣게 되는 답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것. 그도 결국에는 과거의 자신의 영광은 그만 생각하고 열심히 다시 미래를 살기로 다짐한다.
집사인 주인공이 처한 두가지 상황에 따른 이 작품의 감상이다. 지나간 사랑을 이제사 찾겠다고 하지만 이미 늦었고, 과거에 집사로서의 영광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각오로 임해야 하고. 이런 여러 심정을 공유하게 한 것이 이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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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구로 책을 처음 접한 책. 나이가 든 것인가...몇년 전 나라면 이렇게까지 마음 속에 와 닿을 수 있었을까...싶을만큼 잔잔하고, 별 사건도 없는 내용. 그러나, 지금의 저에겐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 되었고, 영화도 궁금해서 봤습니다. 책은 못 따라가지만, 영화 또한 아주 좋더군요. 5년 지나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깊음을 느낄 수 있을꺼 같단 생각을 하며... 이시구로의 책들을 계속 읽어보려 합니다.
읽은지 몇달이 지났지만...제목만 봐도 그 분위기가 잔잔히 떠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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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메세지를 주었다. (물론 번역서의 제목이기는 하지만..) 절제되고, 직역하지 않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후반부로 갈 수록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아쉬움과 허탈함, 나이를 먹을수록 느껴지는 삶에 대한 허무감들...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허탈감 등등 이 책은 스토리만으로 종결하기엔 아쉬움이 많다. 책에 줄긋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명대사가 없다는 점은 아쉬웠으나 그만큼 이 책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메세지를 주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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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라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을, 수상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읽지는 않는다. 그것이 어떤 편견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저어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러지 않기를 아주 잘 했다. 속절없이 빠져들어 이 위대한 집사, 품위를 잃지 않으려 평생을 애쓴 근대인 그러나 ‘항상 그렇게 시치미 떼고 살아야 했던’ 피지배 계급 인간의 한 평생을 눈 여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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